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5) 반공주의로 해방정국을 주도한 조병옥

-조병옥은 누구인가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된 조병옥 (1938년)

‘(중략) 2. 조병옥(趙炳玉) 박사를 조선정부 경무국 경무과장으로 임명하고 그 의무와 직무 수행할 권한을 부여함. 3. 본령은 1945년 10월 20일 야반(夜半)에 효력을 생(生)함. 1945년 10월 20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

-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 APPOINTMENTS  제22호 1945년 10월 20일

‘(중략) 2. 조병옥(趙炳玉)을 1946년 1월 1일 부(附)로 조선정부 경찰국 조선인 국장에 임명하고 그 직권행사의 권(權)을 부여함. (중략) 1946년 1월 3일/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 APPOINTMENTS  제64호 1946년 1월 3일
 
조병옥(趙炳玉, 1894~ 1960)은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공주영명학교를 거쳐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전문학교와 연희전문을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혐의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흥사단에서 활동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석방되었으나, 이번에는 윤봉길의거 관련자로 지목되어 투옥된다. 흥사단 지부를 결성하려 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실패하고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수양동우회는 1937년 해산되면서 보유 자금과 토지, 사무기구를 매각한 금액까지 긁어모아 국방헌금으로 납부했다. 

1941년 8월25일 부민관 강당.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 죽음으로써 일본에 보답한다는 각계 명사 120명의 결의 아래 신흥우, 윤치호, 장덕수, 최린, 이광수, 주요한 등 친일 거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조병옥. 자못 비장한 어조로 목청을 돋구어 청중을 제압하였다.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요컨대 이 모임의 목적은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신민으로서 국책에 절대 협력할 것, 그리하여 위정자로 하여금 안심케 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병옥의 친일회의 참석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38년 12월 14일 <시국유지원탁회의>. 참석자는 이각종, 이광수. 조병옥 , 주요한 등. 내선일체 구현, 동아협동체 건설, 국내 혁신문제 등을 의논하였다. 

조국이 해방되자 조병옥은 공산주의자들의 정권장악을 막는데 앞장섰다. 우선 송진우와 손을 잡고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한민당은  미군을 환영하는 범국민적 대회를 열었다. 연합군환영회에서 조병옥은 위원장을 맡았다. 이승만을 대중 앞에 부각시키고자 하지 중장을 여러 차례 설득했다. 하지는 이승만을 맨 앞줄에 앉혔고, 이승만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결국 조병옥은 미군정 수뇌들과 호흡이 맞을 뿐만 아니라 반공정신이 강하여 치안을 제대로 유지해 나가는데 적임이라고 보고 경무부장에 취임했다. 우선 국립경찰의 체제화를 실현했다. 이 과정에서  총독부 경찰관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을 비롯한  좌익단체들의 해체를 주도했다. 결국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좌익선전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미군정장관이 좌익 청년단체를 해체했듯, 우익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도 해체하라고 지시해도 거부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장관 등을 거친 뒤 이승만과 결별했다. 민주당에 입당,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 조병옥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신병이 도져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치료를 받으러갔다가 1960년 2월15일 별세했다. 향년 만66세였다. 

특히 제주4·3의 도화선이 되는 3·1절 발포사건으로 인해 총파업이 일어나자, 1947년  3월 14일 제주도에 내려와서 제주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제주4·3 당시 초강경진압을 지시하여 3만 명이 넘는 민간인희생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 제주경찰감찰청 정문, 캘리버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이 경계를 서고 있다.(1948년 5월)

- 미군정 경찰은 친일파의 거점

"당신네들이 대구 10월 폭동에 대해서 경무부장인 내가 친일파 경찰관들을 많이 등용하였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민심이 이탈되어 폭동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 있던 우리 한국에서 친일을 했다는 데 대하여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 하나는 직업적인 친일파였고 또 하나는 자기의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 경찰을 직업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동료들은 Pro JAP이 아니라 Pro JOB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회고록』(조병옥 지음, 선진 펴냄), 164쪽)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 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세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고은의 시 ‘오라리’ 전문

해방공간에서 경찰인원은 계속 늘어났다. 해방 당시 식민지 경찰 인원이 약 2만 명이었다. 그 중 이남 지역 인원이 1만 2000명가량. 1년 후 이남의 경찰 인원은 약 2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일제시대보다 갑절의 경찰력이 필요하게 된 것은 미군정 통치가 일본 식민통치보다도 더 억압적인 것임을 설명한다. 경찰의 충성 대상이 미군정이라는 사실이다.

