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30)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이운방

이운방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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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초등학교 옛 모습.

‘백설이 분분하는 27일 대정면 농민위원회 결성대회는 오전 11시부터 모슬포유치원에서 대의원 300명, 방청자 300여명 참석으로써 유치원 운동장까지 초만원의 성황리에 개최되어 각계인사의 격려축사가 있었고 위원장에 이운방(李運芳)씨를 추대하고 아울러 집행위원 선거가 있는 다음 토의사항으로 들어가 △조직강화 △계몽운동에 관한 건 등을 토의하여 끝으로 농위 만세삼창으로써 오후 4시경에 폐회하였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1월 30일

‘대정면 민청 임시대회는 지난 10일 오전 11시부터 500여명 참집하 성황리에 거행하였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2월 16일

‘입산은 혁명적이요, 불입산(不入山)은 비겁행위라고 떠드는 편도 있었지만은 이것은 스스로 애국자연하는 자들에 의한 독선적인 우언(愚言)에 불과한 것이다. 산 아지트에는 그리 많은 인원의 수용력이 없지 않느냐? 입산자가 많게 되면 그에 따라 거처의 중축이 필요할 것이며 식량, 집기, 침구, 기타 일상소모품의 더 많은 비축도 긴급히 수행해야 될 사업으로 되겠다. 그러므로, 이들의 준비에는 많은 물자와 금원(金員)의 필요를 느끼게 되며, 많은 노력을 할애해야 될 뿐 아니라, 유격대 특유의 이동성이 노둔(露屯)해질 것은 재언의 필요조차 없겠다. 그리고 민간에서의 당의 선전 및 조직활동에 있어서도 크게 불편을 가져올 뿐 아니라, 더구나 무기 없는 헐거벗은 군중들을 산에 몰아놓고, 대체 무엇을 하려는 심산이었을까?’-이운방의 저서 『4·3사건의 진상』 중에서

이운방(李運芳, 1910~2013)은 대정읍에서 태어나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의 집은 오대진(吳大進)의 집과 바로 이웃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정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조몽구(趙夢九)와는 같은 반이고 김정노(金正魯)는 일 년 선배였다. 다시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1929년 학문을 향한 열정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공부도 별로 못 해보고 각기병만 얻고 1년 만에 돌아왔다. 귀향 후 농사를 지으며 청년을 모아 독서회를 조직했다.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사상서적도 읽어나갔다. 그의 주위에 모인 청년들은 사상적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진보적 사상을 가진 대정지역 청년들은 계몽운동 차원에서 ‘당(堂) 파괴사건’(1929년)이나 ‘예배당 설교방해사건’(1930년) 등을 벌이기도 했다. 

이운방은 몇몇 청년들과 모슬포교회 최홍종 목사를 찾아갔다. 선교사업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가 교회 장로가 구타를 당하였다. ‘예배당 설교방해사건’이다. 청년들이 예배당 앞에서 집단 시위를 하고 발길질을 해서 소환되고, 그는 목표형무소에서 50일간 징역을 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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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호.
19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들이대며 모든 분야에서 사상적인 탄압의 족쇄를 조여갔다. 그는 공부를 포기하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 1940년 말에  귀향했다. 일본에 있을때 『朝鮮硏究』에,  「4·3사건의 회상」을 쓰고, 1968년 1차 고향을 방문한 후 「고향소감」을 써 「統一日報」에 발표해서 조총련과도 비뚤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조천사람은 두뇌(頭腦)로, 대정사람은 완력(腕力)으로, 애월사람은 구변(口辯)으로, 중문사람은 배짱으로 덤빈다’는 말이 있듯이, 1930년 이후에 조천· 대정은 반일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해방이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되고 곧 인민위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바로 이웃에는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오대진, 이신호(李辛祜) 선배가 있었다. 1945년 9월 7일 대정면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 우영하, 부위원장 이신호, 총무부장 윤평석, 선전부장 이운방, 문교부장 문달진, 치안부장 어기준 등이 참여하였다.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고, 그는 대정면 건준과 인민위에서 선전부장으로 투신한다. 

