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3) 반대파를 다루는데 독단적인 유해진

 

▲ 1948년 5월 21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원들이 소련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제주도지사 후임은 유해진(柳海辰)씨로 결정되어 4월 10일 발령되었는데 씨(氏)의 경력은 여좌하다. 1933년 일본 중대(中大) 법학부 졸. 계속하여 3년간 법리학을 연구. 1945년 국민당 간부에 피선. 1946년 한국독립당 농림부장에 피선되어 금일에 이르렀다.’(같은 기사 경향신문․중외신보 47. 4.13)-제주신보 1947년 4월 14일 

‘1. 각 소속관서의 관리임명을 좌(左)와 같이 공포함. 유해진  제주도지사   1947년 4월 10일
(중략) 2. 각 소속관서의 관리해면(解免) 일부(日附)를 아래와 같이 공포함. 박경훈  제주도지사  1947년 3월 12일.(중략) 1947년 8월-남조선과도정부 임면(任免)사령(APPOINTMENT : REMOVAL LIST :SKIG) 제1호 1947년 12월

유해진(柳海辰, 1899~1950)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석전리에서 태어났다. 서울중동학교를 거쳐 일본주우오(中央)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해방이 되자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과 함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다가, 안재홍이 미군정청 민정장관일 때 제주도지사로 임명되었다. 초대지사 박경훈에 이어 1947년 4월 10일부터 1948년 5월 27일까지 재직하였다. 

안재홍은 유해진을 도지사로 추천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제주 땅에 좌익들이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하고 민생과 치안 유지에 모든 힘을 기울여달라”고 당부했다. 유해진은 부임하면서 “나의 지향하는 바는 극우 극좌를 배제하고 중앙노선에 입각한 정치이념에서 우러난 행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극우파’라고 표현될 정도로 반대파를 척결하는데 앞장섰다. 

유해진은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밤에는 지사관사 주변을 경비했다. 제주4·3 이전까지 5백~7백명 가량의 들어왔는데 일자리가 없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강매하면서 테러와 폭행을 일삼아 제주4·3 발발 원인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유 지사는  관공리의 숙정작업부터 손을 대었다. 총파업에 가담하거나 주도했던 관리들을 가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숙정작업은 도청뿐만 아니라 군청, 경찰, 운수, 체신 등 전 행정기관으로 파급됐다. 교육계에도 불었다. 공직사회에는 날로 빈자리가 생겨났다. 이런 공백을 주로 이북출신으로 채워갔다. 수뇌부 인사에서 제주출신은 완전히 배제했다.  

당시 집회 허가권은 도지사가 갖고 있었다. 주민과의 첫 충돌은 1947년 7월 말 한림면 명월리에서 발생했다. 우익청년들을 동원, 하곡 수집에 나섰다가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은 것이다.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명월리 충돌사건에 대하여 “유 지사가 한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두번째 사건은 1947년 8월 8일 안덕면 동광리에서 발생했다. 마을 주민 50여 명이 하곡 수집 독려차 이장 집에 머물고 있던 공무원들을 상대로 할당량을 조정해 줄 것을 요구하다가 언쟁 끝에 공무원 3명을 집단 구타했다. 

유해진 지사는 6척 장신에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행동파여서 주위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유해진 지사를 암살하자는 삐라까지 나돌았다. 미24군단 정보보고서는 CIC의 보고임을 전제, “극우파(an extreme rightist)인 제주도지사는 좌익분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그의 암살을 요구하는 삐라가 여러 장 뿌려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지 경찰에서 빌려온 권총을 늘 옆에 끼고 잤다는 일화도 있다.

1948년 제주4·3이 발생한 이후 4월 28일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협상이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5월 27일 유해진은 해임되었다. 한국전쟁을 만나 귀향했으나 진안에서 북한군에 붙들려 1950년 8월 15일 전주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전략)보고에 따르면 제59군정중대와 제주비행장의 보병초소를 잇는 전화선이 절단돼 통신이 끊겼다. 전화선은 도난 당하지 않았지만 다른 동기도 드러나지 않아 사보타주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현재 이 사건은 조사중이다. (3) 암살/한독당의 극우파인 제주도지사는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히 떨어지고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많은 삐라의 주인공이 되어 왔는데, 일부 삐라는 그의 암살을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육군 971방첩대 (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주간정보보고(CIC Weekly Activities) 1947년 8월 7일 (제16호)

