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32) 민족주의민주전선 제주도위원회 부위원장 김시범

김시범과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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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범.
김시범(金時範, 1890~1948)은 조천리 2828번지에서 김진호(金振鎬)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3녀는 독립운동가 김평원(金平遠)과 결혼하였다. 조천만세운동은 휘문고보에 재학중인 김장환(金章煥)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김장환은 김시범· 김시은의 조카이다. 조천지역에서는 김시범· 김시은(金時殷) 등이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주에 유배온 최익현(崔益鉉)으로부터 척사론(斥邪論)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유림세력이었다.
 
김시범은 김시은 · 김장환과 함께 미밋동산에서 거사발의를 하고 동지규합에 나섰다. 규합된 인원은 14명의 거사동지였다. 이들은 김시범· 김시은· 고재륜(高載崙)· 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 백응선(白膺善)· 김장환·  박두규(朴斗圭)· 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 김경희(金慶熙)· 김필원(金弼遠)등이다.
 
거사는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네 차레에 걸쳐 전개되었다. 3월 21일은 만취(晩翠) 김시우(金時宇)의 소기일(小忌日)인데, 시위지역도 조천리에서 함덕리, 신흥리, 신촌리로 확대됐고, 처음 150명이 모였고 500여명의 주민이 따랐다. 제주성내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강행하였고, 신촌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엿으며, 13명이 연행되었으며, 이중에는 14인 동지 가운데 김시범 · 김시은 ·김용찬· 고재륜 ·김형배· 황진식· 김장환· 김경희 ·김희수 등 9명이 포함되었다.
 
3월 22일 2차 시위는 200여명이 참여하여 전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한 박두규와 김필원이 연행되었다. 3차 시위는 100여 명이 조천오일장터에서 함덕리로 시위행진을 강행하엿는데, 함덕리에 이르자 800여 명의 주민의 합세로 점점 확산되었는데 이문천 백응선 등이 연행되었다. 4차 시위는 조천오일장날이었다. 1500여명의 시위군중이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김년배 등이 검거되어, 결국 14인이 모두 체포되는 결과를 날았다.     
 
조천만세운동으로 23명이 194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형을 선고 받았으며, 14인 동지가 공소를 제기하여 동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김시범은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시범·김시은 징역 1년, 황진식· 김장환·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박두규· 김연배 등 7명은 징역 8월, 고재륜 ·김형배· 김경희· 백응선 등 5명은 각각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핵심인물 14인은 옥고를 마친 후 귀향하여, 1921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다. 고문과 옥고로 인하여 1920년 3월경에 사망한 백응선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고재륜은 서울중동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김시범과 김연배는 함께 사숙(私塾)이나 야학을 통해 후생들을 가르쳤으며, 박두규는 조천사립학교 교사로, 김시은과 김형배는 조천노동단을 조직하였으며, 김장환은 동아일보 기자로 각기 활약하였다. 조천 만세운동의 여파는 곧바로 서귀포로 전해져, 서귀포 삼매봉 만세운동과 서귀포 해상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제주해녀 항일운동 등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정부가 독립유공자와 4·3희생자 선정 과정에서 사상검증의 이중잣대를 사용해 독립운동가 후손을 두 번 울리고 있다. 1919년 3월 제주에서 벌어진 첫 만세시위인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년 동안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김시범 선생. 그러나 후손들은 광복절만 되면 고개를 숙인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심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지역에서 독립운동가로 존경을 받았지만,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잇따라 탈락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심사보류 이유도 공식적으로 전달 받지 못했다. 해방이후 사회주의 계열에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비공식적인 설명일 뿐이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시범 선생은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초대 조천면장을 지냈고, 당시 전국단위 좌익계열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제주도 부의장에 영입됐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해 김시범 선생을 4·3사건희생자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는 그동안 지방경찰청에서 제출한 해방 이후 좌우익 대립에서의 자료를 근거로 독립유공자의 해방 이후 행적을 검증 하고 있지만 정부산하 4·3중앙위원회는 좌우익 대립으로 희생된 도민 모두를 희생자로 인정하고 있다. 결국 독립유공자와 제주4·3희생자에 대한 정부의 이중잣대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의 가슴을 두번 울리고 있다.’- 제주CBS 김대휘 기자(2007년 8월 15일)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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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항일기념관.

