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달리기 잔혹사

어쩌다 보니 요즘 달리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달리는 흉내를 내고 있다.
신체능력지수가 바닥권인 나는 매번 새로운 운동을 접할 때 남들보다 두 세배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야한다.

초중학교 시절, 체육시간이 가장 싫었다.
고등학교 시절, 남들은 그냥 ‘따 놓은 당상’이라 하는  학력고사 체력장 점수가 내겐 높은 벽이었다.
직장인 초년병 시절, 한라체육관 수영장이 문을 열었을 때 다짐했다. 수영을 배우리라.
결심은 쉬웠으나 과정은 험난했다. 강사에게 수영을 배웠는데.. 보통 한 달이면 끝낸다는 자유형을 난 다섯 달 연습했다. 두 달은 수업, 석 달은 독학. 독학은 힘들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 진도가 느린 수강생 때문에 난감해 하는 선생님에게 폐 끼치기 싫어서였다. 그 넓은 수영장 물맛이 달게 느껴질 즈음(거짓말 좀 보태서 수영장 절반의 물을 먹었음) 드디어 자유형을 익혔고 내친김에 배형까지 나아갔다. 그리곤 더 욕심내지 않았다. 평형은 아직도 내겐 희망사항.
직장 생활이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날로 스트레스도 함께 늘어갈 즈음, 시도한 것은 검도다.
드라마 ‘ 모래시계’ 의 영향으로 검도가 온 나라를 휩쓸던 때였다. 여기서도 나의 좌절은 계속 됐다. 대부분 합격하는 초단  첫 번째 심사에서 난 떨어졌고 너무 슬퍼서 울면서 집에 왔다. (두 번째 심사에서는 합격. 그 후 그만뒀다)

그리고 다음은 요가였다.
뭐, 요가를 한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이제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신체 라인은 전혀 요가를 한 사람 같지 않다고, 친구들이 말한다. 그럼 어쩌라고, 내가 탤런트 이나영처럼 꼭 달라붙는 청바지 입고 그림 같은 포즈를 취해야겠냐?
여전히 몸치지만 요가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장점을 덧붙일 수 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이 잘난 척 한다며 무척 싫어하지만 인정은 해주는 나의 장점, 인지 능력.
난 몸으로 요가를 하면서 동시에 요가 이론과 철학을 익혀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지를, 그리고 어떻게 훈련해나가야 하는 지를.

요가만 평생 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번 여름에 정말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달 ! 리 ! 기 !
내 삶에 달리기는 없을 줄 알았다. 세상에 내가 달리기라니... 우리 허운데기 공주님의 걸음속도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데.

'사업가', '엄마', '마누라', '며느리', '큰 딸'의 역할을 모두 잘 수행해야 하는 나는, 늘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다 부모의 손을 떠난 줄 알았던 아드님과 따님께서 사춘기에 접어드시니... 그 뒷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규칙적으로 하루에 한 번 요가를 가려면 치밀하게 작전을 잘 짜야만 했다. 그래도 미련에 한참을 포기 못하다 결국 이번 여름에 결심했다.
잠깐 쉬자, 집에서 혼자 하자.
그래서 타이머 시계 맞춰 놓고 나름 열심히 요가 수행하는 나를 보고 나의 바깥사람이 꼬드겼다. 나랑 같이 달리기 하자.

그래서 얼떨결에 시작하게 되었다.  달 !  리 !  기 !

시작한 때도 언제냐면 기록적으로 더웠던 지난여름 한복판.
집 옆에 있는 인화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달린다는 모양새를 한 걷기.

달리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여름날 저녁, 운동장 트랙을 열심히 돌고 있는데 어느 결에 따님이 옆에 와있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뭐, 계속 무슨 불만사항을 쫑알거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내 팔을 잡는다.
"아 잠깐, 엄마! 지금 뛰는 거?"
"어."
"난 이제까지 계속 걸어왔는데 속도가 같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나의 달리기 잔혹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달여를 달려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자부하던 9월 초입 어느 날 저녁,
그날도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내 뒤를 따라오는 무리들이 있었다.
팬티선과 바지선이 비슷하고 윗도리는 손등을 덮는 긴 점퍼를 입은 여학생들 서너 명.
모두 알다시피 요즘 아이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내용을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속도 느린 달리기를 하던 난 할 수없이 그 아이들이 나누는 얘기를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은 따님과 비슷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야, 저 아줌마 뭐하맨? 뛰맨? 걸으맨?"
"웃긴다야. 뛰긴 뛰는 거라, 모양은."
이어 배경음악으로 들리는 사춘기 소녀들의 깔깔 웃음소리.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갑자기 내 뒤에 있던 소녀 2명이 바람처럼 내 앞을 지나간다.
긴 머리 휘날리며... 길쭉한 다리로 땅을 구르며 잘도 달린다.
나는 여전히 그 뒤를 터덜터덜 걷는다, 가 아니라 달린다.

그래도 괜찮다.
난 선수하려 달리는 게 아니잖아. 천천히 달려도 돼.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모양과 형식이 같은 달리기를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얼마나 좋아.
달리기를 하면서 첫째로 바쁘다는 핑계아래 늘 뒤죽박죽이던 내 머릿속을 조금씩 정리 할 수 있었다.
무작위로 읽었던 책들이 어느 날 한 프레임 안에서 통했던 것도 달리기를 할 때였고, 근심 걱정했던 문제들의 해결책이 신의 계시처럼 내 머리를 노크하던 것도 달리는 순간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의 얼개들이 정리되고, 내일 해야 할 일들의 순서가 정리되기도 했다.
이번 글의 내용도 달리면서 정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좋은 마음, 선한 의지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화를 내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감춰두었던 나의 오만과 부끄러움을 직면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기엔 제자리걸음이지만 난 나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 달리고 나면 남들과 똑같이 땀 흘리고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달리면서 난 내 삶의 독소들을 비워나가고 그 자리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체력과 의지를 채워 놓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됐다.
내가 달리는 이유는 이것으로 족하다.

요즘은 달리기 딱 좋은 날씨다.
달리면서 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람을 만난다.
내가 왜 '바람섬'인가, 바람 부는 섬 제주도에서 바람과 함께 살며 바람을 사랑해서 바람섬이다. 남들처럼 멋지게 달리지는 못하지만 달리고 또 달리면서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내 얘기를 조금씩 털어 놓는다. 그러고 나면 참 행복하다.

일요일에 제주의소리가 주최하는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본디 달리기를 아주 잘하는 우리 남편과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나는 요즘 이런 꿈을 꾼다.
내년 가을에 온 가족이 대회에 나가자.

▲ 바람섬(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해보자.
그리고 이 글을 읽은 사람 가운데 혹시 느낌 아시는 분들, 내년 같이 한 번 해 볼까요? (참고로 난 5킬로미터 이상은 절대 도전 안함.)

이제 이렇게 만천하에 달리기 한다고 자랑질을 해놨으니... 오늘 밤엔 꼭 달려야겠네요.
바람과 함께. /바람섬(홍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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