‘4월 3일에 돌발하여 꼬박 석 달 동안 주고받는 피의 응수로 처참하던 제주도가 이제야 겨우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그동안 폭도들이 파면을 요구하던 유(柳)도지사가 바꾸어졌고 경찰청장이 정직처분을 받은 후 제주출신의 인사가 새로 오게 되고 국방경비대 박대령이 암살을 당하는 등 폭동 이면의 변모도 적지 아니하였다......(중략)....... 그러나 폭동이 지나간 뒤의 이곳에 다른 불안이 대치되고 있으니 사형(私刑)을 자행하는 관민간의 복수전이다. 기자단 일행이 일반 세화(細花)부락에서도 일부 경관이 휴가를 얻어 경관가족 친척에 대한 가해혐의자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소위 복수 사형을 가하다가 상부에 발각되어 엄중 단속을 받고 있는 일단이 있다. 이러한 복수전의 희생이 되었는지 부락민 한 사람이 이유 모르게 사망하자 자살이냐 타살이냐 또 하나의 고통에 부락의 공기는 전전긍긍하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17일

- 유해진과 서북청년단 

▲ 서청단원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도지사 유해진씨는 국방경비대 제9연대(모슬포)의 요청에 의하여 총무국장 서무국장 등을 대동하고 지난 6일 하오 2시부터 동 제9연대 □□□에서 ‘청년 무인에게 소(訴)함’이라는 연제로써 약 1시간에 한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였다한다.’ -제주신보 1947년 9월 10일

‘과반 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서 유도지사를 비롯한 유지 약 20여명이 모여 군사후원회 준비회합을 가졌는데 오는 19일 군사후원대회를 개최할 것이라 하며 동회 목적은 군사일반에 대한 후원이라 한다’ -제주신보 1947년 10월 12일

‘경찰후원회 결성식에서 선출된 역원은 여좌하다. △회장 홍순용(洪淳容)씨 △부회장 백형석(白亨錫)씨 강성익(康性益)씨 △이사 이윤희(李允熙)씨 박우상(朴雨相)씨 윤성종(尹性鍾)씨 홍순재(洪淳宰)씨 김의현(金宜鉉)씨 최남식(崔南植)씨 오창흔(吳昶昕)씨 조대수(趙大秀)씨 김희수(金希洙)씨 부기선(夫基善)씨 김신현(金信鉉․애월면)씨 박창희(朴昌熙․한림면)씨 김임길(金壬吉․대정면)씨 김봉규(金奉圭․안덕면)씨 이기후(李基厚․중문면)씨 강성건(姜成健․서귀면)씨 정한익(鄭漢益․남원면)씨 송권은(宋權殷․표선면)씨 김성은(金性殷․성산면)씨 김대홍(金大洪․구좌면)씨 김문규(金문奎․조천면)씨 △간사 최제두(崔濟斗)씨 홍종언(洪宗彦)씨 김온희(金溫熙)씨 박태환(朴泰煥)씨 △고문 유해진(柳海辰)씨 최원순(崔元淳)씨 박종훈(朴鍾壎)씨 김영배(金英培)씨 김영진(金榮珍)씨 양치순(梁致珣)씨 김문희(金문熙)씨 김근시(金根蓍)씨 박명효(朴明效)씨 그리고 거(去) 20일에는 읍사무소 읍장실에서 경찰후원회 규약수정위원이 회합하여 동 규약을 수정하였다 한다.’ -제주신보 1947년 10월 24일

