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27)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이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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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라산 관음사.

이일선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오랫동안 준비중이었던 제주도(濟州島)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대회는 지난 23일 상오 11시부터 도내 읍면 대의원, 각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 방청객 200여명의 참석으로 초만원인 가운데 이일선(李一鮮)씨 사회로 개막되어 묵념이 있은 다음 만뢰같은 박수리에 안세훈(安世勳)씨 등단하여 “세계민주주의 체계에 입각한 모스크바 삼상의 결정은 민주과업을 진정하게 실천하게 되는 고(故)로 삼천만 동포의 한사람까지라도 민전 산하에서 최후까지 삼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된다”는 개회사가 있어서 민전의 지향을 명시한 바 있었고,

임시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의장단에 김시탁(金時鐸)씨, 김용해(金容海)씨, 고창무(高菖武)씨 3씨와 의사진행계(議事進行係)에 김정노(金正魯)씨를 선출하였는데, 개회벽두에 긴급동의로 명예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金元鳳), 유영준(劉英俊) 6씨를 추대하고 김정노씨의 경과보고가 끝나자 긴급동의로 광주시 남로당 결성대회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낼 것, 박헌영씨 체포령 취소와 아울러 인민항쟁으로 말미암아 투옥된 열사를 즉시 무죄석방하라는 항의문을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가결한 다음

김용해씨로부터의 국내외 정세보고에 뒤이어 “우리 제주도에는 악질경관이 적은 만큼 인민의 대중적인 분노와 증오심을 발휘할 조건이 많지 아니하였던 것은 다행이나 최근 악질 모리배의 도량과 이에 야합한 탐관오리로 인하여 인민의 분노와 증오심이 확대되면서 있고 또한 중앙에서는 기독교의 원로 김창준(金昌俊)씨가 최근 민전에 참가하였다”는 구체적 설명이 있었다.

이어 내빈 축사로 들어가 도지사 박경훈씨의 축사를 비롯하여 중앙문화협회 강창거(姜昌擧)씨의 격려사가 끝난 다음 김정노씨로부터 본 대회에 기여한 각 단체 메시지 낭독이 끝나자 긴급동의로써 잠복상태에 있는 제주도 남로당이 하루바삐 합법적 출현을 기하라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었고, 연달아 인민항쟁 당시에 무의식한 민중에 발포한 경관을 처벌하여 달라는 항의문을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하고, 인민항쟁에 쓰러진 투사들의 유가족 후원금과 눈앞에서 투쟁하는 현호경(玄好景)씨 강성렬(康星烈)씨에게 격려금과 의복 등을 보내기로 하여 성출된 금액이 3300여원에 달하였다.

다음 선언강령 피로(披露)가 있었고 위원선거가 있었다. 이어 토의사항으로 들어가 김정노씨로부터 조직확대강화에 대한 구체적 복안을 발표한 다음 친일파 민족반역자 규정에 대하여 조몽구(趙夢九)씨로부터 본 도민에 있어는 일제시대의 주구들이 어느 정도 자백하고 있으나 신판 반역자가 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악질 중 악질은 일제에 아부하던 자가 또다시 일제시대와 같이 권세를 부려보려는 야욕 아래서 인민위원회에 가담함으로써 인민에 아부하려다가 탄압이 심함을 보니 슬그머니 빠져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회주의자이다.

이러한 부류는 소위 명사란 자가 그러하다. 또다시 사실무근한 폭동계획 운운의 모략적 밀고를 당국에 하고 더구나 모종 배경으로써 의식적으로 반동하고 또한 모리행위를 자행하여 동포를 착취하는 자 등을 지적한 바 있었고 악질통역에 언급하여 양심적인 행동을 희망한다는 요청의 의(意)를 표하였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반동하여 오던 자에게 대해서는 엄격한 자기비판 아래 반성하는 자는 민전으로써 포옹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는 등 대략 여상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이어 5원칙 및 지방선거 행동강령에 대하여 긴급동의로써 민전 11개조 요구조건을 관철하여 달라는 진정서를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하고 만일 11개 요구조건을 불승인하면 지방선거에 참가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여 태도를 분명히 한 다음, 3․1절 기념행사에 대하여 안세훈씨로부터 질서정연히 평화리에 행하여야 된다는 설명이 있었다.

