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꽃을 피우다] (5)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제주 전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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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 제주시 전농로에 녹음이 짙다.

10년 전쯤, 제주시 삼도1동 중앙초등학교 앞에 산 적이 있다. 결혼 후 내 집을 처음으로 장만한 곳도, 아들을 낳은 곳도, 처음으로 학부형이 된 곳도 그곳에서다. 그래서 우리가족에게는 좋은 기억이 많이 남은 동네다.

삼도1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억 중 특별히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건 전농로 길가에 심겨진 오래된 벚나무들에 대한 것이다. 봄에 하얀 벚꽃 터널이 장관을 연출해 잠시 상춘객들의 발길을 끌다가, 어느새 실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제 빛을 잃을 즈음, 빨갛게 단풍이 든 잎들이 바람을 타고 날린다.

최근에는 전농로 벚나무 길가에 새롭게 주민들이 꾸민 화단이 더해졌다. 인도 군데군데에 설치된 화단은 새롭게 정감을 더한다. 바쁘지 않은 방문객들은 잠시 화단 앞에 짐을 내려놓고 쉬어도 좋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숲길, 제주가 꼭 지켜야할 유산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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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 한 마리가 꽃에 매달리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 300여 년 전 제주땅에 유배된 조정철은 나락에 빠진 인생을 한 여인에 기대어 지탱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내 파국을 맞았으니, 정치란 참으로 비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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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농로에 주민들이 가꾼 화단이 더해졌다. 나그네라면 이 길에서 잠시 짐을 내려놓고 쉬어도 좋다.
이 일대 벚나무 가로수들은 1937년에 제주농고가 이곳으로 옮겨질 때 기념으로 심은 것들이라고 한다. 전농로라는 이름은 '전에 농업학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제주농고가 이곳에 터를 잡기 이전인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 전체가 공동묘지였다. 전농로의 동쪽 끝단 즈음에 해당하는 토지공사 건물 앞에는 과거 한 여인의 무덤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유배인 조정철을 사랑하다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 홍윤애다.

1777년 정헌 조정철이 정조 시해사건에 연류되어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홍윤애는 조정철과 사랑에 빠져 그의 유배처소에 출입했다. 하지만 당시 조정철과 원수지간이었던 김시구 목사는 판관 황인채와 모의하여 조정철을 제거할 계략을 꾸미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홍윤애가 조정철의 처소를 출입하는 것을 알아차린 김시구 목사는 연약한 여인을 잡아다 심문했다. 목사는 조정철이 유형수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지,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에 대한 비방을 했는지 여부를 캐물었다. 하지만 홍윤애는 시종일관 "나는 청소하고, 빨래하며 잔일을 거들어 주었을 뿐"이라고만 답하며, 조정철에게 불리한 진술을 일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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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윤애는 조정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다가, 모진 고초를 감당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후 제주에는 여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다.
결국 홍윤애는 장 70대를 맞아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 가운데 죽었다. 1781년(정조5년) 음력 5월15일의 일이다. 홍윤애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조정철은 옥중에서 그 애절한 심정을 시로 남겼다.

귤나무 우거진 성 남쪽 석자 분묘

젊은 혼 천년토록 원한 남으리

맛있는 술을 누가 드릴까

한 곡조 슬픈 노래에 절로 눈물이 고이네.

당시 홍윤애가 죽은 날부터 오랜 기간 비가 내리지 않아 제주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러다 8월에 들어서니 큰 폭풍우가 불기 시작했다. 비가 동이로 붓 듯했고 나무들이 꺾이는 비바람이 열흘 가까이 그치지 않았다. 섬사람들은 "몹시 세차게 내리는 비바람은 모두 홍윤애의 원기가 섬에 불러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시구 목사는 판관 황인채는 홍윤해 타살의 죄과를 감추기 위해 조정에 ‘역모’사건을 조작하여 보고했고, 조정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어사 박천형을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조정철은 목에 칼울 채운 채 감옥에 갇혀 100일을 보냈다.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운 국문을 견딘 끝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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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현 입구에 세워진 돌하르방은 300여년 전의 일을 기억이나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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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철은 정의현에서 세칸 초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후 조정철의 배소는 정의현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803년에 내륙인 광양으로, 1805년에 구례로, 1807년에 황해도 토산으로 이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정언으로 복관됐다. 그러다가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보상이라도 주어지는 듯, 1811년에는 제주목사겸전라방어사로 명을 받아 제주에 부임했다. 당시 그는 환갑을 남긴 나이였다.

제주섬, 그가 26년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 땅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여인의 시신이 묻힌 땅이고, 자신의 어린 혈육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홍윤애가 낳은 자신의 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홍윤애의 무덤은 사위 박수영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무덤을 찾은 조정철은 그녀를 위해 묘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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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윤애의 무덤은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되었다. 조정철이 쓴 비문이 지금도 홍윤애의 무덤가에 남아 있다.

묻힌 옥, 숨은 향기 문득 몇 년이던가

누가 그대의 억울함 푸른 하늘에 호소하리

황천길은 아득한데 누굴 믿고 돌아갔나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이 있었네.

(이후 생략)

홍윤애의 무덤은 그녀의 사위였던 박수영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다가, 이곳에 학교가 들어서자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조정철이 남긴 묘비명은 지금도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홍윤애의 무덤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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