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9)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A. V. ARNOLD)

▲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미7사단 32보병연대의 진주를 환영하는 서울시민들. <1945.9.10 미 통신부대 소속 일병 퓨스코 사진>

‘일반명령 제5호는 자(玆)에 좌(左)와 여(如)히 개정함. 제1조 특별법의 폐지....(중략)...... 제2조 일반법령의 폐지.......(중략).....제3조 형벌의 제한.

1.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 행위에 대하여 그 범행당시의 현행 법률에 처벌할 조문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였으면 죄명을 정하거나 판결을 언도하거나 형벌을 가하지 못함. 2. 범죄 혹은 범과(犯科)의 확정이 없이 사람을 구류하거나 법적 심문과 판결이 없이 형벌을 가함을 금함.

제4조 벌칙. 본령(本令)의 규정을 범하는 자는 군율재판소의 판결과 동시에 그 소정 형벌에 처함. 1945년 10월 9일. 재조선미국육 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A. V. ARNOLD)’ -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ORDINANCES(USAMGIK) 제11호 1945년 10월 9일

‘(전략)4년의 장구한 전쟁에서 승리를 득(得)한 후에 미국 군대는 조선민중의 친우(親友) 및 보호자로 이 땅에 상륙하였다. 조선으로부터 일본군을 완전 또한 영구히 축출하고 일본의 모든 군국주의, 국민주의적 관념을 일소하기로 공언한 목적을 위하여 온 것이다.

이 목적에 더하여 군정청은 방침을 정하고 조선을 일본의 사회적, 경제적, 재정적 지배로부터 정치적, 행정적 분리를 완성하고 조선의 건전한 경제발달을 촉진하고 조선의 자유, 독립, 책임의 회복을 무도(務圖)하라는 훈령을 받았다.......(중략)..... 조선민중의 복리에 자(資)할만한 일본인 재산은 접수 보관하였다. 기아상태에 있는 지역에 곡물을 반송하였다.

조선 부원(富源)의 다년간 이기적 개발, 그 민중의 압박, 장구한 세월에 일본 압박 밑에 부유(富裕) 또한 진취적인 민족에게 고유한 후생적(厚生的) 산업을 착수키 불능함으로 말미암아 조선민중은 보편된 영양부족, 질병 기타 고난이 목전에 당도한 동기(冬期) 중에 방지할 만큼 물품을 빨리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모(某) 단체는 조선민중의 부(富)를 독점할 목적으로 노동자의 직장 환취(還就), 아동의 학교 수업, 농민의 그 소유지 산물 매각을 방지하였다. 여사(如斯)한 상태로 말미암아 비상시기가 발생하였으니 민중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는 이 위기를 그 이익에 유□된 비상조치로서만 가히 처리할 것이다.

미국국민은 강대한 국민인 것은 주지하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피등(彼等)의 행운에 대한 자각과 타민족을 그 역경에서 보호코자 하는 의도로부터 생(生)한 진실한 온화성을 유(有)한 온화한 국민이다. 이 때에 당하여 그 친우인 조선민중이 동기(冬期) 중에 기한(飢寒)의 위협을 받게 된 것을 염려하고 있다. 설비, 원료, 노력은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으니 적의(適宜)케 이용하면 고통을 방지할 수 있다. 고로 민중에게 해독을 끼칠 사태를 방지코자 이에 강력한 비상조치를 설정함. 이러한 임시방편은 위기가 소멸되는 대로 즉시 폐기할 것이다.(후략)

1945년 10월 30일.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 -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ORDINANCES(USAMGIK) 제19호 1945년 10월 30일

▲ 총독부 건물 앞에 걸렸던 일본기가 내려지고 미군악대의 연주 속에 미군기 게양.

1945년 9월 7일 ‘본인이 지휘하는 승전군은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는 맥아더 미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포고 제1호가 발표되었다. 다음날 J.R. 하지 미군중장이 이끄는 미육군 24군단이 인천으로 상륙하고, 9월 9일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방침을 포고하고, 중앙청에서는 항복조인식에 이어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9월 12일 A.V. 아놀드(Archibald V.Arnold)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였다. 군정장관의 위치는 지금의 ‘장관’의 지위가 아니라 군정통치를 총괄하는 ’행정수반‘의 자리였다. 군정장관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약칭 미군정청)의 최고행정책임자의  관직이다.

