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23)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 최선봉에 서다 

서북청년단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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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청년회.
‘(전략)......존경하는 동지들! 생각컨대 4․3 궐기 전야의 제주도의 정황은 참으로 가열했던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와 그 국내의 주구들이 기도하는 5․10 매국단선을 100% 수행하기 위한 흉계는 그의 야수적 학살정책을 지도층으로부터 전 인민의 위에 확대시켜 조직적 인민교살 정책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서북계열로 개편된 경찰진과 대청 민족청년 서북청년 등 테러단을 총동원한 기동적 학살정책은 인민을 질식시키고 전도는 이른바 곧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입니다......(후략)’ -노력인민 1948년 11월 7일

‘(전략).....극좌계열과 합류하여서 총선거 반대운동에 호흡을 같이 하여 전율할 실천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다. 즉 그것이 거(去) 4월 3일에 일어난 소란의 시초이고 그 후 경찰력 우익세력이 완전하지 못함을 기화(奇貨)로 저 조선 팔경의 제일로 손꼽는 한라산을 그들이 근거지로 하여 각처에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기백(幾百)의 동족을 상살(相殺)하게 되었다. 산부대(山部隊) 소위 인민군의 공격 목표는 (A) 경찰관 (B) 대청 및 서청단원 (C) 군정관리 (D) 선거위원 및 입후보자 또는 그들의 가족인데 그 죽이는 방법도 조선식은 아니고 개량식(改良式)이다. 실례로 남원지서 근무 고(高)형사 외 1인을 죽인 것을 보면 가마니를 덮어서 휘발유에 불을 붙임으로써 철저한 화장(火葬)을 한 것이다. 이와 흡사한 방법으로 피살당한 수는 일일이 매거(枚擧)하기 어렵다. 교통은 차단되어 신문 한 장 볼 수 없는 형편이며, 전신주란 전신주는 모두 파괴당하여 외부와의 연락조차 없다(읍을 제외한 구역).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유언비어도 합하여 도민들은 어제 저녁엔 모 부락에서 사람이 몇몇 죽고 방화가 몇 건이고, 그저께 저녁에는 경찰관과 그 가족이 몇 죽고 또 선거위원이 몇 죽고 하는, 한 사람이라도 만나기만 하면 살인 소문과 공포심을 느낄 불안한 화제뿐이다. 연산(年産) 수백만원을 초과하는 치용(稚茸)도 재배는 하였지만 딸 수 없는 형편이며,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신탄(薪炭)은 물론 보리농사까지 안심하여 수확이 될는지 의문이다. 제일 많이 나는 생선까지 못 먹을 형편이었다. 이렇게 된 환경에서 어찌 목침을 높이 하고 안면(安眠)할 수가 있으며, 살아 나아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후략)’ -경향신문 1948년 7월 18일

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또는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은 '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는 1949년 초 어느 자리에서 "서북청년회원 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 등이 되어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폭동이 난 줄 안다."고 말하였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제주도에 들어왔다. 미군정·이승만 등 집권세력은 '제주도학살'의 최선봉에 서청을 세웠다. 그들은 소련군정에 의해 박해를 받아 월남한 지주세력으로, 그 트라우마에 의해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정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는 우파 민병대였다. 군과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였고 대구노동자파업, 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제주4.3사건에 개입하여 20~40만명 이상의 좌파로 의심되는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

1946년 11월 30일 대한혁신청년회·함북청년회·황해회청년부·북선청년회·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1946년 2월에 월남한 선우기성(鮮于基聖). 서북청년단 출신 안두희(安斗熙)는 1949년 6월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총살했다. 

미군정보보고서에는 “‘임시경찰(temporary policemen)’로서 활동하는 그들이 조천면 신흥리 사건현장에 파견돼 게릴라를 쫓아냈다.”고 기록, 경찰의 신분을 인정했으며, 때로는 ‘은밀한 모병(the secret induction)’을 통해 그들을 제주도에 파견했다는 내용도 있다. 조병옥은 제주도에서 '4·3'이 발발하자 서청본부에 단원들의 제주급파를 요청한다. 미군정보보고서에서 ‘서청의 지원문제는 몇몇 미군 장교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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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청년회 본부 옛터-제주시 일도1동.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북청년회의 조직과 성격

