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7) 제주4·3 당시 유격대총사련관 김달삼의 장인, 강문석

# 항일운동의 거두 강문석

▲ 조봉암.

강문석(姜文錫, 1906년 ~1955년)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대정읍 안성리 출신이다. 강문도(姜文道)·황정(荒井)·산하(山下)·김달삼(金達三)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제주심상소학교를 거쳐 경성고보를 졸업하였다. 그의 증조부 강도순(姜道淳)은 추사적거지의 주인이었다. 아버지는 강기용(姜基龍)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5년 4월 모슬포에 한남의숙(漢南義塾)을 설립한 뒤, 모슬포청년회 회원으로 민중계몽운동과 청소년운동을 벌였다. 특히 동지들과 함께 개설한 모슬포의 광선의숙(光鮮義塾)과 가파도의 신유의숙(辛酉義塾)은 항일인사를 배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강문석은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던 ‘요시찰 임물’이었다. 1928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토쿄와 오사카에서 전국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약칭 : 全協)에 가입하여 화학노조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전협은 일본공산당의 외곽단체였다. 그해 10월 오사카[大阪] 히가시나리구[東成區]의 조선인 노동자 300여명과 함께 공장 습격에 가담, 11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1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조봉암(曺奉岩)과 인연을 맺었다. 중국공산당 강소성(江蘇省)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 지도요원 및 한국인 반제동맹(反帝同盟)위원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일본 경찰은 조봉암과 강문석을 체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 일본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발목에 재우던 족쇄.

1932년 박헌영(朴憲永)·조봉암·김형선(金炯善)·김단야(金丹冶) 등과 함께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을 결성하여 선전부장이 되었다. 일본 경찰은 계속 ‘요시찰 인물’들을 노리고 있었다. 조봉암이 때때로 프랑스 공원에서 밀회한다는 정보를 접한 일본 경찰은 그해 9월 28일 아침 프랑스 경찰의 협력을 얻고 조봉암과 서병송(徐丙松)을 체포하였다. 

강문석도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조봉암· 홍남표(洪南杓) 등과 함께 12월 3일 인천항으로 호송된 후 신의주에 있는 평북 경찰부로 압송되었다. 1934년 5월 30일 오사카 공소원[大阪控訴院]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에 박헌영이 결성한 조선공산당 재건 비밀조직 ‘경성콤그룹’(Com-grop)의 멤버가 되기도 하였다. 경성콤그룹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조직이다.

태평양 전쟁을 수행키 위해 1941년 일제는 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한면서 많은 항일투사를 예비검속하였다. 이때 전향을 거부하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이 되고 1945년 8월 16일 석방되었다. 

# 조봉암과 함께 상해한인반제동맹 활동 

 

▲ 신탁통치안 지지 군중대회 모습. 당시 공산당은 평양 정권의 지시에 따라 반탁에서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였다

‘중국공산당 상해 한국인지부에서는 누차 일본 군인에 대한 일본어 적화 선전의 선동적 문서를 발행 살포하고 있었는데, 이들 전단은 주로 박철환(朴鐵丸, 조봉암의 별명, 당지 조선인 공산당 수령)과 김달삼(金達三, 강문석의 별명, 중국공산당 상해 한국인지부 책임자)이 집필한 것으로,  저들은  중국공산당 법남구위(法南區委) 지도하에 동경에서 이봉창(李奉昌) 폭탄 투척사건과 윤봉길(尹奉吉)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 사건의 결과 당시 민족파 조선인 갑부의 활동력은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그 세력확대를 기도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 일본 상해주재 사무관 보고사료’ 중에서 발췌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9~1959)은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 공산대학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였고, 여기에서 함께 활동한 사람이 바로 제주출신 강문석이다.

1931년 2월 조봉암은  혁명동조자들의 대동단결, 혁명 대중의 직접 원조와 혁명운동자와 그 가족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는 ‘중국혁명호제회(中國革命互濟會)’ 상해한인분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革命의 벗』을 발행하였다. 조봉암은 한인분회를 결성한 후 자신의 동생인 조용암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장태준ㆍ정몽주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 박헌영(1946.4. 이 사진은 박헌영의 딸 박비비안나가 소장.)

