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24)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에 선임된 현경호  

현경호, 그는 누구인가?

▲ 1949년 6월 25일부터 5일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 주석단 앞줄 오른쪽 부터 백남운, 김달현, 허헌,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김책

‘지난 2월 23일 결성을 본 도민전(島民戰)은 3․1사건 이후 그 존재가 없다시피 분산되고 있었는데, 그 후 미소공위의 진보에 따라 그의 재등장이 예측되고 있던 중 금번에 도민전은 합법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 단체 등록을 도(道)에 제출하고 의장단에는 현경호(玄景昊)씨가 취임되어 재발족하게 되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7월 4일

‘지난 3일 발발한 제주도의 항쟁은 경관의 대량 출동에도 불구하고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미 군대의 출동설까지 대두하고 있는데,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지난 20일 산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우선 법조, 언론, 문화 각계를 망라한 조사단을 급속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독립신보 1948년 4월 24일

현경호(玄景昊)는 미군정기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 초명은 현인종(玄仁宗), 호는 우계(又溪),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제주시 노형동 월랑 마을에서 현승규(玄升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제주농업학교 1학년을 수료, 1924년 2월 노형동에 의성학숙(義成學塾)을 개설하였다, 현경호는 제주향교의 직원으로  부자 양대에 걸쳐 제주유림의 반수(班首)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  

해방 후 제주향교재단에서 제주중학교를 설립하자, 1945년 12월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약 1년간을 그의 아들 현두황은 교사로 재임하였다. 1947년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民戰)이 결성되자 의장단에 추대되었다. 의장단에는 그와 함께 안세훈(安世勳,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과 이일선(李一鮮,관음사 주지)이 선임되었다. 같은 해 3·1절 시위사건으로 미군정청 포고령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동년 5월 29일 구속되기도 하였다. 

1949년 6월 25일 박헌영· 여운형· 허헌 등이 주축이 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이 주축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평양에서 창립되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제주4·3발발 이후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에는 제주도의 법조‧행정‧교육‧언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감금되었다. 천막을 쳐서 마련한 수용소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소와 같았다. 수감자 중에는 현경호와 그의 아들 현두황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경호는 두 번째의 수감이다.  

1948년 12월 23일 현경호는 제주읍내 유지학살 사건 과정에서 박성내(현 제주여고 입구) 말방앗간 부근에서 희생되었다. 이날의 희생자는 수많은 수감자 중 현경호, 김원중, 배두봉, 이상희, 현두황((玄斗璜, 제주중 교사‧현경호의 아들),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 등 모두 6명이었다. 군인들은 총살 후 시신에 불을 붙여 태웠다. 

현경호의 가족들은 박성내까지 싣고 간 민간인 운전기사가 고민 끝에 몰래 알려준 덕에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불에 태워버렸기 때문에 현경호는 타다 남은 두루마기 조각으로, 그의 아들 현두황은 주머니에 있던 약병으로 시신을 확인해 수습하였다. 

‘본도 민전에서는 거(去) 24일 상임위원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하였다. 사무국장 김정노(金正魯), 차장 좌창림(左昌林), 조직부장 김정노(金正魯), 선전부장 좌창림(左昌林), 문화부장 김봉현(金奉鉉), 조사부장 정상조(鄭相朝), 재정부장 김두훈(金斗壎).’-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8․15를 앞두고 피검된 민전 간부를 비롯한 제 인사들이 속속 석방되고 있다 함은 기보와 같거니와 그 후 검찰당국에서 계속 취조 중이던 도청, 세무서 직원, 도립병원 의사, 간호부, 우편국 교환수 등 10여 명은 기소중지로, 18일 오후에는 현경호(玄景昊) 이도백(李道伯) 등 전부 석방되었다 하며, 현재 민전 고창무(高菖武)씨를 비롯한 5명만이 미석방이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22일

▲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1948. 5)