초대 아놀드(Arnold,A.L., 재임기간 1945.9.12.∼1946.1.4.), 제2대 러치 (Lerche,A.L, 재임기간 1946.1.4.∼1947.9.11.), 제3대 딘(Dean,W.F., 재임기간 1947.11.25.∼1948.8.15.)이 각각 재임하였다. 10월 10일 아놀드가 격렬한 용어를 동원하며 인민공화국의 존재를 거부하고, ‘북위 38도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임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 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군정관들이 엄선하고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직된 정부로서 행정 각 방면에 있어서 절대의 지배력과 권위를 가지었다.

자천자임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든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의 회합이라든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연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그 동안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만일 或種의 보안대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률에 저촉치 아니하고 유치하나마 성의껏 행동을 하였다면 이제는 해체하고 각기 직장으로 돌아가 過冬에 필요한 식량과 의복과 주택을 확보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국내에는 정당한 직업과 공정한 급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의 노무력은 반드시 過冬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괴뢰극의 막후에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 있어 어리석게도 조선 정부의 정당한 행정 사무의 일부분일지라도 단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맹연각성하여 현실을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출을 당연 정지하여야 할 것이다." - 매일신보, 1945년 10월 11일

▲ 아놀드 군정장관과 그의 사인 필적.

성명서를 받아본 신문사마다 아놀드 군정장관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미국인 발언 중 이처럼 한인들을 진노시킨 것은 없었다. 매일신보는 편집국회의를 소집하여, 일단 기사게제를 보류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아놀드를 만나서 의견을 개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10월 11일자  홍종인 사회부장의 반박문 ‘아놀드 장관에게 충고함’을 성명문과 동시에 게재했다. 

당시 아놀드 소장은 중부 지방을 점령한 7사단 사단장이라서 군정장관에 임명된 것이지, 군정에 특기가 있었던 인물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10월 13일자 자유신문은 이에 대한 각계 인물들의 논평을 게재했다. 여러인물들의 논평을 꽤 고르게 모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는 중립적 입장으로 이해되지만 더러 한민당 계열과 좌익 계열의 성향을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증 평론가 이원조(李源朝)의 입장을 들어보자.

‘인민공화국의 찬부는 우리 인민의 자유의사로 결정될 것이고 어떠한 외부 세력이나 지시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한 데모크라시의 방법인 때문에서다. 연합국은 우리 자주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고 앞으로 그러할 것을 믿기 때문에 지금도 감사와 신뢰의 念에는 추호도 변동이 없다. 그러나 이번 아少將의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로 보면 우리가 신뢰하고 희망하는 정도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만약 인민의 의사로 결정된 인민공화국을 이렇게까지 모욕하고 능멸한다면 이것은 나을까. 각 정당에까지 간섭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바이다. 더구나 전문을 통하여 모욕적 언사는 단순한 동족애만으로서도 앉아 듣기에 불쾌하다. 우리가 신뢰하는 군정장관의 □기가 결코 이러하지 않을 것을 믿음으로 이것은 혹시 오해가 아닌가 의심한다. 하여간 군정관에게 요청할 것은 광범한 언로를 열어 가장 조선을 사랑한 지도 여론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랄 따름이다.’-자유신문 1945년 10월 13일

A.V. 아놀드는 민족자주진영을 대변하던 매일신문 등을 정간시키고, 정당등록제 등으로 결사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좌익활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조선의 건국운동세력, 즉 인민위원회와 민족자주세력에 대한 전면적 탄압이었다.

그는 성명을 통해 민족자주세력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12월 12일에는 해산명령까지 내렸다.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적으로 해산시킨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가 남한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는데 매우 적합하다고 보고, 그 통치기구와 조선인 행정관리들을 그대로 인계받아 통치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에서 하지와 아놀드의 역할을 놓고 "어리석은 놈들"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심각한 문제는 어느 역사학자의 지적처럼 그들이 "게으른 놈들"이라는 데 있었다. 통치 방침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점령 통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면 고문단 구성을 그렇게 '통역 정치' 수준에 묶어놓을 일이 아니었다.

1945년  11월 20일 천도교 강당에서 6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제주도에서는 오대진·김정노·최남식·이운방 등 4명의 대표가 참가한다. 그러나 이 대회에 아놀드가 직접 참석하는 '성의'까지 보였지만 인민공화국의 명칭 중 '국'자를 없애자는 미군정의 제안은 끝내 거절되고 말았다.

