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7) “배에 탄 친구들은 왜 살아오지 못했나요?”①

“이게 나라인가?” 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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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이 뒤집혔다. 사진 속 세월호의 모습처럼. 배가 뒤집히면서 세상 밖으로 나와선 안 될, 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어처구니없다.”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지난 4월 16일, 21세기 백주대낮에 벌어진 대형해난사고인 ‘세월호 침몰사고’. 제대로 생의 찬란한 날들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스러진 어린 넋들을 황망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전 국민이 경악과 한탄을 금치 못하고, 뒤이은 애도와 비탄의 물결이 온 나라를 삼켰다.

모든 눈과 귀가 세월호가 침몰된 진도 앞바다에 쏠려 있다. 더욱이 사고의 상황들이 차츰 적나라하게 민낯을 드러내고, 뒤이은 사고조치상황을 지켜보면서, 망언과 몰상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정부와 집권당의 정신 나간 의원들의 행태를 접하면서, 애도와 추모의 마음은 점차 분노와 한탄으로 얼룩지게 한다. 특히 사고 원인과 상황대처 등을 보면서 이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재(人災)’라는 점에서 아직도 후진국적인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에 실망과 공분이 일고 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사고 발생 8일째까지 승선자 명단 하나 확정할 수 없었다. 정부는 그동안 세월호 승선자가 477명이라고 발표했다가, 이후 459명, 462명, 475명, 476명으로 번복하기를 반복했다. 어찌하여 이 나라의 시스템은 탑승자 명단 하나 확인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사고 직후 경기도교육청은 ‘전원구조’라는 문자메시지를 날린다. 사고 당일 밤, 정부의 집계는 승선 462명, 구조 175명, 사망 4명, 실종 283명으로, 탑승자 숫자부터 틀렸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4월 22일, 아들의 시신이 뒤바뀐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단원고 심모(17) 군의 아버지는 “죽은 것도 억울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라며 “우리나라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나. 정말 나라가 싫어진다.”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내가 만약 그 부모라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치가 떨릴 일이다. 분통이 터지는 것은 실종자들의 가족만이 아니다. 세월호와 함께 박근혜 정부의 대한민국도 침몰한 것이다.

너무 속상하고 너무 슬퍼 이제 뉴스도 보기 힘들구나… 그 추운 곳에서 숨도 못 쉬고 무섭고 두렵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더 좋은 곳에 가서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미안하다.(bkh0****)

네이버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추모게시판에서 퍼 온 추모글 중 하나다. “그 추운 곳에서 숨도 못 쉬고 무섭고 두렵고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네티즌의 글 한 줄은 적어도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안고 가야 할 부채의식의 기원(基源)이다.

기다리라는 말만 믿고, 그래도 어른들이 우리를 그냥 두겠느냐고 믿고, 배가 넘어가도 설마 우리를 버릴까라고 믿으면서 기다리던 아이들은 끝내 그 어른들에게 배반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른 아닌 것들’이 움직이는 시스템에 몸을 실어 수학여행을 떠났던,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까르르 뒤집어지던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그 철없던 아이들이 느꼈을 배반감.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라는 시스템에 대한 배반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절절했던 믿음의 시간 동안 그 어른들은 얼마나 바보 같은 짓들을 했는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숫자, 174. 생존자의 숫자다. 이 숫자는 사고 발생일 이후 최종 집계된 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있는 숫자다.

이 숫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 시스템을 만든 정부가 얼마나 잘못된 정부인지, 그 시스템 속에서 철밥통 녹봉으로 연명하는 이들 또한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주는 부동의 숫자이기도 하다. 이 숫자는 뒤집어진 선체처럼, 대한민국의 속살을 가리키는 숫자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참사는 반복되어 왔다. 그럼에도 이번 참사가 전 국민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첫째,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 희생된 사고였다는 점. 둘째,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했다는 점. 셋째, 침몰 직전부터 침몰 이후 18일간(이 기간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전 국민들의 눈과 귀로 생중계 되는 사고였다는 점. 특히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보도되었다는 점이다. 넷째, 사고수습과정이 도저히 정상적인 국가시스템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드러난 점 등이다.