‘(전략)..... 5. B-2 정보원에 따르면 서북청년단(Northwest Young Mens Association), 대동청년단(United Young Mens Party), 한국청년총연맹(General Alliance of Young Men), 한국독립청년회(Korean Independence Young Men), 대한독립촉성회 청년단(National Society for the Accele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Youth Corps), 한국인퇴역군인회(Korean Veterans Association)의 대표자들이 11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 만났다. 조선민족청년단(Korean National Youth Corps)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표자들은 모든 청년 단체를 ‘대한청년단(Great Korean Youth Association)’으로 통합하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 조직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 (2) 한국을 통일시키는 것 (3) 국가방위를 위한 인적 자원을 제공하는 것   (4) 한국 청년의 정신과 신체를 향상시키는 것/대표자들은 만일 아래와 같은 사항이 준수된다면 대통령에게 200,000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진술했다: (1) 이승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그 단체의 수반이 될 것.  2) 무기가 지급되어야 하고 무기 사용에 있어서 중대급에까지 파견된 미군 장교들이 행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  (3) 다음에 열거하는 장관들을 교체할 것 : 국무총리, 내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농림부 장관, 상공부 장관.......(후략)’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공한(公翰)/1948년 12월 5일/국가보안법 / 국군조직법/발신 : 주한미군사령관/수신 : 미육군성 정보국

‘서북청년단 지원자 약 620명이 최근 수도경찰청의 감독 아래 12일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이들은 정규경찰로 임명되어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소요가 발생한 이 지역에서 한달동안의 의무 근무기간이 끝나면 재배치되어 서울로 올라올 계획이다........(중략).....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에 요원으로 제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지난 번 보고(<일일정보보고> No. 1005)를 확인하고 있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12일~1948년 12월 13일 (No. 1011, 1948. 12. 13. 보고)

‘12월 20일 서북청년단원 200명이 비밀리에 대전에 있는 경비대에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갓 도착한 제9연대에 배속된 이들은 즉시 군복을 지급 받았다. 이들의 복무는 서북청년단 지도부와 제2여단장 간의 은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논평 : 이들 200명의 비밀입대는 서북청년단원으로 ‘엘리트 중대’를 구성한다는 제2여단의 계획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27일~1948년 12월 28일 (No. 1023, 1948. 12. 28.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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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과 서청단원,군인을 격려하는 이승만.

1947년까지 북한인구의 10%에 이르는 100여만 명이 월남했다. 북한체제에서 피해를 당했거나 당할 우려가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념적 성향은 반공·반북적이었다. 서청의 배후에는  군정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으로부터 나왔다. 서청은 경찰로부터도 자금지원을 받았다. 특히 치안책임자이자 조병옥과 장택상은 서청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승만은 사설단체인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되었다. 단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비대·경찰복장을 하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단원들은 바로 경사나 경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 지서주임 등을 하면서 악명이 높았다. 

당시 경찰전문학교는 서울 광화문에 있었다. 거기서 서청단원들이 간단한 면접시험을 봤다. 경찰관이 돼서 취조하려면 최소한 '가나다라'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글자깨나 아는 사람은 경찰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군인 이등병이 되었다. 

이때 경찰 합격자가 200명이 되어서 '2백 명 부대'라고 불렀다. 군인으로 된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서울에서 14일 동안 제대로 교육받은 189명은 '제주경찰 9기'가 됐고, 나머지 11명은 '제주경찰 10기'가 됐다.

1948년 12월 20일 대전에서 200명으로 서청 '특별중대'가 편성되었다. '특별중대'는 소대 단위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토벌전을 벌였다. 군번 없이 경비대 복장을 한 특별중대는 주로 성산포 일대에 주둔, 애매한 사람들까지도 '때려잡는 일'을 했다. 1949년 1월 13일 성산포 앞바다에서 28명의 고성리 청년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 무렵 국민학교 교사 6명도 총살됐다.  

전국 경찰 중 이북출신은 1953년 19.1%, 1955년 말 24.3%를 차지했다. 특히 간부급의 경우 이북출신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1955년의 경우 총경의 40%, 경감의 30.3%였다.  경찰에서 이북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 것은 서청 출신들이 다수 진출했던 것과 연관이 있었다.