그 해 12월 3일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40여 명을 소집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 창립대회를 열고 그 책임을 맡았다. 여기에 강문석이 참여한다. 강문석은 중국 공산당 한국인지부 간사(幹事)로 상해 한국인 반제동맹 책임자인 조봉암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상해한인반제동맹은 상해한인청년동맹 등을 병합하여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상해반제연합회에 가맹하여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일제타도의 투쟁에 앞장섰다.

기관지 『赤旗』 를 발행하여 일본ㆍ프랑스 경찰이 안창호 등을 체포한 것을 비난하기도 했고, 상해 노동자들의 파업 지지와 일본의 침략 방어를 위한 비행기 구입자금 모금운동 등을 폈으며, 중국 국민당에 대해 ‘반동적 자본주의 배(輩)’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상해특신) 당지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의 거두 조봉암(曺奉岩)이 체포된 이래 불조계(佛租界) 당국은 각 방면으로 대대적 수색을 하여오던 결과 하비로(霞飛路)와 천문태로(天文台路) 일대에서 공산당원 중요인물 5명을 또 체포하여 일본영사관 경찰당국으로 인도하였다. 5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김승락(金承洛)·염룡섭(廉龍燮)·이무성(李武成)· 강문석(姜文錫)·장동선(張東宣) 이상 5명을 체포하는 동시에 숙소에서 수다한 비밀문서도 발견되었는데 공산군에 관한 것,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부를 설치한 내용, 공산주의 서적 등이 그 중요한 것이라 한다. 또 불조계 당국은 불조계 내에 조선공산당의 본부가 설치하였다하여 일본영사관 측과 일체 협동하여 수색 중이다’-東亞日報 1932년 10월 16일자 기사

‘(신의주) 평북경찰서에서 약 1년간의 활동으로 평북도내는 물론 경성, 인천, 마산 등지와 멀리 중국 상해(上海)에서 체포 압래하여 취조를 끝마치고 그간 신의주 검사국에 송치하였던 조선공산당 재건 재승인(再承認)운동사건의 조선공산당 상해파(上海派) 일파 중의 거두 조봉암(曺奉岩)·홍남표(洪南杓)·염룡주(廉龍周)·서병송(徐丙松)·김승락(金承洛) 등 5명은 그 동안 곡전(谷田) 검사의 취조가 끝나 지난 2일 다시 동법원 예심정에 넘기어 소전창(小田倉) 예심판사의 손에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강문석(姜文錫)은 일찍이 동경과 대판에서 전협계(全協界) 노동조합 운동에 투신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보석 출옥 중에 상해로 건너가 조봉암 일파와 행동을 같이 하여 상해 한인반제동맹(韓人反帝同盟) 들을 조직하여 동당에서 발행한 「팜플렛」과 「삐라」의 대부분을 작성하는 등 동당의 중요한 멤바의 하나로 전기 5명과 함께 송국되었다. 본적:제주도 대정면 안성리 주거:上海 法曺界 巨碩達路 637 강문석(姜文錫 가명 姜文道 金達三 荒井 山下) 28세 1명만은 사건이 일본공산당과 관령이 되는 관계상 대판지방재판소 예심정에 압송했다’ -東亞日報 1933년 3월 5일자 기사

▲ 조봉암.

처음 조봉암이 체포되자 강문석과 당원들은 「조선공산주의자에 대한 일부 관헌의 탄압에 일대 항의를 일으키자」라는 제목으로 전단을 만들어 1932년 10월 2일 홍구(虹口)지대에 살포하려다 적발되었다. 그 전단은 강문석이 집필하고, 박준환(朴俊煥, 조봉암의 동생, 조용암의 개명. 중국혁명 瓦濟會 상해 한국인분회 책임자)이 등사원지에 글을 썼다.