어쩌면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선박사고가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백 명이 죽는 대참사가 됐다. 그것도 대부분은 이 사회가 누구보다 먼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어린 학생들이었다. ‘기다리라’는 방송만 남긴 채 자신은 먼저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의 말만 믿고 끝까지 선내에 머물던 어린 생명들은, 고스란히 실종자에서 희생자가 되었다.

물론 현재 시신수습도 끝나지 않았으며, 이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수습되지 않은 실종자 수가 80여 명에 이른다. 물론 집계도 정확치 않다. 또한 세계 사고사에서도 유례가 없게, 생각조차 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비극이 수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TV만 켜면 생중계 되는 상황이 며칠에 걸쳐 계속 진행됐으니, 온 국민이 충격과 분노 그리고 낭패감과 비통함에 젖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한 처음에 ‘전원구조’라는 엄청난 오보가 있긴 했지만, 설마 단 한명도 구해내지 못하리란 생각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던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타까움의 탄식으로 바뀌었으며, 생환은 고사하고 시신이라도 제대로 건사하길 바라는 게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의 마음이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이 나라의 해경과 해군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많은 이들이 “이게 나라인가?” 하고 묻고 있다.

시스템과 매뉴얼의 부재,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사고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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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타임의 마지막 9분 45초. 최초의 화면 상태에서라도 모두 구출될 수 있었다. 6000톤에 500여 명이 탄 여객선의 구조에 해경은 달랑 경비정 1척, 고속단정 하나, 헬기 2대만 보냈다. 그들에겐 별다른 장비도 없었다. 그래도 한 해경은 구명벌을 열기 위해 열심히 발길질을 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들은 맨 나중에 구해야 될 인면수심의 사람들만 먼저 구하고 말았다. 그 귀중한 시간, 아이들은 어른들을 기다리며 물속으로 잠겨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베일을 벗는 사고 원인과 배경도 그렇지만, 이번 사고의 가장 큰 문제는, 사고 발생에서부터 사고수습까지 인재(人災)의 확대재생산이란 점이다.

사고가 발생한 이후 적나라하게 보여진 정부의 무능한 대처과정과 재난 발생 시 작동하지 않는 국가시스템의 진면목은 국민의 공분과 실망과 낭패감을 전국화 시켰다. 침몰사고가 국가적 대참사로 바뀌는 대목이다.

이번 사고로 명백히 드러난 것은 대한민국의 위기대처능력과 정부의 시스템 부실과 매뉴얼의 부재다. 사고의 발생은 시스템의 문제요, 사고 대처는 매뉴얼의 존재와 일상적 훈련에 의해 발생 즉시 작동 가능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초기, 가장 중요한 골든타임은 무책임한 선장과 무능한 해경에 의해 날려버렸다. 배가 침몰하는 순간 선장은 가장 먼저 도망가 버리고, 승객들, 특히 어린 학생들은 “가만히 있으라.”라는 지시를 충실히 따르다 차가운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여기까지가 숨 가쁘고 황망했던 세월호 침몰 사건 직후의 전말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구조 활동과 사고 수습 과정에서 국가 재난대응 체계의 총체적 부실에 따른 ‘또 다른 참사’가 시작됐다. ‘대한민국호’에 탄 국민의 마음은 세월호 사고의 피해자 가족만큼이나 비통하고 우울하다.

자연재해든 인재든 국가적 위기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위기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적 역량과 준비된 태세이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지금까지 드러난 재난대응 체계와 위기관리 실태를 보면, 차마 정부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진창의 난맥상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거듭 묻는다. “이게 나라인가?”.

20년마다 반복해 온
대한민국 선박참사의 역사

뒤집어진 건 세월호만이 아니다. 나라가 뒤집어졌고, 국가의 신뢰가 뒤집어졌다. 모든 것이 뒤집어지자, 이 나라의 적나라한 치부가 드러났다. 국가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 그것이다.

