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17 下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이들의 거처, 제주도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오랜 제주섬의 이주의 역사에서 최근의 이주민들은 역대 이주민들과 궤를 달리한다. 그동안의 역사상 이주민들이 할 수 없이 생존을 위해 제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면, 지금의 이주민들은 삶의 패턴과 가치관의 변화에서 제주를 찾는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 제주는 <세계유산의 섬>으로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올레 열풍은 제주를 신혼여행이나 수학여행 단체관광으로 으레 거치는 국내관광지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는 데 기여했다. 즉, 제주를 세계에서 가장 살 만한 곳으로, 인생의 다른 삶의 기회가 남아 있다면, 이곳에서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곳으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이들 ‘이주민’들은 갓 은퇴한 베이비부머 세대뿐만 아니라 30~40대로 훌쩍 내려앉은 것이 눈길을 끈다. 가정에선 아이 키우고 회사에선 실적 쌓느라 바쁠 나이에 높은 연봉과 성공이 보장된 미래, 각종 문화적 혜택을 버리고 굳이 ‘사서 고생’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있는 것.(제주의소리 기사)

인용기사에서 보듯이, 예전처럼 은퇴 후 별장 하나 짓고 여생을 평온하게 살기 위해 오는 노인 세대들도 더러 있지만, 30~40대 젊은 층이 아이들과 함께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즉, 아이들을 대도시의 경쟁과 속도 속에서 팍팍하게 자라게 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 있는 시간 속에서 삶의 소중함을 느끼며 성장하게 해주고픈 다른 욕망의 발로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과거의 이주패턴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가치지향적이다. 즉, 제주섬의 가치를 알아보고 온다는 것인데, 그 가치는 경제적 가치가 아닌 천혜의 자연경관과 삶의 질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의 섬이라는 측면에서의 가치이다. 그리고 이는 돈 주고도 못 바꾸는 가치이기도 하다. 아니,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리라.

▲ 영화감독 장선우 씨가 이주해 와 문을 연 대평마을의 물고기카페. 제주를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카페다.

이 새로운 이주민들은 ‘문화이민’이라고도 불린다. 과거 구한말이나 60-70년대 이주민들이 일거리를 찾아와 화전민이 된다든가 막노동꾼으로 삶을 시작하면서 제주사회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어 갔던 것과는 달리, 지역에서의 경제활동 역시 기존 체제에 편입되기보다 스스로 새로운 경제활동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전 세대들과 크게 다르다.

이주민들은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든가, 올레코스 등 제주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여행책자를 낸다든가, 귀농학교를 다니면서 친환경농사를 짓는다든가, 북카페를 차리든가, 끼 있는 그룹끼리 이주해서 카페를 차리고 공연을 하며 생활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들은 대부분 문화와 소통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또한 시간만 나면, 삶을 즐긴다. 들로 산으로 바다로 다니면서 자연과 공감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적인 이주민들이다.

문화적인 이주민들이기에 그들에게서 우리 시대의 키워드에 맞는 시대정신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생활인이기만 한다면, 낯설고 물 선 이 섬에 달랑 맨 몸뚱이로 이주할 리도 없겠지만, 문화적인 이들이기에 이들에게 제주는 문화적인 코드로 읽히며, 이들이 발견한 제주에서의 생활과 활동은 문화적인 생산성을 지닌다. 블로그와 트위터 등에 수시로 오르내리는 제주 이주체험기들을 가끔 만날 때마다, 이주의 다양한 경험담들은 또한 새 이주민을 현혹하기에도 충분하다. 어쨌든 제주는 이주민들로 인해 문화적 유전인자만큼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제주섬은 신대륙이 아니다

최근 제주에 이주해 오는 분들 중 상당수는 제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이들이다. 그래서인지 이주해 온 젊은 층 중 많은 수가 제주를 신대륙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즉, 지역주민은 삭제된 채 올레코스와 한라산만 보고 오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제주는 신대륙이 아니다. 오래된 구질서가 존재하는 섬이다.

