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2)제주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 

-이덕구는 누구인가?

▲ 이덕구.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에서(68-69쪽)

이덕구(李德九, 1920~1949)는 분단시대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며 4·3당시 인민유격대장이다. 조천면 신촌리에서 부유한 지방유지인 부친 이근훈과 모친 김상봉의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  1943년 관동군에 입대했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얼굴은 살짝 곰보이며 미남형이었다. 늘 목소리가 컸으니 이는 귀국 후 미군정에 의해 구인(拘引)되어 고문을 받을 때 고막이 파열되어 귀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1948년 제주4 ·3이 발생하자 입산하여 인민유격대 3·1지대장으로 제주읍· 조천면· 구좌면에서 활동했다. 김달삼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간 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국군2연대가 최강공책으로 소탕이 이루어지고 산부대가 궤멸 직전에 이르러 해안 가까이 하산한 것을 주민의 신고로 토벌대에 의해 1949년 6월 7일 16시 화북지구 제623고지에서 사살되었다. 현지에서 연락병 2명을 생포하고, 2명이 귀순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선 '몸이 날래 지붕을 휙휙 넘어다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제주를 떠나버린 김달삼과 대비하며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정문 입구에 그의 시신을 걸쳐 세워 전시하였다.

한편 북한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에서는 그에게 국가훈장 3급을 서훈(敍勳)하였다. 북한은 1900년에 조국통일상을 제정, 이를 이덕구에게 수여하고 소위 애국열사능(愛國烈士陵)에 그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이 자리에는 이좌구(李佐九)의 아들(이덕구의 조카) 등 9명이 참석했다.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전략) 13. 제주도로부터 들어 온 추가보고는 특히 반란군들에 대한 군대의 견실한 활동과 공격을 대비하는 체계와  군·경의 우수한 협력에 대한 언급이 있다. CIA는 훌륭히 업무를 수행. 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은 강력하고 적극적임. 활동상황은 다음과 같음.  10월 28일: 50명의 게릴라 공격을 격퇴했음. 경찰 4명 사망, 5명  부상. 최소한 3명의 게릴라 사망. 여러 돌 장애물 도로에 설치. 제9연대장은 17명의 부하들을 공산주의자 세포혐의로 체포. 10월 29일: 군대와 게릴라간의 전투, 약 100명에서 135명 가량의 게릴라 사망 (중략). 18. 10월 29일에 사살된 게릴라 지도자 이덕구의 신원이 확인됨. 사망 당시 게릴라들 중 가장 고위 지도자라고 일컬어짐.(후략)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년 11월 8일

-무장대의 조직과 편성

 

 

▲ 제주시 회천동에 있는 이덕구의 묘비.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명령했다(CHEJU-DO, Communists Ordered To Riot Between Middle February, 05 March)=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이 노획해서 번역한 문건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또한 문건에는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몇몇 남로당 간부들이 새벽 3시에 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을 피해 달아난 것으로 여겨지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106명이 체포되었고, 같은 날 정오 이전에 63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등사기와 다량의 서류가 압수되었다.’

-방첩대 정보요약, 2월 5일, C­3

‘폭동 지령 문건이 발견된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합과 관련하여 1월 22일 체포된 106명 외에 1월 26일까지 좌익분자 115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총 연행자 221명 중에서 63명이 경찰의 심문을 받은 다음 방면되었다. 방면된 자들은 공산주의자인 남로당 당원이었다. 미방면자들의 정치적 성향은 보고되지 않았다.’-방첩대 정기보고 제32호, 경찰 보고

‘한국군은 공세를 취하여 폭도들을 은신처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지난 3월 마지막 3주는 1947년 3월 1일 이래 가장 평온했다....(중략).....폭도 지도자/김시원(KIM Shi Won), 35세, 공산당 지도자, 군대 경험이 없는 제주도 토박이/이덕구(LEE DUK KOO), 32세, 무장폭도 부대 지도자, 한 때 일본육군에 복무/김평호(KIM Pyung Ho), 전 한국군 제9연대 장교. 탈주 후 좌표 958-1138 지역의 산악지역에 위치해 있는 폭도 훈련학교 지휘자가 됨.’-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1949년 3월 30일~1949년 4월 1일 (No. 1097, 1949. 4. 1. 보고) 

1948년 1월 22일 새벽 3시 경찰이 남로당 조천지부 불법집회를 급습, 106명을 체포한 것을 시발로 1월 26일까지 모두 221명을 검거했다.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는 내용의 문건 등을 압수했으며 연행자중 남로당원 63명을 방면했다.  

