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백건우 선생의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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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일 제주항에서 열린 백건우 선생의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공연. ⓒ제주의소리DB

공연 시작 시간인 7시 30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공연장인 제7부두는 수백 명의 관객들이 중국 크루즈 유람선 승객들과 뒤섞여 공연장의 차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더딘 공사 진척 때문인지 공연장 주변 선창가는 군데군데 잡초로 뒤덮인 공터들과 짓다만 건물공사장 때문인지 다소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한 낮의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한 여름의 태양은 이제 서쪽 바다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고 방파제에 가둬놓은 부두의 바다 물결은 여느 때처럼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 몇 명의 사회 봉사자들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던 공연장 입구를 들어서자 어디선가 투박한 부두의 부산한 광경을 고요한 평화로 달래듯 피아노 연주곡이 저녁바다에 은은하게 울려나왔다.

이미 꽉 들어찬 관객들 사이로 빈 좌석을 찾던 바쁜 눈을 들어 보니 방파제 끝머리에 제법 높이 솟아있는 등대 옆으로 주변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시멘트 바닥을 받침대로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 정장을 한 몸집 큰 신사가 무아지경에 빠진 듯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음반으로만 연주를 듣던 백건우 선생이었다. 그와 그의 피아노는 관객이 아니라 등대 너머 멀리 북쪽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공연장은 정식 초대권을 운 좋게 구할 수 있었던 오백 명 이외에도 뒷문으로 들어온 입석 관객들로 꽉 들어찼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관객들이 아니었다. 공연 시작 전 미리 관객들의 박수도 금했단다.

처음 연주한 것은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귀에 익은 베토벤의 비창이었다. 공연 팜플렛에는 이 곡이 산책길에 나선 베토벤이 아기의 죽음을 탄식하는 어느 아낙네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즉석에서 작곡하고 연주한 곡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번 공연의 제목인 “세월호 참사 백일, 영혼을 위한 소나타”의 첫 번째 곡으로 선정된 것도 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동안 그냥 아름답게만 들리던 곡에 이런 슬픈 사연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아니, 그보다 새삼 깨달은 진실은 타인에 대한 진정한 슬픔이 그토록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냈다는 점이었다.

빈 좌석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중간 열 옆쪽으로 다가서니 백건우 선생의 격렬한 손놀림이 더욱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리스트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침울한 곤돌라 2번”으로 넘어가면서 결코 아름다움만이 아닌 울분이 함께 섞인 듯한,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고뇌와 번민을 던져주려는 듯 혼잡한 느낌으로 빠져들었다.

해는 뉘인지 이미 오래지만 선선한 저녁 바닷바람도 내가 입고 갔던 얄팍한 한 겹 셔츠 속 끈적끈적한 땀을 식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영령들을 위한 그 자리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두텁고 거추장스런 예복을 하고 있었다. 30분 남짓한 공연의 종반으로 달려갈수록 그의 손길과 몸짓은 더위에 아랑곳없이 더욱 격렬해져만 갔고. 그가 양복 안에서 흘렸을 땀방울이 엄청났을 터였다. 점점 무뎌져만 가는 세상을 깨우고 깊고 컴컴한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영령들을 불러오려고 했는지, 그는 이제 손가락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건반을 향해 내던지는 듯 보였다. 그의 피아노는 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울분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동안 한 척의 무심한 어선이 낡은 엔진의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연현장의 근처 바다 위를 지나갔다. 또 가까운 선착장의 여객선이 선객들의 승선을 재촉하는 뱃고동 소리가 줄기차게 백건우 선생의 피아노 연주에 열어놓았던 관객들의 귀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심지어 여객기 한 대가 등대에 걸릴 듯 공연장 관객들의 머리 바로 위로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그러나 그 무엇도 백건우 선생의 몰입을 막지 못했다. 그는 부둣가의 일상적 활동들의 소음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무심해져만 가는 우리의 차가운 마음과 싸움을 하는 듯 느껴졌다. 덥다고 냉방기 옆에만 붙어살던 나태한 우리들을 갇힌 공간에서 끄집어내어 ‘세월호 영령들을 위한 백일제’의 자리에 세운 것은 ‘생중사(生中死)’의 세계에 사는 우리들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망각’의 진실을 깨닫게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세월호 영령들도 그날 그의 공연을 함께 들었을까. 그들은 끝내 자신들을 저버렸던 무능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을 용서해줄 수 있을까. 그러나 책임을 지겠다는 정부의 최고책임자들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고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은 유명무실한 상태다. “이번만 도와주십시오. 뼛속까지 바꾸겠습니다”라고 애원하던 여당은 지방선거가 끝나자 진실 규명을 호소하는 세월호 유족들에게 오히려 호통을 치는 듯한 태도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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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이렇듯 허무하게 세간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세월호 영령들의 억울한 죽음을 백건우 선생은 고전의 명곡으로 승화시켰다. 고전적 선율의 형식으로도 담을 수 없었던 그의 곡성은 희생자들의 영혼과 하나가 돼 저절로 움직였던 무아지경의 손길과 몸짓으로 토해냈다. 그래도 미처 다하지 못한 울컥한 마음이 남아있었을까. 그는 연주가 끝나자마자 종별사도 없이 자리를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공허한 퍼포먼스로 공연을 매듭지었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토록 헌신적인 예술가의 영감으로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세월호 영령들을 위해 관객석 끝 열에 마련됐던 열 개의 좌석들은 끝내 채워지지 않은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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