‘어떠한 자와 단체라도 어떠한 종류의 경찰, 육해군 군사활동의 소집, 훈련, 조직, 준비 및 경무, 군무국의 관할에 속하는 행동을 행사치 못함. 단 국방사령부 혹은 국방사령관이 인정한 그 권리부여 대행 기관의 서면인가를 얻을 때에는 제외함.’ -재조선 미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28호, 조선군정장관 미육군소장 W.H. 아놀드(1945년 11월 13일)

- 미 군정청, 남한의 건국의지를 꺾다

▲ 총독부 건물 앞에 걸렸던 일본기가 내려지고 미군기 게양.

‘제1조 국가적 비상시기의 포고/4년의 장구한 전쟁에서 승리를 득(得)한 후에 미국 군대는 조선민중의 친우(親友) 및 보호자로 이 땅에 상륙하였다. 조선으로부터 일본군을 완전 또한 영구히 축출하고 일본의 모든 군국주의, 국민주의적 관념을 일소하기로 공언한 목적을 위하여 온 것이다......(중략).......미국군이 진주한 후 즉시 일본이 전쟁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선이 기아로부터 쇠약하여지기까지 그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고갈시킨 것을 발견하였다.

소비품의 생산은 거의 다 정돈(停頓)되었다. 정부의 자금은 대개 횡령 소비하였다. 통화는 고의로 팽창시켰다.  령을 즉시 제정하였다. 조선민중의 복리에 자(資)할만한 일본인 재산은 접수 보관하였다. 기아상태에 있는 지역에 곡물을 반송하였다. 조선 부원(富源)의 다년간 이기적 개발, 그 민중의 압박, 장구한 세월에 일본 압박 밑에 부유(富裕) 또한 진취적인 민족에게 고유한 후생적(厚生的) 산업을 착수키 불능함으로 말미암아 조선민중은 보편된 영양부족, 질병 기타 고난이 목전에 당도한 동기(冬期) 중에 방지할 만큼 물품을 빨리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중략)....... 미국국민은 강대한 국민인 것은 주지하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피등(彼等)의 행운에 대한 자각과 타민족을 그 역경에서 보호코자 하는 의도로부터 생(生)한 진실한 온화성을 유(有)한 온화한 국민이다.

이 때에 당하여 그 친우인 조선민중이 동기(冬期) 중에 기한(飢寒)의 위협을 받게 된 것을 염려하고 있다. 설비, 원료, 노력은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으니 적의(適宜)케 이용하면 고통을 방지할 수 있다. 고로 민중에게 해독을 끼칠 사태를 방지코자 이에 강력한 비상조치를 설정함. 이러한 임시방편은 위기가 소멸되는 대로 즉시 폐기할 것이다. 제2조 노무의 보호/개인이나 개인집단으로서 직업을 순수(順受)하고 방해 없이 근무하는 권리는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것이다. 이러한 권리를 방해하는 것은 불법이다.

공업생산의 중지 또는 감축을 방지함은 조선군정청에서 민중생활상 필요불가결한 일이라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약속과 조건에 대하여 생(生)하는 쟁의는 군정청에 설치된 중재소에서 해결할 것이니 그 결정은 최후적이요, 구속적이다. 문제가 노무중재위원회에 제출되어 합의에 이를 때까지 생산은 계속될 것이다.

제3조 폭리에 대한 보호/민중생활의 필수품을 민중 재력의 한도 이내의 가격으로 공평 분배키를 확보하기 위하여 필수품의 축적과 과도한 가격으로 판매하여 민중의 희생으로 폭리를 취하는 것을 이에 불법이라 포고함. 제4조 민중행복에 불리한 행위에 대한 공중의 보호/좌(左)에 열거한 행위는 이에 불법이라 포고함. (가) 공무에 관하여 조선주둔 미국육군 또는 조선군정청의 직원이나 또는 그 권위 하에서 복무하는 자에게 구두(口頭)나 서면(書面)으로 고의로 하는 허위진술 또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조선군정청을 기만하려 하는 기도. (나) 조선민중의 행복을 위한 조선군정청의 계획에 반하여 행위, 음모, 공갈, 매수 또는 증회(贈賄)로 조선군정청의 명령 또는 포고한 계획을 방애(防碍), 방애하려는 기도 또는 위배. (다) 조선주둔 미국육군 또는 조선군정부에 여하한 형식으로든지 직접 간접으로 협력하는 자에게 반항하게 기율(紀律)행위에 간섭하거나 협박 강제 또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공갈 또는 □취(동맹배척을 포함)하여 민중의 행복을 손상하는 사(事).

 

▲ 노획한 일장기를 들고 기념촬영하는 미군.

