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8)제주양민학살 사건조사를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제출한 김성숙

진보정치인 김성숙의 4·3인식

▲ 김성숙.

‘민의원의 김성숙(金成淑· 民政) 의원 등은 26일 상오 제주도 양민학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제안했다. 김(金)의원은 4·3사건과 6·25사건 때 적어도 4만~5만명이 학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1961년 1월 26일 

‘(전략)........김성숙 의원이 지난 26일 4․3사건과 6․25사변을 통하여 빚어진 제주도민 학살사건의 진상과 대책을 묻는 대정부질의서를 민의원에 제출하였다. 이보다 하루 앞서 25일 저녁 본보 서울분실에 들린 김 의원은 정부에 따질 구체적인 자료가 적다고 말하면서 도민 특히 피해가족의 고발정신이 희박함을 한탄하고 있었다. 양민학살의 진상규명은 그가 출마 전부터 간간이 표시하여 오던 의욕적인 사업이므로 비상한 결심이 보이거니와 질문서를 받은 정부가 과연 어디까지 성의 있는 진상조사와 피해가족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는지 궁금.....(후략)’ -제주신보 1961년 1월 29일

1960년 4·19 직후 한국사회당 소속 김성숙은 남제주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 함께 출마한 강인숙(姜寅淑)은 “혁신당은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는 그 원조가 유물론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일 뿐만 아니라 4·3사건도 사회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다”고 주장해 한국사회당을 자극했다. 그렇지만 김성숙이 1만3114표 최다득표로 파란을 일으켰다.

김성숙은 국회가 개원하자 제주4·3피해자 조사와 위령탑 건립을 위해 ‘제주도 양민학살에 관한 건의안’을 1961년 1월 26일 제출하였다. 당시 김성숙 의원은 피해가족의 고발정신이 희박함을 한탄하였다. 제주4·3사건 양민학살의 진상규명은 그가 출마 전부터 간간이 표시하여 오던 의욕적인 사업이었다.

국회는 김성숙 의원의 문제제기와 제주도민의 요구를 수렴, 경남지역 조사반의 조사지역을 확대하여 6월 6일 하루 동안 제주 4·3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국회조사단의 증언 청취 자리에서 10년 동안 한을 품어온 학살양민 유족들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양민학살 진상조사 작업은 싱겁게 끝났다. 국회조사단은 유보 쪽으로 의견을 모은 뒤에 국회 본회의에 대한 조사 보고마저 생략해버렸다. 그때 국회보고서에 나타난 제주4·3 사건의 피해내용은 인명피해 1878명, 가옥피해 4179동, 가축피해 2만5185마리로 각각 기록됐다.  제주양민학살사건 국회진상조사위가 열렸다.

‘제주도지사 양제박(梁濟博) : 조사위원장께서 시효라고 하는 말씀을 했는데 이승만(李承萬) 정권 12년 동안에는 군이나 경찰에 대한 책임을 누구든지 한 사람도 추궁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승만 정권이 물러간 뒤로 거창사건이니 이런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시효라고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조사에 관계가 없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년이라는 소추기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시효가 지났다 하더라도 국가로서는 대량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보상을 안 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입법기관도 여기 대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시기문제는 조사할 시간이 짧아서 참 유감입니다만 그것은 부득이한 사정이고 앞으로 계속해서 피해자 여러분이나 여기에 오신 의원 여러분이 계속해서 조사에 주력해 주셔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민학살사건 국회진상조사위 속기록(1960년 6월 6일) 중에서 

4·3의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제주신보의 학살진상 신고 접수 결과였다. 6월 10일까지 연기하여 접수 마감된 학살 건수는 총 1259통, 인명 피해는 총 1457명에 달하였다. 열흘에 불과한 기간에 이만큼 신고 되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국회조사단의 제주도 조사 방문은 제주도민들로 하여금 한껏 기대감을 부풀게 하였으나,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수준의 조사에 그치고 말았다.  국회의 미온적인 반응에 대하여 재경 제주출신 학생들은 6월 21일 국회 앞으로 몰려가 제주4·3의 진상을 규명하고 범법자를 처단하라는 삐라를 살포하면서 시위하였다. 

국회에  제출된 김성숙의 「제주도양민학살 보고서」는 피해자 조사와 위령탑 건립이 포함되어 있으나 이 또한 수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5·16군사정면으로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김성숙은 결국 5·16군사정변으로 구속되었다. 그는 1961년 12월 통일사회당 당원 13명과 함께 기소되었고, 2월 11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고 항소했으나, 4월 27일 혁명재판소 항소심에서는 이를 기각했다.

