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25) 극우성향 드러낸 아서 러치 민정장관 

러치, 미군정청 민정장관 취임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인 너 떠나가네 저 먼 낯선 곳으로/ 누굴 위해 무얼 위해 가야하나/ 아버지가 베트남에 가셨던 것처럼/ 넌 떠나가네 제국의 총알받이로 뒤치다꺼리 하러 예이예이/ 그래 우린 조국을 위한단 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 넌 그저 총알받이 일뿐야 우리 아버지처럼/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인 넌 군인인 난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우린 미군의 총알받이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대한민국 군인인 넌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우린 미군의 총알받이 일뿐/ 라랄랄라 라랄랄라/ 나  나난 미군의 총알받이 나  나난 제국의 총알받이/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인 넌 군인인 난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나  나난 미군의 총알받이 나 나난 제국의 총알받이/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대한민국 군인인 넌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총알받이 일뿐’ -안치환의 노래 ‘총알받이’ 가사

‘제1조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을 허가없이 발행함은 불법임......(중략)......제2조 허가 신청/ 가. 신청사항/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발행허가를 득하고자 하는 자연인 법인은 좌기 사항을 기록한 신청서를 제출할 사(事)......(중략).......제3조 게시요건/ 가. 허가증의 게시/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에 관한 허가증은 항상 우 신청서에 지정한 사무소에 잘 보이게 게시할 사...........(중략)......제4조 허가취소 또는 정지.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는 좌기 이유가 있을 때는 허가당국에 의하여 취소 또는 정지됨. 가. 허가신청서에 허위 또는 오해를 일으킬 신고 또는 태만이 있을 때. 나. 위에 요구한 바와 같은 신청서 기재사항 변경신고에 유탈(遺脫)이 있을 때. 다. 법률에 위반이 있을 때. 허가 취소 또는 정지의 통지를 수리하면 즉시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은 허가당국에게 그 허가증을 양도 및 교부하고 발행배부를 중지할 사. 허가당국이 허가증을 반환복구, 재발(再發)하지 않은 때는 발행배포는 계속하지 말 사(事). 제5조 외국 신문 및 정기간행물. 북위 38도 이남 조선지방 이외에서 발행된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은 발행자 또는 그 대리인의 신청에 의하여 조선정부 상무부장 명령하에 이에 허가함과 같이 배포함을 득함.......(중략).....제6조 신문 또는 기타 정기간행물의 정의. 본령에 사용한 신문 또는 기타 정기간행물은 1년에 1회 이상 발행하며 사회명사 또는 공익에 관한 정보 또는 여론을 전파함에 진력하는 발행물(재발행의 서적 또는 소책자 이외의)을 의미함.......(중략).....제7조 형벌/본령 규정에 위반하는 자는 군정재판에 의하여 처단됨. 제8조시행기일. 본령은 공포기일부터 유효임. 1946년 5월 29일/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치’ -재조선미육군사령부 군정청 법령 ORDINANCES(USAMGIK) 제88호 1946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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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항에 도착한 미군요원들과 그들이 사용한 장비.

미군정기는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까지 기간이다.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은 제24군단이 북위 38도선 이남을 통치하던 군사 통치, 행정 기관이다. 군단을 이끌고 온 존 리드 하지(John R. Hodge, 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26일) 사령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치볼드 V.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하였다. 

군정장관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의 최고행정책임자이다. 초대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Archibald V. Arnold, 1945년 9월 11일 ~ 1945년 12월 17일), 제2대 아서 러치 (Archer L. Lerch, 1945년 12월 18일 ~ 1947년 9월 11일), 제3대 윌리엄 F. 딘 (William F. Dean, 1947년 10월 30일 ~ 1948년 8월 15일) 이 각각 재임하였다.