1945년 11월 20일 서울에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인민위원회위원장 오대진, 부위원장 최남식, 총무부장 김정노, 대정면 인민위 선전부장 이운방 등 4명이 제주대표로 참가하였다. 1946년 말에는 남로당 대정면책을 맡는 등 남로당 핵심 간부를 맡기도 했다. 1947년 1월 30일 대정면 농민위원회 결성하고 위원장도 겸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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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초등학교 민족해방기념비. 1950년 건립.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가 대정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운방의 사회로 대정중 교장 이도일과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해온 이신호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그는 대회가 ‘평화적 시위’가 되기를 바랐다. 결국 총파업을 주도하면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김달삼(金達三)은 당시 대정지역 조직책이다. 

이운방은 1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1948년 3월 중순 출옥 한 후, 무장봉기에 참여 요청을 받았다. 당시 공공연하게는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건강상태가 좋지않아 이향(離鄕)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무장봉기에 대한 거부감과 장차 불어 닥칠 동지들의 희생을 공동 책임질 수 없다는 심리가 그를  압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4·3사건 이후 3개월 쯤 고향에 있다가 송악산 부근의 갈못해변에서 발동선을 타고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그가 다시 고향땅을 밟은 것은 30년이 지난 1979년이었다.

이운방은 평소 "제주4·3은 5·10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위한 투쟁"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무장봉기'에는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4·3은 남로당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령이 아니었다"며 "중앙당의 지령이 있었다면 어째서 봉기 여부를 놓고 도당 내부에서 심각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남로당 지령설을 부인했다. 그는 무장봉기를 선도한 이덕구와 김달삼에 대해서도 '좌익모험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11월 21일 경비대는 대정 근처에서 폭도 88명을 사살하고 4명을 생포했으며 여러 종류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경비대 보고) 11월 23일 경비대는 선흘리 인근에서 폭도 15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경비대 보고) 11월 24일 경비대는 노형리 인근에서 전투를 벌여 폭도 79명을 사살했다. (경비대 보고)’-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1월 26일~1948년 11월 27일 (No. 998, 1948. 11. 27. 보고)

‘본도 9만 이재(罹災) 농민들이 4․3적화(赤禍)로 말미암아 가재를 소실 당하고 안전지대인 해안부락으로 산산이 소개하여 셋방 또는 토막에서 곤궁과 병마의 위협과 싸워온 지도 어언 5개 성상(星霜). 그간 이재민들의 눈물겨운 재건의 노력은 하루하루 결실하여 1953년 말 현재 총 이재 세대수 1만 5,228세대 중 7할인 1만 628세대가 옛터에 자리잡은 눈부신 복구상을 보이고 있어 경찰전투대의 주밀한 작전에 의한 잔비 6명의 3개월 내의 완전소탕의 기대와 아울러 1만호분에 가까운 귀농 정착용 건축자재의 원조실현은 도내 전 이재농민 금추(今秋) 내의 완전한 복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도 사회과 제공 1953년 12월 말 현재 도내 재건 복귀상황 통계표에 의하면 읍면별 실정은 다음과 같다. ※이재 총세대수 (1만 5,228 중 복귀 1만 628. 미정착 4,600. 복귀상황은 1만 628세대 중 본건주택(本建住宅) 완성 2,620 미완성 본건주택 3,093 가주택(假住宅) 4,320 차가(借家) 595. ※북군 복귀 6,498(9,491 이하 괄호내는 이재 세대 총수) A=본건 1,810 B=미완성본건 1,492 C=가주택 2,960 D=차가 236 △제주읍 = 2,164(3,261)  A=341  B=456  C=1,345  D=22 △조천면 = 743(1,327)  A=217  B=208  C=281  D=43 △구좌면 = 441(598)  A=180  B=60  C=191  D=10 △애월면 = 1,188(2,180)  A=596  B=614  C=393  D=85 △한림면 = 1,462(2,125)  A=476  B=160  C =50  D=76 ※ 남군 = 4,130(19,447)  A=810  B=1,601  C=1,360  D=359 △서귀면 = 367(533)  A=102  B=123  C=102  D=39 △중문면 = 387(665)  A=83  B=139  C=90  D=75 △안덕면 = 592(933)  A=196  B=211  C=116  D=69 △대정면 = 326(717)  A=55  B=235  C=36  D=0 △남원면 = 1,664(1,672)  A=293  B=544  C=827  D=0 △표선면 = 622(966)  A=57  B=269  C=178  D=118 △성산면 = 172(311)  A=24  B=80  C=10  D=58’-제주신보 1954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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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운방.