‘바야흐로 민족 존망의 간두에 다다른 이때 도지사 유해진씨를 중심으로 일찌기 현안 중에 있던 민독당(民獨黨) 본도 지부 결성준비위원회는 거(去) 12월 6일 하오 2시 반부터 창덕여관에서 유(柳)도지사를 비롯한 각계 인사의 참집하 우국의 지정(至情)이 울발(鬱勃)한 분위기 속에 막을 열었다. 벽두 당기배례(黨旗拜禮)와 광복선열에 대한 묵상이 있은 다음, 공성수(孔性洙)씨 등단하여 “위급을 고하는 민족의 비상시에 처하여 우리는 대외적으로 미소각축이 거익(去益) 심각화하는 객관적 정세의 불안에 거족적으로 대처하고 대내적으로 좌우 알력으로 인한 주체□ 약체의 미비를 물리침으로써 현단계의 우리의 □□목적인 민족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대동단결해야 한다. 원시(元是) □□당 활동에는 국가 통치란 전제 조건이 □□불가결한 □ 우리는 아직 필요한 전제조건을 구□(具□)치 못했음으로 민족 운명을 전□(展□)함이 현하 정세가 요청하는 당연한 과제다”라는 민독당(民獨黨)의 탄생 의의를 천명하는 개회사가 있어 열렬한 기백이 점고(漸高)하는 가운데 다음 안원보(安元輔)씨의 중앙 민독당 발족 이래의 경과보고 및 동당 선언 □□□책 낭독, 동당 중앙 진영 소개, 동당 제1회 중앙집결의문(中央執決議文) 낭독 등이 끝나자 뒤이어 임시 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최남식(崔南植)씨가 임시의장에 피선되어 □의 사항을 토의했는데 각각 여좌히 결정을 보고 하오 5시 폐회하였다. 준비위원 최남식(崔南植), 안원보(安元輔), 공성수(孔性洙), 고경화(高京和), 강승□(姜承□․대정) 이상 5씨.결성대회(12월 21일)’-제주신보 1947년 12월 8일

서북청년단(약칭 ‘서청)은 제주4·3사건에서 가장 악명을 떨쳤다. 1946년 초 북한 정권이 친일파 숙청작업과 토지개혁에 나서자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월남해 만들었다. 북한의 체제개혁에 의해 피해를 입고 내려온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므로 남한에 연고를 둔 청년단체들보다 반공투쟁에 더욱 극렬하게 참여했다.

월남한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출신 청년들을 주축으로 1946년 11월 선우기성을 단장으로 창립되었다. 미군정은 각 지방마다 서북청년회 조직원들을 파견한 후 정보원 역할을 맡겨 그 지역 좌익 세력들을 색출하는 데 활용했다. 특히 생계 지원 없이 무조건 제주도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현지 조달’을 위해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는 등 주민들을 압박했고, 그 악행이 날로 심해져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제주4·3 진행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국가의 물리력을 보완하는 사설단체 수준을 넘어 준국가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서청이 제주도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1947년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던 시기다. 경호원으로 서청단원 7명을 데리고 왔으며, 그해 11월 서청제주도단부(위원장 장동춘)가 발족했다. 

제주4·3 이전까지 제주에 파견된 서청단원의 수는 제주읍 300명, 각 면마다 40~50명씩 총 760여명이다. 그는 서청단원들을 경찰, 행정, 교육계에 적극 임용하였고, 5백여명의 서청단원들이 경찰로 임관돼 토벌전에 나서게 된다. 1948년 11~12월 사이에는 서청단원 최소한 1천여명이 경찰이나 경비대 옷을 입고 추가로 투입됐다.

서청대원들은 군경의 신분으로 최일선에 나서서 토벌전을 수행했다. 이들에게 제주도는 남한을 평정한 이후 남은 마지막 평정 대상지였다. 법에도 없던 경찰보조기능이 부여되고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아래 백색테러가 노골화됐다. 

 

▲ 제주도 토벌에 나섰던 경찰과 서청단원, 군인을 격려하는 이승만.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 잡혀간 이들을 구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제주4·3이 비극적인 성격을 갖게 된 데에는 서청이 제주에서 보여준 야만성에 원인이 있다. 야만적 폭력을 행사한 서청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4·3진상규명 과정에서 공식적인 언급조차 찾기 어렵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넬슨 특감찰보고서』에 나타난 유해진 지사