제2대 군정장관 아서 러치는 1945년 11월 16일 하오 미군용기편으로 김포에 도착하였다. 하지 사령관은 이틀 후인 18일 상오 군정청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러치의 부임을 공식 발표했다. “신임 군정장관 러치 소장을 소개하게 되어 기쁘다. 러치 장군은 전미군장교 중 군정장관으로 적임자이며, 이것은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도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 9월 이래 임시로 군정장관직을 맡고 있던 아놀드 소장은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본직인 제7사단장으로 귀임하게 되었다.” 하지는 러치의 약력을 소개한  후 신임인사를 하도록 했다. 러치는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온 메모를 보며 인사말을 했다.

러치는 문학사·법학사의 학위와 변호사의 자격까지 소지한 행정통이었다. 그는 통역정치(通譯政治)의 폐단을 막고, 한국민의 민의를 수렴할 수 있도록 입법의원의 중요성을 사령관 하지에게 건의하여 군정법령으로써 설치하였다. 군정장관 밑에 한국인 민정장관을 두었고, 아울러 장차의 남조선과도정부를 수립할 포석으로 치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후 극우성향을 가진 하지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의 불화는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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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무장 해재를 위해 진주한 연합군 환영 행진.

러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발족 

군정장관 아서 러치는 1946년 2월 14일 ‘남조선국민대표 민주의원(南朝鮮國民代表民主議院)’을 발족시켰다. 의장에 이승만(李承晩), 부의장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이 선출되고, 의원 25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후 이승만의 미국 측과의  마찰로 의장직을 사임하고, 부의장 김규식이 의장을 맡았다. 동년 5월 6일 미군정은 김규식·여운형(呂運亨) 등 온건한 좌우파의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알선하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다. 동년 6월 29일  러치는 조선인민이 요구하는 법령을 조선인민의 손으로 제정하는 입법기관의 창설을 미군사령관 하지에게 건의하였다. 

입법의원은 동년 10월 21일부터 31일에 걸쳐 민선의원 45명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관선의원 45명은 하지가 임명하였다. 정식 개원일인 12월 12일 57명의 의원이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입법의원의 구성을 살펴보면 의장에 김규식, 부의장에 최동오(崔東旿)·윤기섭(尹琦燮),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는 법무사법에 백관수(白寬洙), 내무경찰에 원세훈(元世勳), 재정경제에 김도연(金度演), 산업노동에 박건웅(朴建雄), 외무국방에 황진남(黃鎭南), 문교후생에 황보익(黃保翌), 운수체신에 장연송(張連松), 청원징계에 김용모(金溶模) 등이었다.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서는 자격심사에 최명환(崔鳴煥), 임시헌법과 선거법기초작업에 김붕준(金朋濬), 행정조직법기초작업에 신익희(申翼熙), 식량·물가대책에 양제박(梁濟博), 적산대책(敵産對策)에 김호(金乎), 부일협력(附日協力)·민족반역자·전범(戰犯)·간상배(奸商輩)에 대한 특별법률조례기초에 정이형(鄭伊衡) 등이었다.

입법의원에서 통과시킨 제정법령으로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제102호법령>의 제7조 개정, <하곡수집법>, <미성년자노동보호법>, <입법의원선거법>,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조선임시약헌 朝鮮臨時約憲>, <사찰령 폐지에 관한 법령>, <공창제도 등 폐지령>, <미곡수집령> 등이 있었다.

1947년 2월 12일 미군정청은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함으로써, 한국인의 행정체계에 의한 민정이 본격화되었다. 동년 6월 3일 미군정청 한국인기구를 ‘남조선과도정부’라 개칭하고 정권 이양을 준비한다고 발표하였다. 동년 9월 12일 남조선과도정부에 대한 미군정청의 행정권 이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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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장기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미군.

해방공간에서 러치가 저지른 일

‘냉전시대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는 반공주의의 이름으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그리스에서는 미군의 개입 이래 16만여 명이 목숨을 앗아갔으며, 타이완에서는 ’2·28‘사건’과 ‘1950년대 백색테러’가 일어나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투옥되었고,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미군의 대아시아 전략기지로서 역할을 강요당하면서 미군에 의한 재산 및 인권침해사례가 종종 발생하였다.‘-허호준의 논문 ’제주4·3의 전개과정과 미군정의 대응에 관한 연구‘ 중에서 발췌

1946년 1월 하순 미군정은 ‘공출’이라는 말 대신 ‘수집’이라는 말로 바꿔 미곡 수집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에게 일제말의 악명 높은 미곡공출제와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미군정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과 원망이 컸기 때문에, 쌀이 거의 ‘수집’되지 않았다.  

