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3) 제28주년 3·1기념제주대회장, 안세훈

▲ 고 안세훈 묘소

- 항일운동에 앞장선 안세훈 

안세훈(安世勳, 일명 安堯儉, 1893~1953)은 조천리 2931번지에서 안태환(安台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를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다음, 전라도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로 가서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 1861~1936)에게 수학하였다. 조천 태생으로 제주최고의 한학자 안달삼(安達三)의 아들 안병택에게 글공부를 하러 찾아갔으니 이들은 근친사이였다.

안병택은 조천읍 선흘리 출신으로 행장과 시문·비문·편지글 등이 『부해만고(浮海漫稿)』, 또는 『부해유고(浮海遺稿)』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 필사되었다. 2002년 2월에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에서『부해문집(浮海文集)』을 간행하였다.

안세훈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1914년 조천에 신명사숙(新明私塾)이 개설되자 김순탁(金淳鐸)과 함께 사장(師丈)으로 활동하였다. 신명사숙은 ‘반일본(反日本) · 반외세(反外勢) ·반봉건(反封建)’이란 교육으로 일관되어, 조국독립과 민족해방 운동에 기여한 바가 컸다. 1919년 조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발생하자 그는 이에 자극되어 민족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다. 

조천독립만세운동으로 조천출신 김시범 · 김시은은 징역 1년, 황진식 김장환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김년배 ·박두규는 징역 8월, 김용찬 ·고재륜· 김형배· 김경희· 백응선은 징역 6월을 받고 복역하였다. 그렇지만 김순탁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안세훈은 1923년 11월 8일에 청년운동단체인 조천노동단을 김채호·김형배· 김인호 등과 함께 발기하여 출범시켰다. 조천 노동단 강령을 보면 ‘자래의 인습적인 유의도식(遊衣徒食)의 악습을 근본적으로 타파하는 동시에 공언보다도 실행적으로 압압히 마튼 일을 근기(根氣)있게 기운차게 실행의 길을 밝힐 일’이라고 되어있다.  

1926년 6월 안세훈은 만주국 간도로 가서 민족운동 기관인 「간도간민교육연구회」(間島墾民敎育硏究會) 상무서기로 취임하여 동포들의 계몽에 주력하였다. 1930년 다시 귀향하여 농사에 종사하던 중, 1935년경부터 김시용· 김유환 등과 더불어 신좌소비조합운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사상범으로 6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애국동지 김순탁(金淳鐸, 1895~1938)이 타계하자 그의 생전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어  <源泉 金順鐸之基> 비문을 쓰고, 친구들과 문하생들이 비석을 세웠다. 일경(日警)은 이 비문내용을 문제 삼아 신좌소비조합운동에 족쇄를 내렸다. 

안세훈을 비롯, 김시용· 김유환· 현사선· 김평원 등이 반전사상을 고취하였다는 이유로 1942년 검거되었다.  이로 인해 징역2년을 선고 받았고,  광주지방법원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1919년 제주도 조선독립만세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자극을 받고 점차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진술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한 제주출신들 대부분은 조천만세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민족해방 운동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인물 역시 그렇다. 안세훈의 <源泉 金順鐸之基>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君은 金海 金淳鐸이요. 源泉은 그 號니 進仕 禹鐘公 次子라. 三歲에 그 父를 잃고 그 母와 그 兄 淳容씨의 撫育을 받다. 어려서 漢文을 배울 際 勤讀과 誦才로 聞人터니 자라서 그 造詣가 깊고 濟州農高 卒業後 京城에 遊學하다. 君은 强而柔하고 柔而强한 人格을 所有하니 社交와 私事에 圓滿하고 正義와 公事에 强勇하고 家政에 孝友하고 社會에 充實한 것이 그를 證한다. 回顧컨대, 當時는 封建的 舊文化 懷疑와 時代的 新文化 建設運動이다. 君은 奮然히 歷史的 發展 使命을 다하여 或은 小學校에서 鞭을 들어 敎育者로서 活動을 하고 或은 街頭에 出戰하여 新文化 建設者로서 奮鬪하니 그 길고긴 道程은 崎嶇한 險難의 極이였으나 單只 한길로 破壞와 建設을 위한 犧牲的 歷史는 無限한 溫去에서 永久한 將來에 傳한 遺産이다. 嗚呼 君은 罹病 數日 藥石이 無效하여 大志와 不平을 품은 체 1938年 3月 12日로서 그 生을 맞으니 感恩路丁에 葬하다. 君은 年僅 44요, 貴 5男3女이니 性穆, 台穆, 世穆, 鴻穆, 宅 穆, 東烈, 東玉, 東日이다. 友人과 門人이 그 崎구한 그 일생을 追慕키 爲하여 短碣을 세울 際 余의게 그 行狀을 要하니 素志대로 쓰지 못하고 오직 君은 時代的 犧牲者요, 君의 不幸은 社會의 不幸임을 病歎할 뿐이다. 嗚呼痛哉 1938年 10月 일 友人 安堯儉 誌 友人 門人 共立‘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의 주역