미군정 경찰은 친일파의 거점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서북청년단 출신들도 많았다. 높은 자리는 거의가 식민지 경찰 출신으로 채워지고 그들이 새 '국립 경찰'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빨갱이 때려잡는 기세가 지나쳐서 양민까지 때려잡는 경찰을 조병옥은 키웠다. 조병옥의 경찰은 파시스트 경찰이었다.  

조병옥은 4·3발발 직후 군과 무장대가 어렵게 합의한 ‘4·28 평화협상’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자행한 ‘오라리 사건’으로 깨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열린 ‘화평이냐 유혈이냐’의 갈림길이 된 ‘5·5최고수뇌회의’에서 강경진압을 주장해, 결국 피의 제주4·3을 불러일으킨 ‘핵심인물’이다. 특히 5·5회의에서 “4·3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인 만큼 철저하게 토벌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김익렬 연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제주4·3에서 조병옥이 차지하는 역할은 아주 중대했으며, 그 만큼 그를 바라보는 역사적 평가는 싸늘할 수밖에 없다.

▲ 도로차단 현장을 한 경찰관이 가리키고 있다(1948년 5월)

- 3·1사건 수습에 나서다

‘(정보요약 제1767호) (전략)/7. 좌익언론 제주파업 지지: 한국 국내정세를 논의하면서 언론은 주로 각 신문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뉴스를 해석하였다. 좌익지 『독립신보』는 제주도의 파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보도를 하였으며, 좌익지 『자유신문』은 민주주의민족전선(Leftist People's Front)이 조사위원회를 제주도에 파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 다른 신문은 조병옥 경무부장이 조사를 마치고 제주에서 서울로 귀환하여 소요는 진정되었다는 성명을 실었다. 논평: 제주도 총파업은 분명히 좌익의 남한에 대한 조직적인 전술임이 드러났는데 이러한 사실은 공산당의 확립된 정강정책을 수행하는 서울공산당 기관지 『독립신보』가 제주도의 민중들은 파쇼반동의 억압과 경찰의 야만적인 행동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고 공공연히 주장함으로써 분명해졌다. 그 신문은 미국 점령정책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선동의 전파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정부형태의 근간에 반복적으로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자유언론의 보호라는 이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후략)’-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군사정보국 정보요약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Intelligence Summary 1947 4월 3일

“3․1절에 발생한 불상사에 접종(接踵)하여 정치 산업 및 교육 각 기관의 활동이 마비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본관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제주도에 왔다. 첫째 제주도의 동포제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경비상 만전대책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기만적 선전과 파괴적 모략으로써 제주도의 사회를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빠지게 할 근본적 요소를 제거할 근본방침도 수립되어 있다. 도정 책임자와 협의하여 그 실현에 옮기겠다. 바라건대 동포제위는 안심하기를. 그리고 경찰과 협력하여 제주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를. 폭동과 같은 무질서의 행동같이 조선건국의 전도를 위험케 하는 것은 없다. 폭동의 빈발은 조선민족의 정치적 자치력과 도덕적 자율성이 결여함을 세계의 이목 앞에 폭로시켜 우리의 위신과 신용을 실추시키는 것이다. 동포여, 반성자중하여 일상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건국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947년 3월 14일/경무부장 조병옥”-제주신보 1947년 3월 16일
 
‘총파업을 일으킨 제주도로부터 돌아온 경무부장 조병옥씨는 20일 군정청 출입기자단과 회견하고 제주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중략)..... “본관은 3·1절 발포사건에 진상조사위원회를 언명하였던 바 동 회에서는 1구 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의 제 사정으로 보아 정당방위라고 인정하고 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경관에 대해서는 무사려의 행동으로 인정하고 파면시켰다. 금번 제주도 불상사건은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하고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려는 일부 책동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다. 3·1절을 기하여 폭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있었거니와 경찰을 협박 공갈하면서 3만명의 군중은 제주성 내에 집결하고 그 일부는 머리에 수건들을 쓰고 모든 행색이 테러행동자의 태세를 갖춘 수백명의 장정 및 시위행렬을 보존할 목적으로 혁대를 전후좌우로 연락시킨 근 1,000명의 학도군을 중심으로 제1착으로는 경찰청 습격태세를 갖추었다가 경찰당국의 충고 명령에 복종하는 태세를 가장하고 경찰서로 그 세력을 집중하여 습격의 태세를 정비하여 노도와 같이 쇄도하였었다. 경찰당국은 인내와 엄중을 아울러 충고의 경고를 하였으나 군중은 해산을 불응하므로 작년 10월의 쓰라린 경험을 참고로 하여 부득이 발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3ㆍ1절 불상사 야기의 계획, 선동, 실행의 주동자 및 총파업의 모략선동 및 실행의 주범자들을 속속 검거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약 150여 명에 달한다.......(중략)......그런데 현재까지의 파업상황은 도청 군청 읍사무소 면사무소 12 중 8, 학교 108 중 10, 우편국 12 중 6, 무전국 기타 관공서 10 중 9, 산업기관 13 중 7, 금융기관 9 중 7, 교통기관 5 중 4가 파업을 해제하였다. 군정관리로서 시민과 야합하여 파업을 한 것은 군정포고 2호에 저촉되는 것이요, 경찰관 중에도 시민과 야합하는 추태를 한 자도 있었다.”’-독립신보 1947년 3월 21일

