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6) 아들 차령을 잃고 슬픔으로 여생 보낸 한학자, 김경종

# 제주4·3, 너무도 불가사의하다   

 

▲ 1949년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돌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당시 극동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 소령이 찍은 사진이다.

‘제주4·3사건’이라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제2조(2000.1.12)

"아, 너무도 불가사의하다. 믿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전대미문이고 미증유의 대참사이다. 인간이 인간을, 동족이 동족을 그렇게 무참히 파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다. 짐승도 그런 떼죽음은 없다."-소설가 현기영의 「쇠와 살」에서
 
제주4·3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 모르면서 죽어갔다. 미국을 모르고, 미국의 세계전략도 모르고, 섬 주민들에게 몰살을 가져온 제주4·3은 도무지 이해불능이다. 그들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붉은 섬’ 혹은 ‘Red Island'라고 명명했는데, 그 붉은 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대량학살을 그들은 'Red Hunt'라고 불렀다. 

제주섬에 불어닥친 비극을 맨 먼저 드러낸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제주도민에 드리운 상처가 얼마나 큰 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고발한다.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나오고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기 전, 이미 문학은 제주4·3의 진실을 분명한 언어로 담아왔다. 

작가는 정권에 의한 ‘관제 기억’에 대항하는 ‘민중의 기억’을 역사화하는 책무가 있다. 제주4·3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 했던 공권력의 공식 기억은 제주4·3을 봉기한 사람과, 당시 죽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이게 얼마나 왜곡되었는가? 4·3문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죽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언어를 발견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민중의 기억은 대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정권이 이 기억을 말살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민중의 기억을 되살려서 정권의 불합리한 공식 기억을 물리쳐야 한다. ‘관제 기억’에 대항한 ‘기억투쟁’을 촉구해야 한다. 그것이 4·3문학의 몫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전선에서, 제주공동체의 몫을 수행하였는가? 제주작가들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제주4·3기간 동안에, 식자층이라 불리는 유학자들에 의해 한문으로 쓰여진 문자(文字)들로, 대표적인 유학자 김경종의 『白首餘音』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찰은 산으로 도피하는 자들을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해 한 장소에 모아놓고 눈을 감도록 한 뒤 매수한 사내에게 지목하게 하고 모두 죽여버립니다.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김경종이 이승만에게 4·3의 실상을 알리고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하는 서한문 중 일부이다. 그 외 시작품으로 강희경(姜熙慶)의 「嘆流水火亡」와  정경룡(鄭慶龍)의 「偶吟」, 오성남(吳成南)의 「疏開令」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이다. 

4·3문학의 흐름을 점검할 때, 문학평론가 김동윤은 그 기점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된 1978년으로 잡는다. 1978년 이전 제주4·3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별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허윤석의 단편 「해녀」(1950), 오영수의 「후일담」(1960), 곽학송의 「집행인」(1969), 박화성의 「휴화산」(1973) 등이 제주4·3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대부분 피상적 접근에 머무르고 있다.

# 석우 김경종의  4·3문학 

▲ 김경종 시인.

‘제주4·3 당시 제주의 유학자 석우 김경종(1888-1962)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4·3의 실상을 알리고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하는 서한과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 수감자들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학살 책임을 통렬히 꾸짖는 글이 발견됐다. 북제주문화원이 최근 펴낸 석우 선생의 <백수여음>이라는 문집에는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행패와 이승만의 책임을 서릿발처럼 비판하는 글이 포함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

이 문집에는 시 380수와 문장 28편이 수록됐으며, 그가 생전에 직접 육필로 쓴 글들이다. 석우는 당대 제주의 유림인 심재 김석익, 행은 김균배 등과 교유하며 제주시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 짓기를 즐겨 문인단체인 ‘영주음사’에 참여하기도 한 한학자다. 4·3사건 당시 장남을 잃은 그는 1949년 이승만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군·경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긴다”며 군·경의 진압실태를 폭로했다.’ -한겨레신문 2007년 4월 3일 기사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1888~1962)은 고종25년 제주시 노형동에서 태어나, 1958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사장을 지내며 사문(斯文)이 쇠퇴해진 가운데 유림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2005년쯤일까? 문우들과 대화 중에, 시인 김학선과 김성수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신들 할아버지 김경종의 한문 유고집 『白首餘音』을 서울에 있는 김학무 형님이 보관하고 있는데 문화원에서 변역·출간하면 어떠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제안을 하고, 북제주문화원이 제주출신 선인들의 고서를 번역하여 출판 중이라, 일단 유고집을 보고 평가를 내리고 싶었다. 그들의 형제들 중 김학렬은 오현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서 오랫동안 봉직했던 내가 눈여겨보았던 후배이기도 하다. 