건준과 인민위원회 그리고 민전 

‘(전략) ㉠ 남로당/1947년 7월 4일 제주도 하도리에서 몇몇 사람이 (미소)공동위원회 선전 삐라를 배포하려다 체포됐다. 삐라에는 △공동위원회 지지, △3상회의 결정 실천, △3상회의 정신에 따라 북한에 인민경제 확립, △신탁통치 지지, △인민의 친구이자 진정한 애국자인 박헌영 체포 명령 즉각 철회 등 일반적인 좌익 선전내용이 담겨 있었다. ㉡ (미소)공동위원회와 관련한 좌익 선전 활동/1947년 8월 5일 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제주읍 전역에 뿌려졌다. 이 삐라들은 제주도 전역에 뿌려지고 있는 많은 삐라들과 그 내용이 비슷하다. ① “조선에 독립국가가 수립되길! 조선에 과도민주정부가 수립되길! 조선에 인민정부가 수립되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영광이 있으라!” ② “농민들이여 보라! 살인 경찰들에게 하루 5홉씩의 쌀이 분배되고, 악질적 테러리스트인 광복청년단원들의 배만 살찌울 강제 곡물수집 계획을 거부하자! 농민들이여 보라! 도 당국에는 미곡 1만 9,000석이 보관되어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곡물수집 계획을 거부하자!” ③ “인민들은 요구한다! 조선의 모든 재산을 우리 손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한 뒤 처분할 것을! 우리 인민들은 요구한다! 우리 손으로 정부를 세운 뒤 적산가옥을 팔 것을! 왜냐하면 적산가옥은 가장 중요한 우리 재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위원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미국과 소련 대표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낸다! 조선공화국이 수립되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영광이 있으라!”-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격주간정보보고(CIC Semi-Monthly Report) 1947. 3. 1~1948. 5. 15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식에서 선언서를 읽고 있는 대표들(1949년 6월 25일 평양)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10일 결성되었다. 그리고 동년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는 하층조직까지 파급될 정도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현경호는 제주읍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건준 조직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가 조일구락부(서문로 구 현대극장)에서 1947년 2월 23일 상오 11시부터 시작되었다. 대의원과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 방청객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안세훈은 “삼천만 동포의 한사람까지라도 민전 산하에서 최후까지 삼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된다”는 내용의 개회사로 민전의 지향을 명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명예의장에 스탈린· 박헌영· 김일성·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 6씨가 추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박헌영 체포령 취소와 아울러 인민항쟁으로 말미암아 투옥된 열사를 즉시 무죄석방하라는 항의문을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가결하였다.  

이어 내빈 축사로 박경훈 제주도지사, 격려사로 강창거(姜昌擧), 메시지 낭독에 김정노 순으로 이어졌다. 눈앞에서 투쟁하는 현호경·강성렬(康星烈)씨에게 격려금과 의복 등을 보내기로 하여 성출된 금액이 3300여원에 달하였다. 

토의사항으로 들어가 조몽구(趙夢九)로부터 악질 중 악질은 일제에 아부하던 자가 또다시 일제시대와 같이 권세를 부려보려는 야욕 아래서 인민위원회에 가담함으로써 인민에 아부하려다가 슬그머니 빠져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회주의자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다음 고창무로부터 민생문제에 대하여 의식주의 해결책을 역설, 일체의 배급기관을 인민의 손에 넘겨주는 것만이 양책(良策)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하오 7시경에 폐막되었는데 선출역원은 의장단 안세훈· 이일선 ·현경호, 부의장단 김택수 ·김상훈 ·김용해· 오창흔, 집행위원 김정노 외 33명이다. 후에 박경훈이 제주지사에서 물러난 뒤 민전 의장이 되었다.

