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선-민선 5번 전무후무, 시련-재기 반복...공과 평가 극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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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15일 오전 10시 제주도청 기자실을 찾아 6.4지방선거 불출마 의사를 밝히고 있다.
관선-민선 5번 전무후무, 시련-재기 반복...공과 평가 극과 극

우근민 제주지사가 15일 6.4지방선거 불출마 선언과 함께 20여년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사실상 마감했다.

관선까지 다섯차례나 도백에 오른, 한국 지방자치사(史)에 전무후무한 기록의 주인공이 정치무대를 떠나게 됐다.

물론 우 지사 본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아직 정치인생이 끝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가난한 해녀의 아들로 힘든 유년기를 보낸 그의 인생역정을 자수성가의 전형으로 꼽는 이들도 있지만, 그만큼 굴곡도 많았다. 어쩌면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또 매번 일어섰다.

인생의 멘토였던 군(軍) 장성을 따라 전역 후 총무처장관 비서관으로 공직에 발을 들인 우 지사는 총무처 인사국장, 기획관리실장,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제27대, 28대 제주도지사를 지냈다. 1991년 8월에서 1993년 12월의 일이다.

첫 정치적 시련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진 1995년 6월에 찾아왔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으로 도지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신구범 후보에게 일격을 당했다.

‘정치적 맞수’로 불리며 20년 가까이 이어진 라이벌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신 지사는 그 전에 제29대 관선 도지사(1993년 12월~1995년 3월)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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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15일 오전 10시 제주도청 기자실을 찾아 6.4지방선거 불출마 의사를 밝히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처음으로 쓰라린 경험을 한 우 지사는 남해화학 사장, 총무처 차관으로 재기의 발판을 다진 뒤 1998년 제2회 동시지방선거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번에도 신 지사와 겨뤘으나, 처지는 새정치국민회의(여당) 대 무소속으로 바뀌었다. 

임기말인 2002년 1월25일 터진 성희롱 사건은 정치인생에 최대 오점을 남겼다. 특히 성희롱 전력은 우 지사가 정치적 선택을 할 때마다 발목을 잡았다. 가까운 예로 4년 전 제5회 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 복당했으나 불미스런 전력 때문에  ‘공천 부적격자’로 몰렸다.

성희롱 결정이 대법원에서 최종 인정된 것은 2006년 12월21일. 하지만 우 지사는 2002년 6월13일 치러진 제3회 동시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맞대결을 펼친 이번 상대 역시 신구범 지사였다. 세 차례 대결에서 2승1패의 성적을 거뒀다.

정작 우 지사에게 두 번째 정치적 시련을 안긴 것은 선거법 위반이었다. 6.13선거 당시 정책토론회에서 상대방인 신 지사를 공격하면서 신 지사가 축협 중앙회장 재직 시절 대우채를 사는 바람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고 발언한게 화근이었다.    

이와 별도로 신 지사는 선거운동기간 전에 고교 동문 모임에서 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두 사람은 나란히 2004년 4월27일 대법원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가 확정됐다. 우 지사는 곧바로 지사직을 잃었고, 둘 다 5년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두 사람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린 것으로 보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우 지사는 2010년 6.2선거로 6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민주당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도, 집권당의 현명관 후보 쪽으로 대세가 기울 때만 해도 우 지사로서는 희망이 없는 듯 했으나 집요한 추적 끝에 현 후보 쪽의 금품수수 현장을 포착함으로써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 일로 우 지사는 ‘정치9단’에 이어 ‘공작의 대가’라는 불명예스런 닉네임을 하나 더 얻었으나, ‘돈봉투 사건’은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마지막 시련은 짧고 굵게 다가왔다. 무소속으로 민선5기 도지사에 당선된 이후에도 줄곧 민주당은 자신의 정치적 뿌리라던 우 지사는 지난해 11월 진로를 확 틀었다. 지지자들을 대거 이끌고 새누리당에 입당했으나, 결과적으로 이게 부메랑이 됐다.

무더기 동반 입당을 문제삼은 원희룡 전 의원이 ‘불공정한 출발’이라며 당 지도부와 각을 세운 끝에 100% 여론조사 경선으로 결론이 났고, 동반 입당의 ‘효험’을 못보게 된 우 지사는 3월15일 경선 불참을 선언했다.

전조(前兆)도 불길(?)했다. 경선 룰 확정 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우 지사의 지지율은 현직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저조했다.      

정치적인 굴곡 못지않게 우 지사는 재임기간 공과(功過) 면에서도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무엇보다 도민갈등을 심화시킨 장본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제자유도시의 기초를 다진 주역이라는 평가가 교차한다.

공무원 인사에서도 ‘달인’이라는 호평이 있는 반면에 측근을 지나치게 챙긴다는 혹평도 나온다.  

현 민선5기 도정에 대한 평가도 사안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뉜다. 유네스코 3관왕 완성, 관광객 1000만명 달성으로 제주의 브랜드 가치를 크게 높였다면, 지역 최대 현안인 해군기지 갈등을 해결하겠다며 내놓은 ‘윈윈해법’은 구두선(口頭禪)에 그치면서 진정성을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수출 1조원’으로 대표되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경제영토를 늘리고 기업을 키웠으나, 취임초 천명한 ‘선(先) 보전 후(後) 개발’ 원칙은 임기 내내 논란에 휩싸였다가 결국 환경단체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날 우 지사가 언급했듯이 재정, 고용, 1차산업, 수출 등 분야에서 객관적인 지표가 호전된 것은 사실이다. 

우 지사는 4년전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며 배수의 진을 쳤으나, 재출마 채비를 갖췄다가 지난달 5일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약속 번복을 사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경선 룰이라는 외부환경 변화로 인해 4년 전 약속을 지킨 셈이다. 
 
공과를 떠나 이제는 도민들이 제주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노(老) 정객의 퇴장을 지켜보게 됐다. 20여년간 제주사회를 쥐락펴락했던 ‘제주판 3김’ 시대도 서서히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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