‘목포는 외국인가?......(중략).....기자는 전도민이 학수고대하는 중앙정세를 하루속히 소개할 사명을 띠고 도목(渡木)했었다. 그래서 합동통신사를 방문하고 나의 도목 사유를 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네들(약 30명의 청년)은 나의 신분을 확인한 연후에 옥내로 들어가 아연 손에 손에 목봉을 쥐고 나와 이유를 말하지 않을 뿐더러 놈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나를 불법감금하고 나의 주위를 물샐 틈없이 둘러쌓다. 나는 거기서 비로소 서북청년회 본거지임을 알았고, 합동통신사는 이들 무뢰한에 쫓겨 나간 것을 깨달았다. “제주도는 공산주의 분자의 소굴이다” “너는 취재를 구실로 음모 파괴차 왔다” “좌익에 의한 여운형 선생의 살해” 등 폭언을 토하면서 위협을 주며 심지어는 기자의 신체검사를 하는 등 약 1시간에 긍(亘)한 (테러)단의 언어에 절(絶)할 몰이성적 만행은 입으로는 좌우합작을 표방하면서 도리어 일방적 편당성을 띠고 강인부회(强引附回)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엄숙하여야 할 과도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정확 신속한 보도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처한 바 시국을 명시하고 여론의 대표가 되어 그 구현에 전심함은 물론 경세(經世)의 문필을 가지고 이 사회의 암흑면을 □□ 사회정의를 밝히는 것이 언론인의 사회적 임무인 것이다. 여사(如斯)한 의미에서 언론인이 활약은 이로써 양성되는 민중에 영향이 또한 지대한 것이다. 이러한 차등(此等) 무뢰한의 만행을 보면서도 □안(□岸)의 화재시(火災視)로 묵과하는 당지 경찰당국의 무성의한 태도는 민주경찰를 표방하는 소리로 귀익은 기자로서는 아연 않을 수 없었다. 전 민족 생사기로의 오늘날, 삼천만의 지상과업은 수수(雖誰) 민주건국의 성업(聖業)뿐일 것이다. 강토광복(彊土光復)의 일념뿐일 것이다. 가증! 이러한 추잡한 기현상이 어찌 이 사회에 방임할 수 있을까. 과연 목포는 외국이었는가? 김삼규(金三奎)’-제주신보 1947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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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포 서북청년단 숙소.

서북청년단의 테러행위    

‘지난 2일 제주극장에서 서북선(西北鮮) 출신인 청년들이 모여 상호의 친목을 도모함과 동시에 단결의 힘으로써 자주독립을 찾자고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 결성대회가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동일 당선된 역원은 여좌하다. 위원장 장동춘(張東春)씨, 부위원장 박병준(朴炳俊)씨 외 역원 10명.’-제주신보 1947년 11월 8일

‘제주도는 ‘작은 모스크바’/우익 서북청년단 제주도위원장 안철은 지난 주 제주도는 “한국의 작은 모스크바”이며, 자신은 이러한 주장을 방첩대에 입증해 보일 작정이라고 말했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7년 11월24일~1947년 11월 25일 (No. 693, 1947. 11. 25. 보고)

‘11월 9일 서북청년단원이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폭행 치사했다. 서북청년단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그를 단지 취조할 의도였으며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263호, A-1)’-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1월 12일~1948년 11월 13일 (No. 987, 1948. 11. 13. 보고)

‘제주도 반란/ 전략적 위치, 빈곤, 전통적 고립 및 건전한 지방행정의 결핍 등으로 인하여 제주도를 해방 후 남로당의 활동중심으로 되기 좋게 만들었던 것이다. 면적 약 120평방 리(哩), 인구 30만의 이 섬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공산주의 용의자들을 체포, 구타한 데 있어서 1948년 4월 반란의 무대로 화하였다. 소요는 전도에 파급되고 정부가 그것을 평정하기 위하여 대부대를 파견한 1949년 초까지 계속하였다. 작전은 1949년 5월까지 완료되지 않았다. 정식발표에 의하면 1만명 이상의 인민이 참가하였다. 근 2,000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정부측의 사상자 수는 알 수 없다. 파괴는 광범위하였다. 촌락마다 소실되고 가옥, 가축, 작물의 손해는 수십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파출소 80개가 공격되어 소실 혹은 손해를 입었다. 관청 15개와 학교 약 20교가 소실 또는 일부 파괴되었다. 경찰이 특별히 공격목표가 된 것 같으며 100명 이상이 살해 또는 부상당하였다.(후략)’-한성일보 1949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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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청년회의 회원증.

서청단원들은 못된 짓을 많이 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서로 뺨때리기를 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빰때리기를 강요했다. 세게 때리지 않으면 달려들어 죽도록 팼다. 돈을 모아 가든가, 소를 끌고 가야 그 짓이 끝났다.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 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다.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백색테러를 노골화하였다.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 테러에는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되었다.

서북청년회가 제주에 등장한 것은, 1947년 3·1시위사건 발생 직후 제2대 제주도지사로 발령받은 유해진이 경호원 자격으로 서북청년회원 7명을 데리고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제주도본부가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다. 위원장에 장동춘(張東春)을 선출했다. 서청에게 ‘제주도는 악몽의 섬’이었고,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다.   