1·22 검거사건 이후에 남로당 검거작업은 지속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안세훈을 비롯해 김유환, 김은환, 김용관, 이좌구, 이덕구 등 거물급들이 경찰에 검거됐다. 무장투쟁의 핵심인 김달삼도 경찰에 붙잡혀 연행도중 도주했다. 그러나 남로당 조직을 전면으로 노출시킨 이 검거선풍의 사후처리는 흐지부지됐다. 

폭동음모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지 못한데다, 1948년 3월에 이르자 5·10선거를 앞둔 미군정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치범에 대한 대대적인 특사령을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주도 남로당 거물급 인사들도 ‘4·3’발발 이전에 모두 석방됐다.

그럼에도 당 조직의 폭로는 단순히 남로당 조직이 노출됐다는 사실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제주도당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로당 조직원 사이에는 조직의 와해는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긴장감이 팽배했다. 결국 이런 위기의식을 부추긴 강경파의 주도에 의한 지도부의 개편작업은 바로 무장투쟁을 촉발하는 한 동인(動因)이 됐다.

그렇다면  무장대는 어떻게 조직·편성되었는가.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는 무장대의 조직과 편성에 관해 시기별로 그 변천과정을 소개했다. 무장봉기가 시작되기 전 고문치사 사건 등이 벌어지자 각 면리(面里)에 자위대(自衛隊)가 편성되었으며, 한라산 등 산악과 밀림지대 등 각 지구에 유격대(遊擊隊)가 편성됐다는 것이다.

1948년 4월 3일 직후에는 무장대를 일층 강화 발전키 위해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열렬한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의 소유자 30명씩을 선발하여 ‘인민유격대(속칭 인민군)’를 조직하였으며, 또한 그의 기동성과 민활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하였다.

연대구분은 △제1연대=조천·제주·구좌면-3·1지대(이덕구) △제2연대=애월·한림·대정·안덕·중문면-2‧7지대(김봉천) △제3연대=서귀·남원·성산·표선면-4·3지대(?)”로 되어있다. 무장대 구성을 무장봉기 직후 시점에서 정리하면, △본격적으로 입산해 활동을 하는 정예의 ‘인민유격대’(각 면에서 30명씩) △각 행정단위에서 활동하는 ‘자위대’(10명) △정찰 임무를 하는 ‘특공대’ △각 지방 상황을 감시하는 ‘특경대’ △유격대 사상교육을 하는 ‘정치 소조원’등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도 당부 간부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도 당부’책임=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도당 군사부’책임=김달삼(본명 이승진), 김대진, 이덕구 △총무부=이좌구, 김두봉 △조직부=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농민부=김완배 △경리부=현복유 △선전부=김은한, 김석환 △보급부=김귀한 △정보부=김대진 △부인부=고진희

-이덕구의 선전포고

‘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쫒겨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임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

‘제주사태 진압에 혁혁한 무훈을 세운 국군 제9연대장 겸 당지 경비사령관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최근의 전황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폭도의 주력은 붕괴되었으며 그들의 지도자 김달삼을 대신하는 폭도의 총지휘자 이덕구가 10월 6일 전투에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사살된 아래 그들의 소수잔당은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며 닥쳐오는 추위에 떨고 있다. 그들은 최후발악으로 양민을 강압하여 초로전술을 쓰려고 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압수한 지령서에도 이 의도가 발견되었으며 중에는 ‘우리들은 지금 막다른 골목에 들어있다’는 문구도 보였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발악을 허락치는 않을 것이며 폭도배들의 완전섬멸은 목전에 박두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기사 국제신문․대동신문․독립신문․조선일보․대동신문․한성일보 48. 11. 12)’ -자유신문 1948년 11월 12일

