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8) 3·1발포 사건 당시 제주도지사 박경훈 

# 박경훈 제주도지사 임명 

▲ 박경훈.
‘8월 1일부로 승격된 제주도의 초대 지사에는 전 제주도 도사(島司) 박경훈씨가 취임, 북제주군수에 박명효(朴明効)씨, 남제주군수에 김영진(金榮珍)씨가 각각 임명되었다’

(같은 기사 대동신문․자유신문 46. 8. 13) -독립신보 1946년 8월 13일

‘(중략) 14. 좌기(左記) 각인을 1946년 8월 1일부(附)로 제주도청 별기부서에 임명하고 기(其) 직권행사의 권(權)을 부여함. 박경훈(Pak Kyun Hun)  조선인도지사. 박명효(Pak Myung Hyo) 북제주군수. 김영진(Kim Yung Chin) 남제주군수. 김두현(Kim Too Hyun) 내무․문교∙재무국장. 임관호(Im Kwan Ho) 농무․상무국장.(중략) 1946년 9월 12일. 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치’ -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APPOINTMENTS) 제107호(1946년 9월 12일)

‘(전략) 4. 육군소좌 서먼 에이 스타우드(Major Thurman A. Stout : O904209, CE)는 1946년 8월 1일부로 제주도지사(濟州道知事)에 임명함과 동시에 1946년 9월 4일부로 동(同) 관직을 해임함. 5. 육군대좌 알렉산더 아데아(Colonel Alexander Adair : O7308, INF)는 1946년 9월 5일부로 제주도지사에 임명함과 동시에 1946년 10월 11일부로 동 관직을 해임함. 6. 육군소좌 엘스워스 이 위버(Major Ellsworth E. Weaver : O275446, FA)는 1946년 10월 12일부로 제주도지사에 임명함과 동시에 1946년 10월 20일부로 동 관직을 해임함. 7. 육군소좌 서먼 에이 스타우드(O904209, CE)는 1946년 10월 21일부로 제주도지사에 임명함. (중략) 1946년 11월 13일.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치’-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APPOINTMENTS)제107호(1946년 9월 13일)

▲ 박충훈(박경훈 도지사의 동생).

박경훈(朴景勳, 1909~ 1973)은 초대 도지사이다. 제주도 거부 박종실(朴宗實,1885~1966)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박종실의 슬하에는 4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 경훈은 초대 제주도지사, 차남 영훈(永勳)은 제주도립볍원장, 삼남 태훈(泰勳)은 제주남양방송 사장, 4남 충훈(忠勳)은 상공부 장관과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하였고, 사위는 재미공사와 대학교수를 역임한 고광림(高光林) 박사이다. 

1910년 일제 강제 점령이 시작된 해에 개점한 박종실 상점이 칠성통에 있었다. 박종실 상점은 잡화 등 소매상의 영역을 벗어나서 일종의 종합무역의 역할까지 했던 종합무역의 효시이다. 1931년 발간된 『조선실업신용대감』에는 당시 박종실 상점의 연간 거래액이 4만3000원으로 제주에서 1위 자리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46년 2월 제주도사(島司)로 부임한 박경훈은 같은 해 8월 1일 제주도(濟州島)가 전라남도와 분리되어 도제(道制)가 실시되면서 초대 도지사가 되었다. 이에 앞서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약칭:民戰) 에서는 안세훈(安世勳: 조천)을 도사(島司)로 추대하려 했으나, 미군정 당국에서 인정하지 않아 박경훈과 문종철(文鍾哲: 전남도청 근무중)을 두고 고민하였다.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국인과 한국인 공동 도지사제도가 도입되었다. 스타우트(Thurman A. Stout) 소령과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한 사무실에 근무했다.

 

▲ 일제 강점기 시절 박종실(박경훈 전 지사의 부친) 상점.

1947년 3월 1일에 소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여 도민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에서는 즉각 발포 명령에 따른 경찰관의 사과, 피살자에 대한 보상, 투옥된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응원경찰의 수를 증가하고 주동자들에 대한 총검거에 나섰다.  