‘민전 간부측에서 김두훈(金斗壎)씨, 고창무(高菖武)씨 외 수명이 피검되어 목하 취조중이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3월 18일

‘도민전(島民戰)에서는 활동을 개시한 후 그 내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의장에 전 지사 박경훈(朴景勳)씨, 부의장에 김시범(金時範)씨를 추대하고 상무위원회도 결원 중인 사무국장에 고창무(高菖武)씨, 차장에 김창순(金昌淳)씨, 선전부장에 김행백(金行伯)씨, 조직부장에 문경원(文景源)씨를 선정하여 전 부서 결정도 완료되어 민주역량을 집결하고 임정수립의 전제인 미소공위에 적극적인 협력으로써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케 되었다는데 전지사 박경훈씨의 정계 등장은 의외의 일이었고 앞으로의 동씨의 활약은 자못 주목되는 바다.’-제주신보 1947년 7월 18일

‘거(去) 14일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경찰당국에서는 민전 간부를 비롯하여, 남로당원, 도 직원(학무과장 이관석씨 외 7명), 도립의원 직원(의사 1명, 간호부 1명), 우편국 교환수 등을 검거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후 ‘씨, 아이, 씨’와 경찰당국, 검찰당국이 협력하여 즉시 취조에 착수하였던 바, 17일에는 민전 의장 박경훈씨 외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는데, 18일 현재 판명된 바에 의하면 홍종언(洪宗彦) 한사택(韓四澤) 김인규(金仁奎) 백남섭(白南燮) 김이환(金二煥․婦女) 고봉효(高奉孝) 강대석(康大錫)씨 등 기타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며, 한편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를 비롯한 도 직원 7명과 민전 간부 등은 계속하여 검찰당국의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20일

3·1투쟁위원회 결성 

‘28주년을 맞이하는 3월 1일이 혁명운동기념일을 전도적으로 의의깊게 성대히 거행하기 위하여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7일 오후 2시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인사 다수가 읍내 김두훈(金斗壎)씨 댁에 회집하여 안세훈(安世勳)씨의 사회로 제반 토의가 있은 다음, 3․1기념행사의 모든 문제를 준비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하고 위원장에 안세훈씨, 부위원장에 현경호(玄景昊)씨, 오창흔(吳昶昕)씨 양씨를 추대함과 동시에 총무부, 재정부, 선전동원부 등 부서를 설치하고 위원 28명을 선정하여 5시 반경에 폐회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2월 18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군정 당국은 당황한 나머지 이에 대항할 우익단체인 독립촉성청연동맹과 광복회 등을 조직하여 좌익세력과 맞서게 하였으나 치안은 혼미를 거듭하였으며 급기야 군정당국은 중앙에 제주도의 불안한 상태를 보고하여 특별대책을 세워주도록 한 결과 100여명의 경찰 응원대가 도착하였고 연이어 서북청년단이 입도하였다.’-‘제주경찰사’에서 발췌  

1947년 2월 17일 읍내 관공서 단체 대표 및 지방유지로 3‧1 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선임된 위원 27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안세훈(53세) △부위원장 현경호(54세) 오창흔(35세) △총무부 김승문(金升文‧33세) 박태훈(朴台勳) 김영홍(金永鴻‧42세) 양을(梁乙‧35세) 고창무(高菖武‧35세) △재무부 김두훈(金斗壎‧40세) 조응만(趙應萬‧43세) 김태경(金泰京‧50세) 김차봉(金次鳳‧50세) △재정부 홍종언(洪宗彦‧40세) △동원‧선전부 이일선(李一鮮‧53세) 김용해(金容海‧35세) 김정로(金正魯‧50세) 강어영(康御榮‧35세) 김문규(金文奎‧30세) 김태현(金泰炫‧43세) 고칠종(高七鍾‧35세) 임창운(任昌運‧35세) 김덕훈(金德訓‧39세) 김임생(金壬生‧26세) 고원경(高元慶‧26세) 이정숙(李貞淑‧30세) 양군옥(梁君玉‧30세) 김시봉(金時鋒‧40세)

3·1투쟁준비위원회에는 우익인사와 관공리뿐만 아니라 경찰 간부와 검찰 관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조직 총동원령을 내렸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3‧1운동 기념투쟁의 방침’에 나온 표어를 보면, 당면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적 애국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만세!’,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일제적 통치기구를 분쇄하라!’, ‘단일 누진제 즉시 실천!’, ‘입법의원을 타도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 파쇼분자의 근멸!’, ‘삼상회의 결정의 즉시 실천!’, ‘인민 경제를 파괴하는 모리배의 철저한 소탕!’,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신앙의 절대 자유!’, ‘식량문제 해결은 인민의 손으로!’