‘오랫동안 준비중이었던 제주도(濟州島)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대회는 지난 23일 상오 11시부터 도내 읍면 대의원, 각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 방청객 200여명의 참석으로 초만원인 가운데 이일선(李一鮮)씨 사회로 개막되어 묵념이 있은 다음 만뢰같은 박수리에 안세훈(安世勳)씨 등단하여 “세계민주주의 체계에 입각한 모스크바 삼상의 결정은 민주과업을 진정하게 실천하게 되는 고(故)로 삼천만 동포의 한사람까지라도 민전 산하에서 최후까지 삼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된다”는 개회사가 있어서 민전의 지향을 명시한 바 있었고,

임시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의장단에 김시탁(金時鐸)씨, 김용해(金容海)씨, 고창무(高菖武)씨 3씨와 의사진행계(議事進行係)에 김정노(金正魯)씨를 선출하였는데, 개회벽두에 긴급동의로 명예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金元鳳), 유영준(劉英俊) 6씨를 추대하고 김정노씨의 경과보고가 끝나자 긴급동의로 광주시 남로당 결성대회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낼 것, 박헌영씨 체포령 취소와 아울러 인민항쟁으로 말미암아 투옥된 열사를 즉시 무죄석방하라는 항의문을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가결한 다음 김용해씨로부터의 국내외 정세보고에 뒤이어

“우리 제주도에는 악질경관이 적은 만큼 인민의 대중적인 분노와 증오심을 발휘할 조건이 많지 아니하였던 것은 다행이나 최근 악질 모리배의 도량과 이에 야합한 탐관오리로 인하여 인민의 분노와 증오심이 확대되면서 있고 또한 중앙에서는 기독교의 원로 김창준(金昌俊)씨가 최근 민전에 참가하였다”는 구체적 설명이 있었다.(중략)’ -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기사

 ‘10월 6일 상오 10시 제주지방심리원 법정에서 포고령 2호, 법령 19호 위반으로 기소된 전 도민전(島民戰)의장 안세훈(安世勳)씨에 대한 판결언도가 이재만(李才萬) 검찰관대리 입회하에 최(崔)심판관으로부터 검찰관의 1년 구형에 대하여 “피고는 본고나이 일찍부터 지도하여 온 자이고 그 마음과 정신이 결백하다는 점이나 그 인격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본 사건도 피고의 본의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도를 하게 된 것이다”라 하며 집행유예 5년, 5000원 벌금 판결언도가 있었다,’ -제주신보 1947년 10월 6일 기사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협상 대상자로 한국의 민족지도자 여운형(呂運亨)을 찾았다.  이에 따라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위원장에 여운형이 취임하였다.

1945년 12월 ‘선구회’라는 우익단체에서 여론조사를 했다. 당시 조선의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의 응답이 나왔다. 해방 직후 여운형은 국민적 지지를 얻고 었었다.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도 9월 10일 결성되었다. 일제하에서 항일운동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9월 22일 제주도인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병행 운영되었다.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대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읍내 학교에서 도사(島司)선거를 실시, 처음 조천 출신 안세훈을 선출하였다. 이 자리에 불참했던 안세훈은 뒤늦게 연락받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미군정은 일제에 의해 시작된 도사제도를 활용, 도사대리에 일제관리였던 김문희(金文熙)를 임명하였다.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는 처음에는 극한적인 대립보다는 미군정과 일정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정부기관임을 표명했지만 미군정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치안활동에 주력하였다.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드디어 12월 9일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항일운동가 중심으로 결성되고, 위원장에 안세훈이 취임하였다.

1946년 12월 중앙의 정치변화에 따라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위원장은 안세훈이 맡았다. 그 외 참여한 인사들로는 김유환 ·김은환· 문도배 ·조몽구 ·오대진· 김한정· 이신호· 김용해· 김택수· 문재진· 부병훈· 송태삼 ·이도백 등을 꼽을 수 있다.