3월 10일 스타우드 군정장관을 비롯하여 기존조사단 일행과 하지사령부에서 내도한 카스티어 대좌와 박경훈 도지사 등 10여명이 칠성로와 도립병원 앞에서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오후에는 군정장관실에서 집행부원을 초청하여 3·1사건의 유래를 청취하는 등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후 제주도청에서는 박경훈 지사와 김두현(金斗鉉) 총무국장을 비롯한 직원 1백여 명이  청원대회를 개최하여, 3·1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음과 같은 6개 종목의 요구조건을 지방장관과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1) 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2) 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
  (3) 경찰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4)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5) 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6) 일본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탕할 것.
 
그 후 박경훈 도지사는 파업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는 뜻과 경찰 당국의 강경 진압에 항의하는 의사 표시로 4월 7일 사표를 제출하였다. 박경훈에 이어 4월 10일 전북출신인 유해진(柳海辰)지사가 발령되었다. .
 
박경훈 지사 퇴임 후 7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며, 이 바람에 좌익분자로 몰려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같은 해 제주신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편집국장 김호진이 무장대 삐라를 인쇄하는 바람에 같이 구속되기도 했다. 물론 박경훈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49년 서울로 가서 생활하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업을 하던 그는 1973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거반에 본도 지사 박경훈씨가 사표를 제출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탐문한 바에 의하면 거(去) 7일 중앙인사행정처로부터 도지사무(道知事務)를현 총무국장 김두현씨에 인계하라는 전보가 도달하였다 하는데 정식 발령은 아직 없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4월 10일

‘과도기의 지방장관으로서 불리한 조건 아래 취임 이후 기다(幾多)의 공적을 남기고 금반에 사임케 된 본도 초대지사 박경훈(朴景勳)씨는 기자의 방문에 대하여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을 만면에 띠고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작년 8월 본도 승격 이후 각 관공서 각위(各位)와 동포 형제 자매 여러분으로부터 도정에 절시(絶時)한 원조로 공제동궤(共蹄同軌)하여 주시사 충심으로 사의를 올려마지 않습니다.

일방 불초는 본시 천학소재(淺學䟽才)이며 본무민정(本無敏政)의 소질로 도민 각위의 민생문제, 산업, 교육부면, 기타 복리증진에 하등 성과를 이루지 못하여 여러 형제 자매의 기대에 성의을 다하지 못하고 금일에 이르게됨을 자성하여 실로 참괴지념(慚愧之念)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금반 본도 3․1사건과 그 후 계속 발생한 제 사건은 오로지 치정(治政) 역량과 덕화력이 미약한 불초의 책임이오며 30만 동포 여러분이 본 도정에 적극적으로 협력일치하여 주시며 교시하여 주신 진로를 봉부실천(奉副實踐)치 못한 소치로 광복도상에 있는 조국 구폐(舊弊)를 고찰자성(考察自省)함에 본 도정 쇄신과 조국 천년지계(千年之計)에 초석이 될 건국이념을 추진시킬 긴급성을 자인하여 도정책임을 사퇴하옵고 30만 도민 여러분 앞에 진사(陳謝)를 올리는 바입니다.

이후에 있어서도 형제 자매 여러분이 애도교시(愛導敎示)하여 주신 바를 흉리(胸裏)깊이 각명(刻銘)하옵고 조국재건을 위하여 혼백을 바치고자 신발종(新發蹤)을 기하고자 하오니 배전의 편달이 있으시기를 간원(懇願)하오며 조국 완전독립 전취에 매진 건투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제주신보 1947년 4월 20일

# 3·1사건으로 제주도지사 사표제출

 

▲ 옛 제주도청.