긴급동의로써 도령(道令) 제5호를 철회하라는 항의문을 도 당국에 제출할 것을 가결한 다음 고창무씨로부터 민생문제에 대하여 의식주의 해결책을 역설, 일체의 배급기관을 인민의 손에 넘겨주는 것만이 양책(良策)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있어 하오 7시경에 드디어 폐막되었는데 선출역원은 여좌하다. 의장단 안세훈(安世勳)씨 이일선(李一鮮)씨 현경호(玄景昊)씨, 부의장단 김택수(金澤銖)씨 김상훈(金相勳)씨 김용해(金容海)씨 오창흔(吳昶昕)씨, 집행위원 김정노(金正魯)씨 외 33명.’-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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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관음사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 왼쪽부터 제2대 오이화 스님의 맏상좌인 성수스님, 장명윤, 장석상, 문성오, 김홍조스님.

이일선(李一鮮, 1895~1950) 스님은 1895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선운사로 출가, 백양사에서 공부하였다.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 발기인이기도 한 그는 1937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에 내려왔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 포교부장으로 전도 순회강연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의 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1947년 2월 23일 조일구락부에서 5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  결성식이 있었다. 그는 안세훈(安世勳)·현경호(玄景昊)와 함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허헌·김원봉·유영준이 추대되었다. 공동의장에 추대된 후, 그는  안세훈을 도와 스타우트(Stout) 제주도군정관과 3·1절 기념대회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스타우트 소령은 시위운동에 대해서 금지령을 설명하고, 기념식을 서비행장에서 갖도록 통첩하였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군중 수는  3만여 명.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이 보강되었으며, 150명은 제주읍내에 배치하였다. 행사가 끝난 후 가두시위가 시작되었으며  관덕정 앞으로 시위군중이 몰려오자 응원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날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으며, 당국에서는 안세훈· 이일선 등 주모자 28명을 체포, 이일선은 군정포고령 위반으로 형을 받았다.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제주불교 교무원은 3·1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 모집을 하는 제주신보에 조위금을 기탁하였다.
 
그 후 이일선 스님은 1950년 예비검속 되어 산지포구에서 돌에 묶인 채 수장 당하였다. 절에 숨어있다 손을 뒤로 한 채 포박당하여 줄줄이 묶여 가면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던 스님을 정광사 보살이 숨어서 목격하였다.

‘김(金) 치안국장은 26일 경찰국장실에서 시내의 유지, 각 기관장들과 인사를 교환한 후 제주서 연무장에서 본국과 제주서 전직원에게 한시간 남짓 동안 훈시를 하고 일몰 경엔 잔비 토벌상황을 시찰하였다.....(중략)........ 또한 김 치안국장은 하오 늦어서 경쾌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관음사에 있는 잔비 토벌부대를 위문하는 한편 작전상황을 시찰하는 등 분망한 내도 제2일을 보내었다. 김 치안국장은 시내에서 1박하고 오늘(27일) 그의 전용비행기편으로 이도할 예정이다.’-제주신보 1957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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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당시 소실되기 전 1930년대의 관음사 전경. 평화로운 분위기다.

관음사 방화사건과 그 주변

‘함(咸)연대장은 기자단 일행을 포로수용소와 난민수용소로 안내하였다. 정거장 대합실 같은 넓은 방안에 다리를 펼 곳 없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이 포로와 난민이다. 제주도 태생으로 농업학교 4년 중도에 4․3사건을 당하고 이것을 계기로 파괴행동을 시작하여 식량을 조달하러 해안부락에 내려왔다가 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한 청년은 우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제주폭동은 종래 행정당국 측의 강압에 싹이 텄으며 재작년 3․1절의 시위행렬에서 경관측 발포로 4~5명이 쓰러진 것에 한층 더 성숙하였다”고.....(중략)....... 3월에 이르러는 이덕구 이하 20여 명이 무기를 땅에 묻고 분산하는 운명에 빠졌으며 서로가 투항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그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신(申)국방장관이 제주에 왔다.......(중략)...... 한라산 중턱 군데군데는 연기가 난다. 폭도의 조량을 막으며 정글을 불로 태운다는 것이다.