‘3·1절의 유혈참사에 기인하여 지난 10일 먼저 도청원이 파업에 들어가자 파업과 맹휴의 선풍은 삽시간에 전도를 휩쓸어 불과 이틀 동안에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중학교, 국민학교, 교통, 통신기관 등 156개 단체의 2,000여 명 전 직원이 총파업을 단행하고 한편 80여 명의 경관까지 이에 가담하여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되어 오던 바 현지 군정관 스타우드 소좌는 이에 대처하여 만약 취업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전 기관을 폐쇄하겠다고 당국의 태도를 밝힌 바 있었고, 경찰측에서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내도함을 계기로 파업주동자의 검거에 착수하여 각 기관이 개별적으로 취업하기 시작하여 20일 경에는 전면적인 복구에 이르렀으나 경찰의 체포를 두려워하여 피신하고 있는 사람과 이미 피검된 사람이 아직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으므로 특히 학교 같은 데서는 거의 수업불능상태에 빠지고 있다.’-독립신보 1947년 4월 5일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확교 주변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명. 오후 2시 45분께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났다. 군중들이 몰려오자 일제히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3월 14일 오전 조병옥 경무부장은 비행기로 제주도로 향하였다. 미군정 수사국 고문 쇼터 대위와 공안국 부국장 장영복(張永福)를 대동하였다.  그는 3·1사건을 하나의 ‘폭동’으로 규정하였다. 그의 안전대책이란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전남‧전북 경찰청에서 2백22명이 급파되는 등 응원경찰이 속속 증원되었다. 3월 18일에는 경기 경찰 99명이 파견됐다. 이로써 2월 말 제주에 들어온 충남·북 경찰 100명을 합치면 응원경찰은 421명으로 불어났다. 이 같은 응원경찰 수는 원래 있었던 제주경찰 330명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조병옥을 비롯한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경무부 최경진(崔慶進) 차장은 3월 12일 기자들에게 제주도 총파업 소식을 전한 뒤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면서 응원경찰 파견 계획을 밝혔다. 조병옥은 ‘북조선 세력과 통모했다.’고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었으며, 이는 4·3의 발발과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1947년 4월 4일 남로당 중앙선전부는 3·1사건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하였다. ‘업무태만’ 경관 57명 파면문제에 대한 내용이다. 

‘신성한 3․1절을 피로 물들인 제주도사건이 평화군중에 대한 경관의 발포로 인하여 생겼음은 이미 세상이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이번 경무부장 조병옥씨는 이런 무법한 탄압에 참가하지 않은 경찰관 57명을 업무태만의 이유로 징계 파면시켰다. 이는 경찰의 악질화를 조장하는 동시에 인민을 사랑하는 민주경찰을 몰아내는 옳지 못한 처□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경찰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한 어디까지나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할 것이요 무□한 인민에게 함부로 총뿌리를 두르고 탄압해서는 안될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경찰의 양심적 태도를 오히려 징계하는 것은 경찰을 전제정치의 도구로만 두려는 것으로서 도리어 □□할 수 없는 것이다. 양심있는 경찰관은 이 때에 있어서 단호히 경찰의 본분을 지키기 위하여 커다란 반성과 결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중신보 1947년 4월 5일

   