‘경애하는 30만 도민이여! 동포여! 형제자매여! 과거 기미 3․1운동은 조선혁명의 기본과제에 있으며 항일반봉건투쟁사상 가장 큰 운동임과 동시에 세계 약소민족 해방사상에 자랑할만한 거대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도민이여! 해방된 오늘 아직도 완전 자주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원인은 우리 스스로가 냉정히 반성하지 아니치 못하겠습니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불상사건, 좌우의 충돌은 우리가 자치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약점을 연합군에 보여주는 악조건이 되었으며 완전한 자주정부를 시속히 가지지 못하게 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업무를 견실히 수행하면서도 얼마든지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파업만을 계속함은 긴급한 도민 민생문제 및 자치문제에 막대한 영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재건을 지연시키게 됨을 자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연합군에 대하여 자치능력이 없다는 우리의 약점만을 거듭 제시함에 불과하고 자주독립의 지연을 초래하는 악조건의 하나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연합군은 포악한 일제, 우리의 고혈을 여지없이 착취하는 강적을 타도하여 약소민족인 우리에게 해방을 주었으며 앞으로 민주독립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원조를 기약하고 있는 오늘, 파업은 연합군의 일원인 미군정에 대한 반항으로 취급당하게 됨을 또한 자중자성하여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동포여! 형제자매여! 금반 사건에 무참히 희생을 당한 인민에 대하여서는 30만 도민 전체가 한없이 동정과 조의를 표하고 있는 바입니다. 연(然)이나 우리는 파업 계속뿐이 애령(哀靈)을 조위하는 길도 아니며 또한 부상자의 유가족의 참상을 시급 원호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0만 도민이여! 명석하신 각 관공서, 사회단체의 동포 여러분이여! 직장을 견수(堅守)하십시오. 계속 파업의 이해(利害)를 현찰하시고 직장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도탄에 빠진 도민의 민생을 위하여! 오는 앞날 우리의 통일민주독립을 위하여!’-도민에게 고함/ 도지사 박경훈 (제주신보 1947년 3월 24일)

‘관직에 있는 나로서 무어라고 비판을 가할 수는 없으나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도지사 박경훈 담(독립신보 1947년 4월 5일)

3·1절 발포 사건은 제주도민들을 분노케 하였다.  민관합동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파업에는 도청을 비롯한 도내 156개 관공서, 국영 기업들도 참여하였다. 도내 전체 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동참해 문을 닫았다. 심지어 경찰관들마저도 파업에 동참하였으며 도지사 박경훈도 항의성 사표를 제출할 정도였다. 

여기에 지방 신문들도 희생자 조의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며 파업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등 도민 전체가 미군정의 실정에 분노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팀이 "총파업에는 경찰 발포 사건에 항의하여, 좌·우익 세력이 공히 참가하고 있다"라고 보고할 정도로 제주도 전체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경무부장 조병옥과 응원경찰대가 제주도에 들어오고 타 지역 수사 요원들을 중심으로 한 특별 수사대가 설치되었다.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며 3월 15일에는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외부 세력을 끌어 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속 한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고 4·3 직전까지 1년간 2500명이 구금되었다.  

군정 책임자 스타우트 소령도 군중들은 대로 만든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을 뿐 곤봉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시종일관 이 문제를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여 민심 수습보다는 강공책에 비중을 두었다. 경찰은 사건이 발생된 3월 1일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통금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였다.

‘애비없이 불쌍하게 자란 독자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든 경관을 죽여주시오. 내 아들 종국(鍾國)(19)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총알을 퍼부으며 무슨 원수를 졌다고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엘 찾아가는 것에 또 총부리를 댑니까. 치료비는 커녕 병문안도 안오는 경찰의 태도가 몹시도 섭섭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 병신이나 되면 나는 앞날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요’-내 아들 무슨 죄있나/피해자 모 장여사 담(독립신보 1947년 4월 5일)

# 민주의 민족전선 참여로 구금되기도 

 

 

▲ 1957년 6월 1일 박종실이 기부해 지은 도서관.

‘도민전(島民戰)에서는 활동을 개시한 후 그 내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의장에 전 지사 박경훈(朴景勳)씨, 부의장에 김시범(金時範)씨를 추대하고 상무위원회도 결원 중인 사무국장에 고창무(高菖武)씨, 차장에 김창순(金昌淳)씨, 선전부장에 김행백(金行伯)씨, 조직부장에 문경원(文景源)씨를 선정하여 전 부서 결정도 완료되어 민주역량을 집결하고 임정수립의 전제인 미소공위에 적극적인 협력으로써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케 되었다는데 전지사 박경훈씨의 정계 등장은 의외의 일이었고 앞으로의 동씨의 활약은 자못 주목되는 바다’

-도민전(島民戰) 강화!/ 의장에 박경훈(朴京勳)씨 추대(제주신보 1947년 7월 18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民族主義民族戰線) 결성식은 1947년 2월 23일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우파세력이 미약한 반면 좌파조직은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제주 민전 의장단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 승려인 이일선(李一鮮), 제주중 교장 현경호(玄景昊) 등 3명이 추대되었다. 또 부의장으로는 김택수·김용해·김상훈(金相勳)·오창흔(吳昶昕) 등 4명이 선출되었다. 