조봉암은 일본경찰로 넘겨지고, 20여 일 동안 수사를 받았다. 조봉암을 검거한 일본 경찰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에 나서 강문석·이종설·염용섭·김승락·장동선·이무성 등을 검거했으며, 한국으로 압송할 때 이들도 함께 하였다.

일제는 트렁크·버들고리 등 10개에 달하는 한인지부가 발행한 ‘불온인쇄물’과 반제동맹강령·규약·선언·정치결의안·기타 각종 선전문·지령·강령 등 277점을 압수했다. 조봉암과 강문석을 포함한 공산주의운동자들은 상해에서 경안환이라는 일본 기선에 태워져 12월 3일 인천항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7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었지만 치안유치법위반 피의자 신분으로 꽁꽁 묶인 상태여서 먼발치로 고향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끼니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 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어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드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서대문형무소와 수인들과 간수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민담 중 ‘봉암새’(혹은 ‘죽산조’)
 
이승만은 1945년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일이 많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일까? 초대 내각 인선 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만일 강문석이 북한으로 탈출을 하지 않고, 공산주의와 결별하였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박헌영과 함께  경성콤그룹(Com-group)  활동

▲ 신탁통치안 지지 군중대회 모습. 당시 공산당은 평양 정권의 지시에 따라 반탁에서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였다

경성콤그룹(Com-group)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위하여 1939년 조직된 공산주의 비밀조직이다. 강문석은 박헌영과는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하였고, 비밀조직 경성콤그룹에도 가담하였다. 경성콤그룹은 노동자·농민·학생의 조직화를 기반으로 결성된 지하비밀조직이다. 일제의 탄압에도 전향하지 않았으며, 광복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주류를 이루었다.

처음 이재유(李載裕) 계열의 이관술(李觀述)·김삼룡(金三龍)·정태식(鄭泰植) 등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구성한 후, 1940년 2월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지도자로 하여 정식으로 결성하였으며, 이현상(李鉉相)도 조직에 가입하였다. 

경성콤그룹은 반전투쟁, 반일민족통일전선전술, 결정적 시기의 무장봉기 전술을 실천해 나갔다. 조직부·인민전선부·노조부·학생부·일본유학생부 등을 두었고, 섬유노조책·금속노조책·전기노조책·출판노조책을 별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940년 11월 말경 태창직물주식회사 공장반 조직에서 시작된 일제의 검거로 지도부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조직의 중견지도자인 이주상(李胄相)·김재병(金在丙)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도하였지만, 1941년 일제의 검거로 다시 와해되었다.

이렇게 1941년 겨울까지 3차례에 걸친 대규모 검거사건으로 세가 위축되었지만, 여러 개의 소그룹을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혁명정세를 주시하였다. 또한 앞으로 재건될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결정적 시기에 도시폭동전술에 입각하여 일제를 전복한다는 방침으로 다양한 형태의 반전투쟁을 전개하며, 계급·계층·정파·성별·종교 등을 구별하지 않고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여 인민정부를 세우려고 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한층 강화되어 모든 사상운동이 중단되었던 상황에서 조직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였으며, 1945년 9월 11일에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 제주4·3 당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의 장인

▲ 강문석 사위 김달삼.

‘과연 그 장인에 그 사위/ 김달삼/ 본명 이승진/ 일본 예비 육군사관학교에서/ 하필 김익렬이 동기생이었다/ 김익렬은 제주도 9연대장/ 두 사람은 단 한 번 4.3사건 휴전 담판을 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고/ 고개 저으며/ 산에서 돌아온 김익렬은 생각했다’

-고은의 시 ‘장인 강문석’(시집 만인보‘에서 발췌)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2월 이후 미군정과 좌파간에 치열한 대립국면이 표출됐다.  좌파진영에서는 시위, 삐라 살포, 전주 절단, 철도 파괴, 지서 습격 등의 격렬한 선거 반대 캠페인을 전개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157쪽

