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모두 함께하면 더 좋은 한가위

어린 시절 추석은 나랑 별 상관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추석이 뭔지 잘 몰랐고 중·고등 시절에는 공부하면서(했다기 보다는 대의명분이 그랬다는 것)보냈다. 또한 그때는 사춘기 소녀가 누구나 그렇듯 ‘바글 바글 모여서 하는 행사’를 팔짱끼고 눈으로 흘깃거릴 때였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깨송편’ 이다. 그때는(지금부터 30여 년 전) 거의 집에서 떡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추석 떡은 깨와 설탕을 고물로 넣은 송편, 내 주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깨송편을 하는 집은 이모네였다. 추석 오후, 이모네 집에 놀러가 ‘말랑말랑’에서 ‘약간 굳은’으로 넘어가는 깨송편을 한 입 먹는 순간이 참 좋았었다.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도 다니면서 결혼적령기도 넘긴(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들이 말하기를) 나에게 추석은 그냥 긴 연휴였다. 이때 나의 목표는 휴가를 잘 사용 해 가능한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젊었을 때라 몸으로 많이 해결해서 돈은 많이 아낄 수 있었지만 제한된 시간 때문에 늘 아쉬움으로 마무리 되던 여행이었다. 여행을 안갈 때는 하루 종일 비디오를 보거나 장편소설을 읽으며 보냈다. 이때는 차례 준비를 거들었다. 당연히 나는 거드는 사람이고 주최자가 아니었으므로 특별히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어린 시절이나 처녀 시절 공통점이 있다면 추석을 준비하는 어른들이 모두 내겐 배경화면이었다는 것이다.  추석 당일의 행사를 위해 팔 걷어 부치고 모든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정작 제를 치르는 그 순간엔 아무도 모르게 뒤편으로 물러나 완벽하게 배경으로... 정지화면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정지된 화면이 다시 플레이 되는 순간은 제가 다 끝나는 순간이었다. 정지화면의 마법에서 풀린 사람들(할머니 큰어머니 작은 어머니 어머니 등)은 신속하고 빠른 동작으로 음식을 차려내고 다시 걷어내고 뒷정리를 했다. 그 배경화면에서 빠졌던 나는 그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당연히, 너무 쉽게 보였기에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 별거 아닌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별거 아닌 일’이 ‘별 일’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내가 그 배경화면의 일원으로 편입되던 순간이었다.

결혼 직후 처음 맞은 추석. 전날에는 음식 준비를 해야 했고 당일에는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다. 오래된 관습이라는 감독이 내린 지시에 따라 언제 움직이고 언제 멈춰야 하는 가를 잘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었던가.

아직 새댁의 분위기가 조금 남아있던 첫 추석.
생각 없이 날름날름 집어먹었던 여러 가지 전들이 몇 차례의 과정을 겪어야 완성품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명절 때  지천으로 널려있던 적갈(산적의 제주어)들이 꽤 많은 손길을 거쳐야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 다 좋아. 추석 전날 만드는 것은 그렇다 치자. 모든 행사가 무사히 마무리되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이때의 감정은 서양말을 빌자면 ‘오 마이 갓(Oh my god)’ 이거나 ‘읍스(Oops)’ 였다. 내 감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설거지는 그대로 내 눈앞에 있었으므로 차곡차곡 해나가는 수밖에.

이러니 어찌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절’이 될 수 있겠는가.
그저 무사히 잘 지나가 추석 뒷날 하루 종일 잠자고 영화나 보는 것이 젊은 새댁의 추석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참 재미있는 것은 보이게 보이지 않게 자꾸 변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어머니의 보조 역할로 시작했던 차례음식 준비의 내 역할이 해가 갈수록 커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에 우리 시어머님이 내게 묻기 시작한다. 
“이거 양념 좀 하라. 개고 콩나물은 이 정도면 될 거라이”, “이건 어떵허카”
처음엔 낯설고 당황했지만 갈수록 대답은 쉽게 나왔고 이젠 한 발 더 나아가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랑 동태말린 것 양념 행 먹게 맙씨. 세화장이 싸댄 허멍 예. 양념은 나가 허쿠다.”
“아니여, 경 안 해도 세화장에 가 봐신디 올 여름엔 비 많이 왕 못 말렸댄 해라.”
이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화가 부드럽고 편해진 것은 물론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 쌓인 정 때문이다.