일제와 악덕지주에 시달려온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기대하였다. 그것도 무상몰수ㆍ무상분배의 원칙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미군정하에서 발생한 제주4·3항쟁과 대구10·1항쟁 등 전국 각지의 집단항쟁 가운데 가장 큰 원인이 친일경찰, 관료들의 여전한 행태와 건재, 그리고 기대하던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쌀의 ‘수집’이 강요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미군정기간 동안 토지개혁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러치 군정장관은 1946년 3월 7일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불하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토지를 불하하는 대신 신한공사를 만들어 그곳에 위탁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신한공사를 만든 것은 쌀 소동에 대응해서 안전하게 쌀을 수집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동년 5월 15일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이 활동자금을 마련하려고 위조지폐를 만들었다고 발표하였다. 조선공산당 이관술((李觀述, 1902년 ~ 1950년)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이 조선정판사 김창선에게 위조지폐를 만들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의 간부인 박헌영((朴憲永, 1900년 ~ 1955년)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조선공산당은 전면 부정하고 단순한 위조지폐 사건을 좌익세력의 탄압을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박헌영이 직접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러치 장관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러치는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폐간시키고 간부들을 구속했다. 11월 23일 선고공판에서 유죄가 인정되었고 이관술은 종신형을 받았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와 전평에 대한 공세도 본격화하였다. 그해 9월의 총파업은 이에 대한 좌익진영의 반격이었다. 9월 23일 시작된 총파업은 동맹휴학과 가두시위로 이어지면서 남한 전역을 들썩였던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서울 용산의 철도공작창 철도노조원 3천여명이 파업을 벌인데 이어, 부산에서도 철도노조원 8천여명이 가세했다. 서울의 출판노동조합과 대구 지방의 우편국 조합원들까지 동조하고 나서면서, 파업은 전국 규모로 확산돼 나갔다. .이른바 '9월 총파업'의 시작이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러치 군정장관이 특별담화를 통해 모든 파업자들을 구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노조 간부와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9월30일 미군정은 경찰,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해 전평의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자리한 용산의 철도공작창을 습격했는데, 파업 진압은 곧 전쟁이었다. 종로주먹 김두한 대한민청단이 장택상 수도청장을 만났다. 장택상은 총 3백여 정과 수류탄 3상자를 넘겨주었다. 물론 38, 99식이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일러 죽창을 준비시켰다. 

미군정청이 불하하기 시작한 적산기업 또한 부정과 정실로 얼룩졌다. 연일 암투가 벌어지기 일쑤였으며, 미군정의 '백'을 업고 온갖 행패가 자행되기도 했다. 경제 활동은 어느 구석 한 가지 정상인 것이 없었고, 모리배들이 설쳐대는 무법천지였을 따름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1946년 8월 14일 미 군정청 특별발표에서 처음 등장한다. 서울은 고려 때 한양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공식 지명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일제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 경기도 내 행정구역의 하나로 깔아뭉갰다. 러치 소장이 광복 1주년 기념 선물로 서울을 경기도에서 독립시켜 특별시로 승격시켰다. 서울특별시는 군정 법령의 효력이 발생한 1946년 9월 28일을 기해 공식 지명이 됐다.

