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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다”

김관후 kghoo21@naver.com 2014년 03월 27일 목요일 09:27   0면

<김관후의 4·3칼럼> (20) 학살 주범 ‘親日軍’ 출신 최경록과 송요찬    

최경록 연대장의 진압작전

   
▲ 최경록.

‘지난 18일 상오 제주도에서 피살된 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부대장(部隊葬)은 예정을 변경하여 22일 오후 2시 시내 남산동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 집행하기로 되었다 하며 공석중인 전기 11연대장으로는 실전의 경험이 풍부한 최경록(崔慶錄․30) 중령이 새로 임명되어 이미 현지에서 진압행동을 지휘하고 있다 한다.’

-자유신문 1948년 6월 22일(같은 기사 동아일보․조선일보 48. 6. 22)

‘금후의 제주도사건 수습의 중책을 등에 지고 지난 24일 부임한...(중략)... 최(崔) 경비대장은 1일 개최된 전도 읍면장 회의석상에서......(중략)..... “작전행동은 계속 중이다. 사태는 무력만으로는 해결지을 수 없다고 본다. 국방경비대의 방침은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 아니다. 국가 민족의 적과 국외에서 전투함을 본분으로 삼는 경비대는 본의 아닌 임무에 헌신하고 있다. 금후 경비대의 위신을 손상하는 대원은 철저히 숙청할 것이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11일

‘조선인민의 가장 악랄한 적인 미제의 지휘에 빨치산토벌군은 6월 20일을 전후하여 서쪽으로는 애월면 한림면 조천면 지대를 기점으로하여, 동쪽으로는 구좌면 성산지대를 토벌종점으로 하여 유격대를 일시에 섬멸하기 위하여 한라산에 대한 포위 공격을 4일간에 걸쳐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미제와 야수들의 가장 어리석은 오산이었다.’ -김봉현․ 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최경록(崔慶祿, 1920년 9월 21일 ~ 2002년 9월 3일)은 충청북도 음성 출신으로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이어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 지원병 제1기 출신이다. 일제는 지원병제를 '외지 통치의 시금석(試金石)'으로 간주, 지원 권유 캠페인을 벌였다. 

1938년 4월 10일 마감한 제1기 모집에는 4백 명 정원에 2, 673명이나 지원, 6.7대의 경쟁을 보였으며, 혈서지원자까지 있었다. 여기에 18세 최경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봉화가 올려졌다. '미군의 즉시 철수', '망국적인 단독 선거 절대 반대', '이승만 매국도당 타도', '경찰대와 테러 집단 즉시 철수' 등을 슬로건으로 유격대원들은 봉기의 포문을 열었다. 바로 '피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제주도 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 조병옥의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 신성모의 "제주도 도민이 모두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발언은 지금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박진경 연대장이 문상길 중위에 의해 살해되고, 최경록 중령은 1948년 6월 21일 제11연대장으로 보직 발령이 났다. 부연대장은 송요찬 소령. 최경록은  일본군 제78연대에서 하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뒤 육사시험에 합격해 입교 대기상태에 있다가 남태평양 뉴기니에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경록은 제주에 부임하던 날부터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쳤다. 6월 21일 오후 6시부터 24시간 동안 송당리 지경에서 48명을 체포하고 카빈총 1정을 회수했고, 삼양리에서 29명을 체포했다. 6월 25일에도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오후 6시까지 수색작전을 펴 176명을 체포하고, 약 3만원의 돈과 5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압수했다. 

경비대는 6월 21일, 6월 22일, 6월 25일, 6월 26일 잇따라 수색작전을 전개해 253명의 ‘폭도’를 체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획한 총기류가 단 1정 뿐이다. 심지어 6월 25일에는 176명의 ‘폭도’를 체포하고도 노획물은 돈과 식량뿐이었다. 