한라산 기슭에 있는 저 유명한 관음사(觀音寺)도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있다. 파괴된 길을 수선하러 동리 민보단이 동원되었다. 남녀노소 거의 전부인 듯하다. 신(申)장관의 간곡한 훈시에 뒤이어 그들이 가지고 온 점심밥을 보았다. 약 20%는 점심이 없다. 가지고 온 것도 조․콩뿐이며 그 풍부하던 감자와 쌀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제주비바리(處女)는 20세 출가할 때까지 쌀 서말(三斗)을 못 먹는다’는 옛 기억이 머리에 도나 이는 1세기 전 이야기이고 근래는 그렇지 않았다. 뼈만 남은 근로대의 힘없는 괭이를 보는 신장관의 목은 또 막혔다. 임(任)도지사는 말한다. 동란으로 죽은 사람이 아마 2만 명은 될 것이다. 주택은 11만 7000호중 무려 탄 것 3만 3500호, 도민의 유일한 생업인 가축피해만도 4만 6000마리. 전체도민은 지나간 1년간 생업을 잃었고 5000의 해녀도, 20여 처의 대소공장도, 농토도 황폐하였다는 것이다.

브라스밴드의 나팔소리가 제주건설에 한 박자를 더 넣었다. 이(李)대통령의 제주도 시찰을 환영하는 학도호국대의 행렬이다. 수만의 도민은 광장에 모였고 간곡한 대통령의 훈시는 큰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재건에 그리고 나라에 충성할 것을 대통령 앞에서 맹세하였다. “권당(眷堂)이니 더 쉬고 가시오” 초급중학 1년 여학생으로 조직된 국군위문단은 국군을 위문하고 내려오던 한라산 중턱에서 말문을 연다. 제주에서 권당(친척)을 만나니 반갑다고 하였다.(끝)‘-국도신문 1949년 4월 23일

‘△ 제주도지구 171230 BN120003 관음사 □□□지점에 적 8+1이 출현하여 양민 3명을 납치한 후 한라산 방면으로 도주하였음. 171100 BN700065 도남리 남방 200YDS 지점에 적 8+1이 한라산방면부터 침입하여 양민 3명을 납치한 후 적은 한라산방면으로 도주. 171830 BN525017 함곰리 남방 700YDS 지점에 적 8+0이 출현하여 양민 4명과 농우 2두를 약탈한 후 적은 도주, 4명중 2명은 탈출하여 왔음. △ 부대별 병력장비표/ 한라산부대 : 병력 무장 29, 비무 23, 계 52. 장비 소화기 27, 중화기 1.  부대장  김성규’- 육군 정기 정보보고 제138호(1953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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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으로 인해 관음사 등 도내 35개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

한라산 동북쪽 기슭 산천단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관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의 본사로 40여개의 사찰을 관장하고 있다. 고려 문종 때 창건 되었다. 조선 숙종 때 억불정책으로 사찰들이 완전히 폐사되었고, 그후 2백 여년 동안 제주에는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제주불교의 힘은 1924년 음력 4월 8일 관음사 중창 낙성식에서 나타났다. 안도월 스님이 초대주지에 임명됐다. 1936년 안도월 스님이 입적하고, 오이화 스님이 2대주지에 임명되어 1937년 대웅전 보타루 해월각 해탈문이 낙성되었으며, 그해 7월 20일 경내 화재로 모두 소실 되었다. 1938년 음력 5월 28일 안봉려관 스님이 입적하고, 1939년 7월 29일 화재로 대웅전과 요사채 객실채가 소실되었다. 1941년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을 완공 중창하였다.
 
4․3이 발발하고 국군 제2연대는 1949년 2월 12일, 돌연 관음사를 방화, 건물을 전소시켰다. 관음사에 불을 놓는 순간 천둥 벼락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대웅전의 3백년 된 목불이 타기 시작하자 몸체가 번쩍번쩍 빛을 내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스스로 폭발했다.  관음사를 방화한 후 그 잿더미 위에 제2연대 2대대가 주둔하며 주변을 요새화 하였다.
 
그리고 5월 28일, 토벌대는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산악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스님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군인들은 스님을 끌어내 마차 위에 묶고 물고문을 하면서 무장대와의 내통여부를 취조했다. 한밤중에 절간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했다. 다만 주지스님만이 총성이 울리는 와중에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었다.
 
