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추억의 힘

추억의 힘을 믿는다.
살다보면 알게 된다. 현재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추억이라는 것을.
그리고 또 알게 된다. 추억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살아나며 현재는 다시 미래의 추억이 되니 추억의 시제 구분은 갈수록 무의미 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으면 누구나 아는 정답이 나온다.
'현재의 삶에 충실 하라.', '지금 행복 하라.'

보름정도 됐을까. 오랜만에 추억 여행을 떠났다.
지난달 22일 제주시 원도심 일대를 돌아 다녔다. 문화기획 판이 주최한 이 멋진 행사는 제목마저 근사했다. '제주시 원도심 옛길 탐방- 기억의 현장에서 도시의 미래를 보다.'
타고난 성실성 때문에 어떤 행사를 가든 앞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메모하고 듣는 것이 내 삶의 관례였으나, 이번은 넘어가기로 한다.
추억 여행 아닌가.. 이번에는 좀 편하게 가자.

사실 올레길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제주를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올레 코스에 대한 문의를 자주 받는다. 불타오르는 사명감으로 모든 코스를 다 기억하고 잘 안내를 해야 하나.. 잘 안 된다. 올레길 몇 번 코스 그런 것보다 중문 주상절리길. 시흥리에서 시작하는 길이 더 편하다. 제주가 낯선 방문객들에게는 올레길이겠지만 나같은 제주 원주민에게는 걸어보고 싶은 많은 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원도심 옛길 탐방은 다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추억이 깃들어져 있는 곳이고 지금도 날마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 아닌가.

탐방은 칠성통 상가에서 시작됐다.
야간 자율학습 땡땡이치는 학생처럼 나는 사람들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며 느긋하게 걷는다. 걷다보니 다 추억의 한 장면이다.
한때 멋쟁이, 청소년, 아가씨들의 선호 브랜드였던 톰보이의 상호가 바뀌었다.
하지만 지붕이 생기고 차 없는 거리가 된 거리 양쪽으로 지금도 많은 옷집들 자리 잡고 있다.
칠성통을 거의 빠져나갈 즈음에 문이 닫힌 대산상회가 나온다.
같이 길을 걷던 나기철 시인이 한마디 한다.
"허, 작년까지만 해도 문을 열었었는데.. 가보면 난 참 오래된 문구들이 좋더라."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저기 대산상회 딸이 나랑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데... 몇 년 전 소식 들으니 서울에서 무슨 출판사 편집장 한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뭘 하나?'

칠성통을 빠져나와 관덕정으로 간다.
광장에 나오니 사람들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반가운 얼굴이 있어 얼른 인사를 한다.
“야, 너 알아지커냐(알아차리겠니)?”
“무사 모릅니까, 언니 친구 아니우꽈(왜 모르겠습니까, 언니 친구지 않습니까?)”

이 행사를 후원하는 비아아트의 박은희 관장. 하지만 내겐 그냥 중학교 동창의 여동생이다. 관장님이지만 야.. 너.. 이렇게 막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너 그냥 옛날 그 집에 살 맨?“
"네."
내 친구가 살던 집은 넓은 거실 통유리 앞으로 잔디가 아름답게 깔린 멋쟁이 집이었다. 우리 중학교 동창 몇몇은 스터디를 핑계로 그 집 2층에서 공부를 하면서, 사실은 놀고먹었다.

난 지금도 중학교 2학년 수학 첫 단원이 인수분해인 것을 기억한다. 날마다 스터디를 시작하며 매번 인수분해를 새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 더디게 진도 나가던 스터디 팀이었다. 스터디는 느렸지만 상대적으로 사춘기 소녀들의 라이프 스토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난 그날 은희에게 고백했다.
“야... 나 그때 멋진 척 하려고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비율의 커피를 마션. 좀 쓰긴 했지만 티는 안 낸.”
“아이고 언니,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옵써(놀러 오세요). 그 커피 한 번 다시 마셔보게마씸(마셔봐요).”
얘기만 들어도 반갑다.

요즘은 여러 단계를 거쳐 아침마다 원두 드립커피를 마신다. 당시 둘 둘 둘 비율보다 두 배는 더 쓰고 설탕이나 프림도 없는 커피지만 정말로 '아, 맛있다.. 역시 원두가 좋아'라고 하며 마신다.
추억이 담긴 그 둘 둘 둘 인스턴트 커피 맛은 정말 기대된다. 한 번 찾아가야겠다.