최경록 연대장은 7월 14일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이 지휘하는 진압작전 마지막 날인 7월 15일 기자들과 만나 “지금까지 한라산을 중심으로 토벌을 4회 한 일이 있었는데 산사람들을 체포할 수는 없었다”면서, “산사람들의 연령을 보면 소년, 청년, 장년, 노년으로 되어 있는데 소년은 12세로부터 노년은 60세까지 있다. 그 중 청년이 제일 많고 그 다음 장년과 소년이요, 제3위는 노년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무차별 연행은 오히려 무장대 편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최경록 연대장은 교통차단 해제, 어획금지 해제, 통행시간 연장 등의 조치를 취했고, “이후는 특수한 경우 이외의 작전행동은 보류하나 경찰 및 각 행정기관에 협력하여 치안회복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제주사태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 1961년 1월 27일 육군참모총장 최경록 중장(왼쪽에서 셋째),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중장(넷째), 공군참모총장 김신 중장(다섯째)이 장면 총리를 예방하고 있다.

그 후 1960년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발포 명령에 대하여 최경록은 발포를 중단하도록 만류하였다. 그해 5월, 허정은 최경록을 육군참모총장에 채용하려 하였으나,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인연이 있던 최경록은 허정의 참모총장직 제의를 사양하였었다.  8월 23일 장면은 국군 인사를 단행, 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이듬해 1961년 육군참모총장 최경록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바로 5.16 이후 최경록,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은 1963년 3월 21일,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 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희 장군의 군정 연장 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후 1967년 10월 7일 상오, 박정희 대통령은 최경록을 맥시코 신임대사에 임명하였다.  그후 다시 1973년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 

강경한 진압작전 계속되다 

‘중산촌에 머물러서 치안에 노력하던 국방경비대는 6월 26일 새벽부터는 북제주 방면에다 무력을 써서 중간산촌 각 부락을 둘러싸고 소요에 가담한 혐의자를 다수 체포하였다. 이번 방법은 해안지대까지 넣은 대규모의 행동이었다. 이날 오후까지 구좌면, 조천면, 제주읍 등지에서 체포된 인원만도 200여 명에 달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소요부대의 간부로 인정되는 2명도 있었고 대부분은 농민이었으며 무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朝鮮日報', 1948년 7월 4일.

‘처처에 절도된 전주는 그대로 밭이랑 산등성이에 나자빠져 있건만 의연히 엄존하는 경찰지서의 바리케이드만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부락민 40~50명이 지금 경비전화선 복구와 지서돌담 구축 공사부역으로부터 돌아온다. 맥없이 일행 앞을 지나던 그네들이 제주출신의 일행의 한 사람 말에 순시로 사방을 둘러싸고 울음의 바다를 이루고야 만다.

들고 있던 괭이를 돌 위에다 두드리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다”고 울부짖는가 하면 공포와 울분에 북받친 60노파는 무어라 문표를 가리키며 가슴을 두드린다. 붙어있던 집집 문표가 하룻밤에 없어지자 전 부락민이 지서에 인치되어 난타 당하였고 또한 학대받고 있다 한다. 죄는 폭도에 있는 것인가, 부락민에 있는 것인가. 총소리는 잠잠한데 주름잡힌 이맛살에 왜 이다지도 우색이 가득하며 터질까 염려되는 울분에 잠겨 있다. 지금은 어떠한가 하는 기자의 말에 “먼 곳 총은 무섭지 않으나 가까운 총부리가 무섭수다”라고 고함으로 응수한다.’ -朝鮮中央日報, 1948년 7월 11일.