‘남로당 선전부장 강문석(Kang Mun Suk)은 일본공산당과 아시아 코민포름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 연락소의 책임자이다. 일본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인 김천해(Kim Chun Hae)와 일본공산당의 노사카 사부로(Nosaka Saburo)는 남로당의 강문석과 송성철, 북로당의 최용달과 이강국을 통해 코민포름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암호로 된 국제우편물에 따르면, 밀수선들이 부산과 제주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고 있으며 밀사가 연락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다른 정보원은 일본해에 접한 니가타, 타우루가, 아키타 등의 무선국을 통해서도 연락이 이루어진다고 추정했다. 또 코민포름과의 연락은 무선 연락 이외에도 함경북도 청진항과 나남항, 그리고 일본해에 접한 일본의 알려지지 않은 항구들 사이를 운항하는 밀수선을 통해서도 이뤄진다-1948년 12월 31일’ -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1947년~1948년 활동보고서

강문석은 제주4·3 당시 유격대 총사령관을 지낸 김달삼(金達三, 본명 李承晋)의 장인으로 더욱 유명하다. 자기가 사용하던 가명 김달삼을 사위가 사용하도록 했고, 그의 처 김성화(金成花)와 사이에 태어난 큰딸 강영화(姜英愛)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였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유배 올 때 살았던 집 주인 강도순(姜道淳)의 증손자가 바로 강문석이다.  

조국이 해방되자 박헌영의 재건공산당에 합류하여 선전부장을 맡는 등 박현영의 오른 팔이자 남조선로동당 간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지만 해방 직후 잠시 고향에 들러 인민위원회를 지도했고, 보성초등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된 이후, 1946년 2월에 결성된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노동문제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의 3당이 합당되어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한반도의 현안 문제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일본공산당 서기장 도쿠다 규이치[德田球一]와 회담하였다.

1948년 4·3이 발발하고 남한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으로 건너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북한 정권을 수립을 위한 남한의 지하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다. 

그 후 강문석은 1950년 10월 노동당 사회부장을, 1953년 노동당 상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56년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여기에서 제주4·3의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따질 필요가 있다. 박갑동(朴甲東)은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된 「남기고 싶은 글」에서 “폭동의 두목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정책 및 조직 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로 보냈었다.”고 쓰고 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남로당 제주도당 강 · 온건파 간의 노선갈등으로 ‘4·3’발발 직전에는 제주도당 지도부 핵심세력이 종래의 일제하 사회주의 노선의 장년층에서 젊고 급진적인 신진세력으로 교체됐다. 신진세력의 리더로서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23세의 청년 김달삼이었다.” 고 밝히고 있다. 나이 어린 김달삼이 어째서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크게 보상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남로당 중앙위원이자 선전부장이었던 그의 장인 감문석의 후광 때문이었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 북으로 간 강문석과 고경흠

▲ 고경흠.
‘이처럼 제주도민들은 이 선거의 의미를 몰랐다. 투표용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지에 손도장을 찍는 형태였고 그 목적에 대해서는 ’무장대를 지지한다‘는 정도의 뜻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1948년 여름에 제주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이 일은 ’백지날인 사건‘이라고 부른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38쪽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남한에서는 ‘지하선거’가 있었다. 이는 북한 정권 수립에 따른 것이다. 공개적인 선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2중 선거’를 실시하였다. 인민대표를 뽑는 선거였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올라간 인민대표들은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남조선대표자대회를 열었다. 남한 사회를 술렁이게 했던 ‘지하선거’에서 뽑힌 360명도 함께였다. 