‘a. 정치상황은 건실하거나 안전하지 않다. 지사는 혹독한 독재적 방법이나 극우파의 힘을 사용해 왔다. b. 유 지사는 반대파를 다루는데 무자비하고 독단적이다. c. 유 지사는 모든 종류의 대중적 회합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다시 획득하려고 한다. d. 좌익들은 지하로 잠적해 활동하고 있다. e. 좌익은 유지사의 통치 하에서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f. 지사는 1947년 8월 15일 시가행진 중에 경찰을 사열했지만 경비대를 사열하지는 못했다. g. 유 지사 재임 동안 테러행위가 증가했다. h. (주민들이) 좌익에 동조하게 된 것은 경찰에 책임이 있다. I. 본토 경찰이 도내 경찰 최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j. 면 지역마다 식량배급량이 다르다. k. 식량배급표는 배급받는 주민들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면장실에 보관돼 있다. 그 결과 정치인들이 마음대로 식량배급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m. 제주도 식량창고에 10~20%만이 채워져 있는데도 제주도식량사무소에서 구입한 곡식은 야외에 보관돼 있다.  n. 지사는 각 마을에 1만 4,000석의 하곡을 남겨둠으로써 중앙식량행정처 규정 제6조를 위반했다. o. 지사는 정부재산을 보수·유지하지 않음으로써 곡식과 식량을 적절하게 저장하고 보호하지 못했다. p. 전라남도에서 들여올 3만 석의 1947년산 추가분 미곡을 적절하게 보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사는 미곡 반입량조차 모르고 있었다). q. 지사는 건축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군정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대나무가 도착하자 하역을 거절했다.r. 지사는 대나무가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필요로 하는 양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 여러 형태의 주택이 1948년 2월 20일 현재 건설 중에 있다. 제주읍에 주택 100여 채가 건설되고 있다. s. 지사는 대나무를 제주항에 하역한 뒤 제대로 보관하지 않았다. t. 도청 차량기지는 도청에서 쓰도록 넘겨받은 미군 트럭들을 유지·보수하지 못했다. u. 1947년 2월 19일 현재 제주유치장에는 죄수 365명이 있었다. 죄수 35명이 약 10×12피트(3.04m×3.65m : 역주) 정도 되는 한 감방에 가득 수용돼 있다. 감찰관이 유 지사와 동행해 관찰했다. 감찰하는 동안 죄수를 실은 트럭 2대가 추가로 유치장에 들어왔다. 지사는 그들 거의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밝혔다. v. 지사와 그의 참모들은 도정(道政)업무를 미 고문관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유해진 지사 임기 동안 도정업무는 비밀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한국인들에 의해 이뤄졌다. w. 감찰관이 실시한 도립의원에 대한 감찰은 도 보건후생국 고문관 앨런 리(Allen H. Lee) 중위와 보건후생국장 송 박사(역주: 송한영)가 동행해 이뤄졌다. 제주도의 유능한 한국인 의사 2명은 지사의 지시로 해임됐다. 지사는 1명을 좌천시켰으며 그는 결국 사표를 냈다. 이와 관련해 다른 의사 1명은 동조 사직했다. 감찰 당일 병원에 의사가 배치되지 않았다. 직원 42명과 환자 12명만 있었다. 환자 가족들은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병원은 불결했다. 병실은 매우 지저분했고 바닥과 가구는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수술실도 불결했고 수술대 가까이 피묻은 천들이 놓여 있었다. 장비는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았으며 어떠한 감독이나 지시도 없었다. 송 박사는 ‘위쪽 북쪽’에서 온 의사 3명이 도립의원에서 일하기 위해 제주도로 오고 있다고 밝혔다.’-주한미육군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특별감찰보고서(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 제주도 정치상황/작성자 : 로렌스 넬슨(Lawrence A. Nelson) 중령(주한미육군사령부 군정청 특별감찰관) 특별감찰보고서- 제주도지사 유해진(1948년 3월 11일) 1947. 11. 12~1948. 2. 28