제28주년 대정지역 3·1절 기념행사 

‘제주도에 있어서 반동 경찰을 위시한 서청, 대청의 작년 3‧1 및 3‧10 투쟁 후의 잔인무도한 탄압으로 인한 인민의 무조건 대량검거, 구타, 고문 등이 금년 1월의 신촌사건을 전후하여 고문치사 사건의 연발로써 인민 토벌 학살 정책으로 발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단선‧단정 반대, 유엔 조위(朝委)격퇴 투쟁과 연결되어 인민의 피 흘리는 투쟁을 징조하게 되었다. 3‧1 투쟁에 있어서의 각급 선전 행동대의 활동은 그후의 자위대 조직의 기초가 되었으며 3‧1투쟁 직후 도당의 지시에 의하여 각 면에 조직부 직속 자위대를 조직하게 되었으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후 사태가 더욱 악화됨을 간취한 도상위는 3월 15일경 도(道)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 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 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서 발췌

‘어느 날 밤  나는 취조관 앞에 끌려갔었다. 그는 습자지로 된 한 장의 큼직한 등사물을 내 앞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진지하게 날카로운 빛이 띠어 있었다. 그는 “군은 이것을 알고 있을 터이지! 모른다고 차마 말 못 할 터이지!”하고 말한다. 그의 협박적이고 중량 있고 귄위있는 듯, 그리고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한 짧고 낮은 목소리는 나의 고막을 충격적으로 울리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심문이 수반 될 것은 재언이 필요 없겠다.’-이운방의 저서 『4·3사건의 진상』 중에서

신우균(申宇均) 제주감찰청장이 1947년 2월 20일 직위 해제되고, 후임에 강인수(姜仁秀)가 발령되었지만 3·1사건 여파에 밀려 40일 만에 청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운방은 그의 저서 『4·3사건의 진상』에서 강인수를 ‘일제시대 경부(警部) 경력을 갖고 있으며 좌익진영을 탄압하고 섬멸시킨 경험의 보지자(保持者)’라고 혹평하고 있다.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맞아 제주도는 지역마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정지역도 기념집회에 앞서 남로당 대정면분회 역원회(役員會)에서 기념행사에 대해 논의하면서, 당일 기념식이 끝난 뒤 시위를 감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시위 감행의 가부를 당일 구체적인 정세 여하에 따라서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일의 정보수집은 김달삼이 맡기로 역할분담이 되었다.

3·1절 기념대회는 읍·면 단위로 열렸다. 제주읍은 애월면과 조천면을 합쳐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대정면은 대정국민학교에서 열렸다. 그때 대정면 인구가 많아야 2만 정도인데 기념대회에 6천 명이 모였다. 가파도에서도 1백여 명의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나와서 참여할 정도였다. 

기념식은 이운방의 사회로 대정중 교장 이도일과 이신호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기념식이 끝난 다음에는 교실 안에서 대정중학생들의 연극공연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폐회선언이 있은 직후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시위행렬 대열로 돌입하였다. 시위행렬은 운동장을 몇 바퀴 돌더니 교문 밖으로 박차고 나갔다. 시위행렬은 무사히 귀환했고, 선두에 김달삼이 학생들과 어깨를 끼고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주읍에서 발포사건으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대정면에서도 조위금을 모아 7만5천원을 전달했다. 그리고 역원회의를 소집해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미군정은 총칼로 무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맨주먹이니 어쩌겠는가? 정면 대결을 할 수가 없었다.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항의 표시로 전도총파업을 도당에 건의했다. 그 중심에 이운방이 있었다.

