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제주..."섬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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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명량>의 한 장면. <명량>은 제작사가 배급까지 맡으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할 수 있었고, 1600만 관객 동원의 기록을 세웠다. ⓒCJ엔터테인먼트

<명량>이 한국영화사 기록을 시원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명 해전에 어울리는 명 영화로, 유쾌한 등극이다. 그런데 이 '명량(해전)'이 제주를 구했다면,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제주사람이 생각하기에도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제주의 관련성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량이 제주를 구했다!

현명한 독자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12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몽고가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요충지로 제주를 주목했고,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는 본토결전의 요충지로 제주가 일본의 참호가 되기도 했다. 몽고도 배를 타고 제주로 왔고, 일본제국주의도 배를 타고 제주로 들어왔다.

20세기 중반 1948년 4·3 때는 미군의 군함이 제주에 나타났다. 모두가 제주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섬 제주와 거대한 제국들의 공교로운 만남도 그러하거니와, 섬사람들의 운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국들은 제주도를 그런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멀게는 13세기에도 그랬고, 가까이는 20세기에도 제주는 그런 운명의 수레바퀴 밑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사이에 임진왜란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제주, 간헐적 왜구 침탈

고려시대의 제주는 육지부와는 달리 빈번한 왜구침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육지부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안온한 상태가 유지됐다. 그러다가 1316년을 시작으로 왜구의 제주 침탈이 간헐적으로 발생한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인 세종 때에 들어서 왜구의 제주 침탈은 자행됐다. 당시 제주가 '왜구의 선착장'이 될 수 있는 '요해처'여서 제주도 사방에 방어소를 설치했다. 이는 조선 조정의 제주에 대한 지정학적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1500년대 중반에 들어서기까지 왜구의 본격적인 제주침탈은 발견되지 않지만, 그 위험성은 상존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왜냐하면 삼포왜란이 발발(1510년 4월)한 해에는 '제주는 왜구가 통행하는 곳'이으로 '제주의 방어에 배 이상의 조치를 더해야 마땅할 것'이라는 주장에 따라 제주도 방어를 위해 제주목사를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비록 삼포왜란이 발발한 곳은 육지였지만, 그 여파로 제주 침탈의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위기감과 인식은 제주 현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주에서도 "이곳은 적침을 받을 요충 지역이 매우 많은데… 무략과 담용이 있는 자를 가려서 지키게 하게 하여 방호를 실하게 하소서"라는 상소를 올렸다. 즉,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왜구의 제주침탈과는 달리 삼포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조정의 제주에 대한 관심도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파악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이전까지 왜구는 제주를 비롯한 조선 각처를 노략질의 대상지로 대할 뿐, 군사적·영토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임진왜란의 발발로 중대한 변화를 겪다

임란 발발 초기 제주의 군사적 움직임과 관련된 첫 번째 기록은, 임란 발발 1년 뒤에 제주목사(이경록)가 "군사 2백 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힘을 합쳐 전진하여 토벌하고자 하여 조정의 하명을 청"한다는 참전요청이었다.

이러한 요청은 "탄환 같은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다행히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일개 섬의 힘만으로 잘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주장(主將)으로서 진(鎭)을 떠나 바다를 건너 멀리 천리 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라는 비변사의 반대의견으로 인해 수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제주에서의 참전의지가 수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탄환 같은 조그만 섬'에 '적이 침범'하는 사태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삼포왜란(1510년) 이후 '제주는 왜구가 통행하는 곳'으로 제주 방어를 위해서 '배 이상의 조치'를 취해야 마땅하다는, 조선 조정의 지정학적 제주 중시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군에 점거 당했던 평양과 한양이 수복되고 강화회담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1593년 하반기로 들어서면 제주를 둘러싼 기류에 심상치 않은 변화의 조짐이 발생한다.

임란 발발 당시 3군으로 구성된 일본군은 육지부 침략을 목표로 하여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로 나뉘어 북상했다.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일본의 수군 주력은 해상경험이 풍부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를 대장으로 하여, 김명곤이 열연한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조진웅이 열연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영화 속의 스토리 이해를 위해 첨언한다면, 침략 당초부터 일본 수군의 역할은 병력이나 군수품 운반에 제한된 것이었다. 해전을 통한 조선 수군 격파나 해로장악 같은 목표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3로로 나뉜 일본군은 개전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 시키고 두 달 만에 평양까지 점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명나라 국경으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은 달랐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이 증명하듯이, 일본군의 연패가 이어지고 있었다. 임란 초기의 옥포해전을 필두로 한산해전 대패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 장수들에게 조선 수군, 특히 이순신과의 해전 중지를 명한다.