김성숙은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 판결문에 의하면 ‘.....8·15해방으로 귀국하여 서기 1945년 10월경 각 정당 행동통일위원 대표상무, 민족자주연맹 중앙조직부장등을 역임하였고 김규식(金奎植)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하고 월남 후 민주혁신당 부위원장, 한국사회당 총무위원 등을 역임 활약하다가 제5대 민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선되고 통일사회당을 발기하여 정치위원 겸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여 오던 자…’라고 씌여 있다. 

5·16군사정변이 발생하고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제주대학교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원들이 검거돼 고초를 겪었고,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는 옥고를 치렀다. 또 대정지역에서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몇몇 사람들은 군입대 중 체포돼 곤욕을 치렀다. 경찰은 또한 유족들이 세운 위령비를 부숴 파묻기도 했다.

이로써 진상규명 운동은 제대로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혀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 누구도 제주4·3을 입에 담지 못했고, 연좌제의 억압 속에서 도민들의 상처는 속으로만 더욱 곪아 갔다. 얄궂게도 1962년에는 4·3당시 제9연대장으로서 초토화작전의 주역이었던 송요찬이 군사정권의 내각수반이 돼 제주를 방문, ‘4․3상처 치유’ 운운하며 이재민 원주지 복귀사업을 실시했다. 

“혁신세력은 솔직히 말해서 좌익계열이 틀림이 없다” 

▲ 양제박.

제9대 제주도지사 양제박(梁濟博)은 한림읍 대림리 출신으로 보성전문을 거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대 조선노동공제회를 결성할 때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 죽암(竹巖) 고순흠(高順欽)과 함께 중추적임 역할을 하였다. 1927년 6월 인천에서 곽상훈(郭尙勳)· 김헌식(金憲植)이 주도한 민족계몽 단체인 신정회(新正會)를 통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10월 31일 미군정 인천시 고문으로 추대되어 이듬해 10월 26일 남조선과도정부의 한국민주당 소속 입법의원으로 당선되어 중앙정계에 투신하였다. 1948년 5·10선거에 인천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0년 4·19로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9월 10일 제9대 제주도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최천(崔天)을 단장으로 하는 4·3진상국회조사단이 내도했으나 형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럴 때 양제박 지사가 중문면장실에서 지방유지들에게 “혁신세력은 솔직히 말해 좌익계열임에 틀림없다. 혁신계의 진출을 경계해야 한다.”는 발언은 중앙으로까지 비화되었다.  7월 29일 제5대 민의원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유세 때마다 ‘양재박의 설화(舌禍)’가 문제되었다.   

양제박 지사는 또 중문면장실에서 “보수는 민족 고유의 생활양식이다. 그러나 혁신은 통제경제에 의해 주민들의 자유로운 생활권을 박탈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선거에 있어서도 정당보다도 인물본위로 선택하되 혁신의 진출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4·19학생혁명 이후 부쩍 대두되고 있는 혁신정당들을 자극했다.

양재박의 발언은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는 미묘한 시기에 터져 혁신정당의 반발을 몰고 왔다. 한국사회당 제주도당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6월26일에 개최키로 한 도당준비대회에서 「양제박 지사규탄대회」를 함께 열기로 하는 한편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으로서, 그것도 총선을 앞두고 혁신세력을 모두 좌익시 하는 발언은 이승만 정권이 양민을 적색분자라고 했던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고 반발했다.

1960년  6월26일 오후3시 제주시내 중앙극장에서 개최된 한국사회당 제주도당부 결성준비위원회 전도대회에서 김성숙 중앙당부 총무위원(제4대 국회의원선거 때 남제주군에서 출마했다가 차점으로 낙선)은 양 지사의 발언을 문제 삼고 “혁신세력은 국민의 벗일 뿐만 아니라 고귀한 학생들의 피로 시작된 4·19 혁명은 아직도 그 과정 중에 있다”고 말한 후 「양제박 지사 폭언규탄결의의 건」을 상정시켰다. 

