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신산공원 산책 중에 문득 얻은 깨달음

신산공원을 걷는다.

아직 잠에서 덜 깨 부스스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신산공원을 걷는다.
잠의 유혹에 넘어가 예정보다 늦게 집을 나서니 해 뜰 때 집으로 돌아 온다가 계획이었는데 벌써 해님이 한심한 나를 웃으며 보고 있다.
그래도 걷는다.
한 발 한 발 부지런히 걷다보니 조금씩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사계절을 지키는 나무들... 나무들 사이로 난 길... 그 길을 따라 걷는 많은 사람들.

나이는 숫자임을 온 몸으로 보여 주는 한  할아버지는 아침 뉴스를 세상에 퍼뜨리며 힘차게 걷는다. 안테나를 길게 쭈욱 뺀 작은 라디오는 할아버지 손과 하나가되어  지지직 거리는 잡음 사이로 세상소식을 전한다. 나도 슬쩍 귀 기울여 밤사이 사건사고와 급박한  정치현안을 듣는다. 그러면 세상에 무심하지 않은 시민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바로 그 순간 젊은 아가씨가 바람처럼 할아버지 라디오를 추월한다. 민소매 셔츠와 짦은 반바지 차림새의 아가씨는 야구 모자를 멋지게 눌러쓰고 힘차게 팔을 내저으며 달려 나간다.

기다란 하얀색 이어폰이 함께  박자를 맞추며 함께 달려 나간다. 문득 저 이어폰을 채우는 소리가 궁금해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달리면서 듣는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무엇을 들을까?
호기심에 짧은 내 다리를 버둥이며 따라가 보지만 얼마 안가 아가씨는 아예 시야에서 사라진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번엔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아주머니 두 분이 눈에 들어온다. 챙 넓은 모자로 머리를 가리고 마스크로 얼굴을 다 가려 눈과 입만 보인다.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두 팔로 공기를 가르며 ,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눈은 전방을 주시하면서도 수다를 떠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두 분.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집에서 엄마들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하기의 달인이 되지 않으면 한  집안을 꾸려 나갈 수 없는 현실이 저 아주머니들을 저렇게 훈련 시킨거다. 수다의 내용은 참으로 폭이 넓어 생활의 정보부터 드라마 분석까지 하염없이 흘러간다.  내용은 재미있지만 나도 갈 길이 멀어 이 분들보다 앞서 나가기로 했다.

햇볕을 가리긴 커녕 온 몸을 햇볕에 맡긴 나는 , 영차 영차 나름 박자를 맞추며 힘차게 걷는다.  그 앞으로 파노라마처럼 신산공원을 걸었던 나의 모습이 연대기순으로 펼쳐진다. 아주 오래전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나는, 첫 임신때 신산공원을 걸었다.

나이 서른셋에 첫 애를 낳게 된 늙은 산모. 그래도 자연분만을 하고 싶어 틈만 나면 공원을 걸었다. 책에 적힌 대로 배를 쓰다듬으며 좋은 소리만 하며 천천히 공원을 걷는.. 나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 둘을 낳고 갑자기 살이 오른 아줌마가 다이어트를 위해 힘차게 걷는 모습이 보인다.  얼굴은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을 정해놓고 공원을 몇 바퀴 돌기로 한다. 끝날 때까지 조금도 쉬어서는 안 된다. 목표는 달성한 듯 보였으나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 갑자기 주변이 환해진다. 처음에는 그냥 앙상해보였던 왕벚나무가 세월의 도움을 얻어 그늘을 드리울 만큼 컸다. 어느 해 사월 어느 날... 벚꽃잎이 눈꽃처럼 휘날리던  날 .. 벚꽃나무 그늘아래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과 도시락을 먹고 있다. 낭만적으로 밥 한끼 먹자는 나의 제안을 비웃으면서도 한 달음에 달려온 친구들과 맛있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신다. 그 옆을 뱅뱅 맴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벚꽃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배경음악이 된다.

그런데 바로 그 뒷 장면에선 힘없는 뒷모습이 안쓰럽다. 축 처진 어깨가 슬퍼 보인다.
서늘한 새벽 바람도 , 코 끝을 스치는 치자꽃 향기도 위로가 안 되는 것 같다. 눈은 앞을 보는 듯 하지만.... 무엇을 보는 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닿지도 안을 손을 내밀어 본다. 그리고 꼬옥 손을 잡는 시늉이라도 해본다.

닿지 않는 손 때문에 상념에서 깬 나는 다시 걷는다. 벌써 하늘 한켠에 자리 잡은 해님이 강한 햇살을 뿌린다. 그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느긋하게 걷는다. 이젠 걷기위해 걷는다. 시간 정해서 목표량 채우며 걷지도 않고 언제 쓸지 모르는 영어단어를 외우겠다고 이어폰 끼고 중얼거리지도 않는다.
그냥 걷는다.

그냥 걸으니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들어온다. 옆을 스치는 할아버지 아가씨 아주머니들이 정겹고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차 소리 마저 정겹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애써 귀 기울여야 들리는 바람 소리... 걸어가는 나를 평화롭게 바라보는 내 마음의 소리.

돌아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공원을 똑같이 걸었지만 결코 모든 것이 다 같지는 않았다.  나무는 쑥쑥 자랐고 어린이 놀이 시설이 교체되었는가 하면 운동기구도 자리 잡았다. 젊었던 나도 중년이 되었다. 같아 보이지만 날마다 달라지는 공원을 난 앞으로도 울고 웃으며 걸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듯.

결국 어느 날 문득 이 비슷한 느낌은 뭐지, 라며 같은 자리를 헛도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 다르게 걷고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 깨어있음’ 이다.

난 이 네 글자를 말하기 위해 참으로 긴 프롤로그를 늘어놓은 셈이다. 처음엔 나도 잘 몰랐다. 그런데 세월이 주는 삶의 지혜로 조금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그림자처럼 삶을 둘러싼 배경들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 이때 정해져있는 배경은 어찌 할 수 없다. 하지만 늘 변하는 그 배경들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깨어있어 바라보며 방향의 흐름을 잡을 때.. 그 길의 끝자락에 행복이 있음을 확신한다.

잠시 길을 멈춰 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지나온 길을 본다. 그리고 또 내 앞에 펼쳐진 길도 본다. 지나온 길을 보면 넘쳐나는 후회 연민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 복잡하다. 앞으로 난 길도 본다.  깨어있어 바라보며 조금 더 현명하고 조금 더 지혜롭게 그 길을 갔으면 좋겠다.

낮에도 밤에도 더운 날씨가 계속 되고 있다. 그러니 어제 오늘 한 순간 굵게 내린 빗줄기가 시원하고 반갑다. 이러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것이다. 계속 될 것 같은 더위도 결국 끝은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깨어있어 바라보며 그 삶의 여정을 즐겁게 걸어가리라 다짐해본다.

(다짐대로 완벽하게 실행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음. 그래도 무심히 끌려가는 것보다 자꾸 다짐하면 좀 낫지 않으려나) /바람섬(홍경희)

           
   
▲ 홍경희(바람섬). ⓒ제주의소리

글쓴이 바람섬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바라건대 청춘 이후의 내 삶은 독서와 요가로 채워졌다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아들 딸의 강력한 사춘기 에너지를 갱년기 에너지로 힘겹게 맞서며 하루하루살아가고 있다. 좋은 부모 만나 서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10년 언론사에서 일했다. 그 후 이제까지 제주교재사를 운영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행복한 교육으로 가는 작은 다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교재 교구를 판매하고 있다”

고 자신을 소개했다.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