한문 유고집이 도착하고, 처음 젊은 한문번역가 백규상(白圭尙)에게 백수여음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였다. 백규상은 소농(小農) 오문복(吳文福)의 수제자로 이미 탁월한 번역 실력이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白首餘音』’ 번역본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白首餘音』 저자 석우 김경종은 누구인가? 구한말의 거유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의 문하생으로 암울했던 일제하에서는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은일(隱逸)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를 펼친 우리고장의 정통유학자이다. 

그리고 그의 스승 간재 전우(1841~1922)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13세 때까지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두루 읽다가, 21세 때 충청도 아산(牙山)에서 유학사상을 익히며, 중국 송나라의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의 학문, 그리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문을 면밀히 탐구한 분이다. 송시열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보낸 오현(五賢)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간재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국권침탈을 목도하고서, 해도(海島)로 들어가 후학을 양성하고자하는 결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1913년 73세 때에는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계화도로 옮겨,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면서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특히 당대 제주의 유림인 심재 김석익, 행은 김균배 등과 교유하며 제주시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 짓기를 즐겼다.

# ‘이승만에게’와 ‘이승만 성토문’

 

▲ 1949년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돌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당시 극동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 소령이 찍은 사진이다.

‘제주 유생 김경종은 이승만 각하께 편지를 올립니다.....(중략)...... 본도의 백성들은 모두 다가 폭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선량하지 못한 자제들이 부형의 훈계를 듣지 않고 서로 불러 응하여 모임을 만들고 무리를 이루어 산적들과 연락하고 촌락을 위협하여 곡식과 돈을 내치길 재촉하며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는 드러내며 동쪽에서 나왔다가 서쪽으로 피하니 평범한 국군의 힘으로는 금하게 할 수가 없고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양민 소개령이 내려져 불사르니 불량한 자들은 산 속으로 도피하고 선량한 자들은 바닷가 마을로 소개되었습니다. 진정 그 세력의 처음에 어찌하였습니까?

경찰들은 산골로 도피한 자들은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하여 한 장소에 모아 세워두고 눈을 감게 명령을 내리고는 한 번 순찰을 합니다. 눈을 감으라고 거듭한 연후에 매수한 사내를 시켜 지목하게 합니다. 매수한 사내의 가리킴이 많으면 얻은 것도 또한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저쪽을 가리키고 이쪽을 가리키고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는 대로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아아!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산골에 도피한 자들을 쫓아가 체포하여 이와 같이 한다면 도민이 모두 기뻐하며 좇을 것입니다. 어찌 그 칠팔십의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 아이들에게 이와 같이 참혹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군인들이 지나간 곳에는 옥석이 함께 불타지만 얼굴에는 혹여 괴이치도 않습니다. 이른바 지방치안의 책무로써 그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합니다. 아아! 경찰들은 저 무슨 마음입니까?

또한 겨를 없이 소개되다 도중에 방황하는 자들이 소개된 자들이 참혹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버리니 이것이 이른바 연못으로 물고기를 몰고 수풀로 참새를 모는 것입니다. 온 산의 바람과 눈에 얼어 죽고 굶어 죽다 남은 목숨들과 먼저 도피한 자들이 함께 섞여 귀순하여 옴에 죄가 없는 자들은 새로 만든 부락으로 보내고 죄가 있는 자들은 형무소로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죽은 자들은 선량한 백성들의 늙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죽지 않은 자들은 불량한 젊은이들입니다. 죽어 마땅한데 죽지 않고, 죽지 말아야 하는데 죽는 것, 이것은 신령과 사람이 원통해 하고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내로 소개된 자들의 말로는, 서북청년단의 불학무식한 자들로 특수부대를 만들어 종일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가두게 합니다. 한 명의 이름을 불러 고문하고 좌우로 붙잡아 두들겨 기절에 이르면 묻기를, “너는 산폭도에 가담했느냐? 너는 남로당에 가입했느냐? 너는 돈과 곡식을 많이 내쳤느냐?” 기절한 사람이 답할 수 없고 다만 고개를 흔들고 턱을 움직이면 말하길, “저놈이 모두 자수하고 승낙하였다.”며 청취서를 작성하여 이를 보냅니다.