러치 군정장관은 1947년 3월 1일, 미군사령관 직무대행 브라운 장군에게 ‘러치 장관 비밀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미군정 하에서 국가수반으로 김규식(金奎植)을 추천하였다. 브라운도 그의 제안에 적극 동의하였다. 입법회의 의장인 김규식은 입법의원마저 장악하지 못했다. 하지와 러치 군정장관은 이승만을 과대망상으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규식 대통령’이란 카드를 생각해낸 것이다. 미군정 수뇌부는 ‘취임행사를 대규모로 하고 대통령 초상화를 남한 전역에 뿌리는 등 소련이 김일성을 선전하듯이 김규식 대통령을 남한 주민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러치는 군정의 격무로 미34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1947년 9월 53세로 순직했다. 그가 죽은 후 육군준장 헬믹이 잠시 군정장관대리로 있다가 소장 딘이 제3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6월 3일, 나는 하지 중장과 부사령관 겸 남한 군정장관 아서 L. 러치 장관과의 미팅에 참석했다.  그들은 이박사가 과대망상증으로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하지 장군은 이 박사에게 은밀히 정신과 의사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박사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면 아주 쾌활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대중 집회에 나가면 극도로 과격해지고 소련과 한국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하지장군은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이박사를 진정시켜 주세요. 당신이 그렇게 못 하면 이 박사는 끝장입니다. 우리는 소련과 합의하여 한국을 통일시켜야 하는데 이박사로 인해 이미 망쳤을지도 모릅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한 이박사가 한국에서 설 자리는 없습니다.’ -이승만의 개인비서 로버트 T.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저서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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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군 환영 현수막 걸린 건물 앞을 지나가는 마차 행렬.

러치, 제주도제 실시

‘러치 군정장관은 제주도를 시찰하고 지난 2일에 돌아왔는데, 4일 그 감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리 수확이 좋았으나 심을 수 있는 면적을 잘 이용치 못한 곳이 있어서 유감이었다. 부녀가 근실하게 일하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제관(製罐) 알코올 공장에도 씩씩한 부녀의 활동이 보여 매우 믿음성이 있었다. 고구마로 국수를 만들고 있어 이는 식량 부족한 이 때 좋은 일이다. 제주시내도 보았는데 모두 명랑하게 일하고 있었다. 하여튼 제주도는 지금이나 장래에나 중요한 곳인 것을 절실히 느꼈다.”’-독립신보 1946년 6월 5일

‘제1조. 제주도는 전라남도 관할에서 분리한다. 제2조. 제주도는 도(道)로서 전 권한·직무·직능 및 권리를 구비한 도를 구성한다. 그 도의 이름을 제주도라 칭한다. 제3조. 제주도는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의 명칭을 가진 두 개 군(郡)으로 구성한다. 제4조. 북제주군은 다음 면(제주읍·구좌면·한림면·조천면·애월면)으로 구성한다. 제5조. 남제주군은 다음 면(성산면·중문면·대정면·표선면·서귀면·안덕면)으로 구성한다. 제6조. 본령은 1946년 7월 31일 24시에 효력을 발생한다.’ -군정청 법률 제94호(1946년 7월 2일)

‘(중략) 14. 좌기(左記) 각인을 1946년 8월 1일부(附)로 제주도청 별기부서에 임명하고 기(其) 직권행사의 권(權)을 부여함. 박경훈(Pak Kyun Hun) 조선인 도지사. 박명효(Pak Myung Hyo) 북제주군수. 김영진(Kim Yung Chin) 남제주군수. 김두현(Kim Too Hyun)내무․문교∙재무국장. 임관호(Im Kwan Ho)농무․상무국장. (중략) 1946년 9월 12일. 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치’- 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 APPOINTMENTS 제107호 1946년 9월 12일

1945년 9월 9일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제주도의 군정은 11월 9일 제59군정중대가 상륙하면서 비로소 실시되었다. 8‧15 이후 86일만의 일이었다. 인구 26만여 명에 불과했던 제주도(島)는 1946년에 제주도(道)로 승격됐다. 이는 러치 군정장관의 명의로 공포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법령 제94호 ‘제주도의 설치’에 법적 근거를 두고 있다.

러치 군정장관은 도제 승격 사유를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본토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 풍토가 판이하여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가 독자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자치제를 진정해온 도민의 건의가 타당하다고 인정하여 군정장관의 직권으로 도 승격을 허가한다." 고 밝혔다. 제주도의 지역적 특수성과 문화적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였다. 보수진영에서는 당국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도민의 태반은 인위(人委)를 위시하여 도로 승격한 것을 아직도 반대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본토와 고립됨으로써 식량 기타 물자 교류에 있어 전남으로부터 분리됨을 싫어했다. 