- 미군정청 회의실 수뇌회의

‘<남조선과도정부 활동> 제31호/1. 폭력행위 1) 정치적 동기 (1) 4월에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폭력행위는 주로 5·10선거의 선거인 등록을 저지하는 시도에 맞춰졌다. 제주도에서 일상적인 다른 사건들처럼 마음에 쌓인 불평이 타올랐다. 선거등록사무소에 대한 습격이 이뤄졌고, 주로 선거인 등록자들이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위협과 함께 등록명부가 도난당했다......(중략).......제주도는 선거등록사무소에 대한 2건의 습격이 보고됐으며, 전라북도는 1곳이 보고됐다......(중략)......제주도에서의 폭력행위 급증에도 불구하고, 이전 2개월과 비교하면 급격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경찰보고서는 부상당한 ‘무고한 방관자들’의 숫자와 ‘기타 소요’의 숫자가 증가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소요’는 좌‧우익 폭력단의 방화와 협박, 신문언론에 대한 폭파 등 방관자들에는 강력한 유형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동맹휴교도 이뤄졌으나 정치적 이유보다는 시험을 피하기 위한 이유가 더 큰 것 같았다......(중략)......3) 제주도 (1) 이번 달 가장 심각한 폭동은 4월 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였다. 4월 5일자 사건에 대한 개요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찰지서 1곳이 파괴됐고 13곳은 습격을 받았으며, 경찰관 5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6명이 다쳤다. 또 경찰관 부인 1명과 대동청년단원 1명도 사망했다” 응원경찰대가 4월 5일 파견됐다. 일본인들이 만든 은신처를 장악한 잘 무장되고 장비를 제대로 갖춘 폭도 2,000여 명이 있으며 경찰과 경비대에 도전했다고 언론에 보도됐다.....(중략)......신문들은 4월에 나타난 최종 사상자수에 대해 단지 4월 3일부터 19일까지 다루었다. 이것에는 경찰관 사망 7명, 부상 9명. 경찰관 가족 사망 3명, 행방불명 2명. 민간인 사망 22명, 부상 45명, 행방불명 21명. 주택 파괴 19채, 방화 7채. 폭도 사망 29명, 부상 2명이 포함돼 있다.......(중략)........ 4월 7일자 좌익 『독립신보』가 인용한 경찰보고는 1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우익『경향신문』은 4월 23일자에서 폭동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국방경비대 제9연대 특수부대가 제주도에 급파돼 경찰과 함께 2개 주요 읍면에 비상경계선을 치고 있다. (2) 온건 『서울신문』은 4월 29일자에서 제주도와 관련한 한국인 공안국장의 보고를 보도했다. 그는 기관총과 충분한 보급품으로 무장한 2,000여 명이 산간지역에 있는 일본인들이 만든 참호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주한미육군 군정청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일반문서 1948년 4월 제주 4·3폭동 발생 / <남조선과도정부 활동> 제31호

‘지난 3일 이래 제주도에 발생한 경찰관서 등 습격사건에 관하여 조(趙)경무부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회견 석상에서 조부장은 특히 2․7이후 경찰관의 사망자가 30명에 달한 것을 강조하고, 현재 제주에는 2경찰서 15지서에 약 480명의 경찰관이 있으며, 응원대는 전남에서 파견하였다는 발언이 있었다. “거(去) 4월 3일 이래 제주도에서는 1947년 3․1사건 이상의 불상사가 발생되어서 치안이 극도로 교란되었다. 공산계열의 파괴적 반민족적 분자들의 지도하에 총기 수류탄 및 기타 흉기를 휴대한 무뢰한들이 성군작당(成群作黨)하여 경찰관서 및 기타 관공서의 습격, 경찰관리 및 그 가족의 살해, 선량한 동포 살해, 방화 폭행 및 약탈 등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여 전도의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구에 빠뜨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 등록 실시 사무를 정돈(停頓) 상태에 빠뜨리고 있는 인적 물적 손해는 좌기(左記)와 여(如)하다. △경찰관서 습격 11개소 △테러 11건 △경찰관 피습 2건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7명, 행방불명 3명 △경찰관 가족 사망 1명 △관공리 사망 1명, 부상 2명 △양민 사망 8명, 부상 30명 △전화선 절단 4개소 △방화 경찰관서 3개소, 양민가옥 6개소 △도로 교량 파괴 9개소. 그런데 경무부에서는 제주도의 치안 정세가 위급함에 비추어 전도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당부(當部)로부터 김정호(金正浩) 공안국장 및 그 대원을 특파하는 동시에 응원경찰대를 급파하였다. “제주도의 동포제위는 안심하시는 동시에 경찰과 적극 협력을 하여 그 망국적 도배들을 발본색원적으로 퇴치하여 제주 치안의 완벽을 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남조선의 이여(爾餘)의 지역에 계신 동포들도 국제적 정세의 긴박함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위기에 당면한 사실을 직시하여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사회적 환경에서 역사적 대사업인 총선거가 성공리에 종결되도록 국립경찰에게 애국적 협력을 아끼지 말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 바이다.”’(같은 기사 경향신문․대동신문․독립신보․동아일보․우리신문․자유신문․조선일보․)-서울신문 1948년 4월 7일