양제박 지사의 「중문발언」은 제주지역에서만 그치지 않고 중앙정계로 까지 비화되자 총선에 위기를 느낀 민주당은 양제박을 급히 서울로 불러 들였다. 74세의 양제박은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그것을 해명하느라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양재박 지사가 제주지방검찰청의 소환을 받은 것은 귀임 이틀 뒤인 7월12일 밤 8시였다. 양 지사는 이에 대해 “혁신이 국민의 자유권을 박탈하기 때문에 혁신세력의 진출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전혀 한 바가 없으며 이같은 신문보도는 허위이다”며 발언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투표결과 민의원에는 고담룡(高湛龍), 홍문중(洪文中), 김성숙(金成淑)이 당선, 특히 혁신계혈인 한국사회당의 김성숙은 1만 3천 1백 14표로 최고득표자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혁신계열 5명이 당선되었다. 참의원으로는 강재량(姜才良), 강경옥(姜慶玉)이 당선되었다.  동년 8월 21일 양원합동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에 윤보선(尹潽善), 국무총리에 장면(張勉)을 선출하였다. 다음 도지사 직선제가 실시됨에 따라 양재박은 1960년 10월 27일 퇴임하니 도지사 2개월 재임에 불과했다.

김성숙과 신유의숙(辛酉義塾)

 

▲ 가파초등학교.

‘활발하고 건강한 우리 학도들/ 일조의 서광이 비치었으니/ 소리를 마주치고 용맹스럽게/ 아 찬송합시다// 의롭다 한라산을 쳐다보세요/ 일제의 동풍한설 몇 번 지나도/ 만고불변 엄연하기 군장의 절개/ 아 고상하도다// 고금천지 고금역사 들어보아라/ 나폴레옹은 누구이며 골롬부스는 누구인가/ 아아 어느 때 누구누구 영웅열사가 씨가 있으랴/ 아 찬송합시다//(후렴) 신성하다 우리학교여/ 화려하다 우리학교여/ 무궁화 세 가지의 꽃이 아닌가/ 아 잘 배양합시다’

- 김성숙 작사 작곡 「가파도신유의숙가(加波島辛酉義塾歌)」   

김성숙(金成淑, 1896~1976)은  대정읍 가파도(加派島)가 고향이다.  1919년 3·1운동 때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제주출신 중 한명이다. 당시 24살이던 그는 경서고보(京城高普)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일본인 판사 앞에서도 “나는 일찍부터 조선이 독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이라고 당당히 밝힐 정도로 민족해방 의식이 강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독립을 희망하는 이유는?” 일본인 판사가 물었다. “학교제도가 불완전한 것, 그리고 한․일간에 민족적 차별이 있는 것과 지금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독립이 된다면 그런 문제가 해소되니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다.” 경성고보 학생 김성숙이 대답했다. “장래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다시 판사가 물었다. “독립의 호기가 오면 또 할 작정이다.” 김성숙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된 김성숙은 1920년 봄 고향으로 돌아와, 1921년에 신의의숙(辛酉義塾)을 세웠고, 이는 주민들의 독립사상을 고취시켜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공립보통학교 모표는 모두 벚꽃인데, 신유의숙 모표는 무궁화로 일경(日警)의 주목을 받았다. 가파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 가파도에 4년 동안 머물렀다.

해방 후에는 대정중학교 초대 교장 이도일(李道一),  2대 교장 이원정(李元貞), 향토사학가 김태능 (金泰能) 그리고 이정백(李貞白), 김옥천(金玉千) 등 가파리 출신 인재들이 교편을 잡았다. 역사학자 김태능은 김성숙의 조카이다. 그 외에도 김한정(金漢貞), 이신호(李辛祜),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강문범(姜文範), 시인 송건현(宋鍾鉉), 축구와 정구대회 우승기를 휩쓸도록 했던 장종식(張鍾植),  향토사학가 박용후(朴用厚)도 신유의숙 교사였다.

▲ 가파초등학교.

외딴 섬에 있는 학교의 교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이는 김성숙의 영향 때문이다. 제주북초등학교를 제외하곤 모두가 4년제인 시절에 신유의숙은 6년제여서 모슬포는 물론 서귀포에서도 유학을 왔었다. 무궁화를 상징하는 모표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간 김성숙은 1927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 정경학부를 졸업한다. 이후 친분을 맺은 신익희(申翼熙)는 초대 학생회장, 김성숙은 2대 학생회장이었다. 졸업 후 그는 항일독립운동에 가담, 1928년에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고 그 조합의 위원장이 된다. 일결의 핍박이 심해지자 귀국하여 서울에서 ‘귀농파(歸農派)’라는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다 8·15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김성숙은 각 정당을 통일하기 위한 행동통일위원회를 조직하고 상임간사가 되고, 1946년 6월에는 민족의식을 선양하기 위한 조선건민회를 발기, 본격적으로 김규식(金奎植)에 동조하여 민족자주연맹에 창립에 참가 조직국장에 취임했다.