즉, 설촌(設村) 몇백 년이 넘는 마을만 200여 개 가까이 되는 곳으로, 촘촘한 그물망처럼 온 섬을 씨줄날줄로 엮은 조각보 같은 관습과 문화가 존재하는 섬이기도 하다. 현재에도 자연마을의 신당은 본향당을 포함하여 400여 개소에 이른다. 크든 작든 마을의 주민들 중 상당수가 이 신당들을 찾아 치성을 올린다. 이는 제주자연마을들의 오래된 문화이다. 또한 그 문화는 섬이라는 환경에 적응해 온 선 이주민들의 문화이기도 한 것이다.

설촌(設村)이란 마을을 세운다는 말인데, 제주도의 어느 마을에든 설촌의 역사가 있다. 즉, 누구누구가 어느 때 이 마을을 세웠다는 마을 설립의 기원(起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을 세울 때, 제주사람들은 맨 처음 신당(神堂)을 만들었다. 이 당을 본향당(本鄕堂)이라고 한다. 본향당은 마을공동체의 신앙적 구심점이고 마을의 가장 중요한 성소(聖所)이기도 하다.

설촌에 참여한 주민들은 이 본향당을 중심으로 마을의 공동체적 질서를 구축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이고, 사회는 다양한 구성원들끼리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하고 어우러지기도 하는 공동체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 간의 합의된 규칙은 필수적인 것이다.

마을공간과 그 주변 자원의 분배와 관리에서부터, 공동의 노동이 필요할 때 노동력을 적절하게 나누어 감당하는 일까지, 어느 하나 개인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 향약(鄕約)이라는 마을 공동체 운영의 규약을 통해 규칙을 만들었고, 마을공동체의 대소사는 이 향약에 따라 처리했다.

▲ 중산간마을의 본향당인 애월읍 상명리 느지리캐인틈당.

설촌을 위해 본향당을 만들 때도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았다. 당(堂)을 갈라간다. 갈라간다는 말은 바로 설촌하는 마을의 본향당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즉, 기존에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새로 만드는 마을에 모실 신을 나누어 갔던 것이다.

이를테면, 상덕천은 웃송당 본향당신인 금백주여신의 첫 번째 아들 당, 와흘 본향당은 11번째 아들 당, 이런 식의 서차와 위계가 존재한다. 또한 4․3처럼 엄청난 역사적 재난이 닥칠 때는 피난처로 마을신을 모시고 가기도 하는데, 제주시 구좌읍의 본향당에는 4․3 당시 인근 중산간마을들이 토벌군의 소개(疏開)작전으로 강제 이주를 할 때에 각 마을의 신들을 모셔오는 바람에 신당의 신위 수가 대여섯 개가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 송당본향당과 그 당의 11번째 아들 당이라는 와흘당의 당제 모습.

이렇듯 제주의 마을들은 그 나름의 정연한 설촌의 역사와 논리, 공동체적 마을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전통은 미약하지만 현재에도 각 마을마다 자긍심의 뿌리가 되어 면면히 흘러오고 있다. 이런 마을의 전통은 기층신앙 외에도 과거 농본시대의 유제인 각종 세시풍속과 마을의 자생조직들과 연동되어 긴밀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최근 이주민들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주섬을 신대륙으로 이해하고 이주해 온 사람들처럼, 주변 공동체와의 만남의 접점 없이 저 홀로 떨어진 가옥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일례로 조천읍 와산리의 경우, 최근에 마을 인근에 술 공장이 들어섰는데, 아마도 이주민이 차린 농장 바로 옆에 공장이 들어선 모양이다. 그런데, 공장입지가 확정되고 나서 터파기 공사에 들어가자, 농장의 이주민이 마을이장을 찾아와 농장에 피해가 있으니 보상문제 등을 도와 달라고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 이주민은 이전에 마을회의 참석 독촉에도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술 공장이 들어서는 문제도 마을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여러 번의 독촉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이주민은 발언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고, 결국 다 결정되고 난 후 뒷북을 친 셈이다. 마을이장 역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딱히 도움이 될 리 만무했다. 결국 공동체에 합류하지 않은 결과, 공동체의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을 이장님의 말로는 와산리의 경우 100호 중 20여 호가 최근 이주한 주민들인 모양인데, 전혀 교류가 없다고 한다. 당연히 마을사람들은 이주민들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나중에 또 다른 문화대립의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주민들 중 많은 분들이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이야기가 텃세, 괸당문화 등이다. 그리고 자연은 아름다운데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 가보니 영어로만 말한다고 미국사람 탓할 수 없듯이, 이곳에는 이곳의 오래된 문화와 습속이 존재하기에 그 문화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일이 급선무다.