국민의 삶을 안전하게 보장해야할 시스템의 실종과 위험에 대처하는 위기대응시스템, 대처매뉴얼의 부재. 멀쩡한 듯 보이던 대한민국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지난 해난사고의 역사를 더듬어 보며 살펴보자.

한국해난사고의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재난으로서의 대형 해난참사는 ‘창경호 침몰사고’가 가장 앞선다. 146톤급 여객선 ‘창경호’는 1953년 1월 9일 여수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부산 다대포 인근에서 풍랑으로 침몰하고 만다. 배 안에 있던 236명 중 단 7명만 생존하고, 모두 익사했다.

당시 사건 직후 동아일보 보도로는 236명 중 229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월 27일 경향신문은 26일까지 263구의 시체를 인양했으며, 사고 희생자는 3백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탑승자 수가 정확치 않았던 건 이때부터였다. 1차적인 사고의 원인은 악천후와 풍랑이었지만, 선령이 20년 이상 된 화물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것이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탑승인원이 실제 수용 가능한 인원을 넘어섰으며, 쌀 200가마까지 실어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다. 또한 배에 비치되어 있었어야 할 구명보트와 구명복을 본사 창고에 보관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 사고로 당시 김석관 교통부 장관이 사퇴했다. 창경호 책임자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은 창경호 선장 등 4명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으나, 부산지법은 징역 3년형을 내리는 데 그쳤다. 솜방망이 처벌의 전통은 그 당시에도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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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호의 모습.

두 번째 사고는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27분, 남해 여수 인근 ‘소리도’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제주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862톤짜리 여객선 남영(南榮)호가 침몰한 것이다. 인명피해 323명, 사상 최악의 연안 해난사고였다. 당시 국내 최대의 대형여객선이었던 남영호의 침몰은 선원들의 근무태만과 안전불감증이 만들어낸 인재(人災)로 밝혀졌다.

정원초과와 과적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정원 302명에 탑승인원은 338명. 연말 대목을 노리고 마구 실은 농산물 화물의 규모는 130톤의 적재정량을 넘어선 230톤에 이르렀다. 남영호는 성산포항을 떠날 때부터 좌현으로 10도 기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항을 강행했다. 사고는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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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호의 평시 운항 모습.

사고의 뒤처리 역시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국가적 망신까지 불렀다. 침몰 당시 남영호에서 발신한 긴급구조신호(SOS)를 국내에서는 단 한 곳도 수신하지 못하였고, 일본에서만 희미하게 수신할 수 있었으며, 사고 현장 부근을 순시하던 일본 해상 보안순시선 구사사카마루호가 남영호의 참사현장을 확인해 일본 해상보안청에 직접 보고했다.

이에 따라 일본 교도통신이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으며, 15일 오전 11시에는 국내 라디오 전파를 타고 남영호 침몰참사 소식이 도민들에게 전해졌다. 결국 생존승객들이 구조된 것은 멀리서 온 일본 어선에 의해서였다. 일본 측에서는 수신 즉시 한국 해경에 무선연락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해경은 4시간 동안 꿈쩍하지 않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가 나온 이후에도 “연락을 받은 바 없다.”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는 점이다.

결국 해경이 출동한 시각은 오후 1시. 일본의 순시선 급파보다 네 시간이나 늦었다. 당국이 헤매는 사이 표류하던 생존자들은 추가 구조된 6명을 제외하고는 영하의 바다에서 얼어 죽었다. 총체적 부실이었음에도 몇몇 하위직만을 처벌하는 데 그쳤다. “쌍고동에 허공 실어 침몰된 남영호야”라는 가사가 들어간 가요 ‘밤 항구 연락선’조차 국가 위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국가 위신 추락은 정부와 관료들이 저지르고, 국민들만 타박한 셈이다. 박정희 정권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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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남영호 침몰사고를 1면 톱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1970. 12. 16.)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가 정원 초과와 악천후 속의 무리한 운항으로 침몰해 292명이 희생됐다. 사고 발생 이틀 만인 10월 12일, 사고 현장을 방문한 김 대통령은 ‘사과’부터 했다. 또, 해당 사고의 ‘최종 책임 주체’인 대통령으로서 재발 방지를 다짐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승객들은 대부분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온 낚시꾼들로, 구명조끼 등을 제대로 입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났다.

