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이 떠난 러시아 여행] (2) 아르한겔스크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발트 해의 핀란드만으로 나갈 수 있는 땅을 확보하고 나서, 네바 강 하구의 늪지대에 ‘유럽으로 난 창’ 상트뻬쩨르부르그를 건설하기 전까지 백해의 아르한겔스크는 러시아의 유일한 항구였다.

서쪽은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독일의 튜튼 기사단, 그리고 스웨덴 왕국이 버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타타르의 일족인 크림한국(汗國)이 건재해 있었으며, 비교적 저항이 약한 동쪽은 이반 4세(뇌제)가 카잔한국을 정복하고, 17세기 초에는 모피 상인들과 카자크 기병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맹렬하게 동진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 영토는 확실하지 않았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의 선구자로 나설 즈음 영국은 해양국가로서 아직 보잘 것 없는 단계였고, 스페인 출신의 해양기술자를 초빙하여 자국의 항해사를 육성하였는데, 그 학생 중 한명이었으며 모험상인으로 성장한 리처드 챈슬러는 1553년 여름 동양으로 가는 북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한 항구를 출발하였다.

북동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가다  백해(white sea)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겨울을 나는 동안 일행의 대부분이 동사했다. 다행히 북 드비나 강이 백해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월동을 마친 챈슬러는 이듬해 육로로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북방항로에는 영국의 함대가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런던에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머스커비 회사’가 설립되었고, 러시아 또한 영국과 교역을 위한 모스크바 상사를 런던에 개설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러서 1584년 북 드비나 강의 하구에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한겔스크이다.

아르한겔스크는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거점일 뿐만 아니라 군사요새였고, 북극해를 탐험하기위한 전진기지로서도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1693년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조선소를 짓고, 러시아 해군 최초의 배를 진수하였으며, 그 자신이 항해사로 동행하여 북극해 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1720년대 표트르의 발틱 함대가 스웨덴의 선단을 물리치고, 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상트페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상선들은 발트 해를 통하여 쌍트뻬쩨르부르그로 들어왔고, 아르한겔스크에 있던 무역사무소 또한 옮겨갔다. 교역을 위한 북방항로는 이제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아르한겔스크는 주변의 거대한 침엽수림을 기반으로 한 목재산업의 중심지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20세기에 있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봉쇄를 피하여 연합군이 물자를 지원하는 중요한 병참기지가 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후의 내전에서는 백군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스베틀라나 할머니와 머리를 짧게 깎은 앞자리의 젊은 청년은 같은 벨라루시 출신이라고 소개를 했다. 청년은 나와 같은 목적지인 세베로빈스크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그 옆의 중년 여인은 아르한겔스크까지 가는 데, 알고 보니 세베로빈스크는 아르한겔스크 바로 다음 역이었다. 기차표를 살 때 아르한겔스크를 간다고 했는데, 매표소의 여직원은 왜 한 정거장을 더 간 세베로빈스크라는 낯선 이름의 도시로 가는 표를 나에게 끊어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르한겔스크 도착을 얼마 안남기고 열차 승무원에게 혹시 아르한겔스크에서 내려도 되는지 묻자 승무원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대답한다. 한 정거장 더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전에 내리겠다는데 안 될 이유가 뭔가? 하지만 하는 수 없이 세베로빈스크까지 갔다. 스베틀라나 할머니는 몇 정거장 앞에서 먼저 내리고, 중년의 여인도 아르한겔스크에서 내리고 나자 마주앉은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세베로빈스크에 사는지, 무슨 일로 거길 가는지.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가 내 수첩에 러시아어로 써준 것은 결혼식에 초대받아서 놀러간다는 뜻이었다.(‘В ГОСТИ НА СВАДЬБУ’)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라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내일 아르한겔스크로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 앞자리의 청년에게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차가 도착해서 내리자 청년은 마중 나온 사람과 반갑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앞서나가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역 광장에 서서 막막해진 심정이었다. 론리 플래닛에 세베로빈스크는 아르한겔스크 옆에 도시이름만 작게 나와 있을 뿐 이 도시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 세베로빈스크 기차역. ⓒ양기혁
▲ 세베로빈스크 역 앞 거리풍경. 아스팔트길에 흙모래가 쌓여있어 차가 지나갈 때마다 모래먼지가 풀풀 날렸다. ⓒ양기혁

역 광장을 나와 조금 번화한 쪽을 택해 걸음을 옮겼다. 먼지 날리는 오래된 아스팔트길과 키 큰 가로수, 낡은 아파트들과 목조 주택들, 근처에 군사기지가 있는지 군인들을 실은 트럭이 몇 대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가고 나자 황량함이 더 했다. ‘고스트니짜’라는 호텔을 뜻하는 단어가 쓰여 있는 건물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걸어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길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 데 작은 몸집의 여인이 귀에 핸드폰을 댄 채 통화하면서 걸어오고 있었고, 다른 쪽에선 조금 멀리에서 건장한 체격의 대머리 청년 둘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귀에서 핸드폰을 떼지 않는 그녀를 불러 세울 수 없었다. 조금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다가온 두 청년에게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밝게 웃으며 청년은 큰소리로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었는데 청년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자 슈퍼마켓과 클럽등 상가들이 늘어선 번화가가 나왔고, 택시도 몇 대 세워져있었지만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택시기사에게 부탁하여 겨우 찾아간 호텔은 번듯한 외관에 깔끔해 보이기도 했는데 내 여권을 받아본 데스크의 중년의 여직원은 뜻밖에도 외국인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아르한겔스크로 가는 것이 좋겠다며, 종이쪽지에 아르한겔스크로 가는 버스 번호를 적어 건네주었고, 호텔 앞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탈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겉보기로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호텔 안에 말 못할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 도시는 외국인이 들어오는 곳이 아닌 모양이다.