‘미제는 미육군전시법을 적용한 군정법령들인 <국방경비밥>, <치안경비법>에 포함된 불과 50여 조문의 규정으로써 군법회의를 열면서 이와 같은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조선의 우수한 장병을 정뜨르비행장과 산중계곡에서 무수히 참살하였다. 이것은 괴뢰군 지휘부 곧 미제의 테러적 군사독재의 단적인 표현이다. 문상길 장교를 비롯한 애국적 병사들은 죽음터로 끌려가는 마지막까지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인민들에 대한 직업적인 범죄행위를 신랄히 규탄하며, 그를 반대하여 반항하였다. <너희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무엇 때문에 미제의 총마개로 되는가? 오늘 네놈들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있지만 밝아오는 조국의 아침햇살을 쇠사슬로 묶어 놓을 수는 없다!>는 혁명의 열회로써 놈들의 심장을 에이며 애국대열에서 싸움의 불길을 더욱더 격동케 하였다.’- 김봉현․ 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경비대 11연대의 작전은 많은 후유증을 낳았다. 국방경비대가 감시하는 천막수용소에는 20세 청년에서부터 60대 노인까지 있었다. 이들은 산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을에서 농사에 종사 중 붙들려 온 것이다.  특히 무차별 연행은 젊은이들을 오히려 무장대 편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주변 부락에는 청년을 구경하기 어렵게 됐다. 그들은 무차별 집단 검거를 피하여 소위 인민해방군의 전위대에 몸을 던져버렸다. 가장 큰 고통을 묻는 질문에 “호적에도 없는 아들 딸을 내놓으라는 데는 질색하겠다”고 답변했다.

최경록 연대장의 후임으로, 송요찬 연대장이 재임중이던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벌어진 강경 진압작전 때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 초토화됐다. 특히 11월 중순 이전에는 주로 젊은 남성들이 희생된데 반해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토벌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총살함으로써 희생자 대부분이 이 때 생겨났다.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통계를 보더라도 15세 이하 전체 어린이 희생자 중 이 때 희생자가 전체의 76.5%를 차지한다. 또 61세 이상 희생자 중에서는 이 기간에 76.6%가 희생됐다.

초토화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송요찬의 11연대는 이후 2연대(연대장 함병선)으로 교체된다. 제주 주둔군을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하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단원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킨 것은 제9연대보다 더욱 더 강경한 작전을 통해 조속히 사태를 끝내기 위한 조치였다. 함병선이 이끄는 2연대가 무차별적인 살육과 토벌로 무장대는 거의 괴멸하고 나서야 1949년 7월 제2연대는 제주를 떠난다. 

 

   
▲ 정일권 경비대 총참모장(오른쪽). 김영철 해안경비대 참모장(중앙)이 9연대 송요찬 연대장과 함께 삼성혈에서 (1948. 10. 1).

‘【제주도 발 조통】(전략) 지난 9일 현지에 당도한 부산기자단 일행은 10일․14일 2차에 걸쳐 국방경비대 연대장 최(崔)중령과 회견하고 제주도 사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앞으로도 토벌을 더 계속 할 터인가. (답) 필요시에는 하겠다. (문) 현재까지 체포된 폭도의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답)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중간 연락대원과 물자운반 등에 종군한 자를 현재까지 1454명 체포하여 모두 석방하고 약 80명만 송청할 것으로 결정되었다. (문) 팔로군이나 북조선인민군이 다수 가담하고 있다고 하며 또 포로도 있다는데. (답) 그런 일은 전연 없다. 끝으로 동 중령은 폭도수효를 확실히 모르나 정예부대가 약 200명 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일반도민은 적어도 3000명은 넘을 수효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폭도 정예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자는 28세 되는 학병출신으로 대정면 태생 이승진(李承晋)이라고 하며 김달삼 이상길(李相吉)등 두 가지의 가명을 쓰고 있다 한다. 폭도측의 완전 기동부대는 이 자가 직접 지휘하고 있으며 도민들은 그를 인민해방군 사령이라고 부른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21일(같은 기사 조선일보․한성일보 48. 7. 21)

‘【제주도발】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제주도의 현지답사를 목적으로 대구 법조기자단 일행이 부산을(13일 오후 8시) 출발하여 제주읍 항에 도착한 것은 15일 오전 9시경이었다. 일행은 무장경관의 엄밀한 검사를 받고 향하였다. 요소 요소에는 무장경관․국방경비대원들이 삼엄한 경계진을 펴고 있다.

