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6)제주지역 양민학살진상보고서의 주인공 이도영

이도영은 누구인가?

▲ 고 이도영 박사.

‘트럭에 실려 가는 길 살아 다시 못 오네/ 살붙이 피붙이 뼈붙이 고향마을은 돌아보면 볼수록 더 멀어지고/ 죽어 멸치젖 담듯 담겨져 살아 다시 못가네/ 이정표 되어 길 따라 흩어진 고무신들 전설처럼 死緣 전하네/ 오늘은 칠석날 갈라진 반도 물막은 섬 귀퉁이 섯알 오름/      하늘과 땅, 저승과 이승 다리 놓아 미리내길 위로 산 자 죽은 자 만나네/ 녹은 살 식은 피 흩어진 뼈 온전히 세 숨결로 살아 다시 만나네’

- 김경훈의 시 ‘섯알오름 길’

‘1950년 8월20일(음력 7월7일) 서귀포시 안덕면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고 터에서 집단학살된 218명의 신위를 추모하는 첫 합동위령제가 7일 섯알오름 현장에서 유족과 정치인, 4·3단체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위령제는 섯알오름 인근 사계리 공동묘지에서 백조일손유족회가, 한림읍 만벵디 공동묘지에서 만벵디유족회가 위령제를 지내왔으나, 올해 처음으로 공동 위령제를 봉행했다.

오명수 백조일손유족회장은 주제사에서 “앞으로 섯알오름 학살터 현장을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현장이 아니라 잘 정돈된 성지로 관리해 나갈 계획”이라며 “관련 자료들이 있으면 기증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위령제는 각종 주제사와 추도사, 시인 김경훈씨의 추모시 낭송, 추모노래 등으로 이어졌다. 제주도는 사업비 9억5천여만원을 들여 섯알오름 학살 터에 위령탑과 관람로, 주차장 등의 공사를 끝냈다.’- 한겨레신문 2008년 8월 7일

이도영(李道英, 1947~2012)은 1947년 대정읍 하모리에서 태어났다.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주4·3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헌신했으며, 특히 미국에서 방대한 자료를 발굴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데 앞장섰다. 특히 1999년 대전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 문건을 공개해 그동안 입소문으로 알려졌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이도영의 아버지 이현필(李賢弼)은 그의 나이 네 살이던 1950년 8월20일 학살당했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건너 만난다는 칠월칠석(七月七夕). 대정면사무소 서기 이현필은 예비검속으로 붙잡혀 마을사람들과 함께 섯알오름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도영은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대구사범대학에 진학하였다. 군대는 뚜렷한 이유 없이 쫓겨났고, 교사생활도 잠시 뿐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그 혹독한 연좌제에 걸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갔다. 보험외판원과 접시닦이로 고학을 하였다. 

이도영의 할아버지 이성철(李成哲)은 일찍이 백조일손유족회(百祖一孫遺族會)를 통해 4·3진상규명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이성철은 자식 이현필이 학살당하자 함께 죽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앞장서서 백조일손유족회를 만들었다. 비석도 세웠다. 이 비석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깨졌다.  

이도영은 미국 국립문서보관기록청(NARA)에 살다시피 하면서 제주4·3과 민간인학살 관련 자료를 모아나갔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실린 사진도 이도영의 제공이 많다. 제주4·3평화박물관에 걸려있는 좌표가 있는 미군 작전지도도 그가 찾아낸 자료다.  

특히 2008년 9월~2009년 6월까지 제주공항(옛 정뜨르비행장)에서 발굴된 259구의 유해는 이도영이 꼼꼼히 기록해 놓은 옛 지적도가 없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제주공항이 들어서기 이전의 지적도를 확보한 이도영은 이 일대 주민들을 찾아다니면서 1949년 10월 불법군사재판을 받은 후 정뜨르비행장에서 총살된 희생자들이 묻힌 곳을 일일이 기록했다.  

이도영은 2000년 8월 월간 <말> 출판부에서 『죽음의 예비검속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정부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만들어 예비검속에 대한 진상규명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이도영의 발굴 사료가 밑바탕이 됐다. 

모슬포 경찰서 관할 양곡 창고에는 1950년 7월 초부터 347명이 강제 수용되어 있었다.  8월 20일(음력 7월 7일) 밤중에 이들 중 약 250명 가량을 속칭 ‘섯알오름’ 기슭으로 끌고가 총살하여 암매장하였다. 그 후 이 지역은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도영의 아버지 이현필은 바로 이때 예비검속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그는 1948년부터 대정면 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20일 밤중에 무장한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하여 예비검속된 사람들과 함께 처형한 후 암매장해 버렸다. 