한라산 성판악 부근에는 무장대 핵심세력이 주둔해 있었으며, 그 아래 물장오리 부근에는 무장대 훈련소가 있었다. 이덕구(李德九)와 함께 했던 도당 사령부는 '삼이악과 견월악' 부근에 위치해 있었으며, 물찻·말찻·산란이오름 일대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피신해 있기도 했다. 무장대 사령부 수뇌부와 이세진 스님 등도 함께 있었다. L-5 미군 정찰기가 관음사 일대에 집중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토벌대의  총격으로 무장대는 심한 타격을 입고 후퇴하게 된다.
 
제주4·3 당시 격전지였던 관음사 경내 5만평의 밀림지대에는 중대와 소대급 숙영지 27곳이 무더기로 산재해 있다. 가로 25m, 세로 25m급의 중대급 숙영지와 그보다 규모가 작은 소대급 숙영지, 3~4명이 잠복할 수 있는 초소를 비롯하여 700~800m에 이르는 제1방어선, 제2방어선 등이 돌담으로 겹겹이 구축돼 있다. 특히 뒷산인 아미봉 정상에까지 숙영지와 초소가 만들어져 토벌대가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철저히 대비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폐허가 된지 20여년이 지난 1969년에 이르러 대웅전 준공을 시작으로 복원해, 1970년 선방, 1971년 영산전, 1972년 해월각, 1973년 사천왕문, 1974년 일주문, 1975년 종각, 1978년 서향각과 삼성전을 완공하고 오이화스님의 비석을 세워 비전을 마무리하고 1987년 제정된 전통사찰보존법에 따라 1990년 6월 16일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1) 3월 7일 토벌대는 애월리(930-1140) 인근에서 폭도들을 공격했다. 폭도 2명, 군인 2명, 주민 1명이 사망했다. 폭도 10명이 체포되었다. (2) 3월 6일 군경합동 토벌대가 관음사 인근에 은신해 있는 폭도들을 기습하여 5명을 사살하고 20명을 체포했다. (3) 3월 4일과 5일에 관한 보고에 의하면 SANGHWAJON(930-1130) 인근에서 폭도와 토벌대 간에 두 차례 교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으로 토벌대는 폭도 3명을 사살하고 32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 G-2 Periodic Report(1945. 9. 9~1949.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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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사 미륵불들과 전각의 지붕.

제주4·3과 불교계의 피해

‘당신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 막막 저승을 향하여 떠나셨습니까/ 저 아늑한 섬곶 끝자락에서/ 보였다가 사라져버린 무심한 당신/ 어느 곳에서 무얼하고 계십니까/ 동쪽에서 숨죽이며 살다가/ 해지는 서쪽으로 떠나버린 당신/ 광명과 생성을 상징하는 동쪽에서/ 죽어서 영혼으로 떠난 서쪽으로/ 그곳 서천꽃밭에서 죽은 이를 살린다는/ 그 아늑한 환생꽃으로 피셨습니까/ 검은꽃 노란꽃 빨간꽃 파란꽃 하얀꽃/ 뼈와 살과 피와 숨과 혼을 살려내는/ 그 꽃으로 피어 향기를 뿜고 계십니까/ 눈물이 말라 흐르질 않습니다/ 가슴이 막히고 말문도 막혔습니다/ 총소리가 가슴을 후비고 지나는 날/ 동백무리가 뚝뚝 꽃잎을 흩날리던 날/ 동네 고샅길 넘어 동네 삼촌들 함께/ 포승줄에 묶여 질질 끌려가던 날/ 비애 끓는 소소리바람 소리 멀리 하고/ 서천꽃밭으로 당신을 보내는 심정/ 아직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빈 꽃상여 메고 저 멧부리 따라/ 일가친척 영이별하고 산천벗님 영이별한/ 당신을 오늘, 그곳으로 인도합니다’-김관후의 시 ‘서천꽃밭에 계십니까’

‘한국군은 공세를 취하여 폭도들을 은신처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지난 3월 마지막 3주는 1947년 3월 1일 이래 가장 평온했다...(중략).....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제2연대의 3개 대대와 인원 미달의 1개 특수대대, 제2연대의 전 작전참모 김명 대위가 지휘하는 50명의 특수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일본제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이 김명 대위의 특수부대는 선발된 게릴라 요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산악을 배회하다 폭도들과 만나면 사투리로 이야기를 하는 등 정보수집에 아주 가치있는 조직이다.