이날 민전 결성식에서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金日成)·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이 추대되었다. 결성식에 박경훈 지사가 참석, 축사를 하였다. 또 경찰고문관 패트릿지와 강인수(姜仁秀) 제주감찰청장도 참석, 질서문란을 방지하기 위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다음 날  민전은 상임위원회를 개최하여 사무국장 겸 조직부장에 김정노, 선전부장 좌창림, 문화부장 김봉현, 조사부장 정상조, 재정부장 김두훈 등을 선임하였다. 민전은 결성과 더불어 당면한 1947년 3·1 기념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로 계획하였다. 

한편 3․1사건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민전 사무국은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각계가 참여하는 진상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경찰은 이를 거부하였다. 3·1사건에 대한 항의가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등 제주가 들끓자 미군정 당국은 대규모 검속을 벌여 현경호 의장 등 민전 제주도위원회의 간부 다수를 검거하여 민전은  발족 초기부터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이 때문에 민전 임원진 일부가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일본과 육지 등지로 떠나거나 조직에서 탈퇴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1947년 5월에 이르러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면서 민전 활동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민전은 대폭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박경훈을 의장으로 추대하였고 항일운동가 김시범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사무국장에는 고창무가 선임되었다. '제주신보' 에서는 “전 지사 박경훈씨의 정계 등장은 의외의 일이었고 앞으로 동씨의 활약은 자못 주목되는 바”라고 보도할 정도로 그의 민전 의장 추대 소식은 제주사회에서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8월 15일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검거 선풍에 따라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의 박경훈 의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간부가 구금되었다.

경찰당국도 8월 14일부터 민전 간부와 남로당원, 공무원 등에 대한 일제단속에 나섰다. 검거된 사람은 제주도청 공무원 8명을 포함해 민전 간부와 세무서 직원, 도립병원 의사와 간호사, 우편국 교환수 등 20여 명에 이르렀다. 구금된 인사 가운데는  박경훈도 포함되었다. 

1948년 2월 18일~19일 실시된 특별감찰실 로렌스 넬슨의 유해진 지사에 대한 심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문: 박경훈 전 지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본인은 그가 명확한 사상이나 이념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때때로 우익 같지   만 가끔은 좌익 같기도 하고 가끔은 중도파차럼 보인다.
 
‘넬슨 특별감찰보고서’ 에는 박경훈의 체포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울고검 검찰관 이호(李澔)의 보고내용을 보면 박경훈은 1947년 7월 말 민전 의장의 자격으로 제주경찰감찰청장을 만나 미·소 공위에 제출할 진정서를 서명날인 받아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그 진정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견해, 즉 국호는 인민공화국으로, 행정기관은 인민위원회로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민전 회원에 한해 받도록 승인된 진정서를 일반 도민들로부터도 받음으로써 공중치안을 교란한 혐의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박경훈 외 3명은 제주도 민족주의민주전선 간부들이다. 1947년 7월 말일께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할 진성서에 서명날인을 모집함에 관하여 그들은 제주경찰감찰청장을 만나 민전 회원들의 서명날인을 받아도 좋다는 승인을 얻었다.’ -박경훈 사건에 관한 서울고등검찰청 검찰관 이호의 보고서 중에서

박경훈은 연행 나흘만인 8월 17일 석방됐다. 다른 연행자들도 속속 풀려 나왔다. 일부 구금자가 경찰당국에 의해 불법집회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그것도 보석금으로 풀려 나왔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박경훈 전 지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매우 친미적인 인사이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와 우익인사가 아니기 때문에 좌익인사가 됐지만 군정에 위험인물이 아니다”고 밝히기도 했다.

‘거(去) 14일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경찰당국에서는 민전 간부를 비롯하여, 남로당원, 도 직원(학무과장 이관석씨 외 7명), 도립의원 직원(의사 1명, 간호부 1명), 우편국 교환수 등을 검거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후 ‘씨, 아이, 씨’와 경찰당국, 검찰당국이 협력하여 즉시 취조에 착수하였던 바, 17일에는 민전 의장 박경훈씨 외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는데, 18일 현재 판명된 바에 의하면 홍종언(洪宗彦) 한사택(韓四澤) 김인규(金仁奎) 백남섭(白南燮) 김이환(金二煥․婦女) 고봉효(高奉孝) 강대석(康大錫)씨 등 기타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며, 한편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를 비롯한 도 직원 7명과 민전 간부 등은 계속하여 검찰당국의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20일

# 제주신보 사장에 취임

해방이 되자 『제주민보』가  창간되었다. 제주출신 김진수(金鎭洙)가 경영 책임자가 되었으며, 미군정 법령 제19호(1945.10.30 공포)에 따라 신문을 등록하여 발행인으로 취임하였다. 신문 제호는 『제주민보』에서 『제주신보』로 변경하였다.