이곳은 제주도의 수부(首府)로 도내 모든 행정수반 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중앙여관에 여장을 푼 일행은 즉시로 ‘국방경비대 제주도방면사령부’를 찾아 최경록(崔慶祿)사령관을 만난 바 씨는 기자단 일행에 다음과 같이 소요사태를 말하여 주었다.

 (1) 4월 3일 사건 발생이후 7월 15일 현재까지 사령부에서 취급한 부로(俘虜) 수는 약 1,800명 내외인데 그 중 석방자가 약 1,600명 가량이고 현재 부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이 약 150명 가량이며 송청자가 46명이다. 송청자 46명은 주모자로 인정되는 사람들이며 그 중에는 여성이 약간 명 있다. 여성들은 대개가 가정부인인데 지식정도가 모두 고녀(高女)출신이다. 2) 지금까지 한라산을 중심으로 토벌을 4회 한일이 있었는데 산사람들을 체포할 수는 없었다. 3) 한라산에는 약 4개 연대(1개 연대 약 120명)로 약 600명이 잔존하고 있다. 4) 국방경비대원으로서 현지 재판을 받은 사람은 43명인데 그중 사형이 5명이고 10년 징역이 10명이다. 5) 국방경비대가 산에 올라가면 산사람들은 발포하지 않고 경찰관이 산에 올라가면 발포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6) 산사람들의 연령을 보면 소년 청년 장년 노년으로 되어있는데 소년은 12세로부터 노년은 60세까지 있다. 그 중 청년이 제일 많고 그 다음 장년과 소년이요 제3위는 노년이다.

이상과 같은 단편적 담화를 기자단에 말해준 사령관은 끝으로 제주도사태 수습에 있어서 무력해결로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다음 우리 일행은 최사령관의 안내로 내리는 소낙비를 맞아가며 산사람들로부터 압수하였다는 무기창고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일본군총 권총 일본군도 와사(瓦斯)탕기 화약기구 죽창 톱 의류 전화기 미싱기 기타가 있었다.

전화기는 한라산 속 수많은 인조동굴에 칩거하고 있는 산사람들이 동굴과 동굴간에 전화설치가 되어있어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신문을 실증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싱기계는 산속에서 의복을 수리하고 제조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기창고의 견학을 마치고 부로수용소를 찾았다. 부로수용소는 육지에 있는 형무소와는 딴판으로 평탄한 운동장에 야영용 천막을 친 것으로 겨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습기가 차 올라 바닥에 깐 가마니는 축축하고 주위에는 무장한 국방경비대원이 감시하고 있다.

천막수용소는 2개소로 수용인원은 약 40명인데 연령으로는 목하 20세의 청년, 최고 60세의 노인도 있었다. 이들은 산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기 부락에서 농사에 종사 중 붙들려온 것으로 “지금 이게 석달째요”하고 기자단 일행에 하소연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29일

학살 주범은 ‘親日 軍’ 세력 

제주도민과 우리 군 사이에는 ‘4.3’이라는 역사적 상처를 두고 미묘한 긴장이 흘러왔다.  도민들은 4.3당시 토벌대인 군에 씌워진 ‘학살’의 올가미를 거둬들이지 못했다. 군 일각에서는 아직도 제주4.3을 ‘남로당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해 있다. 국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군을 ‘학살자’로 인식하고, 군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국민을 향해 ‘빨갱이’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제주4.3사건은 우리 군이 저지른 것이 아니다. 우리 군이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소위 일본 앞잡이 하던 그런 친일 세력들이 저지른 것이다. 그 정치인들이 정치 군을 동원해 군대의 무력을 활용했을 뿐이다. 4.3학살의 주범은 군 전체가 아닌 일본군 출신의 ‘친일군’이다.