도로 승격함으로써 기구가 확대되어 세금이 증가됨을 우려하는 한편, 해방 전에 2백여 명이던 경관이 수배로 느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라고 반대했다. 또한 도로 분리되어 본토와 다른 독특한 시정을 하는 것은 결국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스타우트 도사가 미국인 제주도지사로, 박경훈(朴景勳) 도사가 한국인 도지사로 발령되었다. 북제주군수에는 박명효(朴明效), 남제주군수에는 김영진(金榮珍)이 발탁되었다. 그런데 인민위원회 계열의 반대에 부딪쳤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도제를 반대하는 뜻에서 그들의 기구 명칭에 ‘도(道)’를 쓰지 않고 종래의 ‘도(島)’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세간에서 제주는 좌익 일색이며 인민위원회의 천하라는 말이 있으나 제주의 ‘인위’는 ’건준‘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 독촉국민회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 남선 일대를 요란시킨 지난번 민요가 제주에 없었다는 것은 지도층의 산하조직 대중이 육지와 상원(相遠)한 점도 있었겠지만 지도층이 자주적으로 선도한 것과 수뇌가 일제하의 경관이 아니었던 신인으로 구성된 경찰진과 호흡이 어느 정도 맞았던 것도 잠재한 이면이 하나일 듯 하다.’-동아일보 1946년 12월 21일 

‘(전략) 4. 육군소좌 서먼 에이 스타우드(Major Thurman A. Stout : O904209, CE)는 1946년 8월 1일부로 제주도지사(濟州道知事)에 임명함과 동시에 1946년 9월 4일부로 동(同) 관직을 해임함. 5. 육군대좌 알렉산더 아데아(Colonel Alexander Adair : O7308, INF)는 1946년 9월 5일부로 제주도지사에 임명함과 동시에 1946년 10월 11일부로 동 관직을 해임함. 6. 육군소좌 엘스워스 이 위버(Major Ellsworth E. Weaver : O275446, FA)는 1946년 10월 12일부로 제주도지사에 임명함과 동시에 1946년 10월 20일부로 동 관직을 해임함. 7. 육군소좌 서먼 에이 스타우드(O904209, CE)는 1946년 10월 21일부로 제주도지사에 임명함. (중략) 1946년 11월 13일/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치’-재조선 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 APPOINTMENTS  제113호 1946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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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치가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보낸 영문각서 .

3·1사건과 러치 군정장관

‘인민들은 <8·15 2주년기념 만세 !>·<미제 침략자를 남조선에서 추방하라!>·<불법탄압을 중지하라!>· <살인테러단을 박멸하라!> 는 등의 삐라가 꽃잎처럼 군중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전단은 온 섬땅에 백설같이 날렸다. 도내 도처에서는 적들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용감히 뚫고 나가면서 감행된 벼락시위와 <미제 식민지 통치를 폐기하라!>·<조선통일 독림만세!>를 절규하는 대중들의 거센 목소리는 온 산하를 진동케 하였다. 이리하여 인민들의 반석같은 단결력과 강인한 투쟁력을 억압자들에게 과시하였으며, 애국인민들의 해방활동은 결정적 행동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단계에 돌입하였다.’-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3․1사건에 관한 군정재판이 개막된 후 30만 도민은 그 추이에 이목을 경주하고 오던 중 14일 돌연 동 군정재판을 조선인 법정으로 이관시키라는 지시가 러치 장관으로부터 있었다 하는데 이에 대하여 법무관 스티븐슨 대위는 여좌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일 러치 본부로부터 본도 3․1사건 군정재판을 조선인 법정으로 이관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차회(次回) 공판부터는 제주지방심리원에서 집행하게 되는데 중대한 재판으로서 조선인 법정에서 처리가 못될 경우에는 검찰관의 보고에 의하여 군재(軍裁)에 회부할 수 있다. 그러나 군정에 적대행위 등의 사건에 대해서는 역시 군재에서 공판하겠다. 그리고 이번 조치에는 심리원, 검찰청, 경찰서 3자의 의견일치를 보았고 송국(送局)된 자로서 죄상이 경한 자엔 심판관, 검찰관의 상의하에 보석할 수 있다.”’-제주신보 1947년 4월 16일