‘3․1기념일을 앞두고 각 학교 대표자회의가 있었는데 동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보았다 한다. 즉 3․1기념대회는 거족적으로 행하여야 할 것임에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와 보조를 같이할 것과 다음의 3단계로써 행동방침을 결정하였다. (1) 준비기간 중 각 학교별로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 (2) 3․1기념의 역사적 의의를 아동에게 인식시키고 아동을 통하여 학부형에도 인식시킬 것 (3) 투쟁기간에 있어서는 3․1운동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때문에 완전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것이며 기념행사에 대하여는 반성의 기한을 둘 것. 또 기타에 있어서 교원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원조합을 조직하기로 되었다는 바 하부조직이 완료하는 동시에 도적(道的)으로 조직할 것 등이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민전 의장단에서는 25일 미인(美人) 경찰고문관을 방문하여 요담한 바 있었다는데 주로 3․1기념행사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 현경호 선생님 추모비.

3·1기념일의 불의의 참사

‘제주3‧1사건 발생/수신:미국 국방부 육군성 참모본부 정보국장/제목: 반미‧반군정 활동을 벌이는 민주주의민족전선/1947년 3월 1일/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들이 제주도에서 폭동을 주도하여 경찰서와 감찰청사를 공격했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시가행렬과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이에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3월 10일/남로당이 작성하여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전달하려다 압수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지령이 적혀 있었다. “야수 같은 경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다. 우리의 적을 무너뜨리자.” ‘공장의 모든 세포들’에게 보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부 노동분과의 1947년 2월 16일자 문서에는 유명한 1919년의 3‧1운동을 1946년 10월의 인민폭동과 비교하면서, 미군정의 행위를 비난하고 한국인에 대한 총격과 투옥의 근거가 되는 하지 장군의 포고령 제2호와 제72호를 비난하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었다.‘-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월간정보보고(CIC Monthly Report) 1947년 6월 20일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군중 수는 대략 2만5000~3만 명. 각계 대표들이 나와 연설을 했다. 주로 3‧1 정신을 계승 자주독립을 전취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날 기념행사가 끝난 후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오후 2시 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난 무렵에는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시점이었다. 육지에서 내려온 응원경찰이 기마경관을 쫓아 군중들이 몰려오자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발포한 것이다.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허두용(許斗鎔‧15세‧제주북교 5년), 박재옥(朴才玉‧21세‧여), 오문수(吳文壽‧34세), 김태진(金泰珍‧38세), 양무봉(梁戊鳳‧49세), 송덕수(宋德洙‧49세)로 밝혀졌다. 미군정보보고서도 도립병원 앞의 발포를 ‘비이성적(irreconcilable with rational thinking)’ 행위로 규정하였다.

‘3월 1일을 기하여 삼양국민교 6년 자치회에서는 전재민(戰災民)과 작년 10월 인민항쟁 희생자 유가족에게 각각 위문의 글과 금액 700원을 민전을 통하여 보내어 왔는데 천진한 어린이들의 눈물겨운 성의는 일반을 감격케 하고 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3월 8일 