1947년 2월 김성숙은 미소공위(美蘇共委)의 성공을 위해 행동통일을 기할 목적으로 김규식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2월 민주자주연맹 상임위원에 취임했던 김성숙은 마침내 이듬해인 1948년 4월 21일 원세훈(元世勳) 최동오(崔東旿) 신숙(申肅) 박건웅(朴建雄) 신기언(申基彦) 강순(姜舜) 송남헌(宋南憲) 등 16명으로 구성된 민족자주연맹 대표단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한 북행길에 올랐다.

김규식의 승용차는 제주출신 부장환(夫章煥) 조선피혁사장의 자가용이었다. 그렇지만 남북협상은 무위로 돌아가고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김성숙은 야당 일선에서 민주적 복지사회의 건설과 평화적 국토통일 운동에 매진하였다.

▲ 가파초등학교에 세워진 김성숙 동상.

1960년 4·19학생혁명 직후인 5월에 한국사회당을 창당하고 7·29선거에 남제주군에서 입후보하여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5·16군사쿠데타로 그의 의정활동은 10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8·15 해방을 맞으면서 가파도 주민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신유의숙 숙장이던 이도일은 대정중학교 초대 교장, 신유의숙 졸업생 이원정(李元貞)은 대정중학교 2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신유의숙 교사 문달진은 대정면 인민위 교육부장을 맡았다.

특히 중요한 인물로 이경선을 들 수 있다. 인민위원회가 주관한 대정면 3·1절 기념행사에서 이경선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3·1절 기념행사에는 이도일 교장과 이신호· 이운방이 자리를 함께 했고, 경찰과 군인들도 함께 했다.

“우리 삼천만 민족이 갈망하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맞이하여 이러한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것에 기쁨을 금치 못합니다. (중략) <경찰군인들을 보며> 경찰 여러분도 우리 조선 사람입니다. 군인들도 우리 조선 사람입니다. 다 같은 조선 사람인데 왜 서로를 잡아가고 그럽니까?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군인이나 경찰이 정치에 관여를 하지 마십시오”

제주4·3이 발발하던 해 12월 3일, 가파도에 수십 명의 군·경 합동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토벌대는 곧 주민들을 가파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양형종(梁瀅鍾,아명 양해관)과 이창하(李昌夏), 그 외 3명을 끌어내 총살했다.

다만 대정중학생이던 강성태가 입산했다는 소문만이 들릴 뿐이었다. 이날 군인들은 3명을 총살한 후 “당장 문덕우·강군섭을 찾아내지 않으면 기관총으로 몰살시키겠다”며 주민들을 위협했다.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마을을 뒤졌다. 가파도에서 숨어있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닷가에 숨었던 문덕우는 곧 발견됐고 군인들이 그를 모슬포로 끌고감으로써 이날의 상황은 끝났다. 

그런데 며칠 후 또다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강군섭이 잡혔다. 강군섭은 자신으로 인해 주민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스스로 자수했다. 군인들은 강군섭(姜君涉)과 함께 역시 가파국교 교사이던 이원함(李元含, 대정중 2대교장 李元貞의 동생), 그리고 강영흥(姜如興7)·강진흥(姜眞興) 형제를 모슬포로 끌고가 12월 10일 비행장 부근에서 총살했다.  

가파리의 마지막 희생은 역시 예비검속이다. 1950년 8월 20일 이재근(李在根)· 조영삼(趙永三) 김승국(金承國) 등 3명이 모슬포 섯알오름에서 희생됐다. 이른바 백조일손(百祖一孫) 희생자들이다.

4·19혁명에 힘입어 진상규명운동 시발

 

▲ 대학재학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한 이문교 회장이 통일방안공청회에서 개막 연설을 하는 모습.