이제 많이 용감해진 며느리는 몇 가지 시도를 해본다.
배경화면속의 등장인물을 늘려가는 것이다. 일손이 많을수록 일이 빨리 끝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모든 것이 넉넉한 추석엔 배경화면속의 여자들도 빨리 일을 마무리 하고 두 다리 뻗고 싶음을 아시는 지.
먼저 미성년자여서 좀 더 말이 먹히는 아들을 부른다.
“아들, 나중에 부인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와서 여기 그릇 좀 닦아.”
그러니 아들이 그릇을 닦는다.
다음은 남편. 남의 편이 아닌 내편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말하지 않고 분위기만 돋아준다.
그러니 내편인 남편이 와서 설거지를 한다.

아직은 여기까지다.

사실 지금 난 명절에 대한 스트레스나 두려움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온라인 고등학교 동창모임에서 한 친구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젊었을 때는 명절이 큰 부담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명절로 인해 생기는 희노애락이 싫지만은 않아. 부모 입장에서는 시집 장가간 새끼들도 보고, 용돈도 생기고, 크크... 하지만, 우린 아직도 힘만 들지? “
힘만 들지, 라고 마무리 됐지만 그 다음의 말을 괄호 안에 넣는 다면(그래도 이젠 할만 해)가 아닐까?

자, 그럼 여기에서 또 생각.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나랑 상관이 없던 추석 명절이 나랑 상관있는 명절로 넘어가면서 힘든 일이 할 만 한 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이들에게만 자기주도 학습을 시킬 것이 아니다. 명절 때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기주도로 명절을 치르면 어떨까.
배경화면을 싸악 없애버리고 모두가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되는 것이다.

추석 전날엔 할머니 어머니 며느리만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딸 모두 명절을 준비하는 것이다. 청소도 같이, 음식 준비도 같이.. 그러면서 하하 호호 웃음도 같이.
명절날도 같이 제를 준비하고 제가 끝난 후 설거지도 같이 하고.
아직은 이런 일이 낯익은 풍경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알겠는가, 앞으로 30년 뒤면 이루어질 수도 있는지.
그때 이루어질 일이라면, 좀 앞당겨 이번 추석에 연습 삼아 해봄은 어떤지.
한 번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렇게 추석 명절이 모두에게 ‘상관있는’ 일이 된다면 누구나 아는 이 말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상상해 보자.
세계가 놀랄 만큼 민족대이동을 하는 우리의 큰 명절 추석을 대가족 종합예술축전으로 만들어 보자. 구성원 모두가 등장인물로 참여하는 축제. 집안의 어른들이 감독하고 집안의 중년세대가 주역을 맡고 집안의 어린이들에게는 단역이나 소품 준비를 맡긴다면? 무대 준비는 같이하고 끝나고 마무리도 같이 하고. 그렇게 가족들만의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면 누구에게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비로소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자기 실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로 나의 희망이 더 많이 담겼다. 내가 못하는 부분도 많다,
이번 추석 전날 , 늘 나를 도왔던 허운데기 공주님은 친구들과 만나 숙제해야 한다며 빠지고, 기달왕자님도 또 친구들과의 만남을 예약하셨고. 남편도 사무실 잠깐 들려야 한다며 빠지고.
그래서 나 혼자 간다.
올해는 이렇지만 내년에는 내후년에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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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섬(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비장하게 새해 결심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추석이다.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여 기뻤던 일, 슬펐던 일 함께 나누고 오해는 풀고 배려와 이해를  더하는 큰 추석이 되길 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가족의 배경화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배경화면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더 주는 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밝고 환한 둥근 보름달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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