‘3․1사건 이후 군정법령 2호, 법령 19호 4조 위반으로 5,000원 벌금형을 약식 재판으로 언도 받았던 현경호(玄景昊)씨는 이를 정식 재판 회부를 청구한 바 있어 그 공판이 23일 상오 9시 반부터 심리원 법정에서 이일빈 심판관 주심으로 양을 검찰관대리 입회하에 개정되어 사실심리가 경찰의 청취서에 의하여 있었는데 피고의 청취서에 대한 불복 진술에 주심은 “이것은 법조(法條)에 맞추기 위해서 여러가지를 종합하여 작성한 것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어서 양을 검찰관대리로부터 “벌금형이라 함은 범죄 이외 가정형편, 재산상태를 짐작해서 하는 것이고 같은 범죄에 있어서도 이로써 형(刑)이 □게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고(故)로 검찰청에서도 1만원의 벌금을 5,000원으로 삭감시킨 것이고 이로써 정식재판 청구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약식 재판과 여(如)히 5,000원 벌금형이 가하다”라는 구형 논고가 있어 피고는 “중학교 설립에 사재를 전부 주입시켰으므로 재산 없다”고 진술하자 이에 대해 주심은 “많은 약식 판결 중에 정식 재판 청구는 피고뿐이었다”하며 5,000원 벌금형을 언도하고 폐정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5월 26일

▲ 제주중학교 전경.

검거선풍 일으키다

‘이렇듯 인민들의 반미기세가 나날이 커짐에 따라 허물어져 가는 퍄쇼 통치배들은 3·1절 발포사건을 전후하여 각 읍· 면· 리 단위로 작성된 검거자 명단에 기초하여 3월 15일 새벽을 기하여 대검거선풍을 일으켜, 온섬을 일순에 감옥과 도살장으로 일변케하고 무고한 근로인민들을 공포와 전율에 계속 떨게 하면서 온갖 생활수단을 박탈하였다.’-‘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3‧1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군정재판이 1947년 4월 3일부터 개정됐다. 제1회 공판주심은 군정청 법무관인 스티븐슨(Samuel J. Stevenson) 대위가, 검찰관으로 패트릿지(John S. Partridge) 대위가 입회한 가운데 제주지방심리원 법정에서 열렸다. 4월 10일 제주경찰감찰청은 총 검거자 500명 가운데 송치된 자 199명, 송치 예정자 61명으로 결국 군정재판 회부 건수는 도합 26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4월 12일까지 4차 공판이 진행됐다.

민간인 법정으로 이관됨에 따라 한국인 판사와 검사가 진행하는 공판은 4월 21일부터 시작되어 5월 23일까지 10여 차례 열렸다. 모두 328명에 대한 사법처리가 됐는데, 실형선고는 52명에 불과했고, 52명이 집행유예, 56명이 벌금형으로 풀려 나왔으며,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다. 그래서 현경호에게는 벌금 5,000원이 선고됐다.   

경찰은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을 검속했다. 구금된 인사 가운데는 초대도지사 박경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는 민전의장을 맡고 있었다. 미군 감찰반이 “제주도의 유치장은 한국의 어떤 행형시설과 비교해 보아도 죄수들이 넘쳐나는 최악의 경우를 나타내고 있다. 10×12피트(3.04×3.65m)의 한 감방에 35명이 갇혀 있다. 비교적 작은 감옥 안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본도의 3․1사건 진상조사차 24일 내도하였던 민전 조사부장 오영(吳英)씨는 용무를 수행 중 돌연 28일 오전 11시 반 서귀포에서 체포되었다 하는데, 수도청장의 체포명령에 의하여 구금한 것으로 방금 제1구서에 유치 중인데 동씨는 불일간에 서울로 압송될 것이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3월 30일

▲ 박성내.