‘자유와 인권을 마구 짓밟아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 속에 집어넣어 살상, 폭력, 강도를 일삼던 이승만 자유당독재정권이 엄숙한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몇몇 불순분자의 권력과 이익만을 위하여 온갖 불법 부정을 자행하면서 조국과 민족에게 치욕과 가난만을 가져다준 이승만 독재정권은 불의와 부정에 굴치 않은 피끓은 청년학도들의 영웅적인 피의 항쟁과 이에 호응한 애국적 국민대중의 과감한 투쟁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국민은 정의와 합법을 찾아 자유와 민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새로운 민주혁명의 제2공화국은 희망과 광명의 내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민주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고 제2공화국 건설에 용약매진하는 경애하는 도민여러분! 1인독재 자유당 폭정 10년 동안에 우리 도민은 질식할 것만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몸서리치는 4․3사건 이후 우리 도민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했으며 가슴 속에 사무친 한이 있어도 호소할 길이 없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매, 처자들이 죄없이 죽어가도 억울타는 소리 한마디 못했으며 빨갱이로 몰려 죽을까봐 두려워 원한에 사무친 울음조차 울 길이 없었다.

야수와 같은 그들의 만행을 우리는 누구의 입을 빌릴 필요도 없이 똑똑히 보아왔다. 그러기에 자유와 권리를 찾아 참다운 민주주의를 건설한 이 마당에 우리는 누구도 4․3사건의 참상을 폭로하고 증언할 수 있으리라. 야만인적인 총칼 밑에서 무참히 죽어간 수만여 원혼을 위령하고 그들이 무죄임을 증언할 때는 오고야 말았다. 4․26혁명 후 사회 각 분야는 고발정신이 날로 앙양되고 있다. 우리는 엄숙한 역사의 부름을 받았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처자를 잃고 비애에 잠긴 유가족들이여! 치가 떨리고 몸서리치는 4․3사건의 학살, 방화 등 죄악상을 목격한 도민들이여! 지금은 원한과 설움 만을 갖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암흑 속에 묻혀있던 4․3사건의 진상을 하루속히 규명하여 야수와 같은 그들에게 역사적․법적 심판을 받게 하고 우리 가슴 속 깊이 서렸던 설움을 실컷 토로해야만 할 때이다. 우리는 사적 감정인 보복행위로써가 아니라 냉철한 이성의 판단으로 감연히 일어설 때가 온 것이다. 불의와 부정에 굽힐줄 모르는 도민들이여! 4․3사건 진상고발에 주저하지 말자. 4․26혁명 후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는 과도정부 각료들이여!

4․3사건 당시 모든 야만적 행위는 자행됐었으나 모두 숨겨져 제주도민의 원한은 한없이 쌓여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에 과도정부는 전력을 기울여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동시 4․3사건 당시 양민을 학살하고 방화 등을 자행한 주동자와 졸도(卒徒)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민심수습의 완전한 효과는 거두지 못할 것이다.

과도정부가 신속 과감하게 4․3사건시 양민학살, 방화 등 모든 야만적 행위를 규명하여 도민의 유한(遺恨)을 풀어주지 않은 한 도민들의 보복감과 정부불신의 사상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4․3사건시 죄악상을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초래될 사회적 혼란도 예상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과도기의 정부가 해야할 급선무는 국민대중의 원한을 속 시원히 풀어주어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감정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건설적 정신을 □□하는 일이라 믿기에 이렇게 호소한다.

과도정부는 국민대중의 요구에 민감해야 할 것이며 또 국민대중의 냉정만을 호소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도정부는 불철주야 그 힘을 다하여 4․3사건시 참상을 규명하여 제주도민의 원한을 풀어주도록 성의를 다하여주기를 호소한다. 자유당 폭정하에서 질식해 버린 언론의 여명을 이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도로 찾겠다고 온 정열을 바쳐온 언론인들이여! 진정한 민주공화국 건설의 일선에서 투쟁한 민주주의 수호신인 언론인들이여! 언론인들은 4․3사건시 참상을 죄다 폭로해 원한에 찬 제주도민의 마음을 대변해주기를 원한다. 도민여론 환기에 편견이 없이 공평무사 진정(眞正)만을 원한다.

도민! 과도정부각료! 언론인들이여! 우리는 역사적인 커다란 교훈을 받을 시기에 처해 있다. 죄없이 무참히 죽어간 수만여 원혼들의 원을 풀어줄 때는 왔다. 유가족들의 설움과 슬픔을 위로해 드릴 때는 왔다.