사찰단과 경찰국서장, 부설 군재판 또한 청취서에 의거하여 재판을 함에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오 년을 선고합니다.........(중략).........당시의 경찰들을 먼저 쫓아내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용납하지 못하게 하시어 무죄한데 참혹하게 죽은 혼령들을 널리 불러내어 죽은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다음은 감옥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풀려나야 하는데 풀어주지 않음은 밝지 못한 것입니다. 풀려주지 말아야 하는데 풀어주는 것 또한 밝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케 조사한 연후에 죄상을 드러내어 사람을 죽이고 방화하고 돈과 곡식을 훔치고 빼앗음을 범한 자들은 종신의 금고로써 뒷사람들의 본보기로 보이시고 시내에 소개되어 체포된 자들은 바로 먼저 풀어 주십시오. 그 나머지 사소한 죄로 갇혀 타인에 해되지 않는 자들 또한 모두 풀어 주십시오. 신령과 사람들의 노여움을 풀어 주시고 한 마음으로 힘을 모은다면 삼팔선의 장벽을 앉아서도 허물어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신령과 백성들을 노하게 하고서 국가의 일을 이룬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본생의 구구한 이 말은 평범한 한 사내로서의 사사로운 견해가 아니라 곧 대중의 원하는 바입니다. 또한 국가가 꾀하는 정책에 두려운 것이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개가 두려워하며 재배합니다.’-김경종의 ‘이승만에게’(與李承晩書  己丑) 

‘(전략)승만이라는 위인은 오히려 항적의 종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포학무도함은 항적과 더불어 나란하다. 하늘의 도는 지극히 공정하여 항적의 죄는 스스로 목을 벰에 이르렀다. 승만의 죄는 천 번 참수하고 만 번 도륙을 내어도 오히려 남은 죄가 있다. 감히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예와 같이 이 백성의 위에 거한다. 대개 일찍이 논한 요즘의 국가의 난적은 곧 공산당의 살인방화자이다. 만약 그 공산당의 무리라면 죽임이 가하고 멸함이 가할 것이다. 지금 이른바 죄수라는 자들 모두가 다 그러한 무리는 아니다.

혹은 유인에 빠지고 혹은 모략에 빠지고 혹은 혐의에 빠지고 혹은 재액에 빠진 자들이다. 경찰들은 산중의 폭도를 보면 머뭇거리며 피하며 체포도 할 수 없으면서 다만 민간의 혐의자들만을 체포하여 죄목을 끌어 만든다. 또한 선량한 백성 중 재액에 빠진 자들을 모아서 돈과 곡식을 빼앗긴 것으로 죄목을 끌어 만든다.

가령 죄수 중에는 진범으로 죽일 수 있는 자는 열에 혹 한둘이고, 혐의를 끌어 만들 수 있는 자는 열에 대여섯이고, 양민 중에 재액을 당한 자는 열에 팔구이다. 대략 이와 같은데 남한의 수십의 형무소는 차고 넘치어 수십만에 이르고 있다. 북군의 입성에 미치어 “부화뇌동할 염려가 있다.”고 말하고는 급히 학살령을 내리었으니 (죄의) 경중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심하게 모두다 죽여 버렸다.

승만의 포학무도가 이에 여기에 이르렀다. 저(승만이)가 말했듯이 부화뇌동의 염려가 있었다면 미리 먼저 각각 돌아갈 곳으로 석방을 하여 그 아비와 아들, 형제들이 기뻐하고 서로 경사로 여겨 나라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윗사람에게 복종하였을 것이다. 혹 한둘의 부화뇌동하는 자가 있어 적군과 더불어 한 몸이 되었다면 쫒아내고 죽이고 멸함이 모두 가할 것이다. 어찌하여 스스로 그 백성을 죽여 시체가 산과 같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르게 하였는가?

옛사람의 이른바 ‘위로 천왕께 고하고 아래로 방백에 고함’에 또한 전할 곳이 없다면 국제연합안보이사회에 고하여 그 죄를 크게 성토하여 서녘 하늘의 약수의 밖으로 보내어 동방예의지국에 함께 설 수 없게 함이 가할 것이다. 국내의 모든 군자들이 나란히 성토에 호응하여 잔학함을 통렬히 벌주고 민족을 보호한다면 천만 다행일 것이다.’ - 김경종의 ‘이승만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

김경종의 ‘白首餘音’은 2권으로 시(詩)와 문(文)을 각 권에 따로 모아 연대별로 기록되었다.  그의 문집에는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행패와 이승만의 책임을 서릿발처럼 비판하는 글이 포함돼 눈길을 모았다. 이 문집에는 시 380수와 문장 28편이 수록됐으며, 그가 생전에 직접 육필로 쓴 글들이다.