3·1사건 이후 제주경제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을 부양해야 하게 되어 더욱 악화되었다. 경찰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했고 서청은 정기적인 봉급이 없었고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다. 

제주4·3 발발 직후 4·3진압요원으로 서북청년회원 500명이, 여수·순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에서 12월까지 두 달 사이에 최소 1,000명 이상의 회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의 신분으로 들어와 진압작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서청단장 문봉제(文鳳濟)는 4‧3사건이 나자마자 단원들을 경찰전투대 요원으로 보낸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백색테러단 서청은 '반공을 전매특허로 하는 극우'였다.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지칭했고, 김재능(金在能) 서청제주도지부장은 제주도를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렀다. 빨갱이라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장모와 사위가 성교하게 한 다음 살해했다.

‘(전략)....작년 3․1학살사건에 뒤이어 3․22총파업이 있은 뒤 이에 경악 전율한 매국 반동세력은 경찰 사법 등 일체의 권력기관에서 양심적인 사람을 모조리 내쫓고 흡혈귀와 같은 악질도배 서북인들로써 그들의 진용을 정비하여 도민폭압의 토대를 쌓았다. 그놈들은 전 도민 27만 중 8만은 남로당원이라고 말하며 제주도의 청장년은 닥치는대로 무단히 검거 구타하면서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내놓으라고 족쳤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인민들은 아무개 때문에 우리까지 못살겠다고 오히려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원망하기까지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매국 반동세력은 서청원을 매 부락에 10명 내지 20명씩 배치하고 기금을 내라, 담요를 내라, 밥을 내라 하여 인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가축을 함부로 도살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죽도록 두들기고 부수고 하여 실로 그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인민들은 하루도 마음놓고 살 수 없었다. 이제까지 중립이라고 자칭하고 반동이라고 지목되는 사람들까지 원성은 높아졌으며 이래서는 못살겠다는 인식이 깊어졌다. 그러나 인민들의 원한과 분노는 속으로만 곪아 들어갔을 뿐 놈들의 야수와 같은 탄압 밑에 위축되어 궐기할 수는 없었다. (계속)’-노력인민 1948년 6월 3일

‘(1) 제주도에서 드러난 공산주의자 음모/ 서북청년단 제주도지부는 1948년 10월 31일 제주도에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꾀한 음모를 폭로했다. 이 음모에는 포로들을 석방하고, 이들과 민주애국청년동맹 회원들에게 무기와 탄약을 주기 위해 경찰간부와 고위 관리들을 암살하려 한 계획이 포함돼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제주도 경찰 11명과 남로당원이 경찰에 체포되어, 쿠데타 음모가 완전히 제거됐다. (2) 제주도의 게릴라 활동/ 이 기간에 게릴라가 지서 3곳과 마을 2곳을 공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공격으로 경찰 2명, 경비대원 1명, 게릴라대원 50명이 피살됐다. 폭도들은 마을을 공격하는 동안 40여 채의 건물과 주택을 방화하고 파괴했다. 제주도 경찰은 11월 11일 게릴라가 신엄리와 조천리를 공격해 주택 약 110채를 방화했다고 보고했다. 이 공격으로 폭도 80명과 경찰 1명이 숨졌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주간정보요약(G-2 Weekly Summary) 1948년 11월 5일~1948년 11월 12일 (No. 165, 1948. 11. 12. 보고)

‘(전략) 귀화한 공산분자가 남녀 합하여 2,800명에 달하였으나 아직도 겁이 나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수효가 몇천명 된다는데 가장 곤란한 것은 여러 촌락이 불에 타서 의지할 곳도 없고 먹고 입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중략) 무식한 남녀들이 공산당 선전에 속은 자도 있고 또는 집이 다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올라간 자도 있었으나 산상에서 살 수도 없고 식물은 더 도적할 수도 없어 형용이 말 아닌 남녀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온 것이 2,800여 명인데 이 사람들을 다 넓은 공청에 칸을 나눠서 거처시키며 하루 두 끼씩 밥을 먹이는데 반찬이 없음은 물론이오…(후략)“ -朝鮮中央日報 1949년 4월 13일

여기에서 '귀화한 공산분자가 2.800명'이라고 했지만 중간에는 '형용이 말 아닌 남녀, 어린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결국 입산자 대부분이 좌우익의 대립과 굶주림, 서청의 만행을 피해 도망간 단순 양민이었지만, 이들을 '폭도·무장대'로 규정하고 무차별 학살했다. 