사람을 죽이면서 게임을 벌이고, 부모를 학살하면서 자식들에게 박수를 치게 하고, 장모와 사위를 발가벗겨 성행위를 강요하며 낄낄거리는 등, 도대체 믿어지지 않은 증언들을 생생하게 듣게 된다. 이런 비인간적 정신상태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바로 '악질 친일파를 포함하여 지배층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도덕적 취약성과 그로 인한 극도의 편협성, 비인간성이 그러한 집단학살을 저지르게 한 것'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시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자신의 동족에게 무슨 일이든지 자행할 정신상태에 있었고, 그렇게 되도록 일제나 미군정에 의해 훈련을 받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학살할 때 특별히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태우고 범하고 죽이는 것이 규칙의 굴레에 묶인 군대의 임무에서 개인의 단독행동이 허용된 자유시간이었다. 어느 일본군 장군은 "전투에서 이기고 난 후 또는 추격전 때는 약탈, 강도, 강간은 오히려 사기를 왕성하게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4.3당시 2만여명의 양민을 학살한 주범은 일본군 출신의 친일세력이며, 그들이 군대의 무력을 활용했을 뿐이다. 1948년 4월3일. 소위 4.3사건 발발 직후부터 종료직전까지 김익렬 9연대장, 박진경 9연대장, 최경록 11연대장, 송요찬 9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이 4.3사건을 진압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중 김달삼과 평화협상 직후 교체된 김익렬 연대장을 제외하고 박진경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 연대장 모두 일본군 출신이다. 이들의 연령은 평균 32세로 매우 젊었다. 특히 4.3이 사실상 진압되던 1949년 봄까지의 사령관은 대부분 20대와 30대 초반이었다. 

일본군인은 천황(天皇)의 충복으로서 상급자와 최고권력자에 무조건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다. 일본육사가 “대일본제죽 남아에게 천황을 위해 죽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일본군 출신이 다수를 장악한 해방 후 한국군의 모습은 일본군의 정신세계를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최경록에 이어 송요찬은 계엄 사령관이 된 후 제주전역에 초토화 작전을 펼쳐 대량학살의 주범이 된다.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 총살할 때, 일제 때 일본군이나 만주군으로 복무했던 군인들에게 중국인 학살의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군인으로서 제일 부끄러운 군인이 항일 독립 전쟁 당시에 독립군 광복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원에 참여했던 군인이다. 군인이 쿠데타를 해서 민주 정권을 탈취해 버리는 것, 그리고 정권유지를 위해 수많은 죽음을 만든 이런 군인이 있다면 가장 부끄러운 군인이다. 

송요찬 연대장의 초토화 작전 

   
▲ 송요찬.
‘(전략) (2) 제주도 작전에 대하여 : “종래 제주도 주민들은 독자적인 도민성을 보존하고 있었고 또한 남로당 조직이 잘 되어 있어 과거에는 국군과 경찰에 적대행위를 했으나 현재는 도민의 심경의 변화가 현저하여 대체로 극히 우호적이며 도민들은 자유스럽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군경을 돕고 최근에는 국군이나 경찰에나 절대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즉 최근 제주도 작전에 있어서 소수의 국군장병에 인솔된 보조 무장도민 3000명이 한라산 무장폭도 측에 1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다수의 무기와 식량을 나포 압수하였으며 12월 11일 하오 6시에는 제9연대의 1개 중대는 도령리 부근의 1000명의 주민을 인솔하고 폭도 측에 105명의 사상을 내고 무기 장비를 나포 압수하였다.

