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기달왕자 두 번째 이야기 '허운데기 공주'

초등학교 5학년인 우리 딸은 머리가 길다. 잘 빗겨진 머리가 단아하게 목 뒤로 넘어가 예쁜 고무줄로 묶여있고 앞머리는 뒤로 완전히 넘겨 시원해 보인다,는 내 꿈이다.

실상은 이렇다. 한 눈에 봐도 약간은 헝크러진 머리가 제 멋대로 흩날리는데 거기에 길고 긴 앞머리가 너무나 자주 얼굴을 덮는다. 그래서 나는 내 딸을 이렇게 부른다.
“허운데기 공주”

▲ 로버트 먼치의 <종이봉지 공주>

허운데기 공주를 보면 로버트 먼치의 ‘종이봉지 공주’ 가 떠오른다.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단히 줄거리만 소개한다.

멋진 왕자와 결혼해 행복한 날만 기다리고 있던 공주에게 큰 일이 닥친다. 못 된 용이 성을 침입해 불태우고 왕자까지 납치한 것. 예쁜 옷이 다 타버려 종이봉지 옷을 입은 공주는 용을 찾아가 지혜로 물리치고 왕자를 구해낸다. 그런데 왕자의 첫마디. “옷이 그게 뭐야,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와” 그 말을 듣고 종이봉지 공주는 껍데기만을 보는 왕자와 기꺼이 헤어지고 결혼하지 않았다.

아주 용감하고 현명한 공주님이다.
여기서 잠깐 질문 하나. 허운데기 공주와 종이봉지 공주의 공통점은?
힘이 세고 용감하다.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살아간다. 예쁜 머리핀이나 고무줄, 머리띠를 싫어하는 듯하다. 하지만 예쁘다. 안 보는 듯 하면서도 다 보는 지혜와 통찰력이 있다.

위 내용을 증명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허운데기 공주가 4학년 때 학교 체육시간에 씨름을 했단다. 처음 엔 선생님이 몇 가지 이론을 가르쳐주고 곧 토너먼트로 경기를 시작했단다. 보기보다 힘이 넘쳐나는 허운데기 공주, 여학생들이야 가뿐히 물리치고 남학생들도 평소 습득한 안다리, 밧다리 기술로 가볍게 제압, 씨름 왕에 등극했다. (당연히 그 기술은 아빠에게서 전수 받았다. 아빠가 가끔 아들 딸 과 놀아 줄때) 그 순간의 얼굴 표정, 안 봐도 훤하다. 평소 그대로의 태연한 표정 그대로.

또 가끔은 우리 집에서 키우는 진돗개의 사료를 들고 내릴 때 한 어깨에 터억 걸치고  영차 영차 하며 가볍게 들고 온다.

하지만 힘만 센 게 아니라 상황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
몇 년 전이던가, 아이들이 이모라 부를 만큼  가까운 친구와 신산공원에서 만나 도시락을 먹이고 했었다. 약속 시간 1시. 평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친구인지라 당연히 늦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어린 승연이가 “그 이모, 1시 약속이면 1시에 출발할 걸”이라 했을 때 놀라움과 웃음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나중에 이 얘기를 친구에게 해주었다. 지금도 친구는 승연이의 힘과 상황 관찰을 두려워한다)

“너 어떵 알안?”
“그냥 알안.”

허운데기 공주가 그냥 안 게 이것뿐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갓 입학한 어린 딸이 어느 날 내게 꼬깃꼬깃 접은 편지를 갖고 왔다. 당시 내가 꽤 힘든 상황 이었을 때다.
“ 엄마,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었어. 나한테만 말해조. 한 10일만 지나면 괜차나질꺼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엄마”
맞춤법은 엉망인 편지였지만 그 내용은 거의 도 닦은 스승의 경지다. 사실 아닌가, 어떠한 일도 대부분 한 열흘 지나면 잠잠해지고 괜찮아 지는 것 말이다.
어떻게 그냥 알았을까,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내가 이제야 안 사실을.