이도영의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지척의 거리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다. 유가족들이 군 당국에 수없이 진정한 끝에 허가를 얻어 7년 만에 149인의 서로 엉클어진 시신을 수습하여 그 중 132위를 현재의 공동묘역에 안장하였다. 또 다른 구덩이에서 61구의 유골이 발굴되어 한림읍 갯거리오름에 별도로 안장하였다.

132위가 묻힌 공동묘역은 1960년 유족들이 성금을 각출하여 묘비의 명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하고, 그 이면에는 각 마을에 수소문하여 수집된 피학살자 명단을 새겨 넣었다. 1950년 제주에서만 약 1천 명이 ‘사상청소작업’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 1950. 7.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혐의 죄수들을 산골짜기로 데려가 처형하는 장면.

한국전쟁 전후 죽음의 예비검속

‘모 사찰기관 수뇌자의 언명한 바에 의하면 지난 14일 도내 사찰 수뇌 측에서는 모처에서 동일 상오 10시부터 하오 1시까지 도내 사찰관계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하는데

동 회의의 동기는 주로 사감(私感)으로 타인을 모함한 자로 말미암아 무고(無辜)한 양민이 희생되는 일이 많은 데 감(鑑)하여 금후로는 그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함과 피검자 중에서 개전의 가망이 있는 자를 설론(說論) 석방하여 국민 의무를 다하게 하자는 데 동일 위선 석방대상자에 대한 재심사 표준을 결정한 다음

1. 관헌에 있어서는 여하한 자를 막론하고 직결 처분을 엄금하고 의법 처분할 것, 2. 관헌은 사정(私情)을 떠나서 냉정한 관찰로 심문할 것. 3. 감방 위생 시설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하며 동 회의의 결과로서 제일착으로는 과반에 예비검속된 자 중 상당수는 일 양일 내로 신중한 심사 후에 석방.’- 제주신보 1950년 9월 17일

‘예비검속자 석방에 대하여서는 기위 지상에 발표된 바와 같은데 그간 사찰 관계당국의 엄중한 심사를 거듭하여 오던 차 예비검속자 153명이 작 18일 하오 7시 제주경찰서에서 CIC 대장, 계엄사령부 정보참모, 경찰국 사찰과장 및 각 관공서장 및 지방유지 다수 출석하에 간단한 석방식을 거행하였는데 국민의례가 끝난 다음 각 사찰관계자 대표의 훈시, 국민회 회장의 격려사, 석방자 대표의 열렬한 개성(改省)의 선서, 마지막으로 국민회 회장의 선창으로 만세를 삼창 폐회하였는데 특히 동 석상에서 제주경찰서장은 진정한 대한의 아들과 딸이 되어 충성을 다하라는 요지의 열렬한 격려의 훈시가 있었다.’- 제주신보 1950년 9월 20일

일제 강점기 시절 ‘예비검속법(豫備檢束法)’라는 것이 있었다. 범죄 방지 명목으로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을 규정한 법률이다. 특히, 일제는 전시체제를 구축하면서 1941년 식민지 조선에 "조선정치범 예비구금령"을 시행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해병대 사령부는 제주도에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제주4·3사건 관련 연루자 가운데 이미 훈방이나 석방된 사람들이 예비검속으로 집단 학살되었다. 그냥 아무 법적 절차도 없이 끌고 가서 경찰서에 가두거나 군에 넘긴 다음 총살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서는 앞 다투어 군대에 자원하는 입대 선풍이 일었다. 입대 선풍에는 공포의 땅에서 탈출하려는 의도 이외에도 '색깔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지가 작용했다.

‘등록된 국민보도연맹 회원 27,000명과 과거 반란사건 시기와 그 후에 공산주의자로서 피살된 사람들의 친척 약 50,000명이 제주도에 잠재적인 파괴분자로 존재하고 있다. (Memorandum for the record, Subj.:Conditions on Cheju Island, John P. Seifert, Naval Attache, Donald S. MacDonald, Third Secretary of Embassy, Philip C. Rowe, Vice Consul, Aug 17, 1950.)’- 1950년 8월 17일 제주도 현지 상황을 조사했던 주한미국대사관 직원이 남긴 보고서에서

▲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

이승만 정부는 전국 각 지역 경찰서에서 파악하고 있던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예비검속에 내몰렸던 '국민보도연맹원'은 제주도에 27,000여명이 있었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1949년 6월 5일 준비모임을 거쳐 6월 5일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됐다. 좌익세력의 섬멸이 결성 취지였다.