이 시점부터 일본의 수군은 이순신에게는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이순신의 도발에 일본 수군이 육상에서만 응전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일본의 수군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싸우고 있었던 셈이다.

제주, 위기에 노출되다

이후, 일본이 제주를 주목한 것은 1593년 6월에 들어서다. "평양과 전라에서 실패한 것을 깊이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배를 모아 식량을 운반하고 강병을 더 조발해서 1593년 7월 중으로 2기로 나누어 1기는 제주로부터 곧바로 전라도로 침범해가고, 또 다른 1기는 경상도로부터 곧바로 경기도로 들어가 동서에서 분탕질하며 이내 합세하여 서쪽으로 침략한다"는 것이었다.

'평양과 전라에서 실패해서 부끄럽고 한스럽다'는 정보의 실체는 평양성 퇴각과 이순신에게 빼앗긴 남해안 제해권으로 인한 전라도 진입 실패를 가리킨다.

특히 침략군이 평양 이북으로 북진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연해를 장악하고 있는 이순신의 수군 때문이었다. 이들 때문에 '서해안 진출로'가 차단되면서 '군량을 나르는 해로가 막혀 있'었다.

이 때문에 남해안을 경유하는 침범로를 포기하고 제주를 전라도 침범을 위한 우회경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제주가 일본의 공략 대상지로 거론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주를 경유해서 전라도로 침범한다는 정보와는 달리 제주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군의 패전과 명나라 사신 심유경이 등장하는 강화회담이 개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593년 10월, 조선 조정에서는 제주의 지정학적 위상에 대해서 논의되고 있었다. 선조가 한양으로 환궁하여 정국의 안정을 되찾던 때의 일이다. 이조판서(김응남)는 선조에게 "제주에서 중국 강남을 가려면 매우 멀지만 전라도에서 요동에 가기는 매우 가깝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중국 공략이 가능한 거점으로 제주에 대한 지정학적 인식이 처음 거론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수로 조사와 왜정 정탐을 담당했던 명나라 장수(장홍유)는 제주와 중국 강남의 거리를 '매우 가깝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제주가 '왜적의 보급로' 차단은 물론이고 대마도를 공략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정학적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명나라는 제주를 중간거점으로 삼아 이순신과 협공체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이순신도 명의 계획에 '거짓은 아닌 것' 같다며 일정한 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도 제주를 '반드시 각별히 경리'하라는 위기의식을 갖기에 이른다. '탄환 같은 조그만 섬' 제주에 대한 일본의 공략을 경계하는 조선 조정의 우려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바로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이었다.

"다른 곳은 다 거론할 수 없거니와 제주가 특별히 염려됩니다. 이곳은 서남쪽으로 바다를 정면하고 있고 또 중국과 서로 가깝습니다. 왜적이 만약 이곳을 점거하게 되면 비록 천하의 힘으로 탈취하려 하여도 탈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조도 이에 동의하고 나선다.

"적이 만일 제주를 빼앗아 점거한다면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에 유성룡은 "적이 만약 제주에 웅거하게 된다면 비단 우리나라가 당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중원(中原)에도 또한 순식간에 배를 타고 이를 수 있습니다. 적이 이러한 형세를 모두 알고 있으니 더욱 염려"된다고 답하고 있다. 조정이 이순신에게 "제주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이처럼 제주는 일본에서도 산동반도·요동반도 일대를 공략하기 위한 거점으로, 명나라에서도 일본을 견제하고 공략할 수 있는 거점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풍전등화의 섬, 전략의 한가운데 서다

제주가 위란지세에 처하기 시작한 것은 정유재란이 발발한 이후였다. 경상우도 병사(兵使) 김응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50만의 군대를 일으키면서 우선 30만의 군사를 먼저 내보내 전라도·제주도 등을 유린하고, 의령·경주의 산성은 기필코 공파한 뒤에야 그만둘 것인데, 6∼7월 사이에 발동 시킨다"는 비밀장계를 보내온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8월 1일에 곧바로 전라도 등지로 들어가 곡식을 베어 군량을 삼고 산성을 격파"한 다음, "이어 제주도를 치라"는 것이었다. 제주 공략이 본격적인 전략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대로 진행된다.

이순신은 모함을 받고 파직된 끝에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때(1597년 7월)였다. 절영도와 가덕도에서는 원균의 조선 수군이 패배했고, 칠천량해전에서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바로 이 칠천량해전에서 장수 배설(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탈영)이 이끌고 생환한 선박이 바로 이순신의 명언으로 전해지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의 그 전선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순신을 향해 큰 소리로 수군을 포기하고 권율 장군의 요청대로 육전에 대비하자고 주장하던 장수가 배설이다.