작전병력과 연대본부는 제주읍에 주둔하고 있고, 대대본부의 경우 제1대대가 PYONG TAI JIN JUN(961-1130), 제2대대가 관음사, 제3대대가 교래리, 특수부대는 노루오름에 위치해 있다. 제주도 주둔 부대원의 훈련은 소단위 부대 훈련에 머물고 있다. 대다수 군인들은 한시바삐 본토로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으나 그들의 사기는 일반적으로 좋아 보인다. 제2연대의 모든 공산주의적인 요소는 대전을 출발하기 전에 깨끗이 제거됐다.(후략)’-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 G-2 Periodic Report(1945. 9. 9~1949.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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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사 미륵불과 만불상.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에 걸쳐 학살과 방화가 자행되면서 사찰피해는 이루어졌다. 진압군은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중산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내려오게 했다. 신도들은 불상과 탱화, 집기 등의  집기를 끌어안거나 등에 업어서 옮겨 다녔다. 빈방을 빌려 불상을 봉안해야 했다. 사찰 건물의 피해는 전소, 폐허, 일부소각으로 나눌 수 있겠다. 법당은 물론이고 요사채 또는 객사 등의 건물까지 불태워졌다. 인명피해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예비검속기까지 이어졌다.

■관음사(제주시 아라동) 법당, 기타 건물 7동 전소. 오이화 스님 고문 사망 ■대각사(제주시 이도동) 원문상 스님 사망 ■백화사(제주시 아라동) 법당, 요사채 파옥 ■불탑사(제주시 삼양동) 법당, 요사채 파옥 ■서관음사(제주시 도평동) 법당, 요사채, 객실 전소. 이세진, 고제선 스님 사망 ■석굴암(제주시) 법당 전소 ■소림사(제주시 아라동) 법당, 요사채 전소 ■용장사 (제주시 도평동 법당) 객실 전소. 백인수 스님 사망 ■원당사(제주시 삼양동) 소개 ■월정사 (제주시 오라동) 법당, 가옥 5채 전소. 김덕수 스님 사망 ■정광사(제주시 일도동) 이일선 스님 사망 ■법화사(서귀포시 하원동) 법당, 요사채, 객실 전소 ■용주사(서귀포시 호근동) 법당, 요사채 파옥 ■원만사(서귀포시 하원동) 법당 전소. 양홍기 스님 사망 ■월라사(서귀포시 신효동) 법당, 요사채 파옥 ■호촌봉 암자(서귀포시 하효동) 법당 파옥 ■단산사(대정읍 인성리) 소개. 강기규 스님 사망 ■두수사(성산읍 신산리) 소개 ■선광사(남원읍 남원리) 법당철거, 객실 소각 ■봉주사(표선면 토산리) 법당, 객실 파옥. 동불상도난 ■고관사(조천읍 조천리) 강제매각■고운사(애월읍 고내리) 법당, 요사채 2동 철거 ■광룡사(한림읍 상대리) 법당, 객실 2동 전소 ■귀이사(애월읍 상귀리) 법당, 요사채 2동, 불상 등 일체 전소 ■극락사(애월읍 상귀리) 법당, 요사채 전소 ■금붕사(구좌읍 하도리) 법당 반 소각, 요사채 소각. 이성봉 스님 사망 ■금천사(애월읍 어도리) 법당, 객실 전소 ■묘음사(애월읍 어음2리) 법당, 객실 전소 ■백양사(조천읍 북촌리) 법당, 요사채, 객실, 불상 등 일체 전소. 김유신 스님 사망 ■북촌포교소 ■보광사(애월읍 고내리) 법당, 요사채 철거. 성명미상 스님 사망 ■본원사(조천읍 함덕리) 법당 일부 소각 ■수덕사(애월읍 광령리) 법당, 객실, 석가모니불상 등일체 전소 ■수산사(애월읍 수산리) 법당, 객실 철거. 고정선 스님 사망 ■외꼴절(조천읍 함덕리) 법당, 요사채 전소. 신홍연 스님 사망 ■은수사(한경면 고산리) 고인봉 스님 도일(渡日)