제주도민들은 이 선거의 의미를 몰랐다. 투표용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백지날인 사건’이었다.  해주대회에 제주도 인민대표는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이라고 좌파측 자료는 밝히고 있다. 제주도 대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가 최고인민회회의 대의원에 뿝혔다. 김달삼은 제주인민해방군 사령관이었다. 강문석· 고경흠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북한 지역에서도 240여 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들 240명과 해주에서 선출한 360 여명의 대의원들 600여 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 겸 외상에 박헌영을 선출하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

‘당면의 조선혁명의 역사적 내용은 농업혁명이다. 농업문제의 철저한 민주주의적 해결과 모든 봉건적 遺制를 소탕하기 위한 투쟁은 제국주의 지배와 타도와 민족해방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기초를 이룬다. 혁명의 추진력의 결정적 부대는 실로 전인구의 80%를 훨씬 돌파하는 방대한 농민대중이다. 농업혁명을 위한 분명한 지표를 주고 광범한 농민대중을 투쟁에 동원하여 자기의 계급적 지도하에 획득하는 것은 현재 민족혁명의 지도권의 결정적인 기조조건이 아닐 수 없다’ -고경흠의 논문 「조선에서의 농민문제」 중에서

‘작년 9월 철도파업에 뒤이어 10월 봉기로 수많은 동족은 살상 희생되었고 수천 명은 검거되었던 대구사건만 하더라도 20여 명의 사형까지 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이 거족적으로 경축해야 할 3·1절에 우리 민족의 피는 이 땅에 다시 물들이게 되었다. 이 마당에 만일 일제 때라면 수백 명 수천 명 우리의 피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하여 피를 흘릴 수도 있지만 해방된 이 땅에 경향각지에서 불상가사 일어난 것은 확실히 조선민족의 불행이다’ -해방 직후 고경흠이 「독립신보」 창간 주필을 맡아 쓴 글 중에서

강문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고경흠(高景欽)은 어떤 인물가? 그는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적 이론가이다. 1946년 「獨立新報」를 창간하여 주필로 있으며 자주독립을 바탕으로 겨레의 통일을 위하여 애썼던 언론인이다.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勞動者新聞」과 「現階段」을 찍어내었고, 「戰旗」, 「인터내셔날」, 「無産者」 같은 잡지를 펴낸 문필가이다.

1910년  제주시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7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홍효민(洪曉民)·이북만 등과 함께 제3전선사(第三戰線社)를 설립하고 잡지 《第3戰線》을 발간하였고, 그해 5월에 재동경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에 국내로 돌아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일명 카프)의 조직 개편에 동참하고 사회주의 문예운동을 벌여나갔다.

1928년부터 필명으로 많은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現階段』에 「조선운동 발간선언의 비판」, 「무엇으로 시작할 것인가-공장의 속으로」, 「개량주의와 항쟁하라-원산쟁의에 대하여 전조선 노동자 대중에게」 등 비중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외  「조선에서의 농민문제」 외에 「전위볼세비키화를 위하여」, 「조선의 당면문제」, 「조선문제를 위하여」 등의 글도 있다.

 

▲ 1946년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과 여운형.

국내에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그 해 도쿄지회에 가입하였으며,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9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국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재건에 힘썼다. 같은 해 7월에 제주도에서 체포되어 고베[神戶]로 압송도중 탈출하여 11월에 톈진[天津]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2월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조공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4월에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8월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에서 박헌영과 함께 상해반제한인동맹을 결성하고, 그 후 박헌영과 표리일제가 되어 당 재건을 위한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것이 바로 강문석이다.

1933년 5월 법정에서 사상전향을 선언하였으며, 1938년 7월 옥중에서 사상전향자들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결성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1940년 3월 여운형(呂運亨)의 일본 방문시 비서로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9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동참하였으며, 1946년 좌익 신문 「獨立新報」 주필이 되었다. 

1946년 8월 〈합당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들에게 고함〉이라는 전단을 만든 뒤,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은 당 대회를 소집하여 토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헌영(朴憲永)의 당 운영을 비난하였다. 10월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노동당에 반발하여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에 동참하였으나 정세가 사회노동당에 불리해지자 11월에 탈퇴하였다. 여운형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김일성(金日成)과 회담하였다. 

1947년 여운형이 위원장인 근로인민당에 참여하였고, 이후 월북하였다. 언제 올라갔는지 알 수 없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이 총살당한 다음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정권의 중앙후보위원으로 후보 서열 45위에 올랐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한지근(韓智根)에 암살될 때 같은 차에 동승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고경흠이다.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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