제주도 제9연대장 송요찬 중령 및 장병들은 최초의 적대적인 도민들로 하여금 진실로 국군을 신뢰케 하고 도민들로부터 충분한 정보와 협력을 획득하였으며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도민들은 군경을 자기들의 보호자로 인식케 하고 결코 반도나 폭도들에게 식량이나 피신 은닉장소를 제공치 않게 되고 제주도는 착착 평온리에 원상을 회복 중에 있다. 특히 송 소령의 공적은 논상(論賞)할 바가 크다.”’-대동신문 1948년 12월 31일

‘제주사태 진압에 혁혁한 무훈을 세운 국군 제9연대장 겸 당지 경비사령관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최근의 전황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폭도의 주력은 붕괴되었으며 그들의 지도자 김달삼을 대신하는 폭도의 총지휘자 이덕구가 10월 6일 전투에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사살된 아래 그들의 소수 잔당은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며 닥쳐오는 추위에 떨고 있다.

그들은 최후발악으로 양민을 강압하여 초로전술을 쓰려고 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압수한 지령서에도 이 의도가 발견되었으며 중에는 ‘우리들은 지금 막다른 골목에 들어있다’는 문구도 보였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발악을 허락치는 않을 것이며 폭도배들의 완전섬멸은 목전에 박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신문 1948년 11월 12일

송요찬(宋堯讚,1918년 2월 13일 ~ 1980년 10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며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일본군 지원병으로 육군 상사까지 진급했다. 광복직후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제1기로 졸업한 뒤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국군이 발족되자 그는 국방경비대에서 국군으로 전환한다. 강릉대대장으로 1948년 6월까지 3·8선 주변 지역 전선 방어를 맡았다. 이후 보병학교 학생연대장을 거쳐 제8연대 대대장으로 보임되었다가, 1948년 7월 제주에서 재편된 제9연대의 연대장이 되어시 '4·3 제주사태'의 진압에 참여하였다. 최경록 연대장의 바로 후임이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내용이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계엄령은 12월 31일 해제되었다

송요찬 연대장의 포고령에 따라  중산간 지대 민간인들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고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작전 대상에는 무장대뿐만 아니라 마을에 거주하는 일반 주민도 포함되었다. 제9연대의 ‘멍석말이식 수색작전’에 따라 체포된 사람들은 중산간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계엄령에 대해 비밀에 부쳤을까? 계엄령을 집행할 계엄사령관조차 그 내용을 몰라 허둥댔다. 계엄이 선포된 1948년 11월 17일 당시에는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계엄법은1949년 11월 24일에야 법률 제69호로 제정 공포됐다. 송요찬 연대장도 계엄령이 무엇인지 몰랐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또 ‘11월 13일 경비대 작전결과, 구좌면 행원리에서 무장대 115명 사살’ 또는 ‘11월 24일 제주읍 노형리 부근의 전투에서 무장대 79명 사살’ 등의 전과기록이 나오는데 진압군 희생자는 한 명도 없다.

   
▲ 5.16 직후의 송요찬.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이라는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유격대는 축소되어갔다.  ‘중산간에서 눈에 띄는 사람은 무조건 총살한다’라는 조치는 즉결 심판권을 의미한다. 그 때 송요찬의 나이는 만 30세에 불과했다. 이후 송요찬은 참모총장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가 예편했고 5·16군사 쿠데타 후에는 국방부 장관 겸 최고회의 기획위원장, 내각 수반 겸 외교통신부장관 등의 정부 요직을 역임했다. 

토벌대가 대게릴라전에 대한 인식은, 송요찬이 1962년 미8군에 제공한 수기에서 드러났다. 그는 여기에서 ‘인민’과 ‘게릴라’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하면서, 연못을 말려 물고기를 잡거나 독약을 풀어넣어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송요찬이 포고문에 밝힌 바와 같이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하고, 초토화작전을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토벌대의 초토화는 ‘씨말리기’나 다름없었고, 토벌대가 지나간 자리는 황량하게 변했다. 송요찬의 수기는 미군의 대게릴라전 이론의 발전에 도움을 줬고, 지금도 대게릴라전 이론에 제주43사건을 연구하는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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