민전 주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 

‘1.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위 속개촉진 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며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함.  2.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기본과업에 매진할 것. 3.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재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여 검거․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4.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주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5.군정 고문기관 혹은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  1946. 7. 25’-민주주의민족전선 좌우합작 5원칙

‘3․1사건에 대한 군정재판이 중지되고 동시에 조선인 법정에 이관케 됨으로써 일반의 비상한 주목과 각광을 일시에 받게 된 제주검찰청에서는 동 사건을 시급히 완결하고자 지난 16일부터 본격적으로 취조를 개시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 있거니와 18일에는 경찰로부터 송치된 사건은 태부분(殆部分)의 취조가 일단락을 보게 되어 동일에 이도백(李道伯․서귀) 김시범(金時範․조천) 양씨를 비롯한 29명의 피고에 대하여 약식재판으로써 각각 벌금형(최하 5,000원, 최고 1만원)을 구형하여 석방하였다는 바 앞으로도 죄상이 경한 자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조처가 있을 것으로 보이며 탐문한 바에 의하면, 기타 피고에 대한 공판은 래(來) 21일부터 개정할 예정이라는데 늦어도 22일부터 개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제주신보 1947년 4월 20일

조국이 해방되자 김시범은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초대 조천면장으로 재임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 위원장, 1947년 7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개편될 때 새로운 의장에 박경훈(朴景勳)을 추대, 그는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제주도(濟州島)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10일 결성되었다. 건준의 지방조직이 ‘인민위원회’로 불리게 된 것은 중앙의 건준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창건을 선언한 이후부터였다. 제주도 건준조직은 1945년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초기 읍‧면의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위원장들은 대체로 이념과 무관하게 지역 원로들이 추대되었으며, 김시범은 조천면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치안활동 이외에도 농사법에 대한 교육, 학습회, 체육대회 등을 개최했고, 마을마다 야학을 통해 문맹퇴치 운동도 전개하였다. 또한 대정중학원, 조천중학원 등 학교설립 사업도 추진했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 결성 대회는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읍·면 대의원과 사회 단체 대표 315명, 방청객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열렸다. 결성 대회에서 안세훈, 이일선, 현경호 등 3명이 의장단에, 김택수, 김상훈, 김용해, 오창흔 등 4명이 부의장단에 추대되었다. 안세훈은 당시 도민의 신임을 받는 원로로 역시 조천 출신이다. 
 
3.1절 기념 시위사건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민족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는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3·1절 기념 시위 사건에 대한 항의가 총파업으로 이어지고, 미군정은 대규모 검속을 벌여 현경호 의장 등 간부 다수를 검거하여 초기부터 시련을 겪었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는 7월에 대폭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던 박경훈을 의장으로 추대하였고 항일운동가 김시범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사무국장에는 고창무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8월 15일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검거 선풍에 따라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의 박경훈 의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간부가 구금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협력관계도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첨예한 대립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도민전(島民戰)에서는 활동을 개시한 후 그 내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의장에 전 지사 박경훈(朴景勳)씨, 부의장에 김시범(金時範)씨를 추대하고 상무위원회도 결원 중인 사무국장에 고창무(高菖武)씨, 차장에 김창순(金昌淳)씨, 선전부장에 김행백(金行伯)씨, 조직부장에 문경원(文景源)씨를 선정하여 전 부서 결정도 완료되어 민주역량을 집결하고 임정수립의 전제인 미소공위에 적극적인 협력으로써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케 되었다는데 전지사 박경훈씨의 정계 등장은 의외의 일이었고 앞으로의 동씨의 활약은 자못 주목되는 바다.’-제주신보 1947년 7월 18일