스위니(Austin Sweeney) 신부는 서울의 한 신부에게 “만약 여기가 문명화된 나라라면 광범위하게 ‘제주도를 돕는’ 계획을 당장 실시할 것이다. 주민들은 짐승같이 살고 있으며 평균 하루에 고구마 한 개를 먹고 있다.”고  암담한 상황을 전달하기도 했다.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서청·대청·민보단 등 우익단체원들이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고 있었다. 도민을 학살했던 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연금을 받고, 억울하게 죽었던 이들은 수십년간 4·3을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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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 단장

‘초대사장 박경훈(朴景勳)군의 손으로 발간되었던 제주도 유일의 일간지 제주신보는 4월 3일 사건으로 작래(昨來) 이래 휴간 중이던 바 진용을 개비(改備)하여 신 사장에 김재능(金在能)군이 취임하여 지난 2월 중순부터 복간하였는데 한국일보 모 군이 4월 1개월을 후원하고 온 후 편집 약체에 곤란을 받고 있다 한다.’-비판신문 1949년 5월 30일

김재능(金在能 1916~?)은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다. 키가 6척 거구로 짧은 콧수염에 긴 가죽장화를 신고 팟쇼형 인상이다. 4· 3사건이 거세지자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서청원 다수가 입도하였다. 제주에 배치된 서청단원을 보면, 제주읍 300명, 대정면 40명, 서귀면 70명, 한림면 50명, 성산면 40명, 애월면 40명, 안덕면 40명, 남원면 30명, 구좌면 50면, 중문면 50명, 표선면 30명, 조천면 20명 등 모두 760명이나 되었다.

서청은 김익렬(金益烈)과 김달삼(金達三) 평화회담 직후인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을 유발하였다. 여기에도 서청단원이 동원되었다. 또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이 칠성로의 서청사무실에 붙잡혀와 뭇매를 맞고 피살되었다. 김재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금품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을 일삼았다. 김영진(金榮珍) 북제주군수도 맞아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1948년 11월 21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동 12월 하순 서북청년단이 제주신보를 강제로 장악했다. 김재능을 발행인으로 하고, 편집국장에는 김묵(金默)이 기용되었다. 이에 앞서  10월 24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李德九)의 명의로 된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라는 삐라를 제주신문사에서 인쇄하였다. 서청과 경찰의 공조로 편집국장 김호진(金昊辰)과 사장 박경훈(朴景勳), 전무 신두방(申斗玤)을 연행하였다. 사장과 전무는 석방되고 김호진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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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들은 계엄군의 제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卓聖祿) 대위와 한국전쟁으로 개설된 제주비상계엄령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 대위와 김재능을 삼대 폭한(暴漢)이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김재능을 가장 포악한(暴惡漢)이라고 불렀다. 김재능은 섬을 떠난 후 보복이 두려워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신보 사장 및 서북청년단 본도 위원장이었던 김재능(金在能)씨는 경찰에 피검되어 현재 국 수사과에서 구속 문초중에 있다. 그런데 씨(氏)의 표면적인 죄명은 사기공갈, 상해, 사문서위조 등 단순한 혐의 밑에서 입건수사되어 왔던 것이나 본도 각면(各面) 각리(各里)를 막론하고 30만 도민 거의 전부가 김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인 한 설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씨계통(金氏系統)에 의하여 애매하게 살해되고 상해되며 재산을 강탈되었던 수십명 내지 수백명의 가족들은 지금도 얼른 김씨에 대하여 보복적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왜냐!(후략)’ -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김재능씨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당시의 피해자 전 총무국장 고 김두현씨 가족들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비통한 표정으로써 그러나 당시 김두현씨가 결코 공산주의자였거나 관리로서의 긍지를 잃은 결과 피살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도민들은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말하였으며 고 김두현씨의 가족으로서 현재 본도의 어느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인사는 혼란기의 일이니만큼 지금에 와서 어느 개인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으나 어디까지나 김두현씨가 청렴결백한 관리였다는 사실만은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김재능씨 계통에 의해 한때 사지(死地)까지 함입(陷入)되었던 본도 민족진영의 모유지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동씨는 앞서 김재능씨를 치안국장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한다. 즉 작년 가을 동유지가 전 치안국장 이성주(李成珠)씨와 치안국장실에서 면담 중 노크소리와 함께 수배중인 인물 김재능씨가 이성주씨를 만나러 동 실내에 들어왔던 것이며 동 유지를 보자 호연(豪然)하게도 악수를 청하였다 한다.’ -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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