[뉴스 後]③인터뷰-'봉황새작전' 현장 사진 찍은 서재철 전 기자

 

▲ 1982년 2월5일 추락하면서 특전사 대원 53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행기를 찍은 서재철 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이 당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53명의 희생자를 낸 비행기 추락사진을 찍었지만 모두 군부에 뺐겼어요"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대에 언론인이었던 서재철(65, 제주신문,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포토갤러리 자연사랑 대표. 그는 1982년 2월5일 오후 3시께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 53명의 특전사 대원이 전원 사망한 보도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였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당시 전혀 보도될 수 없었다. 오히려 찍은 사진 대부분을 군부에 빼앗겼다. 다행히 필름 1롤을 숨겨놓아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9년에야 보도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의 언론통제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한 소위 '제주 봉황새작전'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 5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포토갤러리 자연사랑을 찾아 서 대표로부터 당시 상황을 들었다.

30년이 지났지만 그는 또렷하게 1982년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2월5일 늦은 오후 탑동에 위치했던 제주신문 인근 해상에는 해군 전함이 몇척 떠 있었고, 하늘에서는 굉음을 내며 전투기와 수송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제주신문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는 연통(현재 연합뉴스) 텔레타이프(수신신호가 자동적으로 인쇄문자로 기록되는 기기)에 '제주해역에서 공군 훈련 비행기 추락'이라는 2줄 짜리 속보가 떴다. 요란하게 울리는 타전이면 '긴급뉴스'였다.

당시 편집국에 있던 기자들은 '제주도 어디에서 추락했을까'라고 술렁거렸고, 해군과 공군에서 수색하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 이상 속보가 나오지 않아 편집국에서는 'TV 모니터라도 하자'는 방침이 떨어졌다.

6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개통식과 제주연두방문이 있었다. 서 기자는 지방신문에서는 이례적으로 VIP 근접 촬영 허가를 받았다.

공항에서 대기하던 서 기자는 전두환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미리 제주에 내려와 있는 장관들의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장관들은 '경호원을 실은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데 바다는 아니고 한라산이라고 하더라', '아직도 못찾고 있다'는 얘기를 귀동냥한 것이다.

전날 오후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던 텔레타이프 소리와 장관들의 말이 오버랩됐다. 서 기자는 '아! 한라산이구나'를 직감하고, 연두순시를 하는 대통령 취재를 서둘러 마감하고, 회사에 들어가 보고했다.

제주신문 사장은 서 기자에게 "특전사가 사고를 당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 만약 사진을 찍다가 들키면 내가 책임지지 못한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서 기자는 제주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에 대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한라산을 밥먹듯이 올랐던 서 기자는 사고 장소가 백록담 인근으로 생각했다. 북벽과 남벽을 휘저었지만 찾지 못했다. 해질무렵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던 중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근무하던 양송남씨를 우연히 만났다. 양씨는 특전사 수색팀과 함께 한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양씨는 서 기자에게 "사고지점은 적송이 있는 개미등 계곡"이라며 "조심해야 한다"고 몰래 알려줬다. 해는 지고 군인들이 사방에 쫘악 깔린 상황에서 더 이상 취재가 어렵게 되자 서 기자는 다음날 일찍 취재하기 위해 서둘러 내려왔다.

집에 도착하자 서울에서 경향신문 기자 2명(취재.사진기자)이 와 있었다. 서 기자는 경향신문 사진기자와 함께 7일 새벽 회사차를 이용, 관음사로 이동했다. 아라초등학교에서는 특전사 수색대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 기자 일행은 특전사 수색대 보다 빨리 올라간다는 생각에 사고지점까지 쉬지 않고 뛰어 올라갔다. 사고 현장은 참혹했다.

그는 "현장에 도착하니 비행기는 종이조각처럼 널브러지고 시신과 포탄이 뒤엉켜 있었다"며 "시신들은 불에 타고 포탄 주변으로 숯덩이가 돼 있었다"고 현장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특전사 수색대가 곧 올라올 예정이기에 카메라 렌즈는 쉴새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역사를 기록하기 바빴다.

특전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왔던 길 대신 산으로 올라갔고, 사진기자 옷을 뒤집어 입고, 필름들은 신발과 호주머니에 숨겼다. 서 기자 일행이 내려오던 도중 특전사 대원들과 마주쳤다. 대원들은 이들을 붙잡고 "혹시 기자 2명이 올라갔는데 못봤느냐" "어디 다녀오느냐"고 물었다. 서 기자는 "용진각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도둑놈이 제발 저리듯이 가슴속은 쿵쾅쿵쾅 뛰었다. 까딱 잘못하면 찍은 사진은 물론이고 그대로 군부대에 잡혀갈 뻔했다"고 회고했다.

서 기자는 흑백필름으로 총 5롤을 촬영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단 한장의 사진도 지면에 쓸 수 없었다.

그는 "회사에 들어가 촬영한 내용을 보고하니 사장이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며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촬영한 4롤을 사장에게 건네고, 1롤은 따로 가졌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촬영한 필름은 모두 군부로 넘겨졌다. 경향신문 기자들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일절 하지 못했다.

그는 "군 관련 내용은 쓰라는 것 이외에는 절대로 쓸 수 없었다"며 "요즘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기관원들이 신문사에 상주하는 엄혹한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한마디로 언론은 입은 있으되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며 "언론인으로서 부끄럽고, 힘든 시절이었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숨겨놓은 1롤의 필름은 7년이 지난 1989년에 쓸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이후였다.

그는 최근에 특전사에서 사진을 줄 수 없느냐는 연락을 받았던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몇달 전 특전사에서 '당시 현장을 알고 싶다'며 사진을 달라고 부탁했었다"며 "사진을 주기 위해 뽑아 놨는데 아직도 찾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이승록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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