‘기보한 바 치안국 최 보안과장의 내도를 계기로 중앙에서 장비 보급을 증강하는 등 최근 경찰에서는 전 병력을 동원하고 활발한 토벌 작전을 전개 중에 있는데 그 첫 전과로서 적 2명 사살 등의 전과를 올렸다. 작 14일 경비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 13일 상오 9시 반경 색적 중이던 아 경찰전투대에서는 제주서 관내 한라산록 어후악 남방 약 50미터 지점 밀림 속에서 무장 비무장 합 60명 가량의 잔비를 포착, 교전 끝에 적 2명을 사살하고 99식 총 1정, 동 실탄 약간, 불온문서, 식량 등 다수를 노획하였다.’-제주신보 1952년 4월 15일

‘지난 16일 하오 1시경 허 경감이 지휘하는 경찰전투대 유격대는 제주서 관내 ‘성널오름’ 부근에서 잔비 수십 명을 포착 격전 끝에 생포 2명 사살 1명의 전과를 올렸는데 생포 중 1명은 재산 잔비의 병원책임자 고신종(高申宗․당 22년․조천면 와흘리 출신)과 병원 간호사 김순자(金順子․당 17년․제주읍 이호리 출신)이며 사살된 폭도는 고광추(高光秋․조천면 와흘리 출신)로 판명되고 있다.‘-제주신보 1952년 4월 19일

‘지난 17일 하오 1시경 제주읍 관내 관음사 천조봉 남방 약 300m 지점 출입금지지역에서 고사리 캐던 여자 1명이 잔비에 납치되었다.’-제주신보 1953년 5월 19일

제주불교의 인명피해는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에 걸쳐,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여름까지 이어졌다. 1947년 3 · 1사건이나 2 · 7사건 등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요시찰 인물, 또는 불순분자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허가 집회, 폭동 음모 등의 구실로  토벌대에게 예비검속 되었다. 예비검속 된 사람들은 총살이나 수장 등으로 희생되었다.
 
수장은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진 극악한 만행 가운데 하나이다. 바다로 나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돌을 매달아 빠뜨리거나 총을 쏘아 바다로 던지는 끔찍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알몸으로 수장시키는 등 학살의 흔적자체를 없애려했다. 수장은 정식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임의대로 처분하였던 불법적인 일이었으며, 이일선 스님 외 10여명의 스님들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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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사 경내 4.3 유적지.

■이세진 : 1910년 저지리에서 태어나 내장사에서 출가하였다. 경성 개운사 불교 전문강원의 망년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하였고, 1937년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를 지냈다. 1939년 한림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하면서 제주불교연맹에서 교육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도평리에 서관음사를 창건하여 기와공장을 운영하며 강원설립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48년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하였다. 이덕구 무장대 지휘부 15인과 함께 관음사에서 기거한 적이 있다. 관음사는 이후 토벌대에 의해 소각되었다. 1949년 초, 토벌대의 포로로 잡혀 동부두 주정공장에 잡혀있었으나, 이일선 스님의 상좌였던 헌병장교 김우송의 도움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1949년 7월 관음사에서 잡혀나가 수장 당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원문상 :1908년 하원리에서 태어나 기림사에서 출가하였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의 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중문중학원에서 역사와 국어, 한문을 가르쳤다. 1950년 7월 7일 서귀포 경찰서장 김호겸의 이름으로 경찰국장에게 보고한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은 2·7사건의 주모자로서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다. 서북청년단 전문규의 누명으로 예비검속 되었고 바로 처형당하였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오이화(吳利和, 1903~1950) : 1903년 제주시 오라리에서 출생하였고 12세에 출가하여 관음사 서기에서 포교당 서기, 법화사와 불탑사 감원, 포교당 감원 포교사를 거쳐 관음사 2대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제주교구 교무원 재무국장, 조선불교 중앙대의원을 거쳐 제주교구 교무원장을 지내는 등 제주불교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49년 1월 관음사가 불태워지던 당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50년 5월 25일 45세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성봉 : 1895년 행원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화엄사 제주포교소 포교사였다.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 금붕사를 대표하여 참여하여 교무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49년 10월 21일 55세로 금붕사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하였다. 금붕사 경내로 도망 온 마을주민을 숨겨주었는데, 뒤따라 온 토벌대가 행방을 물었으나 스님이 모른다고 하자 여덟 발의 총을 쏘아 죽였다.