1947년 1월 25일 눈보라치는 엄동설한(嚴冬雪寒), 조천면 민주청년대회가 조천국민학교에서 대의원 100명, 기타 방청자 300여명의 참석한 가운데 그 막을 올렸다. 김원근(金元根), 김평원, 김대진(金大珍), 김완배(金完培), 김의봉(金義鳳)등  5명의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 조천 출신 안세훈이 참석, 격려축사를 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사상범으로  징역을 산 경험을 살려 해방정국에서 제주도의 주요인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좌파정당이나 단체에 가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제재하지 않고 있었다.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대회는 1947년 2월 23일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열렸다. 조일구락부는 현재 제주YMCA 부근 옛 현대극장 자리이다. 이날 결성대회에서 안세훈· 이일선· 현경호 등 3명이 의장단에 추대됐다. 안세훈의 개회사와 김정노의 경과보고, 김용해의 국내외 정세보고, 고창무의 민생문제 보고, 조몽구의 친일파 동향보고 등으로 이어졌다.

안세훈은 개회사에서 “세계민주주의 체계에 입각한 모스크바 삼상의 결정은 민주과업을 진정하게 실천하게 되는 고로 삼천만 동포의 한사람까지라도 민전 산하에서 최후까지 삼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조몽구는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면서 “악질 중의 악질은 과거 일제에 아부하던 자로서 또다시 권세를 부려 보려고 인민위원회에 가감했다가 탄압이 심함을 보고 슬그머니 빠져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또 안세훈은 당면한 3·1절 기념행사를 평화리에 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박경훈 도지사가 이 대회에 참석, 격려축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또 경찰고문관 패트릿지와 강인수(姜仁秀) 제주감찰청장도 참석,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개회벽두에 긴급동의로 명예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 유영준을 추대하기도 하였다. 

- 1947년 3·1 기념 제주도대회의 주역

▲ 제주북초등학교.

‘28주년을 맞이하는 3월 1일이 혁명운동기념일을 전도적으로 의의깊게 성대히 거행하기 위하여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7일 오후 2시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인사 다수가 읍내 김두훈(金斗壎)씨 댁에 회집하여 안세훈(安世勳)씨의 사회로 제반 토의가 있은 다음, 3․1기념행사의 모든 문제를 준비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하고 위원장에 안세훈씨, 부위원장에 현경호(玄景昊)씨, 오창흔(吳昶昕)씨 양씨를 추대함과 동시에 총무부, 재정부, 선전동원부 등 부서를 설치하고 위원 28명을 선정하여 5시 반경에 폐회하였다.’ -제주신보 1947년 2월 18일 기사

「제주4·3진상규명및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제2조는 “‘제주4·3사건’이라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7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제주4·3특별법」제정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54년 9월 21일은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된 날이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 경찰은 원래의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보강하고 이 가운데 150명을 제주 읍내에 배치, 시골에서 올라오는 군중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행사장 주변에는 제주읍뿐만 아니라 애월면·조천면 등 주변 주민들이 모여들었으며,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학생들은 이미 이날 오전 9시께 오현중학교에 집결, 한 차례 행사를 치른 다음이었다.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 주인공은 바로 대회장 안세훈이다. 그는 북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민중들을 향해 “3·1 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어 각계의 대표들이 나와 연설을 했는데, 주로 3·1 정신을 계승 자주독립을 전취하자는 내용이었다.  

‘3·1 기념 제주도대회’의 주장은 미군철수, 삼상회의 절대지지, 3.1정신의 계승, 파쇼세력의 타도, 경찰의 학원탄압 반대 등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산하의 경찰은 평화적인 3.1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여 6명을 사망케 하고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미군정은 보다 강력한 탄압을 위하여 목포로부터 100여명의 군정경찰을 증원받아 대대적인 체포와 구금을 한다. 제주도 초대 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과 초대 도지사 박경훈. 두 사람은 3·1사건 직후 교체됐다. 