‘이대통령은 제주도 시찰담을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재흥(劉載興) 대령이 지휘하는 3,100명 육군 장병의 용감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공산반도 2,800명 이상을 포로로 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주도내 게릴라 부대 공격전은 종결을 보게 되었다. 제주읍 근교에 있는 포로로 된 소위 ‘산사람들’ 2,500명이 수용되어 있는 전재민 수용소에서 그들을 위로하는 한편 도민을 격려하였다. 도내 공산주의 지도자 김영환, 이덕구(李德九) 등은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의 추종자들은 대개가 무장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들은 산중 바위 사이에 은신하고 있으나 육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있으므로 소탕전은 근근 종료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고문 윌터 T. 하버러 중좌와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씨는 대통령 부처(夫妻)의 도내 시찰시에 수행하였다. 동일 대통령은 미(2줄 누락)대사의 노력에 대하여 크게 감사하는 동시에 이 원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일부분인 제주도민도 큰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후략)’-조선중앙일보 1949년 4월 12일

‘【본사 이월준 기자】폭도를 소탕하고 있는 일선을 위문하고자 함(咸)연대장의 안내로 선무공작대 위문단과 한라산 주둔 부대로 향하였다.....(중략)........ 그리고 체포된 폭도한테 다음과 같은 산생활 상태를 들었다. “현재 총지휘자는 이덕구(李德九․37․도당 부위원장)이며 무장폭도는 약 150명, 비무장폭도는 800명 정도이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는 기관총, M1, 카빈, 권총, 수류탄 등이고 탄환은 여기서 제조한다. 무전기 라디오 등도 있었는데 밧데리가 없어 못쓰고 있다. 그러므로 작년 말까지 도외지와 연락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연 두절되었다 한다. 그리고 산에서는 *이라는 4면지 일간신문과 '인민'이라는 수시 발행의 간행물이 있다. 또 수첩을 보았는데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작은 글씨로 치밀하게 ***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활동동태의 그래프까지 기입되어 있다. 식량은 종전까지 무장폭도에는 1일 4홉씩 1개월 분을 주고 비무장폭도에는 1일 1홉 5작씩 10여일 분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갈되어 순조롭지 못하다. 폭도의 조직은 기동대, 별동대, 교육대로 되어 있고 기동대는 국군상대, 별동대는 경관상대, 교육대는 훈련과 식량보급 등의 활동을 하며 전까지는 민애청 여맹 농위(農委)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무장응원대 속으로 개편되었다 한다.” 다음 무엇보다도 긴급한 것은 이재민에 대한 구제와 평화로운 섬으로 건설하여 가는데 적극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3월말 현재 피해조사를 보면 폭도의 생명ㆍ재산을 제외하고도 주택 1만 8,000호, 인명 사망 1,670명 외 중경상자가 무려 3,560여 명에 달하고 있다. 8만 7,000여 명에 달하는 이재민은 글자 그대로 돼지우리처럼 토막굴에 건초를 깔고 나무** 해초로 그날 그날을 연명하는 비참한 현실이다. 학교에 있어서도 국민학교 96교 중 45교, 중학교 11교 중 2교가 소실되었으므로 2부, 3부제로 창고 등을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고 교원 역시 학생 300~400명에 5~6인 비율이다. 그런데 한편 사회부에서 구제물자 소맥 1만 6,000석 침구 8,000점, 광목 1만마가 구입되었다 하나 이것은 코끼리의 *무는 편이다. 주택은 한라산에 무진장으로 있는 재목을 활용하는 한편, 2만동 건축재를 당국에 요청중이라 한다. 구호와 동시에 생업장을 제공하는 것이 또한 급선무다. 전에는 1만 5,000여 명이나 되는 해녀가 작업을 하여 생계를 도모하여 왔는데 지금은 5,000~7,000명밖에 없고 근해어업도 통행금지 자재난으로 총스톱 되고 있다. 그리고 육산인 우마도 반이상이 감소되어 일대 경종을 울리고 있는데 다행히 도당국에서 도외 반출을 절대 금하고 있으므로 불행중 다행이다. 요컨대 폭도진압은 시간이 해결할 것은 기정사실이나 앞으로의 우리의 과업은 이재민에 온정의 구호로 시급히 실시할 것과 선무공작을 적극 추진하는 것만이 오직 해결의 초점이 될 것이다.’ -자유신문 1949년 4월 19일

김달삼이 월북하자 이덕구가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직을 맡았다. 그가 사령관이 된 후, 지서 습격과 경찰관을 비롯한 인명 살상이 점점 늘어났다. 그는 1948년 9월 15일을 기점으로 경찰과 국군, 우익인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경비사령부를 설치, 토벌작전을 단행하였다.