‘금반의 파괴음모 사건에 대하여 제주경감청장 김영배씨는 거(去) 14일 「도민에 고함」이라는 제하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중략).....여기 있어서 조국의 광복과 30만 도민의 행복을 위하여 본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서의 과거 수십차에 긍(亘)하여 본관이 도내를 순회강연하며 매국노 도배의 모략선전에 빠지지 말고 경거망동치 말라고 도민 제위에게 간곡한 부탁과 아울러 충고를 올리는 동시에 만약에 이 충고와 부탁을 불문하고 그릇된 사상을 버리지 않고 그릇된 행동을 취하는 때에는 국립경찰로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하루바삐 달성하기 위하여 치안확보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조만간 반동분자 숙청에 추상(秋霜)의 단(斷)을 내릴 것을 성명하여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매국노 도배의 모략선전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사상에 침윤되어 가는 수가 일증월가(日增月加)하여 가는 경향이 불무(不無)할 뿐만 아니라 2월 8일부터 우금(于今)까지 반동배들의 망동건수를 보면 함덕, 성산포, 조천, 대정, 하도, 삼양, 두모를 순위로 시위행렬과 불온삐라를 첩부(貼付)하였으며 안덕면 사계리에서는 경관 납치사건이 발생되었으나 민속(敏速)한 순찰경관대의 응원으로 난(難)을 면하였으며 또는 화북, 삼양 등지로부터 약 100명의 관공리 습격대가 제주읍내에 투입, 일면 도청창고에 방화를 하며, 일면 산지출장소를 습격하려고 돌진하는 바를 발견, 경관대를 현장에 급파, 폭도를 진압한 사건 등이 빈발하여 부득이 금반의 경찰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자주독립 전취에 방해를 하며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매국노 도배 등을 소탕하기 위하여 철추의 단(斷)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소련을 조국으로 하는 매국노 도배를 제거함이요, 조국의 장래를 위하여 함이니 선량한 도민제위는 생업에 안심하여 종사하며 종(從)하여 경찰을 신뢰하여 우리가 지도하는 바를 명심 준수하며 차후 추호라도 매국노 도배의 감언이설에 속지 말고 자주독립을 전취하는 도정에 귀중한 차(此) 시기를 망동함이 없이 자중하여 주시기를 지금 또다시 한번 충고하는 바입니다.”(次號 계속)‘-제주신보 1948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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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만세운동 비석- 3·1운동 당시 구속된 인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조천리와 제주4·3

‘아무튼 무장대가 기습전을 벌여 물러간 뒤 마을에서는 토벌대의 보복학살극이 끝없이 벌어졌다. 토벌대는 조천면 여성동맹위원장 김옥희(金玉姬)등 여맹원 2명을 잡아 고문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이들의 목을 잘라 시가행진을 했다. 김옥희는 1919년 조천만세운동과 1930년대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김시범(金時範)의 딸이었다. 김시범은 해방 후 조천면 인민위원장과 초대 조천면장을 역임했는데 그 역시 6·25가 발생하자 토벌대에게 처형된다.’-『4·3은 말한다<4>』 424쪽

‘【제주도 발 조통】동란의 화는 결코 이 섬의 평화만을 깨뜨리고 씻어가지는 않았다. 빈부의 차를 모르고 특수계급을 볼 수 없는 균등한 제주도의 자제들은 누구나 배움을 즐길 수 있는 환경에 있다. 더욱이 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열성은 육로에서 볼 수 없는 공동부조로 1부락 1국민학교, 1면 1중학을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간 3개월의 참혹하고도 치열한 동란의 불길은 배움의 집을 병정의 둔영(屯營)으로 변하게 하였고, 민정(民情)의 불안으로 학교란 학교는 거의 다 폐문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기자단 일행이 방문한 이 곳 북촌(北村)국민학교의 아담스럽던 돌담은 어느덧 모진 비바람에 허물어져가고 돌보지 않는 교실에는 산산편편이 흩어진 책상 걸상이 어린 주인공을 잃어버린 채 음산하게 쭈그리고 있다. 교정에는 잡초만이 무심하게도 무성하고 군데군데 피어나는 코스모스가 임자 없는 교정을 홀로 지키고 있다. 조천(朝天)리의 학교에도 국방경비대가 숙소 삼고 주둔하고 있을 뿐 아동의 그림자는 찾아볼 바 없다. 학교를 지키는 두 명의 선생에게 수업상태를 물으니 “교원이나 아동이나 공포에 싸여서 나오지를 않고 있소. 가정교육의 철저한 소치인지 어린 아동까지 ‘산사람’들의 활동을 보조하고 있소”하고 말한다. 확실히 이변 있는 옛날의 도원경에 홀로 화를 피할 수 있던 것은 허물어진 돌담 밑에 무성한 잡초뿐이더냐!‘-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20일