현경호 부인 테러사건

‘테러는 드디어 평화스런 본도에까지 파급하여 민심은 극도의 공포에 둘러싸이고 있다. 거(去) 7일 만(晩) 8시 반경 도 식량사무소장 박태훈(朴泰勳)씨 댁에 돌연 정체불명의 청년 6, 7명이 나타나 방내(房內)의 전등을 파괴하여 박씨의 안면을 무수 구타하고 도주해 버렸는데 연달아 8일 만(晩)에는 도 민전간부 현경호(玄景昊)씨 댁에(현씨 부재중) 약 8시 반경 전화로 자기는 감찰청 직원이라고 하며 현씨의 재부재(在不在)를 문의한 후 약 10분 □□ 한 청년이 들어와 재가 중인 현씨 부인 안내로 온 방을 수색하였는데, 안내를 마쳐 현씨 부인이 방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돌연 나타난 다른 괴한이 곤봉으로 동 부인 두부(頭部)를 강타, 인사불성의 부상을 입혔고 각 방 속에 있는 가구 창문 등을 손가는대로 파괴하여 놓고 순시에 사라지고 말았다는데, 동 부인 진술에 의하면 먼저 청년을 안내하여 공장에 이르렀을 때 공장 부근에 괴한 3명이 어두운 곳에 서 있었다 하며 경찰당국에서는 범인수사에 노력 중이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9월 10일

1947년 9월 6, 7일 이틀간 민전과 관련이 있는 제주읍내 지역유지 집에 괴한 6~7명이 잇달아 침입, 물을 부수고 사람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첫날 피해를 당한 사람은 제주도식량사무소장 박태훈이었다. 침입자들은 박태훈을 당시 제주민전 의장인 박경훈으로 잘못 알고 테러를 가했다. 박태훈은 박경훈의 동생이다.

둘째 날 침입자들이 공격한 집은 박경훈 바로 앞에 민전 의장을 맡았던 현경호 집이었다. 당시 현경호는 집에 없었는데, 감찰청 직원이라 사칭한 침입자들은 10분간 방안을 수색한 뒤 현경호 부인을 곤봉으로 강타했다. 수사에 나선 미 CIC는 사건 발생 직전에 괴한들이 두 차례 현경호 집에 전화를 건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교환수는 그 전화가 유해진 도지사의 집에서 건 것이라고 진술했다. CIC의 추궁을 받은 유해진 도지사는 전화 건에 대해 모른다고 부인했다. 이 침입자들은 서청 단원들로 알려졌다.

미 CIC는 정치단체의 움직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미 CIC 요원들이 제주에 상주하게 된 것은 3‧1사건과 3‧10 총파업 직후인 1947년 3월 중순께였다. 제주CIC의 첫 보고는 그 해 3월 21일 제출된 ‘제주 우익정당이 허약하다’는 내용부터 시작됐다. 제주CIC는 1948년 말에도 계속 운영되었다.

▲ 제주북초등학교.

제주4·3과 민전의 대응

1947년 3·1사건 이후 4·3봉기 이전까지 약 2천5백여명이 구속되었다. 그후 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고 심한 허무주의와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에 시달려야만 했다.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4·3이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봉기목적에 드러나듯이, 시위군중는 인민위원회에 깊은 신뢰를 보였다. 그 가운데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있었다. 민전은 그 무렵 4·3에 대하여 계속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토벌을 즉시 중지하고, 전 역량을 집결하여 외군철퇴 조국통일의 민족과업 완수에 총진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민전은 제주도에 조사단을 파견키로 하고 민전 외교부차장 최태용(崔兌龍)을 군정 당국의 양해와 신변보장 등에 관한 협력을 요청코자 딘 군정장관과 면담코자 교섭하였으나, 군정장관의 비서는 면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이 4월 3일을 기하여 이에 반대 궐기한 것은 가장 애국적 구국투쟁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것을 탄압하고 있는 것은 실로 천인공노할 사실이며, 이와 같은 마침내 제주도 인민으로 하여금 정당방위적 무력반항으로 발전시켰다. 우리 3천만 인민은 제주도 인민의 이 영웅적 구국투쟁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토벌적 탄압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그들을 승리의 길로 이끌어 나아가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더욱 영웅적인 거족적 구국투쟁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그 무렵 죄명도 없이 재판조차 없이 타살당한 인사로 제주도 도총무국장 김두현, 제주중학교 교장 이관석, 전직교장 현경호, 검사 김방순,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 조천면장 윤창석, 독립운동가 조대수 등이다.  제주도에서 사실상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토착세력은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제주도의 권력은 오로지 중앙정부에 종속된 형태로서만 존속하게 되었다.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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