그 후  10월 24일, 이덕구는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선전포고 이후  인민유격대가 국군9연대 6중대를 공격하여 국군이 21명이 사망하는 사건 11월 2일에 발생한다. 인민유격대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다. 정부에서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국군은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948년 11월 17일 이후 12월 31일까지의 계엄선포기간에는 제9연대의 토벌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반주민이 체포, 구금되거나 현장에서 즉결 처형되는 사례가 급증하였다. 많은 사람이 계엄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언도자는 후에 처형되고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육지의 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하였다.

당시 무장대에 협조하지 않으면 무장대원들에 의해, 토벌군의 말을 듣지 않으면 토벌군에 의해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다. 또 토벌군이 무장대 차림으로 마을에 들이닥쳐 좌익들을 죽이는가 하면, 무장대가 토벌군복을 입고 나타나 토벌군 행세를 하며 우익들을 죽이니, 제주도민은 숨이 막히고 살 길이 막막했다. 무장대원들의 공격과 군경의 강경 토벌로 제주도민이 당한 피해는 너무도 참혹했다. 

이덕구가 지휘하는 주력부대는 기습 공격을 가하고, 제주읍을 급습해 도청을 방화하고 지서를 습격하면서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이미 대공세 이후 무장대원이 1백여 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유격대는 '최종항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토벌작전이 강화되자 이덕구 부대에서는 많은 이탈자가 생겨 조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주읍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갖추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받음으로써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다. 1949년 3월에 설치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인 지 약 2개월 반 만인 5월 15일에는 사령부를 해체해도 될 만큼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한라산 지구 공비들은 설 자리를 잃은 채 자멸해 갔으며, 특히 이덕구가 이끈 인민유격대가 우연히 진압군과 정면충돌한 사건인 녹하악 전투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녹하악 전투에서 이덕구가 진두지휘하는 공비주력이 토벌작전 부대에 의하여 거의 섬멸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1. 민간인 소요/ (1) 제주도의 게릴라 활동/이 기간 게릴라에 대한 경비대의 강력한 토벌작전으로 게릴라 대원이 약 146명 사살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났다.  경비대는 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여 제주도 인민유격대 제2인자인 이덕구(Lee, Duk Soo)를 사살했다. 많은 양의 탄약과 무기, 피복 등이 게릴라로부터 압수됐다. 경비대 사상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몇몇 추가보고에 따르면 게릴라는 경찰지서 4곳을 공격했고, 우익인사 2명을 공격했다. 그 결과 경찰 4명과 우익인사 4명, 게릴라대원 2명이 숨졌다. (하략)’-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주간정보요약(G-2 Weekly Summary)1948년 10월 29일~1948년 11월 5일 (No. 164, 1948. 11. 5. 보고)

‘동해안 방면 전투와 제주도 사태 수습에 있어 9일 국방부 보도과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과를 발표하였다......(중략)...... 그리고 제주사태는 제2연대의 맹활약으로 말미암아 소기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 도민은 일로 평화 건설에 총진군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아직 45명의 잔도가 산중에 출몰하고 있다는 것을 탐지한 소재 국군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7일 하오 4시경, 623고지에서 제주도 공산군 총사령 이덕구(李德九)를 사살하는 동시에 이(李) 사령의 연락병 2명을 체포하고 2명의 귀순자가 있었는데, 이것으로서 제주도의 소탕전은 완전히 종식을 지은 셈이라고 한다.(같은 기사 경향신문․국도신문․자유신문․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49. 6. 10) -동아일보 1949년 6월 10일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

 

▲ 이덕구 시신.

‘국방부 보도과 5일 발표에 의하면 지난 10월 28일 제주도 고성지구 작전에서 소위 제주도 인민군 사령 이덕구(李德九·32)의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그는 전(前)제주인민군 사령 김달삼의 참모장 격으로 김달삼이 북조선 인민공화국 대의원으로 당선되어 평양에 가자 이덕구는 제2대 인민군사령으로 임명되어 모종 작전을 계획하다가 국군의 급습으로 사살되었는데 동일한 장소에서 성명부지(姓名不知)의 인민군 대정지대장(大靜支隊長) 등 다수 간부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한다. 한편 국방부에서는 이것으로 제주도 소요사건도 일단락을 지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같은 기사 경향신문․동아일보․서울신문․자유신문 48. 11. 6)’

