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이 아름다운 봄, 주인공이 되는 방법

▲ 활짝 핀 벚꽃. <제주의소리DB>

봄이 왔다.
오래된 친구처럼 포근하던 겨울 외투가 따뜻한 햇볕에 어색해하며 슬그머니 사라진 사이로 봄이 쑥쑥 다가왔다.
겨울이 어느 사이 물러간 것도 눈치 못채고 우리 몸은 금방 봄볕에 익숙해졌다.
봄이 오는 첫 신호, 봄볕에 이어 저 멀리서 불어오는 노란 모래바람…. 그 바람을 순식간에 잠재운 부슬부슬 봄비까지 며칠 전에 내렸으니 이젠 정말 봄이다.

제주의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는 벚꽃이 얼른 생각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짧기는 하지만 나름 굽이굽이 골목길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현관을 나와 대문을 거쳐 골목길 끝에 잠깐 멈추어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동네 놀이터의 벚꽃나무. 위풍당당 오래된 나무는 아니지만 동네에서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그 벚꽃나무는 정신없이 하루 일과를 준비하고 출근길에 오르는 나의 눈과 귀를 잠깐 잡아주었다. 눈부시게 화려한 꽃등불이 내게 다가와 소곤소곤 속삭이며 남루하고 볼품없는 나의 일상을 위로해주었다.

그런데 그 꽃등불의 향연을 지켜본 내 딸의 한마디가 나를 놀라게 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엄마, 벚꽃나무가 너무 예쁘난 그 사이에 있는 다른 초록나무들이 외로워 보이맨"
"왜?"
"몰라. 그냥..."
어린 딸은 그냥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했고 교훈과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 엄마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숨어 있는 풍경도 풍경이다. 마치 책을 읽을 때 문자와 문자가 만들어내는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것과 같구나)

동네 놀이터에 있는 벚꽃나무 몇 그루가 삶을 위로하고 교훈까지 찾게 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일타이피(^ ^)다.

벚꽃은 동네 놀이터를 벗어나면 조금 더 규모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신산공원 한 편에서도 하늘하늘 꽃비가 내리고 문예회관 마당 모서리에는 그야말로 큰 벚꽃나무가 오랜 세월 자리를 잡고 있다. 문예회관 벚꽃나무만 보면 떠오르는 흐뭇한 추억 하나.

지금은 코밑에 거뭇거뭇 수염이 나려하는 중3 기달왕자님이 여섯 살 때 일이다.

그땐 참 부지런히도 주말 나들이를 즐겼었는데.. 그러던 그 어느 날 문예회관에 있는 그 아름드리 벚꽂 나무가 화안하게 꽃 핀 모습을 보고 "엄마처럼 예쁜 벚꽃"이라는 명대사를 날려주신 거다.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좋고 또 좋다.

며칠 전 학교에 데려다 주며 그 애기를 했더니 "엄마.. 다 나이 들면 순수함이 사라지는 거. 그땐 나도 순수핸" 이라는 짧은 반응이 돌아왔다.
역시 이 상황에서도 정신건강에 좋은 교훈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으나 입 다물었다. 아주 틀린 애기는 아니기에. 하긴 그 시절엔 나도 낭만주의자였다.
벚꽃이 피었다고 일요일만 되면 친구들을 죄다 불러 꽃나무 아래서 밥먹자고 협박에 가까운 제안을 했으니.

꽃이 핀 벚꽃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수다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음꽃을 피웠다. 각자 준비해온 주먹밥과 김밥은 꿀보다 달았다. 물론 사이사이 아이들을 통제하느라 아름다운 꽃을 배신하는 드센 날것의 단어들이 봄바람에 날리긴 했지만 좋은 시절이었다.

이제 곧 다시 찾아올 벚꽃의 전성시대를 그리며 상념에 잠기다보니 그 끝자락에 노래 하나가 걸려있다. 제목도 '벚꽃엔딩'이다.

▲ 전농로 벚꽃터널. <제주의소리DB>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밤에 들려오는 자장노래 어떤가요 오예

몰랐던 그대와 단 둘이 손 잡고알 수 없는 이 떨림과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흩날리는 벚꽃 잎이울려 퍼질 이 거리를우우 둘이 걸어요
봄바람 휘날리며흩날리는 벚꽃 잎이울려 퍼질 이 거리를우우 둘이 걸어요 오예


그대여 우리 이제 손 잡아요 이 거리에마침 들려오는 사랑 노래 어떤가요 오예

사랑하는 그대와 단 둘이 손잡고알 수 없는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아래 가사 후략)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이 노래를 처음 내게 소개한 친구는 "우리 젊은 날의 감성과 현재의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 기막힌 노래"라며 꼭 들어볼 것을 권유했다.
이 노래를 듣고 나도 너무 좋아 또 다른 친구에게 권했을 때 돌아온 답은 "가사가 들리네.. 요즘 노래 맞아?"라는 거였다.

나, 나의 첫 느낌은 '설렘'이었다.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연인과 함께 봄날의 산책을 권유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오랫만에 내 감정의 풍선은 마구마구 부풀어 올라 배시시 웃음이 나오고, 만나는 그 누구에게라도 예쁜 웃음을 건네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민낯의 내 욕망'을 오랜만에 꺼내볼 수 있었다.

굳이 다시 노래가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은 나'이긴 하지만 분명 내 진실한 욕망만으로 뭉쳐 웅크려진 내가 있을 것이다.
동네 놀이터 화려한 벚꽃나무 사이로 외로워 보이는 '초록나무' 처럼..그간 일터와 가정을 꾸리면서 대부분의 나를 보여주는 '벚꽃나무 나'말고 오랜 세월 남모르게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던 '초록나무 나'를 꺼낼 때가 된 것이다. 외로운 모습 말고 당당하게.

(여담. [숨, 쉼]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그 노래였다. 2년 전 봄날 전농로 벚꽃 길을 벚꽃엔딩 노래를 들으며 지나다가 떠오른 그 벅찬 감정의 순간을, 다른 이들과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 곧 벚꽃이 다시 필 것이다.
바닷가 가까운 전농로나 종합운동장 어귀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벚꽃은 한라산으로 올라올라 제주대학 가는 길 입구를 불 밝혀 줄 것이다.
이번 봄에는 <벚꽃 예습>을 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그냥 봄이니 ‘벚꽃이 피네’라고 하지 말고 이번 봄 벚꽃이 필 때 무엇을 할까를 미리 생각해두자는 것이다.
꽃길 걷기(사랑하는 연인과 혹은 오래된 남편 또는 아내와, 친구들과), 꽃나무 아래서 먹기(주먹밥이나 김밥 혹은 딱 막걸리 두잔), 꽃나무 앞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꽃나무 바라보기(남의 눈치 보지 말고, 오로지 초록나무 나에 집중하면서)...

▲ 바람섬(홍경희). ⓒ제주의소리

그러면 혹여 알겠는가,
벚꽃나무만 화려한 게 아니라 삶도 예쁘고 화려해질지.
그래서 정말 이 아름다운 봄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