1949년 11월 말 현재 제주지역에서 5,283명의 전향자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놓았다. 서울(12,196명) 경기(5,964명)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수를 자수시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던 것이다. 수는 계속 증가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27,000명의 연맹원을 기록했다. 제주4 3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지역에 또다시 3만 명에 가까운 관리 대상자가 왜 필요했을까.   

'예비검속'은 인민군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기 위한 장치였다. 1945년 패망이 임박하자 일제는 '비상사태에 따른 제1호 조치'를 통해 반일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이승만 정부도 그대로 써먹었다.

또 다시 제주도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4·3이 끝나갈 무렵 아픔을 치유해 가던 과정에 일어난 또 하나의 광기였다. 4·3강경진압작전 때 검속되었다가 일차 석방되었던 사람, 경찰이나 서청 등의 우익단체에 한번 잡혀가서 그 기록이 남아 있던 사람, 귀순자, 그리고 무고한 양민들이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체포되어 참혹하게 죽어갔다. 

경찰당국은 이들 검속자에 대한 범죄 경중 급별 심사를 비밀리에 사정하고 제주도 주둔 해병대 계엄사령부에 이관했다. 이들에 대한 등급 분류 지시는 1950년 7월 7일 제주도경찰국에서 각 경찰서에 내려졌다. 등급은 A, B, C, D로 분류됐데, D등급이 가장 중요한 자, C등급이 중요한 자, B등급이 경한 자, A등급이 애매한 자로 정했다.

D급과 C급은 곧 트럭을 타거나 배를 타고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죽음의 등급이었다.  검속 대상자들도 다양하다. 제주경찰국 접수 공문을 보면, 6월 말부터 8월 초에 이르기까지 공무원 교사에서 학생과 부녀자 등에 이르기까지 예비검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요시찰인 일제 검거에 대한 ○○○의 언동건', 濟警査 제6206호, 1950. 7. 1 ; '공무원 구속자 보고의 건', 西署査 제1880호, 1950. 7. 7)

제주지역에서는 1950년 7월 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제주읍과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서 여러 차례 대대적인 집단 총살이 이루어졌다. 제주 경찰국 관할 제주, 서귀, 대정, 그리고 성산의 4개 경찰서에서 예비검속을 단행하여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됐다.

당시 경찰서에 수감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명령 및 집행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와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그리고 제주경찰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은 1950년 7월 29일 150명 정도가 희생됐다. 독립운동가 출신 문형순이 서장으로 있는 성산포경찰서에서는 군의 지시를 거부하여 성산포 예비검속자 D급 및 C급 80명 중 6명만이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가 서귀포 예비검속자들과 함께 희생됐다. 

제주읍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총살 집행은 두 번에 걸쳐 실시됐다. 처음 집행은 1950년 8월 4일 이루어졌다. 제주경찰서, 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밤 9시경에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하여 알몸 차림의 500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집행은 1950년 8월 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실시되었다. 주로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트럭에 싣고 제주비행장으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암매장했다. 

▲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에 의한 섯알오름 양민학살터 안내판.

‘섯알오름 학설터’와 백조일손지묘 

과반도 사찰 관계 수뇌부 회의에서 결정 실시 중에 있는 예비검속자에 대한 전면적 석방은 제2차로 제주서에 수용 중이던 48명에 대하여 CIC 당국의 재심사를 마친 후 행하여졌는데 즉 지난 21일 제주경찰서 후정에서 석방식을 거행하여 예검자에의 최종적 요청이 약 2시간에 걸쳐 피력되었고 그 요지는 각각 다음과 같다.

CIC 대장대리 “아국은 전략적으로 극히 호전되고 있으며 불원 승리의 기쁨을 가질 수 있는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있어서 전 한국 국민은 민족적 각오를 더한층 굳게 해야 할 것이며 또 금반 반격전의 성공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공산제국주의를 쳐부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예비검속자의 석방에 임하여 나는 대장을 대리하여 국가가 석방자에 요청하는 바를 전하는 바이다.

석방된 후엔 제씨는 후방 생산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분투노력해 주기 원한다. 특히 오래 동안의 부자유한 환경에서 몸이 쇠약해졌으니 금후로 건강에 유의하며 배전의 협력이 있기를 부탁한다.” 경찰국 사찰과장 “오늘의 석방은 국가적 은혜요 민국의 모든 백성이 다같이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한 것이다.

민국은 도의 깊고 민주주의 원칙을 실천하고 있고 또 그 주장이 진실이 이 민족국가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여러분은 악독한 공산당 놈들에 이용되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믿는 바이며 또 그런 신념이 명백히 표시될 것을 인정한 까닭에 석방하는 것이다. 사회에 나간 후에 여러분은 국가 민족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충성을 표할 것이며 또 우리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다.”