-국제신문 1948년 11월 6일

‘<제주발 합동>제주도 반도사령관 이덕구(李德九)는 지난 7일 경찰부대에게 사살되었다. 즉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金英柱)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지난 7일 오후 4시경 속칭 작은가오리 부근 정글 속에서 반도사령관 이덕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보신부하 1명을 포로하였다 하는데 동시 이덕구 사체는 방금 제주경찰서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다.’-東光新聞 1949년 6월 11일

‘한국군 사령부는 6월 10일 제주도의 무장폭도 사령관 이덕구를 6월 7일 제2연대의 작전 중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경찰보고에 따르면 무장폭도 부사령관 김대진도 6월 10일 경찰에 사살되었다. ’ 1949년 6월 13일~1949년 6월 15일 (No. 1128, 1949. 6. 15. 보고)

이덕구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유격대를 지휘하였으나, 대규모화된 토벌대의 진압에 결국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결국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비밀리에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자수를 권하였으나 경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도 집중 사격을 하여 그의 몸은 벌집같이 되어 있었다. 

1949년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이덕구의 시체가 전시됐다. 이덕구의 시체는 반란의 두목이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시 효수돼 전봇대에 걸렸다. 그의 시체 옆에는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를 글귀가 붙어있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의 장두들이 효수되어 내걸리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전통을 잇게 되었다. 시신은 하루 정도 전시되었다가 인근 남수각이라는 냇가에서 화장되었으나, 다음 날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유골이 빗물에 떠내려갔다.

-뜻 있는 젊은이들이 찾는 ‘이덕구 산전’

 

▲ 이덕구의 가족묘. 훼손된 비석은 토벌대에 의해 파손된 이덕구의 할머니 묘.

‘스무엿새 4월의 햇, 살을 만지네/ 살이 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가죽나무 이파리 사시나무 잎 떠는 숲/ 가죽 얇은 내 사지 떨려오네// 울담 쓰러진 서너 평 산밭이/ 스물아홉 피 맑은 그의 집이었다 하네/ 아랫동네를 떠나 산중턱까지 올라온/ 아랫동네 사기사발과 무쇠솥이 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 그 숲에나 잡목으로 서,/ 살 부비고 싶었네/ 그대 한 시절에 무릎 꿇은 것, 아니라/ 한 시절이 그대에게 무릎 꿇은 것, 이라/ 손전화기 문자 꾹꾹 눌렀네/ 산벚나무 꽃잎 떨어지네/ 음복하는 술잔 속 그 꽃잎 반가웠네/ 그대 발자국 무수한 산밭길의 살비듬/ 어깨 서서히 데워주었네/ 나 며칠 북받쳐 앓고 싶었네’

-정군칠의 시 ‘이덕구 산전’

‘우린 아직 죽지 않았노라/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 내 육신 비록 비바람에 흩어지고/ 깃발 더 이상 펄럭이지 않지만/ 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 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 까마귀 소리 사이로/ 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 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 돌틈새 나무뿌리 사이로/ 복수초 그 끓는 피가/ 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 우리는 싸움을 한번도 멈춘 적이 없었노라’ -   김경훈의 시 「이덕구 산전」 전문

‘이덕구 산전’은 속칭 ‘시안모루’라는 곳이다. 1948년 겨울부터 1949년 봄까지 봉개리 등의 주민들이 피신해서 지냈던 곳이다. 그 겨울 동안 이덕구 부대가 이곳에 잠시 주둔했었고, 이곳이 이덕구 최후의 장소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이덕구 산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4·3유적지 중에서 지명(地名) 앞에 인명(人名)이 붙는 경우는 ‘이덕구 산전’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박박 얽은 그 얼굴 덕구 덕구 이덕구 장래 대장고심’, 이덕구! 제주4・3의 대명사이면서도 제주4・3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인정은커녕 유족들이 희생자로 신고도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금기시된 인물. 일가족이 전멸되고, 남과 북 그리고 제주도에서조차 완벽하게 버림받은 가장 처연한 비운의 혁명가. 그는 1949년 6월7일 오후 4시쯤 속칭 작은 가오리오름 부근에서 최후를 맞는다. 배신한 부하들이 끌고 온 경찰들과의 교전과정에서 자결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고 있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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