출항 당시 기상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당시 기상 상황을 고려하면 선장은 출항을 해서는 안 되었지만, 출발예정 시간인 9시를 한참 지난 9시 40분에 무리하게 출항했다. 출항 후 갈수록 파도가 높아지고 기상이 악화되어 항해가 불가하다고 판단한 선장이 회항하려 선수를 돌리는 순간, 선체가 심한 파도너울에 기우뚱거렸고, 승객과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침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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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몰하는 서해훼리호.

서해훼리호는 정원을 초과해 운항했다. 정원(221명)보다 141명을 더 태웠고, 배의 앞부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정원 초과와 악천후에도 출항하게 된 배경은 운영난 때문이었다. 정부의 낙도보조항로 보조금이 예산부족으로 끊기자 운영난 타개를 위해 정원초과 등 무리한 운행을 감행했다. 또한 부실 운행 행태도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서해훼리호에는 승선원이 12명 있어야 하는데, 사고 당일에는 7명만이 탑승했다. 이 중 비상상황에 대처할 안전요원은 단 2명이었다. 특히 이날은 항해사마저 휴가를 이유로 탑승하지 않았다. 회사는 예비 항해사를 쓰지 않고 갑판장에게 항해사 노릇을 하게 했다. 이 역시 예정된 인재였던 것이다.

이때에도 사고의 뒤처리 역시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침몰 뒤 승객 구조가 늦어져 희생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자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구조에 나선 이들은 근처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었다. 이들이 조난 승객들을 구조했다.

반면 군과 경찰의 구조선은 사고 발생 뒤 1시간이나 지나서 현장에 도착했다. 군산해양경찰서가 신고를 받은 것은 사건발생 5분 만이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서야 전북경찰청 헬기 1대가 출동했고, 사고 현장에는 사고발생 55분 만에야 도착했다. 또 해양경찰서 소속 경비함정도 현장 도착에 1시간이나 걸렸다. 경찰헬기와 경비함은 단 한사람의 생존자도 구출하지 못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했다. 역대 4번째 초대형 사고다. 1953, 1970, 1993, 2014. 근 20여 년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일어난 대형선박사고사는 마치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고 하는 것 같다. 이 슬픈 대한민국 해난사고의 연표를 보면서, 두 세대를 넘어서는 60여 년 동안 여전히 반복되는 이 사회의 장기지속의 부실과 불감증에 놀랄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이 나라는 과거의 사고로부터 단 한 치의 교훈도 챙기지 못하는가 말이다.

결국 우리는 지난 60여 년 동안 나라의 덩치만 키웠지 한 치도 성숙하지 못한 셈이다. 정부나 기업이나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은 “안되면 되게 하라”, “자칫 사람이 상할 수도 있지만 당장 시급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일의 효율성과 ‘빨리빨리’의 속도전, 단기적인 눈앞의 이익에 빠져,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으며, 당장의 목표달성에 몰두하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지속시켜 왔다. 대형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아무리 재발 방지를 외치고, 온갖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체 생색을 내면서도 소용이 없엇던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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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7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 이때에도 여전히 선령, 정원초과, 과적 등이 문제가 되었으며, 구명장비 또한 실제 사용할 수 없는 전시용에 불과했다. 선사의 영세성 탈피도 여전히 급선무로 지적하고 있다. 20년 전의 기사라는 게 무색할 지경이다.

위의 신문기사에서 날짜를 지워버리면, 오늘 현재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20년 전의 문제점들이 여전히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와중인 50년대에 침몰한 창경호의 경우, 사건 발생 3년 후에야 선체를 인양했다든가, 정확한 사망인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 등은 그 당시 기술력과 열악한 경제수준을 고려하면 일견 수긍이 가지만,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도록 똑같은 사고가 반복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기술적 진보니 세계적인 경제규모니 하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막상 사고가 터지면, 그 호들갑 떨면서 단행한 후속조치의 결과란 게 반복적인 사고의 발생뿐이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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