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영화 '지슬', 개인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제주의소리에서 초대해준 덕에 나도 '지슬 관객'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벌써 오래전 일이 돼버렸다.)

이미 영화에 대한 각종 평가와 의의는 너무나 많이 발표됐으므로 어쭙잖은 나의 의견을 한줄 더 보탤 생각은 없다. 다만 그냥 밀려오는 파도에 슬쩍 몸을 맡기 듯 영화를 본 나의 개인 단상을 티 안 나게 얹어 놓고 싶을 뿐이다.

지슬을 본 후의 개인 단상이라...
그래서 당연히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지슬은 내게 뭘까?

 

▲ 영화 '지슬'의 스틸컷.

늙어서 거동이 불편한 어멍은 아들내외 보고 어서 가라고 손짓한다. 차마 발길을 뜨지 못하는 아들에게 어멍은 알이 굵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지슬을 건넨다. 갈 길 바쁜 아들은 한참 고민 하다 꼭 다시 모시러 오마고 다짐하며 떠난다.

비교적 안전한 동굴 속에 왔지만 집에 두고 온 늙은 어멍이 걱정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집을 찾아가는 아들, 어멍이 고집을 부린다면 업어서라도 모시고 오겠다며 집을 찾아간 아들을 기다린 것은 불타버린 집이었다.  그리고 잿더미위로 어멍이 남긴 마지막 지슬이 새까맣게 그을려 나뒹굴고 있었다.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가슴에 꼭꼭 눌러 담고 절을 한 다음 아들은 그 지슬을 품에 안고 동굴에 돌아온다.

사연모르는 동굴사람들은 참으로 맛나게 그 지슬을 나누어 먹는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난 노래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하마터면 진지한 극장 분위기를 잊고 콧노래를 부를 뻔 했다.)

이원수 선생님이 쓰고 백창우 선생님이 곡을 붙인 감자씨

감자 씨는 묵은 감자/ 칼로 썰어 심는다.
토막토막 자른 자리/ 재를 묻혀 심는다.
밭 가득 심고나면/ 날 저물어 달 밤
감자는 아픈 몸/ 흙을 덮고 자네
오다가 돌아보면/ 훤-한 밭골에
달빛이 내려와서/ 입 맞춰 주고 있네.

불타오른 집에서 건져 올린 슬픈 지슬은 동굴 속 사람들에겐 일용할 한 끼 양식이 되었다. 씨감자는 훗날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기꺼이 토막토막 잘리는 신세를 받아들인다. 슬픔과 기쁨의 경계에 세월이 보태지면 그 구분선은 희미해지며 그대로 삶이 되고 그렇게 반복되는 삶이 역사가 된다.

역사의 단면을 그린 영화에 내 지난날의 기억들을 담아보았더니 이 역시 내 삶의 역사가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익숙함은 무엇이지 하고 생각의 뿌리를 캐다보니 뿌리에 매달린 크고 작은 감자처럼 몇 가지 영상들이 지나간다.

한참을 거슬러가 대학생이던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노천극장이 있었다. 당시 노천극장에서는 끊임없이 사물놀이 공연이, 노래패의 노래 공연이, 마당극이 펼쳐졌다. 공연이 끝나면 끼리끼리 모여 각종 주류, 통기타와 젊은이의 뜨거운 열정이 어우러진 뒤풀이가 이어졌다.

몇 년 타지 생활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놀이패 한라산의 멋진 공연을 만날 수 있었다. 민요패 소리왓의 공연도 좋았다. 탐라미술인협의회의 전시회도 빼놓을 수 없다.
제주 굿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한 동안 쫓아다녔던 굿판도 잊을 수 없다.

난 영화 에서 이 모든 공연의 흔적을 보았다.
지슬을 보며 추억에 젖어들고 낯익었던 그 느낌들은 내가 20,30대 때 보았던 그 많은 문화공연들의 기억 때문 이었다.
그런데 그 공연들은 재미있거나 비장했지만... 아주 현대적이거나 세련된 느낌은 없었다.

슬픈 역사를 세련된 영상미로 표현한 영화 지슬은 아마 오멸 감독의 재주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또 오멸 감독에 대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가 제주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1990년대 초반,
탑동에서 누군가 퍼포먼스 미술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 갔었다.

탑동 광장에서 아마 사정 모르는 어른들이 보면 '자빠져서 허우적대는' 전위행위 미술을 했던 이가 오멸 이었다. 오멸 감독이 대학 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파격이었다.

오멸 감독의 파격은 이어졌다. 감독님은 잘 모르겠지만... 나름 감독의 팬이었던 나는 십여 년간 그의 작품들을 쭉 아이들과 함께 관람해왔다.
아름다운 샌드 애니메이션, 재미있는 인형극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팬터마임 강습회 등.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은 간접화법의 아름다움이었다.
내 느낌에 오멸 감독은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많은 내용들을 상징적으로 함축해서 간결한 결과물로 완성하는 편이다. 두 세 줄의 짧은 시지만 강한 여운이 남는 시 같은.

그 오래고 치열한 작업들의 결과물로 나온 영화 지슬을 보며.. 나의 개인 단상은 계속 된다.

1980년대 마당극이나 영화 지슬에서나 모두 '유머'가 나온다.
나는 그 유머가 '신명'이라 생각하고 그 신명은 희망이 전제 되었을 때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그때나 영화의 배경이 된 1940~50년대나  모두 우리 역사에서는 힘든 시기였다.
힘들고 어려워서 하하호호 웃기는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이 순간은 반드시 지나가고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당연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당연했던 확신이 요즘은 자꾸만 확신의 끈을 잡고 바둥대는 사회가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면 된다’는 신념 교육이 때론 억압으로 다가오고 지금보다 앞날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질문에 쉽게 예라고 대답하기 힘든 시절이다.
희망에 대한 확신이 아니고 희망을 찾아 고민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러니 난 영화 지슬이 희망에 대한 감자 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늙은 어멍의 지슬이 희망의 감자 씨가 되어 여기저기서 주렁주렁 열매 열렸으면 좋겠다.

▲ 바람섬(홍경희). ⓒ제주의소리

그래서 영화 지슬은 내게 뭘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거다.

‘지슬은 지슬이다’ /바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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