어쨌든 칠천량에서 승전하여 해로를 확보한 일본군은 육로 '전라도를 향해 진격'해 '각처의 산성을 공파'하고 결국 전라도의 주요 거점들이 점령(남원성과 황석산성 함락) 당한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구상대로라면 다음 단계는 "이어 제주도를 치라!"는 하달이다. 제주도로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아, 명량해전!... 섬의 운명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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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0월, 전라우수영을 탐사했을 때의 필자. ⓒ이규배

12척의 전선을 토대로 수군 재건에 성공한 이순신! 여기서 바로 영화<명량>이 시작되는 셈이다. 육상에서는 이미 전라도의 거점이었던 남원이 점령당한 상태였다. 바다에서도 절영도, 가덕도, 칠천량에서 원균의 수군이 괴멸당한 뒤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군은 거칠 것 없이 남부지방과 남해안을 유린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생령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했겠는가!

화급한 조선 조정은 모든 병력을 권율 휘하에 두고 수전 포기 전략으로 나섰다. "바다가 조선입니다!"는 이순신의 절규는 이래서 나온 것이다. 남해안의 최서단인 진도 일대가 뚫리면 서해안을 통해 한양이나 개성, 평양 방면으로 침략군이 쏟아져 들어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주도는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게된다.

그러나 단 한 차례도 이순신을 이겨보지 못했던 일본의 수군 장수(도도, 와키자카)들은 원균이 패사한 직후 현직으로 복귀한 이순신의 전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의 수군 장수들이 쉽사리 병사를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였다. 여기서 일본의 해적 수괴 구루지마(류승용 분)가 등장한다.

침략군이 서해로 본격 진출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 그 싸움이 바로 명량해전이었다. 수 백 척에 이르는 일본의 대규모 수군이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바로 명량에서의 수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선시대 역사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일본 수군이 진출한 최서쪽이 바로 명량이다. 이 명량이 뚫리면 서해는 물론이고 조선도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는 셈이었다. 일본 장수 도도(김명곤 분)가 내뱉은 포스터의 카피처럼 "내일 아침, 조선의 운명은 바뀔 것이다"라는 호언장담은 빈 말이 아니었다.

물론 "제주를 공략하라!"는 한 마디 명령과 함께 제주 섬도 초토화가 됐을 터였다. 여기서 일본 수군은 물론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야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명량해전이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나 처절했던 해전을 영화를 통해서 상상할 도리밖에 없다. 우왕좌왕하는 조정, 잘못된 전략, 무능한 장수들, 겁에 질린 군사와 민초들, 게다가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다 말아먹고 단 한 척도 남아 있지 않던 거북선! 도대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던 호재, 남은 건 오로지 하나, 이순신의 "사즉필생 생즉필사(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의지뿐이다.

그러나 침략군은 명량해전(1597년 9월 16일)에서 참담한 대패를 당한다. 그 여파로 일본 수군은 이순신에 의해 남해안 제해권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른다. 그리고 이순신이 통영까지 나아가게 되자, 일본 수군은 끝내 바다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 일본 수군은 이순신과 대치하며 남해안 공방전에 모든 전력이 묶이게 되고, 이른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달한 바 있는 '제주공략'도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417년 전에 있었던 명량해전은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의 '제주공략'이 결정적으로 좌절된 분기점이 됐던 것이다.

영화 <명량>의 포스터에는 "역사를 바꾼 가장 위대한 전쟁"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명량은 "제주의 운명을 바꾼 가장 위대한 해전"이라 일컫기에 충분하지 아니한가?

그리고 이로부터 1년 뒤, 드디어 침략군의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음을 맞이하여 일본군도 철군에 돌입한다. 다행히 제주는 일본 침략군으로부터 해방된다.

명량해전! 그리고 이순신!

제주 역사가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그리고 제대로 기록되지도 않은 이 이야기는 제주의 과거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제주에는 남해안 곳곳에 눈에 띄는 그 흔한 이순신 사당도 하나 없지만. / 이규배 제주국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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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전남 해남의 전라우수영 경내에 있는 "이충무공 명량대첩비"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곳으로, 1597년 9월 15일 충무공이 이곳에서 삼도수군을 정비하여 다음날 명량대첩을 이룬 곳이다. 1688년(숙종14) 충무사가 건립되었으나, 일제 때 철폐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2009년 10월, 전라우수영을 탐사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규배

*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의 협약에 의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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