■백인수 : 1940년 백양사 김녕포교소 감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제주불교청년단' 선전부장으로 추대되었다. 1949년 1월 6일 군인, 순경들이 도평국민학교로 소집을 시켜서 나갔는데 그때 학교에 모인 60여명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연대마을 입구에서 총살당하였다.

■신홍연 : 함덕리 백양사 포교소를 창건하였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하였으며 1934년 10월에 백양사 북촌포교소 계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제주도에 들어왔다. 비파, 시금치, 무, 배추 등을 갖고 들어와 함덕리에 보급하였다. 함덕 배추는 스님의 보급으로 시작되었고 함덕 주민들에게 퇴비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밭을 세내어 신도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수확물은 팔아서 신도들과 함께 나누었다. 사찰이 있던 외꼴 지경은 함덕리 인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마을 청년들이 토벌대를 피해 절에 와서 숨어 있기도 하였고, 밥을 해먹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스님은 절에서 200m 쯤 떨어진 곳에서 귤나무에 묶인 채 살해되었다. 군인들은 동네 청년들에게 죽창을 들고 스님을 찌르게 하였다.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하며 임종했다.

■고정선 :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의 교무회원,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1949년 봄, 수원사의 주지였으며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좌익 쪽 연락책이었다고 증언되는 고인봉 스님이 잠시 수원사에 기거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고문 끝에 총살당하였다.

■양홍기 :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원이었다. 홀로 절을 지키다 토벌대에게 총살당하였다.

■강기규 :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1948년 가을, 소개 되던 때 인성리 단산사에서 총살당하였다.

■김덕수 : 1930년 오라리에서 김석윤 스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입산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8년 11월 13일 월정사에서 잡혀나가 제주시 박성내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때 나이 19세였다.

■김유신 : 북촌리 집단학살 당시인 1949년 1월 17일 마을주민 500여명과 함께 북촌포교소에서 총살당하였다. 49세였다.

■고제선 : 1945년 대각사 서기를 역임하였고 이세진 스님의 상좌였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 서관음사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도평리 서관음사 소각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창현 : 1950년 9월 4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명단에 있다. 검속당시 51세, 주소: 용담리 437번지, 직업: 승려, 범죄개요: 남로당원, 농위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주간 폭력 요약/3월 11일부터 18일까지 1주일 동안 폭도들의 활동 상황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3월 10일~12일 - 제주도. 한국군 작전보고. 폭도 22명을 사살하고 16명을 포로로 잡음. 경비대원 2명이 피살되고 2명이 부상당함. M-1 소총 1정, 카빈 소총 3정, 일본제 소총 8정을 되찾음. (B-2) 2. 이전에 요약되지 않은 추가보고 (일일정보보고 제 1084호 참조)  

(1) 3월 5일 - 제주도 SANGHWAJON(930-1130). 토벌대, 폭도들과 두 차례의 교전을 벌임. 폭도 3명을 사살하고 32명을 포로로 잡음. (C-2)   (2) 3월 6일 - 제주도 관음사. 토벌대가 폭도들의 은신처를 기습하여 폭도 5명을 사살하고 20명을 포로로 잡음. (C-2)   (3) 3월 7일 - 제주도 AEWOL-Li(930-1140). 군경토벌대는 폭도들을 기습하여 2명을 사살함. 경비대원 2명과 주민 1명 피살됨. 폭도 10명 포로로 잡음. (C-2)  (4) 3월 5일~9일 - 제주도. 한국군 작전보고. 폭도들과 7차례 교전. 폭도 89명을 사살함. 경비대원 26명 피살됨. 폭도 167명을 포로로 잡음. 경비대원 3명이 부상당함. 한국군은 일본제 소총 3정을 폭도들로부터 탈취하고, 경기관총 2정, M-1 소총 6정, 카빈 소총 7정을 탈취 당함. (C-3)’-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 G-2 Periodic Report(1945. 9. 9~1949. 6. 17)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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