3·1발포사건을 계기로 민족진영이라는 이름으로 대동청년· 서북청년· 민족청년 등 단원들이 완장을 끼고 <빨갱이 수색>이라는 미명하에 <빨갱이 동정자>라 덮어씌우고 집단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행패가 극에 달하였다. 미군정청은 이들을 적극 사주 동원하면서 불과 1개월간에 2천여 명의 도민들을 미군정법령 위반이라는 죄명 아래 소위 을 적요하면서 무궤도한 군정재판을 벌이었다. 

3‧1사건 및 3‧10 총파업 연루자들에 대한 군정재판이 1947년 4월 3일부터 개정됐다. 제1회 공판의 주심은 제주도 군정청 법무관인 스티븐슨(Samuel J. Stevenson) 대위가, 검찰관으로 패트릿지(John S. Partridge) 대위가 입회한 가운데 제주지방심리원 법정에서 열렸다. 4월 10일 제주경찰감찰청은 총 검거자 500명 가운데 군정재판에 송치된 자가 199명, 앞으로 송치 예정자가 61명으로 결국 군정재판 회부 건수는 도합 26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군정재판은 4월 12일까지 4차 공판이 진행됐다. 그런데 러치 군정장관은 4월 14일 군정재판에 회부된 사건을 한국재판소로 이관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는 통역문제 등 군정재판의 한계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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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
경찰의 검속은 계속되었다. 3‧1사건 이후 ‘4‧3’발발 직전까지 2천5백여 명이 검속됐다.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미군 감찰반이 “제주도의 유치장은 한국의 어떤 행형시설과 비교해 보아도 죄수들이 넘쳐나는 최악의 경우를 나타내고 있다. 10×12피트(3.04×3.65m)의 한 감방에 35명이 갇혀 있다. 비교적 작은 감옥 안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조선민청 단원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공공연히 조선민청 단원의 이름으로써 폭행과 협박을 감행하며, 테러와 악한단(惡漢團)의 행동을 계속하므로, 해(該) 단체는 정치적 영향을 강화할 정책으로써, 테러와 악한단의 행동과 폭행을 채용하였으므로, 여차(如此)한 행동은 해 단체의 본부에서 비밀히 지휘하였으므로, 그리고 여차한 행동은 질서있는 정부와 조선의 진정한 민주주의 발전에 직접 위협을 구성하므로, 본관은 아래와 같이 명함. 1. 조선민청은 해산함을 요(要)하며 자(玆)에 즉시 해산됨. 2. 법령 제55호에 의한 해 단체의 등록을 취소함. 3. 해(該) 단 단원은 동양(同樣)의 정책을 취하는 다른 단체에 가입함을 금함. 4. 어떠한 단체를 막론하고 금후 조선민청의 명칭을 사용함을 금함. 5. 경무부는 즉시 우기(右記) 단체의 본부를 폐쇄하고 일체의 기록을 차압하며 자산 기타 재산을 압수함을 명함. 6. 우기 단체가 수(受)한 일체의 재정적 및 기타 원조, 일체의 관계자에 관한 완전한 조사와 보고를 군정장관에게 제출함을 요함. 7. 경무부는 특정한 테러와 폭행에 관련된 해단 단원을 체포하며 처벌할 수속을 즉시 취함을 명함. 8. 본령의 규정을 위반 또는 회피하는 자는 군정재판에 의하여 군정재판소가 정한 벌에 처함. 9. 본령은 발포와 동시에 유효함. 1947년 4월 16일/우(右) 요청함 경무부장 조병옥/우(右) 건의함 민정장관 안재홍/우(右) 인준함 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치’-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군정장관실 행정명령 EXECUTIVE ORDER 제2호 1947년 5월 16일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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