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7) 욕쟁이 세탁소 아저씨 / 정신지
 
 

▲ 미싱상회의 오래된 간판은 내려졌지만, 세탁소 앞을 떠날 줄 모른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어느 시골의 오래된 세탁소. 창문 너머로 오래된 재봉틀이 수십 개 놓여 있고, 그 안에 꾸벅꾸벅 졸며 쉬고 있는 백발의 한 아저씨가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좀 찍어도 되느냐 물으니, 그는 대꾸도 안 하고 나가라고 손짓한다. 그냥 가기가 아쉬워서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던 나에게 그가 묻는다. 어디서 온 누구냐고. 취재라면 사양하겠다고 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취재라면 사양한다.'는 말이 순간 머리에 꽂혔다.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어서, "아저씨 어디서 취재 받은 적 있는 유명한 분인가 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감겨있던 눈을 뜨며 무섭게 한마디 했다. "사진 같은 거 찍으려면 근처 바닷가에나 가. 이런 더러운 물건들 찍지 말고…". 그래서 내가 또 물었다. "누군가 아저씨를 취재해 가서 나쁜 짓 했어요?" 그러자 그는 말없이 다시 눈을 감으며 귀찮다는 듯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는 67세의 노총각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온 미싱(재봉틀)기사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1960년대)에는 거의 모든 여성이 결혼할 때 재봉틀을 혼수품으로 가지고 갔으니,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먹고 살 걱정을 안 해도 될 것이라고 젊은 날의 그는 판단했다. 온갖 잡일을 다 시키던 스승과 함께하며 그의 손기술은 나날이 발전했고,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달리며 고장 난 재봉틀을 고치는 전문가가 되기까지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럭저럭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그 돈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써본 적이 없는 듯했다. 중풍에 걸린 어머니를 돌아가시는 날까지 홀로 보살폈고, 장애인이라 몸을 쓰지 못하는 형의 뒷바라지도 해왔다. 그뿐 아니다. 삼십 년 넘게 세탁소를 하면서 그는, 의용소방대(현직 소방관이 아니라, 소방활동을 돕는 마을주민으로 구성된 봉사 조직)의 대원이기도 했다.

  세탁소 한쪽에는 그 시절에 받은 표창이 두 개나 걸려있었다. “아저씨, 유명한 소방대원이셨나 봐요!”라고 내가 감탄을 하니 그가 말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소방서가 바로 우리 가게 옆에 붙어 있잖아. 그러니 불이 났다고 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뛰어가는 게 항상 나니까 표창을 준거야.”라고 말이다.

  게다가 그는 ‘소문난 효자’로 알려져, 텔레비전에 두 번이나 나온 적이 있는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서도 그는 말했다. “이장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응하기는 했는데, 몇 년 후 찾아온 두 번째 취재 때에는, 내가 이미 알려졌으니 그냥 있는 이야기를 사는 곳 이름만 살짝 바꿔서 똑같이 써먹은 거야. 3일이나 고생하면서 촬영했는데 출연료도 안 주고, 나쁜 사람들… .”

  하지만, 두 번째 방송이 나가고 그의 인생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말이야, 제주도에서 늙은 어미를 돌보며 혼자 사는 내 이야기를 방송에서 보고, 무슨 감동을 하였는지 한 서울 여자가 나를 만나러 세탁소에 찾아왔어. 그 전날 그분이 꿈을 꾸었는데, 집채만 한 바위가 자기 집 앞에 갑자기 텅하니 나타나 있었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전개에 놀란 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예? 그래서요?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데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 여자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그랬어. 그런데, 시에 사는 어떤 여자가 심한 방해를 놓았지. 괘씸한 여자야. 하늘이 보고 있는데, 아마 그 여자는 절대로 잘 안될 거야.”라고 말이다.

 

▲ 그는 세탁소 안의 물건들은 오래되고 더럽다며 찍지말라 호통치셨다. 이 사진을 찍고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 저 풀들도 다 제각각의 이름이 있을텐데, 우린 그저 잡초라 부른다. 내 발이 그 잡초위에 서있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듣는 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가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후로 그가 하는 말들은 거의 그 여자에 관한 원망뿐이다. 버럭 화를 내다가 주제가 180도 바뀌고, 그러다가 또 욕을 늘어놓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들에 듣는 나의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계속해서 들었다.

  덧붙여 그가 말했다. “얼마 전에 어머니 제사가 있어서 집에 갔는데, 글쎄 동생이 나더러 양로원에 들어가라네. 그것 참…, 아버지, 어머니, 형 뒷바라지 죄다 홀로 하면서 한평생을 바쳤는데, 너무하지? 우리 동생!”

  스포트라이트가 현란했던 무대 위에서 잠시 빛을 발했었던 그의 삶은, 한때 소문난 효자였고 용감한 의용소방대원이었다. 타인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예순일곱의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저 지칠 대로 지친 백발의 욕쟁이 재봉틀 아저씨다.

  그가 수리할 수 있는 구식 재봉틀은 혼수품 목록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제 목숨 던져가며 동네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던 그와 같은 소방관도 많이 사라져 버렸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그는 현재진행형의 효자도 아니다.

  문득,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 할 때마다 욕부터 해대며 못 찍게 한 낡은 재봉틀과 빛바랜 표창장?, 아니면, 몸이 불편한 형님과 자신을 양로원으로 보내려는 동생?, 그나마 기적 같이 일어났던 한 여성과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 역시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렸기에, 그의 추억은 달지 않고 씁쓰름하다.

  애초에 나는 세탁소 아저씨에게 쫓겨날 뻔했다. 하지만 내가 끈질기게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잠시 후 또 나가라고 소리치겠지?’ 하며 노심초사 하고 있을 때 그가 이렇게 말문을 열었었다. “……이제야 알아질 거 닮다(알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그가 도대체 무엇을 알 것 같다고 말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빠진 아랫니 사이로 현란하게 튀던 그의 침을 맞아가며 보낸 시간 속에서, 나도 희미하게나마 무언가를 ‘이제야 알아질 거 닮다.’

  제주를 걸으멍(걸으며) 보멍(보며) 내가 만나 오고 만나 갈 사람들은 결코 유명한 이들이 아니다. (가끔 세탁소 아저씨 처럼 유명한 무명인도 있을지언정.) 하지만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다름’의 부분이고, 다시 말해 그것은, 그들과 내가 제주라는 섬에 내리고 있는 뿌리의 깊이일 것이다.

  우리 집 앞마당에 뽑아도 매년 자라는 풀들은 한데 묶어 ‘잡초’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풀들에 제 각 각의 이름이 없을까? 정원에 곱게 핀 꽃들이 언제 무슨 비료를 먹고 자랐는지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마당에 핀 잡초들은, 물을 주지 않아도 쑥쑥 자라나고, 뿌리째 뽑아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 수많은 잡초 중에 ‘세탁소 아저씨’라 불리는 풀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적어도 나는, 그가 언제 어떤 비를 맞았고, 누구를 만났는지에 관한 기억의 한 부분을 전해 들었다. 억센 잡초의 기운이 나약한 정원의 꽃과 다를 바 없는 나를 당황하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멀게나마 조금씩, 고통 끝에 오는 소통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음에 또 그를 만난다면, 덜덜거리는 그의 오래된 재봉틀 소리가 듣고 싶어 왔다고 말해야지. / 정신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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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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