‘6. 유해진 지사는 지사로서 도정업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능력함을 드러냈다. 그는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는 쓸데없는 시도를 해왔다. 그는 좌파를 지하로 몰고 갔으며 결국 그들의 활동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좌익세력의 숫자와 동조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7. 유해진 지사는 1947년 8월 15일 시가행진 중에 경찰을 열병했으나 경비대를 열병하지는 못했다. 그는 물을 마시기 위해 사열대를 떠났다고 해명했다. 제리를 떴다고 불평했다. 8. 유 지사 재임 기간 경찰은 테러행위를 수없이 자행했다. 경찰 최고위직은 모두 본토에서 모집된 경찰관들로 채워졌다. 유 지사는 제주도 출신이 아니며 많은 자리에 제주도 주민들에게 호응받지 못하는 본토 사람들을 임명했다.  9. 하곡수집 계획과 식량배급과 관련한 유 지사의 행정은 제주도의 모든 행정기관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운영 미숙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앙식량행정처 규정 제6조를 따르지 않았다. 규정에는 구입한 곡물을 도청 창고에 보관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곡물을 마을 창고에 보관하도록 허가했고, 할당량의 15%만 수집해놓고서 100% 수집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하곡수집 계획을 미숙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군 지역의 불평등한 식량배급 체계를 야기시켰다. 식량배급 제도는 배급받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배급표를 갖지 못하고 면장실에 모든 식량배급표를 보관함으로써 정치적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10. 지사는 1947년 3월 1일께 제주도 민정장관이 도착하자 자신은 정치인이지 사업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도정은 그의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런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이 명백하다. 곡물저장을 위한 도청 창고가 보수되지 않아 곡물이 노상에 쌓여 있다. 그는 전라남도에서 들여올 3만석의 추가분 쌀을 저장하거나 보관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11. 유 지사는 1947년 10월 감찰관과의 회의 도중 건축자재를 요구했다. 대나무가 부산 자재창에서 선적됐다. 그러나 지사가 LST에 화물을 싣고 부산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하는 바람에 제주항에서 대나무 하역에 대한 행정절차가 해결되지 않았다. 지사는 제주도 민정장관을 통해 사령부로부터 명령을 받은 뒤에야 대나무 하역을 지시했다. 대나무를 하역한 뒤 지사는 대나무를 보관하지 않았다. 감찰관은 항만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일부 대나무로 모닥불을 지피는 것을 발견했다.   12. 도청 차량기지는 무지와 만행의 전시회장이었다. 미국정부는 민간인 물자보급소를 통해 1947년 제주도에 트럭 34대를 할당했다. 4개월 뒤 트럭 15대가 완전히 망가졌다.  13. 제주유치장은 한국의 어떠한 형사시설에서 보이는 넘쳐나는 죄수 수용시설 가운데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10×12피트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됐다. 비교적 작은 유치장 안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 지사는 수감자 대부분이 좌익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좌익을 우익으로 전향시키려는 그의 계획의 일단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주한미육군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특별감찰보고서(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 제주도 정치상황/작성자 : 로렌스 넬슨(Lawrence A. Nelson) 중령(주한미육군사령부 군정청 특별감찰관) 특별감찰보고서- 제주도지사 유해진(1948년 3월 11일) 1947. 11. 12~1948. 2. 28

 

▲ 제주시 일도1동에 있는 제주4·3 유적지-서북청년단이 사용했던 터.

유해진 지사는 정치적 반대파를 다루는데 무자비하고 독단적이었다. 독재자나 극우파들과 같은 거친 방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좌익은 지하로 잠적했다. 경찰은 수없이 테러를 자행했다. 그래서 유해진의 암살을 요구하는 삐라가 여러 장 뿌려졌다. 

유 지사는 1947년 11월부터 미군정청의 특별감사를 받았다. 이 감사는 미군정청 특별감찰관 로렌스 넬슨(Lawrence A. Nelson) 중령의 지휘 아래 1947년 11월 12일부터 1948년 2월 28일까지 서울과 제주도에서 집중적으로 실시됐다. 

넬슨 중령은 이 조사 결과에 대해 ‘특별감찰보고서‘를 작성했다. 유해진의 개인문제와 그가 이끌고 있는 제주도정에 대해서 광범위한 조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중앙의 군정관리들로부터 의견서를 받기도 했다. 

로렌스 넬슨의 특별감찰보고서에 의하면. 유해진은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 부임했을 때 도민 대다수가 좌익이라고 판단했다. 첫 단계는 일반대중을 극좌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극우의 힘을 빌려 조직과 선전활동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겠다고 결심했다. 