『白首餘音』 중 서한문은 1949년에 이승만대통령에게 당시 4·3의 진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낸 장문의 편지글 「與李承晩書」(이승만에게)라는 글이다. 그리고  「李承萬 聲討文」(이승만 성토문)은 6 · 25 발발직후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4 ․ 3 연루자들의 무고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의 만행과 죄상을 폭로한 글이며, 이에 따른  시(詩)는 형무소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비통한 심정을  읊었다. 

김경종은 제주4·3으로 아들 창진이 뜻밖의 환난을 당해 붙들려 갔다. 그래서 『白首餘音』에서 적병이 들이닥쳐 생사를 알지 못했으며, 한 번 가서 탐문해 보았지만 이미 죽은 뒤였고 촉석루를 찾아보니 또한 재가 되어버렸다고 그 심정을 고백하고 있다.

김경종의 아들 김창진(金昌珍)의 경우 김천형무소에서 한국전쟁으로 사망하여, 남은 가족들은 제주4·3희생자 신고를 마친 상태이다. 특히 『白首餘音』에는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시 제주4·3의 진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낸 장문의 편지글 「與李承晩書 己丑(1949)」(여이승만서 기축)과 나중에 쓴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1950)」(이승만성토문 경인)은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4·3 연루자들의 무고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의 만행과 죄상을 폭로한 글이다. 그리고 그 책에 수록된 시 중 다음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本道四三之變家兒昌玲以橫厄拘在晉州適遭敵兵入城生死不知一往探問事已逝矣又見矗石樓亦灰矣遂取其原韻以叙悲懷」(본도의 4·3사건에 아들 창령이 뜻밖의 환난을 당해 진주에 붙들려 갔는데 때마침 적병이 들이닥쳐 생사를 알지 못했다. 한 번 가서 탐문해 보았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다시 촉석루를 찾아보니 또한 재가 되어버렸다. 드디어 그 원운을 취하여 비참한 감회를 적어본다.)라는 긴 제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주목하게 한다.

“山河万變水東流(산천 만 번 변하여도 물 동으로 흐르나니)/ 白首呼兒泣古洲(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節義當年忠死地(절의는 이 해 맞아 충성스레 죽어가고)/ 兵戈此日?灰樓(전쟁이 겁나고나 이날 누대 재 되었네)/  神明倘識焦心恨(신명이 행여 타는 한스러운 맘을 알까)/ 世亂空添觸目愁(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骨肉不知烏有在(아들이 어딨는지 아아 아지 못 하겠네)/ 惟魂遙向故園遊(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제주4·3희생자와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의 책임을 물기도 하였다.

“옛날 항적(항우)은 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여 명을 살해하였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이 나라 안 죄수 수십만여 명을 죽였으니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어떠한가”.

제주4·3으로 인해 일반재판과 군법회의를 거쳐 징역·금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군법회의’로 수감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징역 10년형·5년형 일부는 김천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1950년 부천형무소로 옮겨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 손자들의 활발한 시작활동

 

▲ 김학선 시인.

김경종의 손자 김학선(金學先)과 김성수(金成洙)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훌륭한 시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얼을 이어받아 역사의 아픔을 시어로 표현하는 제주의 우뚝서는 시인으로 성장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김학선의 오랜 친구이자 문학동우인 시인 김용길은 “김학선 시인, 그는 너무 순수하고 어질고 내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는 늘 ‘자괴감으로 점철된 나날을 지내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45여 년 전 김학선과 김용길은 이팔청춘의 청춘나이에 ‘2인 시화전’이라는 문학의 열전을 치렀다. ‘문학동인’ 결성을 위하여 황금 같은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모두 먼 옛날의 일이지만 그것은 문학의 아름다운 과거이며 오늘의 그들을 있게 한 밑거름이기도 하였다.