‘금반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씨는 선무공작을 위하여 거(去) 16일 내도하였는데 내도 즉시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씨의 「도민에 고함」이라는 선무문을 발표하였다.도민에게 고함/친애하는 제주도의 동포여러분! 우리의 동경하던 자주독립이 목첩(目睫)에 박두한 이 때, 무모한 폭동을 일으켜 여러분의 골육인 건국의 일꾼을 살상하여 가뜩이나 빈약한 우리의 재산을 파괴하고 독립을 방해함은 그 무슨 일인가. 여러분은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 하는 공산분자의 흉악한 음모와 계략에 속은 것이다. 현명한 여러분은 총선거가 조선독립의 천재일우의 호기이고 그 완성의 유일한 방도임을 인식하라. 이 기회에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영영 노예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러분! 때는 아직 늦지 않았다. 파괴와 기만적 선전 및 폭동에 부화뇌동하지 말라. 그리고 주모자와 직접 행동으로 범죄한 자들도 지금이라도 즉시 그 전과(前過)를 회전(悔悛)하고 선량한 국민이 되는 행상(行狀)을 가지라. 소지하고 있는 무기, 흉기 등을 신속히 경찰관서에 납부하라. 그리고 각기 생업에 종사하라. 그리하여야 정상작량(情狀酌量)의 은전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개전치 않고 끝끝내 여사(如斯) 망국적 폭거를 지속할진대 본관은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1948년 4월 14일 경무부장 조병옥(중앙신문 48. 4. 7)-제주신보 1948년 4월 18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무장대는 도내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무장대가 뿌렸다는 2개의 ‘호소문’ 내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아래의 내용은 경찰·공무원·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장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1948년 5월 5일 오전 12시.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 참석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군 전용통역관 등 9명.  제주4·3의 진압에 대한 최고수뇌회의가 열렸다.

▲ 조병옥 UN총회 옵서버 참석사진.

조병옥이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된다. 김익렬을 지목하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라고 지적했다. 김익렬은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김익렬은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에게 달려들었다. 김익렬은 주먹으로 조병옥을 끌어내 실랑이를 벌였고,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 넥타이로 목이 졸린 조병옥은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이 말리러하였으나 김익렬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고, 맨스필드 대령과 안재홍이 달라붙어 김익렬과 조병옥을 떼놓으려 하였으나, 김익렬 역시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김익렬과 조병옥의 몸싸움은 격화되었고,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이성을 상실한 김익렬은 조병옥의 넥타이를 붙잡고 통역관에게 달려가 발길질로 음낭을 걷어찼다. 놀란 딘 장관과 안재홍, 송호성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소란은 끝이 났지만,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 조병옥 박사의 국민장.

 

   

-조병옥 대통령 후보 급서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가도 가도 끝이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고  민주당에 눈이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춘삼월  십오일에  조기 선거 웬 말이냐/천리만리 타국 땅에 객사 죽음 웬 말이냐/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있네// 터졌네 터트렸네 학도들이 터트렸네/ 4.19의 혁명 정신 너도 나도 이어 받아/ 독재 없고 부정 없는 살기 좋은 한반도/ 무궁화 꽃 삼천리에  격양가를 불러 보세’ -노래 ‘유정천리와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 대대적인 선거부정행위가 자행되었다. 이승만(李承晩)은  4선 출마의사를 밝히고, 자유당 조직 확대로 대한반공청년단을 발족시켰다. 부통령후보에 이기붕(李起鵬)을 지명하여 선거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민주당은 조병옥(趙炳玉)을 대통령후보로, 그리고  장면(張勉)을 부통령후보로 각각 선임하였다.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는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였다.  ① 4할 사전투표, ②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③ 완장부대 활용, ④ 야당참관인 축출 등을 통하여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올린다는 것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조기선거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정부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3월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그러나 2월 15일 조병옥이 급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조작되고, 터무니없는 집계에 놀란 자유당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최종집계는 총투표자 1000여만 명 중 이승만 960여만 명으로 88.7% 득표, 이기붕 830여만 명으로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의 부정선거규탄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결국은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민주당 후보 조병옥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이었기에, 그때 자행된 부정선거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3·15 의거는 민주화를 향한 긴 도정에 첫 봉화를 올린 희망의 기억으로 빛난다. 3·15 마산시위(이후 3.15의거)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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