대정면당의 3․10 총파업 건의를 도당은 받아들였다.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전도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민관총파업이었다. 각급학교의 교사와 학생, 은행,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관리자와 노동자, 군정청의 통역들은 물론 중문지서에서는 순경들까지 파업에 참여했다. 전도적 총파업이었다. 대정면에서는 구멍가게까지도 파업에 동참했다.

그러나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내도하면서 사태는 일변했다. 미군정은 사과는 커녕 무차별로 활동가들을 검거하기 시작하더니, 군정장관이며 도지사, 경찰 책임자를 극우강성파로 바꿨다. 그때 이운방도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총파업의 주모자가 누군지 몰라 취조랄 것도 없었다. 한 조직원으로부터 대정면당 대회 소집통보서가 발각되었다. 통지서 한 장으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고 총파업과의 연계도 다 밝혀졌다. 그는 10개월 징역에 벌금 5백 원을 선고받았다. 전도적으로 파업은 확대되었으며 대정면에서도 면사무소 어업조합 금융조합 우편국 대정중학교 전분공장 등이 파업에 동참하였으며, 상점가주는 철시상태가 되었다.

‘대정면에 관한 한 최초의 7,8명의 피검자 중, 취조를 받은 자는 2,3명에 불과하며, 그래서 총파업과의 관련관계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내기에 실패하였다. 총파업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주모자를 색출해서 이에 엄벌을 가함으로써 제주도가 보유한 애국적 좌일세력을 흔적없이 소탕하려는 그들의 최초의 의도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없는 한 만사는 도로(徒勞)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취조자들은 당분간 무위도식하는 것이 일과였었다. 엄중한 고문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순회(순회)폭력에는 괴로움을 당했었다.’-이운방의 저서 『4·3사건의 진상』 중에서

김달삼에 대한 평가

‘1. 게릴라 집결/제주도 게릴라가 섬 남서쪽에 있는 대정면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주민들의 좀 더 강력한 지지와 약한 경찰의 방해와 보다 효율적인 남로당 조직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192호, C-3) 2. 삐라 살포/ 8월 12일 공산당 노선을 추종하는 삐라가 ‘단정분쇄투쟁위원회’의 명의로 제주도 일대에 살포되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192호, C-3) 3. 북한인들 제주도에 도착/ 자칭 ‘북조선인민군 증원부대 및 선거촉구위원회’라고 하는 새로운 공산주의자들의 집단이 8월 7일 북한으로부터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제주도 일대에 유포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조직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그룹은 15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조천면, 대정면, 한림면으로 각각 파견되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192호, F-6)’-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8월 16일~1948년 8월 17일 (No. 913, 1948. 8. 17. 보고) 1945.9.9~194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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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달삼.
김달삼(金達三, 1923 ~1950)은 제주4·3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대정읍 영락리 987번지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그의 장인 강문석(姜文錫)이 일제강점기에 중국 상해에서 항일운동 당시 쓰던 가명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다. 1945년 1월 강문석의 큰딸 강영애(姜英愛)와 결혼하였다.  강문석(姜文錫, 1906년 ~1955년)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대정읍 안성리 출신이다. 

대정지역 3·1절 기념행사에서 조직부를 맡았던 김달삼이 나중에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돌리지 말라던 이운방의 말을 무시하고 통지서를 돌린 게 나중에 탄로가 났다. 김달삼은 1948년 무장봉기 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첫 군사부책이 되었다. 

