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 폭낭 아래 소굴의 구사일생 이야기(1) / 정신지

 

▲ 우연히 알게된 어느 팔순 노부부의 집을 찾았다. 이 집 하르방의 서재에는 재미있는 책이 많다. 한 권 골라서 빌려달라고 하니, 책 속에서 나온 옛날 사진들로 이야기가 끊길 줄 모른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주변을 걸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천 냥 빚을 내서라도 지울 수 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젊은 날의 고생에 한이 맺힌 채 살고 계신 분들이 많다. 특히, 전쟁과 폭력, 가난과 상처의 기억을 가지고 한평생을 살아오신 우리 주변의 할망 하르방(할머니 할아버지의 제주어)이 그렇다.

  그네 역시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다. 1929년생, 올해 나이 84세의 동갑내기 부부다. 하르방은 10여 년 전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고, 할망 역시 다리 한쪽이 불편하셔서 지팡이를 들고 다니신다. 우연한 계기로 이들 부부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도 두어 번 그들의 집을 찾았다.

  "너무 오래 살아도 힘들어, 얼른 누구 하나 죽어야 할 텐데, 구사일생으로 살아오다 보니 죽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네." 라 하시는 할망은 힘들게 살아오신 옛 시절 이야기를 곧잘 하신다. 매번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는 그때추룩(그때처럼) 세상 살지 못한다. 그때 시국처럼 살젠 허믄(살려고 하면), 이젠 살 사람이 어서(없어)."라고 하시면서도, 당신이 기억하시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내게 들려주신다. 묻지도 않은 많은 이야기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그 슬픔에 나도 그녀도 매번 가슴이 아프다.

 

▲ 빛바랜 사진속에 그가 회상하는 꼬마상병이 있다. 사진 아래가 꼬마상병 할아버지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4.3사건과 6.25를 겪으며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주렸던 이야기, 사랑하는 친구들과 남편이 전쟁에서 죽은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은 목총질을 강제로 해야 했던 이야기, 해안가로 피난을 가던 중 군인에게 들켜서 죽다 살아났던 경험, 한국전쟁이 끝나고 아들 없는 어느 집에 족은 어멍(후처의 제주어)으로 다시 시집을 와서 낳은 첫 아들을 큰 어멍(본처) 호적에 올려줘야 했던 기억, 전쟁 중에 일본에 건너갔던 언니가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일 등등…, 파란만장한 삶이란 책이나 영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르방도 마찬가지다. 말수가 적고, 귀도 잘 안 들릴 줄 알았던 그가 말문을 여니, 녹음테이프에 용량이 모자랄 만큼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남자들이 여자를 만날 때, 곧 죽어도 군대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하건만, 그는 내 앞에서 군대 이야기만 꼬박 2시간을 하셨다.
 
  삼대독자로 귀하게 자란 하르방은, 제주중학교(해방 이후 생긴 제주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 1회 졸업생의 엘리트 청년이었다. 그 시절 중학교라 함은, 우리가 말하는 대학과 흡사해서, 14살부터 17살까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고 17세부터가 중학교 과정이었다고 하신다. 중학교 졸업을 코앞에 두고 4.3사건이 터졌고, 여차여차 졸업을 한 1950년 2월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 해 6월에 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군인이 되었다. “신혼도 없으셨겠네요.” 라고 내가 물으니, 4.3사건 때문에 뒤숭숭해진 마을에서는 신혼은커녕, 여자도 남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을을 지키느라 새색시 얼굴을 볼 틈도 없었다고 하신다. 게다가 그때는 한 방에 온 식구가 모여 살며, “움(짚)만 덮으면 집”이라 하는 공간에서 생활하셨기에, 그의 신혼생활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그는 해군을 지원했다. 그도 그런 것이 당시는 4.3사건 발발 이후라 ‘빨갱이’ 취급을 받아 지칠 대로 지친 제주 청년들이, 의도적으로 해군을 지원함으로써 그러한 사회적 누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장미달로 해군에 못 간 그는 육군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지냈다. 하지만 당시 해군을 지원했던 마을 친구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전사했다고 하신다.

