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인터뷰] (1) 벨기에 피핑톰 무용수 김설진...유럽 언론 "찰리 채플린, 마르셀 마르소 능가" 극찬

 

▲ 김설진 씨. ⓒ제주의소리

유럽 북서부에 위치한 벨기에는 그냥 ‘잘 사는 나라’ 혹은 와플이나 초콜릿, 2014 월드컵에서 우리와 같은 조가 된 ‘아자르의 나라’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현대무용의 중심지다.

1990년대부터 안느 테레사, 얀 파브르, 빔 반데키부스 등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현대무용가들이 배출됐고 세계에서 가장 손꼽히는 현대무용단체가 총집결해 있다. 그 시스템이 가장 탄탄한 국가이기도 하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창작과 활동의 기회를 적극 제공해 전 세계 무용수들이 모이는 ‘현대무용의 메카’인 셈이다.

제주 출신의 무용수 김설진(32)씨는 여기서 새로운 실력자로 주목받고 있다.

벨기에에서 높은 인지도를 지닌 ‘피핑톰(Peeping Tom) 무용단’ 소속인 그는 팀의 주역으로 월드투어를 하며 최근까지 360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했고 이 분야의 세계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테아트로아크 지는 ‘A Louer’에서 그의 공연을 두고 “잊지 못할 퍼포먼스다.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움직였다”며 “찰리채플린과 마르셀 마르소를 능가하는 정도”였다고 평했다. 르 몽드 지는 그가 주역을 맡은 ‘반덴브란덴가 32번지’를 두고 “그들의 재능은 무서울 정도”라고 극찬했다.

2013년 연말. 세계를 휩쓸고 다니다 잠시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 부모님, 아내, 이번에 태어난 딸 아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를 <제주의소리>가 직접 만나봤다. 김씨는 ‘무용단과 성향이 맞았을 뿐’이라며 ‘성공담’으로 그를 다루는 데 대해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는 벨기에 등 다양한 국가에서의 생활을 통해 한국과 제주의 문화예술계가 가진 고민들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해법들을 모색하고 있었다. 외국 생활에서 줄곧 연구한 ‘문화로 제주를 먹고살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는 사실 거의 완성 단계라고 이 인터뷰에서 밝힐 정도였다.

신년을 맞아 <제주의소리>는 그가 지금까지 겪었던 이야기와 문화예술계 전반에 대해 지닌 생각들을 두 차례로 나눠 싣는다.

 

춤만 추던 중딩, 이제는 세계의 중심에

제주시내에 살던 설진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춤을 좋아했다. ‘뒤뜰 야영’이라는 캠프파이어에서 사람들 앞으로 나가 춤을 춘 것이 생의 첫 공연이다.

제주제일중학교와 제주공고에 다닐 때 그는 소위 도내에서 ‘춤 좀 추는 형’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신산공원으로 몰려가 실력을 키웠다. “그 때 거기에 가면 모서리마다 각 학교에서 온 애들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그가 회상한다. 선생님들께 혼도 많이 나고 매도 많이 맞았다.

본격적인 그의 도전은 고 2때 시작된다. ‘더 댄스’라는 안무팀 오디션을 보러 서울을 향하게 된 것. 반대하던 부모님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마지 못해 허락했다. 그는 제주에서 손꼽히던 소년 댄서 답게 합격했다. 이 때를 회상하며 그는 ‘운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김원준, 코요테, 조성모의 백댄서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문득 주변에 백댄서를 하던 선배들이 춤 만으로는 계속 먹고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클럽이나 고기집, 학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춤만으로 지속가능한 삶은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춤을 배우면 좀 더 오래 춤을 출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쌓아온 실력으로 실기시험을 봤고, 서울예술대학교에 진학한다.

‘거리 출신’인 그는 일반적인 예술입시를 거치고 온 학생들과는 조금 다른 타입이었다. 발레 때 쓰는 바를 옷걸이로 착각할 정도로 그는 스스로 ‘무식했다’고 말한다. 다른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옛날에 저희 춤출 때는 밤 늦게 까지 추고 새벽까지 춰도 힘들다는 친구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돈을 내고 수업을 받으면서 베이스가 다른 애들이 많았어요. 그 교육 입시라는 걸 겪으면서 학교를 들어왔던 친구들은 2~3 클래스만 있어도 힘들다고 하는거에요. 처음엔 ‘그걸 왜 힘들다고 하지?’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일 못했어요. 남들에 비해서 떨어지니까. 제일 더해야 따라잡으니까 열심히 한 부분이 있죠”

‘남들에 비해서 떨어졌던’ 이 학생은 어느 순간부터 뚜렷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다. 끊임없는 노력과 입시교육에서는 나올 수 없는 독특한 몸짓이 이목을 끈 것이다. 