『제주신보』는 계속되는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을 주주로 영입하여 회사를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주주로 참여한 유지들은 황순하(黃舜河)·윤성종(尹性鍾)·백찬석(白燦錫)·홍종언(洪宗彦)·김석호(金錫祜)·박영훈(朴永勳)·신두방(申斗玤) 등이었고, 사장에 김석호를 선임하였다.

박경훈은 1947년 10월 제주신보사를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제주4·3사건 직전 불온 유인물 인쇄가 문제되어 구속되었다가 무혐의 처리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제주에서는  대토벌이 자행되고 있었다. 제2대 편집국장 김호진(金昊辰)이 좌익 무장대 담화문을 인쇄한 혐의로 군부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김호진은 유격대 삐라를 제주신보사에서 인쇄를 한다. 신문사 차원이 아닌 당시 편집국장이자 주필이었던 김호진의 단독 행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친구들이 만류하지만, "산군들의 부탁이야"라며 대담하게 인쇄를 계속하였다. 서북청년단 사무실이 불과 30미터거리에 있었는데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호진은 발각될 기미를 알고 입산을 시도하가다 관음사 근처에서 잡혀 농업학교에 수감이 된다. 그리고는 그해 10월말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문사 사장이었던 박경훈도 이 사건으로 위협을 받게 되는데, 그는 민전 의장 경력이 있던 터라 사찰 당국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당시 박경훈의 부친 박종실이 미군을 매수하여 그를 도피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건 이후 『제주신보』는 아예 서북청년단이 강제로 접수해 버린다. 당시 서청 단장 김재능이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어 '제주신보'가 1년동안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김익렬 연대장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어느 날 김익렬 연대장은 박경훈 제주신보 사장을 만났다.  제주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한 뒤 선무활동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당시 무장대의 공격 표적이 되었던 경찰은 선무보다도 토벌위주의 작전을 중시하고 있었다.

김일렬 연대장은  민간인들에게 혹시나 경찰로부터의 후환이 있을까 봐 지역 유지들과의 접촉사실을 극비에 부쳐 선무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연대참모들과 지역 유지와의 비밀화합장소로 박경훈의 집이 이용되었다. 이곳에서 귀순 유도를 위한 선무전단 작성과 무장대 대표와의 접촉 문제 등이 협의되었다.

박경훈  사장은 김일렬 연대장의 자문에 응해 전단문 작성자로 김용수를 추천했다. 제주신보 정경부장 출산의 김용수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언론공부차 상경했다가 4·3 발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향,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김용수느 제주신보 창간 당시 경영책임자였던 김진수의 동생이다.

1948년 4월 20일을 전후해서 작업은 진행되었다. 전단문에는 “군은 국토방위와 외적과의 전투가 주임무이지, 동족상잔을 원치 않는다. 제주도민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귀순자는 안전과 생업을 보장한다. 반도는 요구조간이 있으면 회담을 통해 해결하자” 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원고는 제주신보사에서 인쇄되었다. 전단은 마을곳곳에 뿌려졌다. 김익렬 연대장은 L-2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직접 한라산 기슭 곳곳에 뿌렸다. 전달 살포 다음 날부터 회답삐라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 모슬포 연대본부에서 발견된 전단에서 무장대 본부의 것이라고 판단되는내용이 있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즉각 정보부임 이윤락 중위에게 접선공작을 지시했다. 그 후 김익렬과 김달삼의 역사적인 회담은 이루어졌다.

‘초대사장 박경훈(朴景勳)군의 손으로 발간되었던 제주도 유일의 일간지 제주신보는 4월 3일 사건으로 작래(昨來) 이래 휴간 중이던 바 진용을 개비(改備)하여 신 사장에 김재능(金在能)군이 취임하여 지난 2월 중순부터 복간하였는데 한국일보 모 군이 4월 1개월을 후원하고 온 후 편집 약체에 곤란을 받고 있다 한다’ -제주신보 속간/ 사장에 김재능(金在能)군(비판신문 1949년 5월 30일)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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