‘이렇듯 인민들의 반미 기세가 나날이 커짐에 따라 허물어져 가는 파쇼 통치배들은 3·1절 발포사건을 전후하여 각 읍· 면· 리 단위로 작성된 검거자 명단에 기초하여 3월 15일 새벽을 기하여 대검거선풍을 일으켜, 온 섬을 일순에 감옥과 도살장으로 일변케 하고 무고한 근로 인민들을 공포와 전율에 계속 떨게 하면서 온갖 생활수단을 박탈하였다.’ -김봉현· 김민주의 저서『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경찰 당국은 '대규모의 시위대가 경찰관서를 습격하려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은 격으로 제주사회가 격분했다. 당시 「제주신보」는 경찰 성명이 잘못됐음을 조목조목 따지고 나섰다.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은 "나중에 알아본 결과 군중들은 대로 만든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을 뿐 곤봉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꼬리를 내렸다. 박경훈 도지사도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이런 사실은 「독립신보」가 보도하고 있다.

이에 민중세력은 민전과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총파업으로 맞서나갔다. 제주도 총파업투쟁위원회는 3.1절 기념행사에서의 미군정 산하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3월 12일부터 19일까지 8일간 계속하였다.

▲ 관덕정.

그렇다면 3·1기념대회는 불법집회인가? 이 날 집회의 합법성은 3·1 행사 주도자 안세훈에 대한 재판 판결문에서도 입증됐다. 1947년 10월 6일 제주지방심리원(심판관 崔元淳)은 안세훈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3·1 기념식은 당시 제주감찰청장의 허가를 수(受)한 것으로 인정하고 무죄를 언도한다”고 판결했다.

그 후 1948년 1월부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 대한 검거산풍이 일어났다. 소위 ‘1·22 검거사건’이다. 1월 22일 미CIC와 군정경찰은 106명을 검거하고, 1월 26일까지 추기로 115명을 붙잡았다. 검거된 사람가운데 안세훈 위원장을 비롯해 김유환· 김은환 ·김용관· 이좌구· 이덕구· 김양근· 김대진 등이다. 

그 해 2월 28일 미군정 특별감찰실 로렌스 넬슨은 유해진 제주도지사를 상대로 심문한 기록이 남아있다. “극좌 세력은 누구인가?” “안세훈이다.” 심문은 이틀 동안 이루어졌다.

결국 1947년 3·1 발포사건은 제주 현대사의 비극을 증폭시킨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발생 경위도 그렇지만, 그 후 진행된 미군정의 대응방법이 그렇다. '4·3'이란 불행한 사태도 여기서 잉태하고 있었다.

그 후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가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참가한 제주도 인민대표는 안세훈· 김달삼(金達三)·강규찬(姜圭讚)· 이정숙(李貞叔)·, 고진희(高珍姬)· 문등용 등 6명이다. 이 가운데 ‘문등용’은 생소한 이름으로 가명이라는 추측이 있다. 1947년 민전 제주도 의정 자격으로 3·1절 기념대회를 주도한 안세훈은 이미 제주도를 탈출한 뒤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안세훈은 남하하여,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던 전라남도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에 있는 안병택의 손자의 집에서 2년 가까이 지하 생활을 하다 1953년 4월 15일 병사하였다.

김봉현· 김민주의 공동 저서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에는 “3·1절 항쟁을 기회로 하여 불과 1개월 간에 2,000여 명의 진보적 근로자들을 군정법령위반이란 죄명 하에 놈들이 고안해 낸 소위 을 적용하여서는 무궤도한 군정 재판을 벌이었다.”고 씌여 있으며, 안세훈은 인민유격대 도당부 책임에 이름이 올라있다.

그런데 1999년 12월6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4·3특별법안을 심의하면서, 4·3의 기점 문제로 여야 사이에 실랑이를 벌였다. 4·3 ‘정의’에 해당하는 제주4·3의 기점을 국민회의 안에는 '1947년 3월1일'로, 한나라당 안에는 '1948년 4월3일'로 제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진통 끝에 ‘1947년 3월 1일’ 안을 수용하였다.  만일 사건의 시점을 1948년 4월3일로 설정했을 때,  '공산폭동'으로 변질될 우려가 충분히 있었다.   

▲ 김관후 소설가. ⓒ제주의소리
‘전체 도민들이 결행한 3·1절대회, 시위투쟁, 총파업투쟁으로 파생된 일련의 억세고 줄기찬 인민항쟁은 그들의 무력에 비록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통치자들의 학정에서 조성된 섬의 현실은 더욱 인민들을 분개시켰으며, 나아가서는 애국적인 도민들로 하여금 생존의 권리와 통일독립을 전취하기 우한 반미구국투쟁의 불꽃을 한결 불러 태우는 모멘트로도 되었다.’

- 김봉현·김민주의 저서『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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