제주서장 “군경에서 여러분들의 신변을 보호한 이유는 공산당들이 후방을 교란하는 경우를 고려해서 잠시동안 실시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보호를 받게 되는 날 적절한 시기에 자유로 해주겠다는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란 것을 여러분도 알 것이다. 민국은 승리하고 있고 민족은 환희하고 있다.

괴뢰군의 멸망의 날도 머지 않다. 여러분이 자유가 된 후에 그 신분에 대해서는 보장될 것이니 안심하기 바란다. 이곳에서 나간 뒤에 국민병역 해당자는 속히 입대하며 그 타는 후방 생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석방자 대표가 나와 과거를 반성하며 대한민국에 충성을 표하겠다는 선서가 있은 후 폐회되었다.’ - 제주신보 1950년 9월 23일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당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다.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도 840여명의 주민을 검속했다. 모슬포 경찰서 관내 한림·한경·대정·안덕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는데, 이들 중 149명을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4~5시경 집단학살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날 새벽 2시경 한림지서에 검속되었던 63명도 계엄당국에 의해 집단총살 당하여 이곳에서의 희생자는 212명에 이른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대정읍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 창고 터이다. 이 폭탄 창고 터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이 구덩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학살이 시간 간격을 두며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암매장 구덩이도 두 개가 만들어졌다.

우선 학살 당일 소문을 들은 유족 300여명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학살현장에 모여들어 27구 정도의 유해를 구덩이 밖으로 인양하여 수습하던 중 군 당국의 무력저지 때문에 꺼내 놓은 시신마저 다시 구덩이에 놓은 채 수습을 포기해야 했다.

6년여가 지난 1956년 3월 30일 당시 한림지서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63구의 시신이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한림면 금악리 공동장지에 안장했다. 이 소문을 들은 모슬포지서 수감 희생자 유족들이 1956년 4월 28일 시신수습을 시도했으나 또 다시 군의 저지로 무산됐다.

하지만 유족들의 끈질긴 진정과 요구로 경찰, 군으로부터 시신발굴허가를 받았고, 1956년 5월 18일 발굴을 통해 149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중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17구의 시신을 제외한 132구는 백조일손 묘역에 안장했다.

모슬포 알뜨르 군비행장터에는 남이있는 격납고는 모두 20개이다. 파괴된 격납고도 없다. 이 격납고는 '가미카제'(新風)로 설명된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탄약고의 자리다. 일본군이 떠나면서 폭파해 버린 탄약고는 그 형체를 알 길이 없다. 여기서 죽어간 영령들을 수습하여 모신 곳이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다. 

1956년 5월 18일,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 수감 희생자 유가족의 끈질긴 청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149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중 132위를 상모리 586-1번지 묘지를 매입하여 안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상이 다른 일백 서른 두 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조상은 일백 서른 둘이요 자손은 하나다'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명명했다. 오랫동안 학살터에 방치한 결과 누가 누군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된 슬픈 공동운명체'였던 것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유족들은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책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긍정적인 답변으로 호전되는 듯 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무산되고 유가족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받았다.

▲ 백조일손지묘.

섯알오름 학살의 최종책임자는?

‘도의회 제25회 제2차 본회의는 8명의 성원을 본 가운데 어제 상오 11시부터 개회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결석의원에 대한 처리안건과 4․3사건으로 인한 양민학살 조사의 건 및 건의문 처리안건을 중요 의제로 하고 진지한 논의가 거듭되었다......

(중략)......다음 4․3사건으로 인한 양민학살 조사 및 건의문 처리의 건에 있어서 시 및 남․북군의 3개 단위로 기히 조사된 바가 각 의원으로부터 보고되었는데 제주시 구역을 조사한 고병효(高炳孝)의원은 서비행장 집단학살 사건과 또는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관련했다 해서 역시 집단학살된 수가 1,606명임이 조사되었음을 밝혔다.

다음 북군 동부를 조사한 한재원(韓在源)의원은 북촌에서 387명이 집단학살 당한 것을 비롯해서 동복리에서 24명, 조천지서 앞에서 60명, 신흥리에서 10명, 또한 제1차 동복리사건에서 양민학살 85명과 전부락이 전소, 그리고 행원리 공회당사건 등을 폭로하였으며, 북군 서부를 조사한 송봉규의원은 하귀국민학교에서의 양민학살 사건 등을 지적한 다음 6․25 후의 소위 예비검속으로 총살당한 희생자들은 양민임에 틀림없음으로 이들의 원혼을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남군 일대의 양민학살 진상을 조사해온 정맹수의원은 대정에서의 특공대사건을 비롯해서 송악산에서 수백명 학살되었다는 것과 안덕에서 187명, 강정에서 30명, 그리고 남원의 산간부락이 전부 소탕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토산리의 집단학살 사건과 또한 성산에서 한번에 30~40명씩 집단학살을 당해서 그 수 205명에 달했음이 조사되었다고 폭로하였다.