또 허운데기 공주는 사람과 동물에 대한 인정이 많다. 특히 동물 사랑은 유별나다.

우리집을 거쳐 가거나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개들은 모두 공주님의 절친한 친구다. 특히 지난번에 키우던 진돗개는 주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무섭게 짖었었다. 웬만한 사람은 접근도 못하는 그 개도 공주 앞에서는 온순한 개의 대표 역할을 한다.

한 번은 길을 가다 허운데기 공주가 전봇대에 붙여진 무엇인가를 휴대폰 카메라로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뭔가 봤더니 잃어버린 개를 찾는 내용이다.

“왜 찍으맨?”
“ 내가 친구들에게 이 내용 다 보내줄 거야. 그래야 빨리 찾을 수 있을 거 아니?”
어린 딸에게서 삶을 한 수 배운 순간이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허운데기 공주는 요즘도 여전히 허운데기다. 요즘이야 날씨가 선선해서 그나마 낫지만 지난 그 뜨거웠던 여름날에는 모두 각자의 해결책을 내게 제시해 주었다.

머리를 좀 잘라라. 스트레이트 퍼머넌트를 해서 찰랑 거리게 해라. 양 갈래로 묶어 주어라. 등등.
그런데 머리는 도저히 안 자르겠다 하고 머리 당겨 묶는 것도 싫고, 그러면서 말한다.
“엄마가 잘 땋아서 묶어 봐”

이건 그러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잘 알기에 하는 협박이다.
다른 건 다 잘하지만(?) 바느질과 머리 손질은 내겐 너무 힘든 일이다. 그래서 공주에 대한 머리 통제권을 내가 가졌을 때 스타일은 항상 귀밑 3센티미터, 몽실언니 스타일이었다.
오죽하면 공주가 다니던 어린이집 원장님(내 친구)이 내게 전화 걸어 한 말씀 전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의식이 생기면서 완전 상황 역전.
공주님은 머리를 기르고 기르고 또 기르고. 어떻게 내가 할 수가 없다. 벌 받는 모양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툭 툭 한마디 던진다. 저 머리 어떻게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이젠 익숙해져서 공주와 나는 듣고 흘려보낸다.
그래, 남들 보기 좀 그렇지만 이제 다시 한 번 시간이 흐르면 공주가 알아서 다 하겠지.
지금 내가 뭐라 해봐야 소용이 없는 상황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지 뭐.
(그런데 이 결심은 상황에 따라 자주 바뀜을 고백하겠다)

종이봉지 공주처럼 힘세고 용감한 허운데기 공주, 하지만 학교에서는 거의 말이 없는 모범생 스타일... 엄청 부끄러움을 타고 주로 친구들의 말을 경청한다.(참관 수업 갈 때 내가 발표 좀 하라고 신호주면 고개를 싹 돌려버린다. 발표하는 내 딸 보는 게 아직도 나의 꿈이다)  집에서는 학교에서 발산하지 못한 에너지를 내게 다 쏟아 낸다. 그 실상을 다 전하고 싶지만 후환이 두려워 못하겠다. 허운데기 공주의 두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한 자리 숫자를 넘어서지 못했다.

내 곁에 공주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 나의 평생 친구, 허운데기 공주님. /바람섬(홍경희)
           
▲ 홍경희(바람섬). ⓒ제주의소리

글쓴이 바람섬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바라건대 청춘 이후의 내 삶은 독서와 요가로 채워졌다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아들 딸의 강력한 사춘기 에너지를 갱년기 에너지로 힘겹게 맞서며 하루하루살아가고 있다. 좋은 부모 만나 서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10년 언론사에서 일했다. 그 후 이제까지 제주교재사를 운영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행복한 교육으로 가는 작은 다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교재 교구를 판매하고 있다”

고 자신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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