한예종에 진학했고, CJ 영 댄스 페스티벌 최우수상, 전국 신인무용콩쿠르 특상을 받았다. 안성수 픽업 그룹과 무브먼트 랩에서 무용수로, 안무연출가로 활동하며 ‘묘기와 현대무용’을 넘나드는 다이나믹한 무대로 주목을 받았다.

힙합은 아니었고, 일반적인 현대무용도 아니었다.

“제가 팝핀을 해야지 현대무용을 해야지 한 건 아니었고. 제가 해왔던 거, 하고 싶었던 거 해보니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춰진거죠. 나쁘게 보면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죠. 힙합 하는 친구들이 보면 무용같은데, 무용하는 친구들이 보면 팝핀 같은데 이럴거고.”

하지만 녹록치 않았다. 여러 개의 작업을 병행하고 티칭하고 알바도 하는 것, 먹고 살기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연극적인 요소와 피지컬 적인 측면을 융합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번번히 기대에 못 미쳤다.

 

▲ '반덴브란덴가 32번지'에서 열연을 펼친 김설진. ⓒPeepingtom.be

무작정 떠난 벨기에...피핑톰의 선택을 받다

그 때 즈음 우연히 접한 피핑톰 무용단의 내한공연이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게 된다.

공연을 본 뒤 당시 국가에서 받은 신진예술가 지원기금으로 생긴 조그마한 경제적 여유로 비행기표를 끊는다. 오디션을 보러 벨기에로 떠난 것이다. 2008년 여름이었다.

당시 붙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답했다. “네? 아니요. 전혀요”

오디션은 일주일 간 매일 오전 9시반부터 6시까지 이어졌다. 심사진에서 계속 새로운 주문이 나왔다. 미리 준비를 한다고 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당당히 합격한다. 사실, 1차에 통과하고 나서 다음 달 다시 최종 오디션을 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국으로 갔다 다시 이곳으로 올 비행기표도, 이 곳에서 계속 머물 여유도 없었다.

‘비행기 값이 없어 다시 못 올지 모른다’는 말을 들은 피핑톰 무용단은 최종 오디션 없이 바로 이 한국 청년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는 이번에도 ‘잘해서 됐다기보다는 이 곳과 성향이 잘 맞아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외국에서 활동한다고 종종 콧대 높아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안된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됐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는 게 그냥 성향이 맞아서 운 좋아서 직업을 얻은 것인데. 그걸 가지고 으스대는 것도 웃기구요. 그것 가지고 실망하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그냥 연애하듯이 성향 맞으면 같이 작업하는 거구요”

▲ 김설진 씨. ⓒ제주의소리

브뤠셀 보자르 센터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워크숍이 시작이었고, 2009년 3월부터 그가 주역급으로 등장하는 ‘반덴브란데 32번지’ 월드투어가 시작됐다. 곡예 같이 거칠면서도 유연성을 겸비한 그의 몸짓은 곧바로 주목을 받았다.

그가 꼬깃꼬깃 종이를 하나 꺼내보였다. 1년 스케쥴표였다. 대륙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왔다갔다 해야한다 1년 내내. 그 동안 그는 360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해냈다. 이제 당당히 팀의 주역인 셈이다.

잘 나가는 무용수가 됐지만 고민은 있다. 어린 딸 아이를 데리고 계속 세계일주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월드투어를 계속할 수 없다는 뜻을 피핑톰 팀에게 내비쳤다.

그러자 팀 운영진은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음...그럼 안무 연출 한 번 안해볼래?” 이쯤되면 누가 고용인이고 피고용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어쨌던 애초에 ‘연극과 신체적 무용의 조화’를 고민하던 그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때문에 피핑톰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하는 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학창시절 춤만 춘다며 학교 선생님들께 혼만 나던 제주소년이 이제 세계에서 탐내는 빼어난 예술가로 성장한 셈이다.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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