김달삼· 김익렬의 회담 직후, 이운방이 김달삼을 만났는데 김달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찰력만으로는 인민의 유격대의 진압은 불가능한 일이며 국방경비대는 오히려 유격대에 대하여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승만 배(輩)가 의뢰할 곳은 미점령군 밖에 없다. 그러나 미점령군이 우리사업에 직접 간섭하게 된다면 그것은 크나큰 국제문제로 화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김달삼의 이 말은 바로 2~3일 전에 제주출신 고경흠(高景欽)이 독립신문에 쓴 “만약 미군이 제주4·3사건에 직접 간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유유(悠悠)한 국제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글을 인용한 것이 틀림없다. 김달삼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일반이 다 알고 있는 신문보도조차 그대로 말하였으며, 김달삼은 마치 테잎 레코더였다고 이운방은 비판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사건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 한데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 특별발표에 의하면 4월 3일부터 동 7일까지 5일간의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4월 3일 △모슬포 일반측 중상 1명, 가옥파괴 1, 방화 1 △외도 경찰관 사망 1 △화북 경찰관 사망 1, 방화 1, 일반0측 사망 2, 가옥파괴 1 △조천 경찰측 중상 2명, 경상 1명, 가옥파괴 1, 일반측 행방불명 5, 폭도측 사망 △대정 경찰측 중상 1명 △신엄 경찰측 중상 1, 일반측 사망 3, 일반측 부상 12, 경상 12, 행방불명 1, 가옥파괴 4, 방화 3, 폭도측 사망 △세화 경찰측 중상 1, △남원 경찰측 사망 1, 일반측 사망 1, 중상 2 △한림 경찰측 사망 1, 부상 1, 일반측 사망 1, 중상 2, 경상 4, 가옥파괴 6 △함덕 경찰측 행방불명 2, 일반측 행방불명 4, 4월 6일 △이호 일반측 사망 2, 중상 5, 경상 3, 가옥파괴 2. 4월 7일 △피습 경찰측 방화 1, 일반측 사망 3, 중상 2, 가옥파괴 1, 폭도측 사망 2 △경찰측 계 사망 4, 중상 6, 경상 1, 행방불명 2, 가옥파괴 2, 방화 2 △일반측 계 사망 12, 중상 24, 경상 19, 행방불명 10, 가옥파괴 15, 방화 4 △폭도측 계 사망 6, 총계 사망 22, 중상 30, 경상 20, 행방불명 12, 가옥파괴 17, 방화 7.(같은 기사 독립신보․동아일보․서울신문․조선일보 48. 4. 14 / 자유신문 48. 4. 13)’-조선중앙일보 1948년 4월 14일

‘6월 초순경의 일로 기억되는 바이다. 대정지서 보성파견소가 9연대를 탈영한 국방경비대원의 기습에 의하여 전 소원(所員)과 함께 전멸한 바 있었는데, 대정당은 즉시로 리민대회를 열도록 하고, 제조직의 부활을 도모한 바 있으나 이의 해방지구화에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도리어 대정지서는 눈과 콩의 거리에 있는 안성리향사를 접수하고, 여기에 파견대를 설치함과 동시에 리민을 강제동원시켜 석성을 쌓게 하고, 경찰대를 새로 파견해서 방성수사토록 하였다. 그들의 보통 아닌 결의를 엿볼 수 있겠겟다.“ -이운방의 ‘4·3사건의 진상’ 중에서

김달삼은 제주도당으로 옭겼다. 그는 경솔하고, 명예욕이 강하며, 모험적이었다. 그 날, 3월 1일에도 시위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는데 김달삼이 군중들을 지휘해 시위를 벌였다. 회의 결정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한 것이다. 소집통보서 문제에서부터 온통 일을 벌여 놓은 것이다. 

김달삼에 대한 평가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무장봉기를 하면서 조직의 모든 실권이 군사부책인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무장봉기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잘못하면 당시의 무장봉기 자체가 그와 같은 모험적인 젊은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단선적인 평가만을 가져올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김달삼은 그 당시 대정중 사회담당 교사였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머리가 좋고, 항상 품에 단도를 품고 다니며 일군의 야봉(보스) 노릇을 했다. 1944년 3월 광주사범학교를 거쳐 중앙대(東京) 예과로 진학했다. 1944년 가을에 모슬포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운방은 그이 부친과 면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피로연에 참석했었다. 그 후 대구로 이주했으며, 1946년 말에 재차 모슬포에 왔는데 그는 부친의 청을 받아 이운방은 그를 대정중학교 교사로 소개해 주었다. 

남한 정권이 수립된 직후인 1948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김달삼은 여기에 참가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해주대회는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예비 절차로서 남한에서는 1,002명의 대의원이 참가했고, 제주에서는 6명이 참가했다. 그는 여기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대훈련을 받은후, 1949년 8월4일 강동정치학원의 4차유격대 대장으로 유격대원 300명을 이끌고 일월산 일대로 침투한다. 이후 경북 보현산에 거점을 구축한후 동해연단을 편성하여 유격전을 지휘하였다.