도민들을 중도노선으로 이끌기 위해 경찰들이 대중집회를 통제했다. 경찰들이 집회를 통제하여 극좌분자들의 집회는 없어졌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자신이 모든 회합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경찰과의 관계는  평화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좌익분자들을 자신이 몰락시키고, 극우세력은 어떠한 충돌도 일이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극좌분자들이라는 색각이었으며, 그 중심에 안세훈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충돌을 막기 위해 제주도청 실국장들로 이루어진 ‘주도그룹’을 조직하여 도를 순회하면서 정부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로렌스 넬슨이 ‘경찰이 좌익동조에 책임이 있다고 언급됐다.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어 다수의 경찰 고위직은 육지경찰이 차지하고 있으며 정치사건을 다루는데 신중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박경훈 전 지사에 대해서는 그가 명확한 사상이나 이념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고, 박경훈 전 지사는 때때로 우익 같지만 가끔은 좌익 같기도 하고 가끔은 중도파처럼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예산이 짜여질 때 ‘미국인 고문관들에게 예산문제에 대해 상의했는가?’ 라는 질문에 ‘예산과 관련해 김두현 부지사에게 미국인 고문관들과 상의하라고 했다’고 대답했다.

1947년 11월 21일 제주군정청 법무관 스티븐슨(Samuel J. Stevenson) 대위가 제출한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의견서는 유해진이 극우파라는 점,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상대를 좌익분자로 몰고 가는 매카시즘이 강하다는 점, 그리고 우익 집회를 제외한 좌파나 중도파의 집회를 허가하지 않아 불법집회를 양산해 내고 있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 1948년 5월5일 제주4.3사건 처리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화평이냐 진압이냐"는 갈림길 선택을 놓고 열린 이날 9인 비밀회의에서 경찰총수인 조병옥 경무부장은 강경진압을, 경비대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다가 몸싸움을 벌였다. 딘 장군은 다음날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조치하고, 강경진압을 선택했다. 왼쪽부터 보좌관,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제주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경비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제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넬슨 중령은 광범위한 조사를 벌인 끝에 유해진이 대단히 문제가 많은 도지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넬슨 특별감찰보고서’에 기록된 유 지사의 문제 부분을 추려 내면 다음과 같다.

- 도정업무를 적절히 수행하는 데 있어서 반복적으로 무능력함을 드러냈다. 그는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는 쓸데없는 시도를 해왔다. 그는 좌파를 지하로 몰고 갔으며 그곳에서 좌익활동은 더욱 위험스럽게 변모했다.
-  테러행위를 수없이 자행했다. 경찰 최고위직은 모두 본토에서 모집된 경찰관들로 채워졌다.  많은 자리에 제주도 주민들에게 호응 받지 못하는 본토 사람들을 임명했다. 
- 하곡 수집계획과 식량 배급과 관련한  행정은 한국정부의 모든 행정기관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운영 미숙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할당량의 15%를 수집해놓고 100%를 수집했다고 보고했다.
- 제주 유치장은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10×12피트(3.04×3.65m)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됐다. 비교적 작은 유치장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 지사는 수감자 대부분이 좌익이라고 밝혔다.

넬슨 중령은 1948년 3월 11일 이런 조사 결과를 토대로 ①유해진 지사 교체 ②제주도 경찰행정에 대한 조사 ③미국인 경찰 고문관의 제59군정중대 임무 동시 수행 ④과밀 유치장 조사 등 4개항을 군정장관에게 건의했다. 이런 상태에서 4·3사건을 맞게 된 것이다.

김창후 제주4·3연구소장은  『제주도연구』 제17집(2000.6. 제주학회)에 「넬슨 특별감찰보고서-제주도의 정치상황에 나타난 제주도지사 유해진」(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Chejudo Political Situation)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27) 피습 사건을 조사하고자 18일 정오 김포공항을 떠난 딘 군정장관은 당일 하오 7시 반 경 박대령의 유해를 싣고 귀임하였다. 저격 범인에 대하여서는 부내인의 행동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으나 아직 명확한 판단은 짓지 못한 채 현지에서 각 방면으로 엄중한 수사를 계속중이라 한다. 그리고 과도정부 당국은 이번 제주도 일대의 소요사건의 수습책의 하나로 경찰책임자와 도지사의 경질을 단행하여 민심 수습에 노력하고 있다 한다. 유(柳)도지사 후임으로는 제주도 산업과장으로 있던 임관호(任琯鎬)씨가 이미 취임하여 시무중이라고 한다.’- 현대일보 1948년 6월 20일

 

 

▲ 제주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초등학교 건물.

/ 김관후(시인·소설가)

 

<제주의소리/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