제5조 신문 기타 출판물의 등기/언론자유와 출판자유를 유지보호하고 불법 또는 파괴목적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북위 38도 이남 조선에서 천연인(天然人)이나 법인이 담당, 소유, 지도, 지배 또는 처리하고 서적, 소책자, 신문 또는 기타 독물(讀物)의 인쇄에 종사하는 기관은 등기하라 이에 명함. 이러한 등기는 본령(本令) 시행일부터 10일 이내에 완료하고 신생 출판물의 경우에는 그 발행 전 10일 이내에 완료하되 등기서류는 정부본(正副本)을 작성하여 해(該) 기관의 명칭, 인쇄 및 발행장소, 인쇄 및 발행에 종사하는 자의 씨명(氏名), 해(該) 기관을 담당, 소유, 지도, 지배, 처리 기타 관계있는 자의 씨명, 해(該) 기관의 사업, 운영 또는 인쇄물 및 출판물, 각종 인쇄물의 실물대(實物大)의 판, 종류, 형(型)의 모사(模寫)를 함(含)한 현재에 사용하는 또는 장래에 사용할 인쇄출판의 각종 형식, 해(該) 기관의 재정적 후원, 자본, 자금, 재산, 현유(現有) 총자산 및 급박상태에 있는 필요품의 현재고(現在高)와 장래에 취득할 본원(本源)을 시(示)하여 신문서적의 출판사무를 운영유지할 해(該) 기관의 재정적 능력을 반사(返射)한 명세서, 해(該) 기관 또는 그 기업에 재정적 관계가 있는 자의 씨명(氏名) 주소 등을 구(具)하여 등기우편으로 경성(京城)군정청에 제출할 사(事).

 

제6조 벌칙/ 본령의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육군 점령재판소에서 정죄(定罪)하는 동시에 그 소정 형벌에 처함. 제7조 본령의 실시기일/본령은 발포 즉시 시행함. 1945년 10월 30일/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ORDINANCES(USAMGIK) 제19호 1945년 10월 30일

미군정청이 제일먼저 행한 것은 조선의 건국운동세력, 즉 인민위원회와 민족자주세력에 대한 전면적 탄압이었다. 아놀드는 민족자주세력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을 부정했고 해산명령까지 내렸다. 자진해산하지 않은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간부들을 연행해 갔다.

정당등록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좌익성향의 운동단체 또는 민족자주성향의 운동단체들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시켰으며, '인민보', '자유신문', '현대일보' 등 민족적 신문들을 폐간시켰다. 민족주의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인민공화당 중앙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중앙위 사무소를 폐쇄하고, 좌익계열 1천여 명을 검거하는 등  민족자주운동세력의 씨를 말렸다.

▲ 여운형.

특히 1945년 10월 5일 군정장관 고문관에 친일민족반역자 김성수를 임명하였고, 친미성향의 11명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미 군정청의 자문기구격으로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을 출범시키면서 친미우익의 거두인 이승만을 의장으로 임명하였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하지 사령관은 고문단 임명 전날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건국준비위원장을 처음으로 만났다. 며칠 후  아놀드는 건준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실권 없는 고문단, 그것도 한민당이 판을 치는 고문단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여운형은 그후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에 피격되었다. 차 속에는 제주출신 고경흠이 그의 곁에 있었다. 

‘呂運亨은 미군정 당국의 초청을 받아 4일 오전 9時에 비로소 아놀드 군정장관 同 오후 2時에 하지 중장과의 첫 회견을 하였다. 呂運亨은 이미 미군이 상륙 준비로 인천 부근 해상에 있을 때에 白象奎, 呂運弘, 崔謹愚 3氏를 사절로 보내어 하지 중장에 친서를 보냈으나 여하한 곡절인지 이 친서가 수교되지 않고 또한 그 후 하지 중장이 진주한 이래로 呂는 일본인과 결탁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악질의 모략으로 된 중상으로 지금까지 회견이 늦어졌다는데 4日에야 미군은 모든 오해를 풀고 건준위원장의 자격으로 呂運亨에 회견을 요청하여 식량 기타 생산업 운영에 대한 협력을 요망하는 제1차 회담을 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6일

이후 미군정은 친미우익인사들의 보직을 마련하여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하는 등 친미우익세력이 남한의 정치세력으로 부각할 수 있게끔 인위적으로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남한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지배집단으로 존재했고, 친미수구세력들이 또 다른 지배집단으로 자리잡았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지난 반세기동안 남한의 정계에서 총리 2명, 장관 21명, 시장 및 도지사 10명, 합참의장 6명, 육군참모총장 7명, 공군참모총장 4명, 검찰총장 4명, 대법원장 3명, 대법관 8명, 검판사 201명 등이 친일파였다고 하니 미군정의 친일파육성정책은 성공한 셈이다. 물론 이 친일파들이 친미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 미군, 제주도에 상륙하다

 

▲ 거리에 나붙은 미군 환영 벽보.