작가 오성찬도 생전에 “시인 김학선은 말이 없는 사나이다. 그는 외형으로 덩치가 우람하고 등이 다소 굽은 것도 그렇거니와 보통 때는 거의 말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도/ 우리가 나눠 가진/ 눈시울 붉은 소식 알지 못한다// 아직도 때가 아닌데도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마른 잎새 곁에/ 쉰줄 넘은 기다림이 부질었다// 날이 가고 달이 지는 사이/ 너의 발자국 소리/ 아예 지워졌는지/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한줌의 빛이/ 눈물처럼 젖는다’ -김학선의 「紗羅峯 詩篇 14 –멀리 있는 빛」 전문    

‘사람들 집으로 가네// 만산홍엽//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네// 거무죽죽한 속진(俗塵) 탈탈 털어버린 듯// 참 맑은// 한 무더기 웃음소리// 만추를 건너가네’ -김학선의 「풍경」 전문

 

▲ 김성수 시인.

김성수는 1996년 《심상》지 6월호에 「오로 섬 거울나기」외 4편의 시가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시인 한기팔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시력의 중심은 “그가 그의 아내로부터의 갈등에서 빚어진 상처로 결코 견딜 수 없는 삶의 천척으로부터 해방이요 탈출이었을 것이다.”라는 지적은 옳은 말이다. 그는 자기 진실에 대하여 책임있는 언어로써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진눈깨비’를 통하여 아득한 섬에서 한 목숨 날개를 펼치고 있다.
 
‘어둠이 가차없이 포획된다// 내 겹눈에 멀어지는 촉수/ 이흔아홉 번 입김 훅훅 내불어/ 가사 녹여 보지만 아득한 섬/ 꿈을 꾸는 꿈속에서/ 한 목숨 날개를 펼쳤다’ -김성수의 「진눈깨비· 1」 전문 

‘달그락,/ 끝내 피붙이 내려 놓지 못하고 제 귀에 박힌 질기고 질긴 문고리 그 긴 소리 하 애지도록 들창바라기 하고 있을 어머니/ 91살’ -김성수의 「빈 방」 전문
 
# 기타 제주출신 한학자들의 시

 

▲ 김학선 시집 『紗羅峯 詩篇』

강희경(姜熙慶,1874~1959)과 정경룡(鄭慶龍,1883~1964)과 오성남(吳成南,1902~1960 )은 한학자들이다. 강희경은 유수암리 출신의 유림이다. 유수암리 주민들이 1948년 12월 19일 해변 마을로 소개되었는데, 소개되어 내려간 지 5일째 되던 날, 유수암리가 전소되는 광경을 중엄리에서 바라보면서 그 비분함을 달래며 읊은 시이다.

정경룡은 성산읍 고성리 출신으로 약관에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당하고 비분강개하였으며 평생 서당문을 닫지 않고 글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였다. 해방 이후 4 · 3 발발 직전 좌우의 대립이 극한에 치닫던 정국의 분위기를 반영한 시인 듯하다.

오성남은 성산읍 신풍리 태생으로 광복 후 어려운 시기에 면장직을 맡아 민심을 수습하였고는 제주4․3을 당하여서는 면내의 피해를 줄이는 데 힘써 칭송을 받았다. 성산읍 수산2리에 그의 송덕비가 남아있다. 

‘三百餘年先祖鄕(삼백여년 살아온 선조들의 고향마을) 一朝渾入火中亡(하루아침 불속으로 모두다 타들어가네) 暗宵山賊窺强奪(어두운 밤 산적들은 강탈을 엿보았고) 白日團軍如探囊(한낮엔 서북청년과 군인들이 뒤졌었던) 食糧居屋痕全沒(곡식과 살던 집의 흔적조차 사라짐에)     老少生靈心共傷 (늙은이와 아이들 모두 가슴 아파 하나니) 流水節山依旧在(예와 같이 서 있는 유수암의 절산만은) 回蘇他日更生光(훗날에 살아남아 생생한 빛 발하리라)’-강희경의 시 ‘嘆流水火亡’(유수암이 불타는 것을 한탄함)

‘語南語北俱不合(남이 맞다 북이 맞다 이치엔 다 안 맞는 말) 孰是孰非正難分(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운데) 若知制禮先王意(예악을 제정하신 선왕의 뜻을 안다면) 卽能終熄說紛紛(곧바로 어지런 말들 끝낼 수 있으련만)’-정경룡의 시 ‘偶吟’(우연히 읊음)

‘疏開令落近山村(소개령이 인근의 산촌마을에 떨어지니) 驚動閭閻相不言(온 동네 깜짝 놀라 서로 말도 못하는데) 怯海畏山何處去(바닷가도 겁이 나고 산으로도 두려워서) 負携佇立日黃昏 (업고 잡고 우두커니 해는 벌써 저무는데)’- 오성남의 시 ‘疏開令’(소개령)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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