오대진과 이신호 가까운 이웃

‘11살 위인 오대진과는 가까운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잘 알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키가 작은 편이었으나 야무지게 생겼다. 오대진· 이신호가 이 무렵 대정의 이름을 낸 사람들로, 특히 오대진은 1920년대에 지방사람들의 신망을 받았고 좋은 인상이었다고 한다. 1930년 경에는 서귀면에 전문공장을 차려 경영하며 목포 쪽과 내왕이 잦아지고 거기 집도 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작가 오성찬(吳成贊)의 『한라의 통곡소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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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진.
오대진(1898~1979)과 이신호(1901~1948)는 대정면 하모리 출신이다.  두 사람은 1919년 기미운동에 관여한 후,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으며, 1925년 3월 21일 제주청년연합회를 창립 오대진은 총무로, 이신호는 서무를 담당했다. 두 사람은 신인회의 창립 멤버로, 동년 1925년 9월 23일 제주소년연맹회를 창립하여 함께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10월 모슬포의 3개 단추공장의 노동자 1백여명이 노동친목회를 조직, 공장주에게 처우개선· 인금인상· 8시간 노동 ·정기휴일 실시 등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를 유발, 일제당국에서는 모슬포 청맹원들을 피검(被檢)하였으며, 이 때도 오대진· 이도일· 김한정 ·이신호· 이운방 등이 큰 힘이 되었다.

두 사람은 1931년 9월 제주도야체이카에 가입하였고, 1932년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나자 함께 지원하였으며, 1932년 3월 1일 모슬포에서 전개된 기미독립일에 다수 군중이 시위운동을 전개, 두 사람은 배후 인물이라 하여 함께 체포되어, 1933년 6월 대구복식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대진은 징역 4년형을, 이신호는 징역 2년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되고, 제주도(濟州島)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10일 결성되었다. 각 읍‧면 대표 100명 가까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도단위 건준 조직을 출범시킨 것이었다. 이날 임원진 구성도 있었는데, 위원장에 오대진(대정면), 부위원장에 최남식(崔南植‧제주읍), 총무부장에 김정노(金正魯‧제주읍), 치안부장에 김한정(金漢貞‧중문면), 산업부장에 김용해(金容海‧애월면)가 선출되었다. 주로 40~50대의 장년층으로 항일운동 경험자들이 많았다.

해방 직후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은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였다.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 결성했다. 그 후 11월 20일 천도교 강당에서 6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제주도에서는 제주도인민위원회 위원장 오대진, 부위원장 최남식, 총무부장 김정노, 대정면 인민위 선전부장 이운방 등 4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다.  

1946년 12월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위원장은 일제시대 사회주의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조천의 안세훈(安世勳)이 맡았다. 초기 주요 활동가로는 김유환, 김은환(金誾煥), 문도배(文道培), 현호경(玄好景), 조몽구(趙夢九), 오대진, 김한정(金漢貞), 이신호, 이운방, 김용해, 김정노, 김택수(金澤銖), 문재진(文在珍), 부병훈(夫秉勳), 송태삼(宋泰三), 이도백(李道伯) 등을 꼽을 수 있다. 

1947년 28주년 3·1기념대회 사건으로 두 사람은 제주도파업투쟁위원회를 지휘하다가 미군정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자, 오대진은 1949년 일본으로 피신, 도쿄에서 82세에 사망하였다. 그의 큰 아들은 4·3에 죽고 작은아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다. 이신호는 3·1기념대회 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4·3사건 여파로 1948년 11월 20일 암살되었다.

‘4‧3 투쟁은 일부의 미숙하면서도 모험적인 분자들에 의하여 시기 아닌 시기에 하등의 세심 세밀한 준비도 없이 단지 몇 자루의 소총을 가지고 무장봉기로 저돌맹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국적 투쟁의 일환으로부터 자의로 이탈해서 고립무원의 환경 가운데서 개시되었고, 고립무원의 환경 가운데서 적연히 막을 닫게 되었다.’- 이운방의 「4‧3사건의 진상」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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