‘(전략)제6조  조선 제주도지방재판소 임명/조선 광주지방재판소 지청(제주도)은 자(玆)에 이를 폐지하고 그 판검사의 지위는 전일 최후의 장애로 인하여 포기되었다는 이유로 공석 폐지했음을 자(玆)에 포고함. 조선 제주도지방재판소를 자(玆)에 창설함./좌기 각인을 자(玆)에 조선 제주도지방재판소에 지정하고 그 지위에 임명함. 최원순(崔元淳) 판사 겸 소장/양홍기(梁鴻基) 검사장/ 박종훈(朴鍾薰)검사(중략)1945년 10월 11일.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

-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APPOINTMENTS) 제12호, 1945년 10월 11일

제주도의 미군정은 1945년 11월 9일 제59군정중대가 상륙하면서 비로소 실시되었다. 해방 이후 86일만의 일이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군 제58군 병력 5만여 명 가량이 남아 있었다. 그 이전에 미군은 9월 28일 현지 일본군 지휘부로부터 항복을 받기 위해 2대의 수송기와 LST편으로 제주에 진주했는데, 상륙부대는 항복접수팀과 무장해제팀으로 엄격히 구별되고 있었다. C-47 수송기로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38명의 항복접수팀은 그린 대령이 인솔하고 있었으며, LST편으로 제주항에 들어온 무장해제팀은 파우웰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먼저 서울에 입성한 하지 장군은  맥아더 최고사령관에게 "미군 배치가 끝나는 대로 제주도에 무장해제팀과 조사팀을 공수하겠다."고 보고했다. 9월 28일 오전 7시 김포비행장에서 C-47 2대에 분승한 항복접수팀은 184보병부대의 그린 대령을 지휘자로 해서 7사단 대표, 미군정청 참모부, 308항공대, 몇 명의 통역관, 4명의 홍보요원, 6명의 기자, 2명의 통신사 기자, 해군 대표 월든(Walden) 등 총 38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됐으며 오전 9시에 제주에 도착하였다. 비행장에는 7명의 일본관리가 마중 나왔다.

비행장에 도착한 뒤 곧바로 항복조인식을 위해  제주농업학교로 갔다. 오전 10시 45분 항복문서가 영어 3부, 일어 3부씩 만들어져서 일본군 도야마 장군, 하마다, 민정관 센다(도사대리인 千田인 듯)에게 보내지자 6분 만에 사인했고, 문서는 다시 그린과 월든에 넘겨져 2분 만에 사인을 마쳤다.

5만 병력의 항복절차가 단 14분 만에 끝마쳐진 셈이다.  항복조인식이 끝난 뒤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한 시간 가량의 협의가 있었다. 일본군측에서는 거의 모든 탄약과 폭발물은 이미 폭파시키거나 수장시켰고 항공기는 작동불능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 소형 무기들은 세 군데에 분산·보관하고 있으며 일부의 탱크와 대포도 다른 세 군데에 저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제59군정중대는 9월 26일 미국을 출발, 10월 21일 인천항에 도착했으며 제주에는 11월 9일 상륙하였다. 그만큼 행정공백이 길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진주 시점의 병력은 장교 7명, 사병 40명 등 4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정중대의 지휘관은 스타우트(Thurman A. Stout) 소령이었다. 