이상의 보고가 끝나자 김지만 의원은 본도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중앙의 태도가 주시되고 있으니만치 정확한 단안을 내려 건의서를 진달(進達)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한 사후처리로서 우선 현재까지 조사된 인명 및 재산 등의 피해를 종합적으로 통계하고 국회조사단의 요구에 의해서 10일까지 공식진정서를 동 조사단에 건의하자는 한재원의원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7일 하오 2시 현재)’- 제주신보 1960년 6월 8일

▲ 박정희 정권이 증거인멸을 위해 파괴한 백조일손지지 묘비의 파편들.

이도영의 아버지를 앗아간 섯알오름 학살 최종책임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도영의 추적은 섯알오름 학살현장 최종 명령권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는 한국전쟁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장이던 김종필(金鍾泌)에게 쳐들어가 예비검속학살책임자가 누구인지 따졌고, 결국 김종필은 이도영에게 “(전쟁당시 양민학살은) 전부 김창룡(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4과장)이 한 것이다”라는 증언을 받아내었다.  

한국전쟁 전후 '예비검속에 의한 양민집단학살'은 육군본부정보국 CIC와 내무부 치안국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됐다. 김종필과 백조일손유족회 대표가 만나 한국전 당시 양민학살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예비검속자 처형'이 당시 육국본부정보국 제4과 CIC의 김창룡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김종필를 면담한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잃은 이도영이다.  

2000년 1월 24일 월요일, 이도영은 자민련 당사 김종필 명예총재를 찾았다. 명예총재실에는 4명의 보디가드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고, 이덕주 특보가 배석했다. 이도영은 단신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 이도영이 질문을 하고 김종필이 대답했다.
 
- 저희들을 연좌제로 묶은 사람은?
“내가 무슨 연좌제에 관련된 사람이여? 여기 앉아요.”
- 연좌제에 총책임을 지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총책임을 져?”
-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경찰문서에 나와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연좌제를 없애는 데 노력한 사람이오.”
- 아버지 비석 부숴뜨린 것은 정부에서 세워 주셔야 됩니다.
“그걸 내가 부쉈어?”
- 명령해서 부쉈습니다.
“누구한테 명령했다는 거여?”
- 그럼 이 사실을 정부에서 조사해서.....
“조사해 밝혀 보시오. 내가 그런 명령을 했나! 왜 갖다 붙여? 왜? 증거도 없이!”
- 왜 이때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까?
“거기에 관련된 일이 없으니깐 할 얘기가 없잖어...”

그리고 2001년 3월 28일, 한국전쟁 당시 섯알오름 양민학살은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3대대 대대장 김윤근 소령이 지휘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이도영이 김윤근으로부터 직접 자백을 받아냈다. 결국 예비검속자에 대한 집단양민학살의 최종 책임은 이승만이며, 국가권력이라고 추론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이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요, 제노사이드(genocide) 범죄에 해당한다.     

 

▲ 섯알오름 학살터.

김종필의 정치판 영욕(榮辱)

박정희와 함께  정치판에서 영욕의 세월을 보낸 김종필을 칭송하는 모임이 2013년 12월 10일 발족했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창립대회를 연 ‘운정회(雲庭會)’다. 운정회는 김종필의 아호를 딴 이 모임이다. 이한동· 정우택·이완구·성완종 정진석 등  사실상 충청 출신 정치인들이 중심이다. 

이날 김종필은 5·16 쿠데타에 대해서는 여전히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할 수 없다)을 인용해 “민주주의와 자유도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며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먼저 깔아야 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걸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참석자들도 김종필을 “혁명의 지도자”라고 치켜세웠다. 운정회의 회장을 맡은 이한동 전 국무총리는 “운정(김종필)은 반세기 전 5·16 군사혁명을 기획, 주도했고 반만년의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민족을 후원하는 데 기틀을 놓았다”고 말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30대 후반의 혁명지도자로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고 칭송했다.

이날 모임에는 강창희 국회의장과 박희태 전 국회의장, 정운찬 전 총리를 비롯해 심대평 전 충남지사와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서청원, 정몽준, 이인제, 이완구, 정우택, 김을동, 성완종(이상 새누리당) 의원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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