▲ 무근성 골목을 걷고 있는 탐방 참가자들. ⓒ홍경희

관덕정을 지나 탐방 안내자인 김석윤 건축가가 발굴했다는 ‘무근성 골목길’ 순례가 시작됐다. 아, 놀라워라.

읽어보진 못했지만 제목만은 너무나 친숙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오밀조밀 보인다. 차를 타고 휙휙 지날 때는 운전하기 불편한 길이라 간혹 짜증도 내며.. 지나갔던 그 길들이 걸어보니 참 좋았다.

눈에 보이는 길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거짓말처럼 기막히게 아름다운 돌담이 있었고 아무렇게나 막 찍어도 작품이 되는 아름다운 선의 골목길이 있었다.
좁아서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엔 본디 길의 주인인 바람 햇살 이야기들이 공중을 떠돌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옛 제주대학 병원 옆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다 만난 초가집. 들어가지는 못하고 대문 틈새로 살짝 안을 엿보았다. 아 .. 거기 마법의 옛 정원이 있었다. ⓒ홍경희

 

▲ 대문에 늘어진 청포도 넝쿨. 습관처럼 한 알 따서 쏘옥 입에 놓고 싶었으나 보는 주변 사람들이 많이 교양인(^ ^)답게 참았다. ⓒ홍경희

▲ 선이 아름다운 무근성 골목길. 분명 지금도 내가 자주 지나가는 곳에 있는데 한 번도 눈여겨보지 못했다. ⓒ홍경희

 

▲ 유리 조각이 박힌 담... 내가 어린 시절엔 저런 담을 가진 집이 많았다. 유리조각이 뾰족 할 수록 방범 효과가 컸을까? ⓒ홍경희

유리 조각을 박아 나름 밤손님을 경계한 돌담, 소변금지라고 쓰인 벽, 안거리 밖거리 집을 넉넉하게 지켜보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그 내부와 외부를 살짝 가려놓은 담. 안을 쉽게 들여다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또 길을 따라가다 보니 대문 위로부터 늘어진 청포도 덩굴이 초여름 햇살에 방실거리고 있었고 틈새로 슬쩍 훔쳐본 초가 마당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마법의 옛정원이 있었다.

칠성통에서 관덕정 남문통 동문시장으로 이어진 탐방에서 참가자들은 당연히 몇가지 공적인 논의를 하기도 했다. 가장 공분을 샀던 것은 너무 쉽게 옛 제주시 청사가 무너져 버린 것. 별다른 공론화 과정 없이 올해 초 사라진 옛 제주시 청사를 돌아보며 탄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또 전형적인 일본 건축양식이 잘 살아 있는 집이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아 폐가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누군가 저 집을 사서 잘 지켜야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나는 옆에서 듣기만 했지만 너무 자주 “아 저렇게 변하면 안 되는데...”라는 소리가 나오니 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제주YMCA 유치원 마당에 있는 그네. 토요일이라 애들이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틈을 타 슬쩍 엉덩이를 걸쳐 보았다가 얼른 일어섰다.... 왜 .. 사이즈가 안 맞아서. ⓒ홍경희

 

▲ 옛 현대극장 옆면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 너무나 선명한 희망이 눈에 띄어 찰칵. ⓒ홍경희

우리의 추억을 위한 보존을 거주인 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 아닌가.
원형 유지를 위한 불편한 요소를 함께 바라보아야 되는 것 아닌가.
낡은 건물을 밀어내고 새 건물, 새 길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쯤에서 정말 한 번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왜 사람들이 추억의 옛길에서기쁨을 찾는지를?
어쩌면 번듯한 새 길을 만들어 얻고자 했던 것들이 이미 추억의 옛길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 이제야 말로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와버렸다.
더 미루지 말고 찾아야겠다.

 

▲ 바람섬(홍경희). ⓒ제주의소리

주말, 걸어서 동네 한 바퀴 어떠한가?
가가 상회, 나나 치킨, 다다 분식
생각 보다 많은 가게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 거리를 거닐며 과거와 미래를 잇는 추억을 만들어 보자.
그 추억은 당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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