‘【제주 2일 발 합동】 제주 경비사령부에서는 지난 22일부터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하오 8시부터 다음날 상오 5시까지로 변경하고 위반자는 총살에 처한다고 포고한 바 있는데 지난 24일 하오 9시경 도내 애월면 □□리 고창무(高昌武․30․목공)와 조천리 문홍목(文洪睦․21․농업) 양인은 조천리 김만여(金萬女) 집으로부터 귀가하는 도중 순찰하는 경관에게 사격을 받아 전기 문(文)은 즉사하고 고(高)는 중상을 당하였다 한다.’-독립신보 1948년 5월 4일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 대부분은 해방 이후에는 좌익운동을 주도했다. 제주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남로당제주도당 위원장을 역임했던 독립운동가 안세훈도 조천리 출신이었다. 1947년 6월~7월 조천중학원 학생들에 의한 삐라 살포사건이 발생하고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 연행된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고문 치사사건이 발생한다. 조천지서와 면사무소가 있어서 무장대의 공격이 잦았고, 우익인사들이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피해를 당한 우익인사들이 어김없이 보복 공격을 감행했는데, 보복 대상은 주로 조천리에서 가족이 없어진 도피자 가족이나 중산간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1948년 11월 4일과 11월 11일 무장대는 조천리를 연거푸 공격하였다. 면사무소를 불태웠고 일부 우익인사들을 살해했다. 무장대가 기습전을 벌여 물러간 뒤 마을에서는 보복학살극이 벌어졌다. 토벌대는 조천면 여성동맹위원장 김옥희(金玉姬, 40대)등 여맹원 2명을 잡아 고문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이들 목을 잘라 시가행진을 했다. 김옥희는 김시범의 딸이다. 조천리에서 거리를 걷던 주민 2명이 경찰의 총격을 받아 문홍목(21)이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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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밭.

■조천지서 앞밭 : 1948년 12월부터 주민을 학살하던 장소다. 신안동·양천동 등 산간마을 뿐만 아니라 대흘리·와흘리 등 중산간에서 소개 온 주민들 중 도피자 가족을 골라내 집단학살했다. 1949년 1월 13일부터 30여명이 집단 총살됐다. 또 동년 2월 1일 양천동· 대흘리 주민 등 60여명을  집단총살했다. 이날의 학살은 주민들을 불러모아 총살장면을 공개했다. 어린이 노약자를 불문하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있었다. 대흘리 부성방(남, 02년 88세)이 소개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친 김달현(58세), 아들 부시길(12세), 딸 부을림(14세), 부신순과 제수 김재순(32세), 조카 두 명(6세, 4세) 등 일가족 8명이 총살되었다. 또 양천동 신태호(남, 03년 74세)도 가족들이 조천리 집단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부친 신갑권(41세), 송매화(40세), 이름도 모르는 두 동생(8세, 4세)을 한꺼번에 잃었다. 조천지서 앞밭 총살 때는 여자 민보단원들을 동원해 죽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조카가 삼촌을 향해 창을 겨누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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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리 집단수용소 옛터.

■조천리집단수용소 옛터: 정미소로 쓰였던 약 40~50평 규모의 건물이다. 1948년 11월 하순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면서 주민들이 해변마을인 조천과 함덕으로 피난했다. 양천동·신안동· 봉소동은 물론, 대흘·와흘 등지의 도피자가족도 수용되었고, 이웃 해변마을인 신촌·신흥 등지의 도피자 가족도 수용했다. 그 숫자는 2~3백여명. 경찰에 돈을 주어 수용자를 빼내려다 발각되어 총살당하기도 했다. 특히 수용됐던 젊은이들은 수시로 선별 총살했고, 어린이 노약자를 포함한 도피자가족 30여명이, 1949년 1월 13일에 또 60여명이 1949년 2월 1일에 조천지서 앞밭에서 집단총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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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파출소-4.3당시 조천지서였고, 우익인사들의 활동공간이었다.