그는 제주도의 최고자리로서, 일본인이 맡았던 제주도사(島司) 자리에 올랐으며, 1946년 8월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될 때에는 도지사를 맡기도 하였다. 그 직책에 대해서 언론 등에서는 ‘제주도 군정장관’으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제주도 미군정본부는 일제시대의 제주도청(濟州島廳)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스타우트 소령 역시 일제시대 도사 사무실에서 집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인, 한국인 공동 도지사제도가 도입되면서 1946년 2월 박경훈(朴景勳)이 한국인 제주도사로 부임하였다. 스타우트와 박경훈 도사는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한 사무실에 근무했다.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는 것에 관한 시비는 분분하였거니와 이곳 주민들 중 보수진영에서는 당국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도민의 태반은 인위(人委)를 위시하여 도로 승격한 것을 아직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첫째로 본토와 고립됨으로써 식량 기타 물자 교류에 있어 전남으로부터 분리됨을 싫어한다. 그 다음에 하루바삐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하는 그들은 모든 행정구역의 변형을 민족의 총의로 된 우리 정부에 맡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셋째는 도로 승격함으로써 기구가 확대되어 세금이 증가됨을 우려하는 한편, 해방 전에 200여 명이던 경관이 수배로 느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라고 반대한다고 한다. 또한 도로 분리되어 본토와 다른 독특한 시정을 하는 것은 결국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기우에서 나오는 점도 있다고 한다.’ -自由新聞 1946년 12월 19일

- ‘경찰기구는 그 기능을 계속한다’

‘......(중략)....2. 조병옥(趙炳玉) 박사를 조선정부 경무국 경무과장으로 임명하고 그 의무와 직무 수행할 권한을 부여함. 3. 본령은 1945년 10월 20일 야반(夜半)에 효력을 생(生)함. 1945년 10월 20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 -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APPOINTMENTS) 제22호 1945년 10월 20일

‘............(중략).........2. 조병옥(趙炳玉)을 1946년 1월 1일 부(附)로 조선정부 경찰국 조선인 국장에 임명하고 그 직권행사의 권(權)을 부여함.............(중략).......1946년 1월 3일.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APPOINTMENTS) 제64호 1946년 1월 3일

<제주신보>가 1945년 9월 25일자 호외를 발간하였다. 아놀드의 성명내용이다. 아놀드의 성명은  '일제경찰의 군정경찰화'를 확연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①연합국 군 최고사령부 포고 제1호 제2조에 의해 현재의 조선(북위 38도 이남)에서의 경찰기구는 그 기능을 계속한다. ②정치단체, 귀환병단 또는 다른 일반 시민대가 경찰력 및 그 기능을 행사하거나 또는 행사하려는 것을 금한다. ③현재의 경찰기구는 종전의 일본정부와는 전연 관계없이 군정장관인 내 아래서 운영되고 그 조직의 실권은 내가 부여하며, 또한 그 조직은 헌병사령관 쉭크 준장에 직속한다.

그 밖에 ⓸항은 경찰관의 직권을 열거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무기의 휴대, 체포, 분쟁의 진압, 법규 및 질서유지 등을 열거하고 있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을 곧바로 그들의 군정경찰의 골간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들의 점령목표, 즉 남한에 친소정권 수립을 예방하고 이미 전국에 뿌리를 내린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았다. 그리고  일제경찰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찰력을 급격히 늘려 나갔다. 8·15 직후에 일본인 경찰의 철수로 남북한 통틀어 8천여 명이었던 경찰인원은 1945년 11월 중순께 남한만도 1만5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1946년 말에는 2만5천여 명으로 증강되었다. 

친일경찰의 재등용문제는 제주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새 질서가 세워지기를 기대하던 젊은 사람들의 눈에 어제의 '일제순사'가 오늘날 군정경찰복을 입고 활개 치는 모습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미군정시대 제주에 있어서의 일반 민중과 군정경찰의 마찰은 유별난 점이 있다. 그것은 1947년 3월 1일에 발생된 이른바 '3·1절 발포 사건'이전까지만 해도 특기할 만한 충돌사건이 없다가 3·1 사건 이후 극도로 악화된다. 여기에는 민전 등 좌익세력이 주도한 총파업에 맞서 경무부에서 응원경찰과 서청 등을 파견, 예의 '제주도민 80%가 빨갱이론'을 펴면서 대규모 검거선풍을 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

제주에 주재했던 총독부 경찰인원은 101명으로, 이 가운데 한인이 51명, 일본인이 50명으로 분류되어 있다. 한인 51명 가운데는 상당수가 해방 이후에도 제주경찰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5년 말과 1946년 초에 제주경찰서장(당시는 전남 제8관구 경찰청 산하 제22구 경찰서)으로 발령 받은 박형규(朴炯奎)나 김창희(金昌禧)도 일제 순사부장 출신이었다.

8·15 당시 1백명 안팎이던 제주경찰은 4·3 발생 직전에는 5백명 가까이 불어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타도 출신으로 채워졌으며, 월남한 이북 출신도 많았다. 경찰 내부에서조차 제주 출신과 본토 출신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게 갈등이 빚어졌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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