최근 가시리로 이주한 서울내기의 농촌정착과정을 옆에서 잠깐씩 들여다보면서, 이주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주민들과 함께 일을 만들면서 산다는 게 정말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 친구는 어찌어찌 버텨나가는 것을 보면서 강골의 풍모에 감탄하기도 한다. 전혀 다른 생활패턴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속에, 그리고 기득권까지 작용하는 관계망에 놓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낯설던 관계도 시간이 흐르고 에피소드가 쌓이면, 이웃이 되는 것이다. 상황이 더 잘 풀리면 정겨운 이웃이 되는 것이고.

새로운 제주의 주역들, 제주 이주민

강정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주민들이 많다. 아니, 최근에 이주해 온 분들은 대부분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다. 이미 몇백 년씩 살아온 선이주민들의 후예들이 지역개발 운운하며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찬동하고 나서거나 침묵으로 일관할 때, 최근의 새 이주민들은 강정해군기지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발견을 통해 제주를 찾은 이주민들의 가능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 새로운 세대의 이주민들은 강정의 구럼비나 성산일출봉의 장대한 아름다움, 즉 제주가 가진 내재적 가치를 발견한 이들이기에, 또한 그런 것들이 있는 제주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는 해남촌의 경우처럼, 한 세대를 넘어서야 제주의 지역주민으로서 ‘주민등록’된 정체성과 주체성을 지닌 주민으로 정착될지 모르겠지만, 역대 이주민들과 달리, 제주지킴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 ‘제주포럼C’에서 마련한 이주민 수다방의 이주민들. 이들이 ‘육지것’의 자조감을 넘어서서 새로운 제주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논의와 생산적인 활동들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주민들의 자식 세대들은 지역사회의 제주 가치를 지키는 지킴이로 충분히 성장할 것이란 점에서 또 다른 세대의 제주인으로서 제주의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새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자는 섞일수록 우월해진다는 생물학적인 원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의 변증법적 결합과 혼종이야말로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파워블로거로 명성이 높은 이주민인 ‘아이엠피터’는 제주 이주를 테마로 한 블로그 글에서 “이주에 관한 이야기나 제주 정책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족과 아이들이 사는 지역을 조금 더 발전시켜 행복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평생 살고 싶은 작은 소망 때문이기도 합니다.”라고 밝혔다. 새로 이주해 오시는 분들이 피터처럼 제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참여한다면, 제주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제주섬의 이주의 역사를 살피고, 제주섬으로의 이주가 역사상 특별한 일이 아니며, 그렇기에 선주민들인 제주도민들은 이주민들의 서툰 제주생활을 백안시하거나 색안경을 낀 채 ‘웃드르 촌놈, 알드르 보재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또한 이주민들 역시, 제주섬은 무인지경의 신대륙이 아니므로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함께 사는 지혜를 빨리 발견하는 것이 제주에서의 새로운 삶에 정말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제주시가지나 서귀포시내권이 아닌 자연마을 농촌으로 이주하신 분들에게 필자가 권하고 싶은 한 가지 이벤트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주한 마을의 본향당을 찾아, 소주 한 잔 올리는 일이다. 여유나 정성이 더해지면, 소박한 제물도 함께 준비하면 더할 나위 없다. 이는 종교와 관계없이, 오래전에 이 마을을 설촌한 마을 선주민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일이다. 만약, 이주해 오신 당신이 이 작은 이벤트를 실천한다면, 그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50%는 먹고 들어가는 일이다.

오랜 제주 이주의 역사상 이번 이주민들의 역사는 새로운 연대기를 쓸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주사(移住史)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 이 글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대거 피난 왔던 피난민과 최근 농촌지역의 다문화가정은 제주 이주사에서 빼기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 본토에서 온 피난민은 자료에는 150,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는 4·3의 와중이기도 했는데, 4·3으로 인한 이재민만 90,000여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육지부에서 온 피난민까지 밀려들면서 최악의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이때의 이주는 대규모이긴 하지만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것이었기에 본 고에서 제외했으며, 결혼 이민 등으로 인해 늘어나고 있는 다문화가정문제 역시 제주 이주사에서 독특한 것이기는 하나 아직은 미미한 인구구성이란 점에서 제주이주사의 맥락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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