  “게난(그러니까), 난 키가 작아서 살아난 거주게(것이지). 경해도(그래도) 국군 가서 키가 3센치나 커서(컸어). 군대에선 밥은 주더라고. 부대에 여군들도 이서신디(있었는데), 나를 막(정말) 잘 따란게(따랐어). 아기 모냥(모양) 얼굴이 귀엽댄(귀엽다고), 별명이 ‘꼬마 상병’ 이여서(이였어).”라고 하시며 정말 아기처럼 웃으셨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할망은, 예나 지금이나 이 하르방은 여자만 밝힌다며 귀엽게 입술을 삐죽이셨다.
 
  그렇게 우리는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고, 웃다가도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공간에 함께 있었다. 하르방이 결혼을 하시면서 사셨다는 당시 시가 37만 원의 집 한 채. 푸르게 이끼가 낀 돌담길을 굽이굽이 걸어 들어가면 나타나는 그들의 오소록한(구석진, 외진이란 뜻의 제주어로 ‘아늑한’ 의미로도 사용) 쉼터이지만, 그 작은 공간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하루 이틀 듣는다고 끝날 만큼의 양이 아니었다. 

 

▲ 한 수저 뜨고 하르방 수저에 고기 얹어주고, 또 한 수저 뜨고 물 챙겨드리는 그녀는 내조의 여왕이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두어 시간 셋이서 수다를 떨고 있자니 배가 고프셨는지, 할망이 밥상을 차리셨다. 할망 집이라 먹을 건 하나도 없지만 먹고 가라 하시며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온 집안에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겼다. 하르방과 내가 단둘이 방에 남았을 때, 그가 대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충청도 아가씨가 아직 살아있을까? 정양이라고, 내가 군에 있을 때 위문편지를 보내 준 중학생 여자아이야. 처음엔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고, 답장을 보냈더니, 어느 날인가 편지에 사진을 붙여오더라고. 참 예쁜 꼬마였네. 군 복무 중에 우연히 충청도에 갈 일이 있어서 마음을 먹고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어. 그 아이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처음엔 약수터 근처에서 만나려고 했는데 돈이 하나도 없었어. 그리고 괜히 산에 갔다가, 밤이 늦어서 하룻밤 자야 하는 일이 생기면 큰일 나거든. 당시엔 군인이 연애질하면 총살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집에서 하룻밤 머물었지, 부모랑 다 같이. 오랜만에 따뜻한 집 밥도 먹고 참 좋았어. 다음 날 귀대하는데, 그 아이 아버지가 엿을 한 뭉치 쥐여 주시는 거야. 그 집이 고물상이었는데, 가진 게 그것밖에 없다면서 그날 팔아야 할 엿을 몽땅 싸주신 거지.”

  눈가에 부드럽게 주름이 잡히며 할아버지가 말씀을 이었다. 요즘 너무 몸이 안 좋아 침상에 누워있으면, 할망은 그에게 ‘죽어붑서(죽어버려요), 죽어붑서.’를 연발하신다고. 그래서 정말 내가 언제 죽나 하고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으면, 예전에는 생각도 안 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고 말이다. 그래서 떠오른 정양의 이야기에 나도 덩달아 한숨이 나는데, 할망이 밥 먹으라고 소리치신다.

  차려진 밥상은 두 개. 큰 상에 하르방이 혼자 앉아 큰 접시에 담긴 고기를 드시고, 나와 할망은 작은 상에 앉았다. 밥을 먹다가도 몇 번이나 일어서서 하르방 수저에 고기를 얹어주시고, 물도 챙겨주시는 할망. 하르방에게, ‘죽어붑서, 죽어붑서’ 하시면서도 그녀는 결혼생활 53년째 내조의 여왕이다.

  “나도 이 사람도 같은 뱀띠야. 그런데 점쟁이가 그러더라고, 뱀은 뱀인데, 우리는 커다란 폭낭(팽나무) 밑 소굴에 사는 뱀이라고.” 밥 먹다 말고 튀어나온 할망의 한마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오신 그들의 폭낭 밑 소굴에 앉아 밥을 먹는데,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이 든든해진다. “살 좀 쪄사켜(쪄야하겠네)”라 하시며 할망이 내 수저 위에 얹어주신 두꺼운 삼겹살이, 마치 약해빠진 내 마음을 살찌우게 할 보약이라도 되는 양, 나는 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치웠다. / 정신지 *그들의 구사일생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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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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