■조천지서 : 1903년부터 연북정에 경찰관 주재소가 있었고, 1933년부터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1945년 10월 국립경찰 창립과 더불어 조천지서로 발족했다. 4·3당시 경찰 및 응원대의 활동 근거지가 됐으며 피의자에 대한 취조 및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1948년 3월 6일 김용철(조천중학원 2학년, 21세)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가 지서를 습격했으나 선제사격으로 피해가 없었다. 다음날 무장대에게 재습격 당해서 교전 중 1명의 무장대원이 사망하고 2명의 경찰관이 부상당했다. 1949년 1월 13일과 2월 1일,  도피자가족 90여명이 지서 앞밭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조천중학원 옛터 : 조천중학원은 지역유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 1946년 3월에 설립된다. 5개 학급에 1,2학년 20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당시 교사로는 현복유(학원장, 국어), 김민학(수학, 과학), 김동환(영어), 이덕구(사회, 체육), 김석환(역사), 김응환, 한평섭 등이 근무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 등지에서 공부한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교사들은 4·3와중에 대부분 흩어지게 된다. 이덕구는 해주대회 참가차 제주를 떠난 김달삼의 후임으로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된다. 1947년 3·1절 시위 및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청의 탄압을 받아 사실상 수업이 어려웠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도 심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민애청 등의 조직원이 되었고 탄압을 피해 입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현하 본도에 준동하고 있는 남로당 계열의 악렬분자 등은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인민 살상, 파괴, 방화(주로 경찰관 및 우익요원) 등을 연일 감행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있다. 연(然)이나 국립경찰은 남로당 계열의 악렬분자의 준동을 발본색원할 만단의 준비와 용의를 □□하고 있다. 도민제위는 안심□□하여 총선거 실시에 협심 동력하라. 금반 남로당 계열의 악렬분자 등의 감행으로 인한 본도 전역의 피해상황을 종합하면 좌기와 여(如)함. (自4월 3일 至4월 7일) (1) 4월 3일 △모슬포 일반측 중상 1명, 가옥파괴 1, 방화 1 △외도 경찰측 사망  1명 △화북 경찰측 사망 1명, 방화 1, 일반측 사망 2명, 가옥파괴 1 △조천 경찰측 중상 2명, 경상 1명, 가옥파괴 1, 일반측 행방불명 5명, 폭도측 사망 2명 △대정 경찰측 중상 1명 □□□ 경찰측 중상 1명, 일반측 사망 3명, 중상 12명, 경상 12명, 행방불명 1명, 가옥파괴 4, 방화 3, 폭도측 사망 2명 △세화 경찰측 중상 1명 △남원 찰측 사망 1명, 일반측 사망 1명, 중상 2명 △한림 경찰측 사망 1명, 중상 1명, 일반측 사망 1명, 중상 2명, 경상 4명, 가옥파괴 6 △함덕 경찰측 행방불명 2명, 일반측 행방불명 4명 (2) 4월 6일 △이호 일반측 사망 2명, 중상 5명, 경상 3명, 가옥파괴 1 (3) 4월 7일 △저지 경찰측 방화 1, 일반측 사망 3명, 중상 2명, 가옥파괴 1, 폭도측 사망 2명 경찰측 계 : 사망 4명, 중상 6명, 경상 1명, 행방불명 2명, 가옥파괴 2, 방화 3 일반측 계 : 사망 12명, 중상 24명, 경상 19명, 행방불명 10명, 가옥파괴 15, 방화 4 폭도측 계 : 사망 6명 총계 : 사망 22명, 중상 30명, 경상 20명, 행방불명 12명, 가옥파괴 17, 방화 7’-제주신보 1948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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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범의 재판기록부와 수형기록부

‘지난 24일 하오 8시경 제주서 관내 애월면 유신동 경찰관파견소 동남방 1km지점 속칭 ‘정기’ 부근 나락밭에 무장공비 8명이 출현, ‘벼’를 잘라가려는 것을 부근 밭에 3분대로 산재하여 잠복근무 중이던 유신파견소 대원과 제주서(濟州署) 사찰공작대원들이 발견, 이를 포착하여 치열한 집중사격전을 감행하자 무장공비들은 혼비백산하여 시체마저 유기한 채 분산도주하였다.