중국에서도 과거 관리들이 공무상 출장 시 이용하던 숙박시설인 ‘초대소’는 외국인의 투숙을 받지 않았었는데, 충칭에서 내가 하룻밤 이용했던 초대소는 내부시설이 낡고 불결해서 하룻밤 지내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일본의 러시아어 통번역사이며 유명작가이기도 한 요네하라 마리가 러시아의 화장실에 대해서 쓴 에세이가 생각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회상한 그의 스승인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모스크바 남쪽 지방 도시인 툴라의 한 호텔 공동화장실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다룬 것이었다.

아마도 소비에트 연방 시절 러시아의 공공화장실은 불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던 것 같은데, 화장실의 변기 밖에 싸지른 똥 무더기가 가득해서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들어가기조차 엄두가 안 나는 공포스러운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정직하게 변기에서 일을 처리하려다 미끄러져 똥 무더기가 가득한 화장실 안에 나뒹굴었다는 웃지 못 할 얘기였는데, 호텔 데스크에서 돌아 나오며, 어쩌면 이곳의 화장실도 그러한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운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시골 정거장마다 멈춰서는 완행 시외버스는 1시간 정도를 달려 아르한겔스크에 도착했다. 저녁 9시가 넘었으나 아직도 해가 떨어지지 않은 한낮이었고, 그런 만큼 조바심도 덜 났다. 사실 시간개념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르한겔스크에는 가이드북에 소개된 유스호스텔이 하나 있어서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자 택시를 타고 로모노소프 거리에 있는 로모노소프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택시는 제대로 찾아왔으나 유스호스텔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하는 수없이 좀 비싼 호텔로 갈 수밖에 없어서 다시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오지 않았다. 한참 후 다시 돌아다 본 유스호스텔은 닫혀있던 문이 열려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다시 호스텔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여행 온 대학생들로 보였는데, 문만 열려 있을 뿐 안은 컴컴했고 어디가 숙소인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돌아 나왔다. 내가 그들에게 아무래도 호텔로 가야겠다고 하자 거기 서있던 학생 몇 명이 같이 가자며 앞장섰다. 늦은 시간이라 택시가 없어서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선 것인데 나는 그들도 나와 같이 호텔에서 머무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들은 상트 뻬쩨르부르그에서 온 대학생들인 데 현대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자기들을 소개했다. 남학생 둘은 꼴랴와 쏘렌이라고 이름을 밝혔는데 쏘렌은 아르메니아식 이름이라고 덧붙였다. 한 여학생은 이름을 뽈랴 혹은 뽈리나라고 했고, 다른 여학생은 메리라고 영어식으로 말한 다음 마리아라고 덧붙였다. 마리아는 내가 택시를 기다리다 다시 호스텔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다가갔을 때,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나에게로 와서 자기들과 함께 호스텔에 머물자며 나를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다지 오래 걷지 않아서 꽤 큰 호텔에 도착했는데 이름이 아르한겔스크를 흘러가는 강이름을 따서 드비나 호텔이다. 호텔 로비에서 그들은 다시 호스텔로 돌아간다고 하자 그제서야 그들이 나와 함께 이 호텔에 머무는 것으로 착각한 것을 깨닫고, 며칠 후 상트뻬쩨르부르그로 갈 예정이니 연락처를 달라고 요구했다. 마리아가 내 수첩에 전화번호를 썼다.

호텔은 규모는 컸으나 오래되어 낡고, 내부 시설도 보잘 것 없었으나 숙박비는 2,800루블(약10만원)을 호가한다. 방에 배낭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었고, 몹시 피곤했지만 북방의 백야를 즐기고 싶었고, 맥주 한잔으로 갈증을 풀고 싶기도 했다. 호텔에서 멀지않은 길모퉁이의 카페로 들어가서 껍질을 까먹는 피스타치오를 안주로 맥주를 들이켰다.

▲ 아르한겔스크 시내 중심가 길 모퉁이 전광판의 현대 중장비 광고. ⓒ양기혁

얼마 안 있어 검정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까무잡잡한 여자 둘이 나타나더니 창가의 비좁은 무대로 올라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손님도 몇 사람 되지 않고 그저 평범한 맥줏집 같은 데 조금은 어설프기도 하고 딴에는 정열적으로 요염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바라보다가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대낮같이 밝은 창 너머 길모퉁이에 세워진 전광판에서 낯익은 세모꼴 두 개의 산이 겹쳐있는 현대브랜드가 선명한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전광판에서는 굴삭기와 불도저 같은 중장비 광고가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머나먼 러시아의 북쪽 끝 아르한겔스크의 백야에 비키니차림의 무희들이 춤추는 카페 창밖에 현대브랜드를 단 굴삭기와 불도저가 번갈아가며 번쩍이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카페에 앉아있는 나에게는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내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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