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 (11) 무명사진전 / 정신지

 

▲ ⓒ정신지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사진 속의 이들이 언제 태어나,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누가 찍었는지, 왜 찍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그들은 일본강점기 시절을 전후로 학창시절을 보냈고, 4.3사건의 슬픔을 겪은 사람들이며, 게 중에 몇은 바다를 건너간 일본 속의 제주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뿐이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많은 노인분의 이야기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의 것들이다. 가끔 운이 좋아 그들의 집에 가면, 벽에 걸려있는 사진에서, 혹은 친절하게 꺼내주신 앨범 속에서 그 풍경들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운이 좋으면 얼마나 좋으랴. 할망 하르방은 낯선 이에게 그들의 옛 기억을 섣불리 끄집어내 이야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진은 더더욱 그렇다.

가끔, 어떠한 우연이나 혹은 인연으로 내게 다가오는 옛날 사진들이 있다. 허물어진 폐가나 고물상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주인 없는 사진들. 그 속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의 풍경들이 있고,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있다. 상상할 수는 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사진 속의 이야기를 마음껏 꾸며낼 수도, 역사적인 사건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써 박물관에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강렬히 원하는 것은,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해줄 사진의 주인공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걷고, 걷고, 또 걸어도, 허탕을 치는 날이 꽤 많다.

 

▲ ⓒ정신지

 

▲ ⓒ정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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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오십여 장의 흑백사진 한 꾸러미. 며칠 동안 몇 번이고 반복해 바라보았다. 이 많은 사진을 미련없이 남긴 채 분명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아니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지만, 이 사진꾸러미가 내게 있다는 사실조차 그에게는 별 관계가 없는지. 혹, 찾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도 들지만, 이것을 어떻게 누구에게 찾아주어야 할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모르고, 그들 역시 나의 이름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몇 해 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뉴욕에 있었을 때, 나는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을 즐겨 찾았다. 무엇보다 나를 흥분하게 했던 것은, 오래된 사진과 편지, 엽서 등을 파는 한 모퉁이의 가판대였다. 한 장에 천원 이천 원 부터, 가격은 부르기 나름.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의 기억을 기웃거리고 있자면 훌쩍 하루가 갔다. 가끔 나 같은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편지를 열심히 골라서 사가곤 했다. ‘저걸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하고 늘 궁금했거늘, 나는 그것들이 예술작가들에 의해 재탄생 되거나, 학자들에 의해 재해석, 재조명되는 결과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세계의 모든 유행이 시작되는 곳에서, 주인 없이 버려진 사진을 가지고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나도 감히 ‘무명사진전’. 하지만 그 어떤 예술적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재해석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가족의 과거와 그들이 살던 섬의 풍경을 혼자보기 아까웠을 뿐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보고 아직 살아계신 당신의 할망 하르방의 흑백사진을 떠올릴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슬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창조적인 독자가 주인 없는 사진 한 장을 계기로 가장 가까운 곳의 옛이야기들을 다시금 ‘보멍’, ‘들으멍’ 할 수 있다면! 제주도 전체가 살아있는 목소리의 박물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정신지

*혹여나 당신이 이사진 속 주인공이라면, 나는 기꺼이 당신에게 사진꾸러미를 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몰라, 감히 허락없이 사진을 공유한 점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사라져버린 당신의 흑백사진들을  바라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기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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