이 때에 4․3사건시 죄악상을 조사 규명하여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음과 아울러 인간의 탈을 쓴 야야수와 같은 행위로써 양민학살, 방화 등을 자행한 주동자와 졸도들을 고발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죄없이 죽어간 원혼을 위령하고 슬픔과 억울함에 잠겨있는 유가족들을 심적으로나마 위로하여 민원이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하여 찬란한 제2공화국 건설에 미력이나마 헌신하고자 같은 뜻을 품은 7명의 동지들이 모여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라 이름졌으니 도민, 과도정부 각료, 언론인들에게 많은 협조있기를 진심으로 호소한다.’ -1960년 5월 일/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고순화(高順華) 고시홍(高時弘) 박경구(朴卿久) 양기섭(梁基燮) 이문교(李文敎) 채만화(蔡萬華) 황대정(黃大定)‘-제주신보 1960년 5월 26일(광고/호소문)

‘용공혐의로 구속되어 있던 25명의 학생들이 10일 하오 기소유예 또는 공소취하로 석방되었다. 이날 하오 9시 최고회의 공보실은 이들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는 발표와 아울러 “이런 파격적 은전을 베푸는 것은 이들을 학창으로 복귀하게 하여 국가장래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그 뜻을 밝혔다. 석방자 명단 및 원(元忠淵)공보실장의 담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지화(金知華․기소유예) △이종화(李鍾和․공소취하) △장병성(張秉成․동) △오정식(吳廷植․동) △최석환(崔錫煥․동) △나탁균(羅鐸均․동) △조동철(曺東哲․기소유예) △이장근(李蔣根․동) △김득수(金得洙․동) △김용서(金龍瑞․동) △오덕량(吳德樑․공소취하) △이인재(李仁載․기소유예) △백승홍(白承弘․동) △김하청(金河靑․동) △신의웅(申義雄․동) △최덕상(崔德相․동) △백남현(白南鉉․동) △신대순(申大淳․동) △이문교(李文敎․동) △이향문(李鄕文․동) △김봉세(金琫勢․동) △정대영(鄭大永․동) △윤재화(尹在華․동) △김수영(金銖泳․동) △이문교(李文敎․공소취하) 서울형무소는 기소유예 및 공소취하 조처로 석방이 결정된 학생 25명에 대하여 11일 자정 현재 석방조처 집행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  한국일보 1961년 11월 11일

제주4·3의 첫 진상규명 운동은 1960년 4·19혁명에서 비롯됐다.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돼 사건이 종결된 지 6년만의 일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열기가 무르익던 1960년 5월 23일, 국회는 한국전쟁 당시 거창·함양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조사단 구성을 결의했다.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제주4·3도 진상규명해야 할 것 아니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제주대학생 7인은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 (고순화·고시홍·박경구·양기섭·이문교·채만화·황대정)를 결성해 자체 조사활동에 나섰고, 모슬포에서는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궐기대회가 열렸다. 결국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위는 조사 대상 지역에 제주를 포함시킬 것을 승인, 6월 6일 조사반이 내도했다.

이처럼 갑자기 국회조사단의 제주 방문이 결정되자 제주신보는 촉박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희생 상황 접수를 받았고, 제주도의회나 제주시의회, 그리고 진상규명동지회도 나름대로 자체 조사 수집에 나섰다.

그러나 경상남도 조사반에 곁다리로 끼어 마지못해 실시된 단 몇 시간의 국회 조사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공교롭게도 조사반장 최천 의원은 4·3 당시 제주경찰감찰청장으로 재직한 토벌대 주역인데다 태도마저 강압적이어서 물의를 빚었다.

조사 과정을 보도한 제주신보는 "질문하는 방법이 마치 죄인 다루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최천 반장이 "10여 년이 경과됐으니 처벌 시효가 지났다"고 말하자 현장에 있던 제주신보의 신두방 전무는 "그러면 뭣하러 왔느냐. 사람 죽인 놈들에게 시효가 문제 되냐"고 따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조사반의 다른 두 의원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철저히 처리하겠다"고 다짐해 겨우 일단락 됐다. 또 1960년 6월 21일 재경 제주학우회는 국회 앞에서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서울과 제주도의 대학생을 망라하는 '제주도민 학살사건 진상규명 대책위'를 조직하는 등 열기를 더했다.

 

▲ 이문교(李文敎)는 1960년 5월 제주대학 동료 6명과 함께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했다. 4.3 해결을 호소하는 광고와 함께 홍보 전단을 배포했으며, 실태 조사 등의 활동을 벌이다 5.16쿠데타 이튿날인 1961년 5월17일 계엄군에 연행돼 긴급 구속됐다. 바로 4.3 해결에 나섰던 1세대이다. 1960년 5월 제주대학교 학생들로 결성된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7명의 멤버. 앞줄 가운데가 당시 구속된 이문교  회장. ⓒ김관후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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