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9 충칭에서의 하룻밤

19세기까지 충칭은 인구 이삼십만의 중소규모 도시였으나 중일 전쟁 당시 난징에 있던 국민당 정부가 이곳을 임시수도로 정하여 옮겨오면서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3,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모여 사는 중국 최대의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충칭은 장강(長江)과 가릉강(嘉陵江)이 합류하는 지점의 반도처럼 튀어나온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도시라고 한다. 장강을 내려다보는 절벽위에 도시가 있어서 케이블카로 강을 건너면서 보는 전망은 충칭만이 갖는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도의 끝에 있는 충칭항에서 장강유람(長江遊覽)이 시작된다. 바다가 아닌 강에 항구가 있다는 것이 이채롭기도 하다.

청두가 오랜 유적을 간직한 차분하고 조용한 문화의 도시라면 충칭은 근대에 들어서 급격히 성장해온 산업 도시라는 점에서 대비 된다.

그런 만큼 가볼 만한 유적지나 관광지가 많지 않지만 상해에서 옮겨와서 해방되기 전까지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는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식당을 나와 시내버스 정류소로 향했다. 막상 시내버스정류소에 도착하고 보니 노선안내도를 알아볼 수도 없고 그것을 보고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택시를 타려고 두리번거리는데 한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비쩍 마르고 추레해 보이는 노인은 나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였는데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팅부동(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노인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하자, 곁에 있던 젊은 남자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은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지도에 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표시된 근처의‘치싱강’을 가리키며 여기서 택시를 타도 괜찮은지 묻자, “커이 커이(可以).”라고 말하며 괜찮다고 한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도로에 한 걸음 붙어 서는데 옆에 서있던 노인이 다시 다가와서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5원을 달라고 말한다.

“워 게이니 우콰이? 웨이썸머?(왜 내가 당신에게 5원을 줘야 합니까?)”

노인은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한참을 설명했고 뒤편 터미널의 한쪽을 가리키기도 했다. 여기서 택시를 타도 괜찮다고 말했던 젊은 남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이해를 했다. 어떤 곳을 안내해 줄 테니 따라와라, 그리고 5원을 달라, 대충 그런 내용 같았다. 노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노인의 정성이 통한 것이다.

노인은 앞장서서 터미널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 넓은 광장을 건너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택시정류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노인이 가리키는 줄 뒤에 서서 주머니에서 10원짜리 지폐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5원을 거슬러 주면서 택시가 많이 오니 금방 탈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는 환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돌아서 갔다. 오랜 세월 삶의 무게에 짓눌린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져 가는 노인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내가 선택을 잘한 건지도 모르겠다.

‘치싱강’엔 금방 도착했는데 임시정부청사를 찾기는 쉽지않았다. 약도에 나와 있는 대로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30분 가까이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겨우 태극기가 그려진 작은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경. ⓒ양기혁

 

▲ 임시정부로 가는 이정표. ⓒ양기혁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표지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 그다지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관리인인 듯 “한궈런마?”하고 물으며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아침시간이기도 했지만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다. 관리인은 등에 진 내 배낭을 받아서 사무실에 내려놓고 편하게 둘러보라고 한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낡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조그만 흉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그 앞에 서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시큰해오는걸 어찌할 수가 없다. 30여 분간 초행길의 낯선 도시를 헤매며 찾아온 피곤함도 잊고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고결한 영혼 앞에서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다음 달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중일 전쟁의 시작으로 중국의 동부해안을 따라 내려와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에 대해서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던 후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압박을 피하여 항주(杭州), 가흥(嘉興), 진강(鎭江),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들어왔다. 충칭에서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1945년 1월 이곳 칠성강(七星岡) 연화지(蓮花池) 38호에 정착하여 일본의 패망과 광복을 맞았고, 11월까지 마지막 임시정부로 남아 있었다.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에서. ⓒ양기혁

중국의 각지를 떠돌며 이곳에 오기까지의 역정을 훑어보고 나오니 처음 맞아주던 노인이 방명록에 서명하고 성금을 내줄 것을 권하여 입장료라 생각하고 성금함에 10원을 넣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나올 때까지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고 충칭항으로 향했다. 충칭에서 이창(宜昌)까지의 2박 3일간‘장강삼협유람’은 나를 강렬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충칭항이 있는‘차오티엔먼’으로 들어가는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오가는 차들이 서로 엉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자 택시 기사는 나에게 내려서 걸어가라고 하고는 차를 돌려 가버린다. 택시에서 내리자 한 청년이 다가와 삼협유람 광고 전단지를 내보이며 바로 옆의 여행사로 나를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직원이 반갑게 맞이하는데 정작 오늘 여행할 수있는 표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몇 군데 전화를 해 보더니 2등실 표 한장은 구할 수 있다며 530원이라고 한다. 썩 내키지 않았다. 3등실이나 4등실이면 되니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는데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등실 요금을 조금 깎아준다고 했지만 나는 그냥 밖으로 나왔다. 비용이 많이드는 3일간의 긴 장강유람을 하기보다 창사로 바로 가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러고 보니 청두에서 바로 창사로 갔으면 시간과 경비가 훨씬 절약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터미널 안의 의자에 앉아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유스호스텔을 찾아가서 쉬면서 리를 좀 하기로 결정하고 터미널을 나왔다.

가이드북에는 충칭의 유스호스텔이 나와 있지 않았지만 그동안 머문 유스호스텔마다 다른 도시의 유스호스텔을 소개하는 리플렛 같은 것들이 있어서 몇 개 가져온 것 중에 충칭의 유스호스텔이 있었다. ‘종싱루146’라는 리플렛에 나온 주소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택시를 타고 곧 도착할 수 있었다.

 

▲ 충칭에서 하루 더 머문 유스호스텔 바깥. ⓒ양기혁

 

▲ 충칭에서 하루 더 머문 유스호스텔 바깥. ⓒ양기혁

데스크에 있던 여인이 예약을 했는지 묻고는 도미토리는 없고 1인실만 하나 남아 있다고 한다. 그거라도 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요금은 100원인데 유스호스텔 회원증을 확인하고는 10%를 할인하여 90원으로 깎아준다.

1인실이라 그런지 방안에 욕실 겸 화장실이 같이 있어서 편하긴 했다. 샤워를 하고 속옷과 양말, 수건 등 빨래를 하고, 잠시 침대에 드러누워 쉬고 나서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가볍게 숙소 주변 시내모습을 구경할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얼마안가 큰길 옆 골목길 계단에 몇몇 사람이 좌판을 벌여놓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런 좌판이 안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 골목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러 사방으로 뻗어 있는 좁은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벼룩시장이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양기혁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