동(同) 사격전에서 여공비 김위순(金位順․당 23년․제주읍 이호리 출신․2년전 납치된 자) 1명과 남공비(성명불상) 1명을 사살, 남공비 임봉하(任奉河․당 16년․조천면 조천리 출신․거(去) 10월 2일 조천면 신촌리 침입시 납치된 자) 1명을 생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사살된 전기(前記) 여공비는 놈들이 유기하였으며 남공비는 도주시 운반하여 갔으나 생포된 전기(前記) 임(任)이 25일 진술한 바에 의하여 사살로 확인된 것이다. 금반(今般)의 전과를 거두기까지 당지(當地) 경찰국에서는 작금의 공비 야외추곡투쟁에 대비하여 전도적으로 특수사찰공작을 수행하던 중 거양(擧揚)한 수훈인 것이며 앞으로 신임 이(李)국장의 작전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제주신보 1952년 10월 26일

‘작보(昨報)한 경찰전투대 주작(朱雀)중대의 전과가 작 27일 전방 전투사령부로부터 보고되어 왔는데 사살 4명, 생포 1명, 총기 노획 2정 등의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있는데 사기충천한 아 전투대에서는 계속 □□전을 전개하고 있다. 사살된 잔비는 특별대책(特別隊責) 김호현(金鎬鉉․조천면 조천리 출신․당 21년․舊匪)과 김형봉(金亨奉․조천면 조천리 출신․당 22년․구비), 강석종(姜錫鐘․제주읍 봉개리 출신․당 21년․구비), 최봉근(崔奉根․한림면 귀덕리 출신․당 29년․구비)의 4명이고 생포된 것은 여비라는데 작전상 관계로 신원이 발표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사살을 확인하기 위하여 4명의 잔비의 두부(頭部)는 전투현지에서 전방사령부에 보내지고 있으며 아방 피해는 없다. 노획품은 다음과 같다. △44식 총 1정 △M2 카빈총 1정 △실탄 55발 △30발 탄창 1개 △한국제 경찰관 동복 상의 1매 △불온문서 다량’-제주신보 1953년 4월 28일

이선교의 ‘제주4·3사건의 진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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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교.
‘노무현 정부에서 작성한 제주4·3사건잔상조사보고서는 허위보고서이며, 희생자 심사도 허위로 하였다,’- 이선교 저 『제주4·3사건의 진상』 표지글

‘한국은 낮은 단계의 공산화가 된 좌파정부에서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제주남로당 좌파 폭도들을 위하여 허위 및 좌편향적으로 작성되어 제주4·3폭동을 진압한 이승만 대통령과 국군과 경찰이 학살자가 되어 국가의 역적이 되게 하였고, 경찰과 우익과 국군을 죽인 살인자들인 좌파 폭도들은 희생자가 되었다’-이선교 저 『제주4·3사건의 진상』 중에서 

이선교는 비무장지대 ‘김훈중위사건’ 국방부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6·25에 관심을 갖고 한국전을 연구하였다. 1990년 『한국전 다시 써야 한다』를 출간하였고, 그간의 연구를 정리한 『제2차 한국전쟁-끝나지 않은 전쟁 6·25를 말한다』, 『6·25 한국전쟁 막을 수 있었다』를 출간하였다.  특히 『제주4·3사건의 진상』이란 책을 저술· 발간한 이후, 제주4·3단체와 법정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행정법원 재판부에 제출한 폭도 명단’에 김시범을 비롯한 18명을 거론하여  유족과 4·3단체의 울분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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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3월 청와대에 제출된, "4·3진상조사보고서의 왜곡과 불법성을 재조사하라"는 내용의 보수단체 진정서. 진정 단체의 주소는 이선교 목사의 주소와 같다.

이선교가 행정법원 재판부에 제출한 폭도 18명의 명단은 강기우·김형촌·강두추·김주탁·김완식·김의봉·김시범·김필원·현호경·강정호·송원병·고문수·류신출·이원옥·김만옥·김전중·신선우·강자규 등이다. 여기에 김시범이 포함되어 있다. 제주4·3사건 희생자심사위원들은 신청만 하면 모두 희생자로 처리했다고 주장기도 했다.  다음은 이선교의 핵심 주장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가짜보고서다. 제주도민이 많이 죽게 된 원인인 1948년 10월 24일 제2대 폭도사령관인 이덕구가 대한민국에 선전포고한 내용을 싹 빼버렸다. 1948년 11월 2일 이덕구 이하 폭도들이 9연대 6중대를 공격하여 하루에 중대장 이하 21명이 전사한 것도 싹 빼버렸다. 국군이 180여명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7번 정도 있는 것도 싹 빼버렸다. 이 모든 것은 폭동(내란)을 무장봉기라고 하기 위한 것이다. 제주도에 아무 잘못이 없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11월 17일 계엄령을 내려 국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제주도민 13,900여명을 학살하였다고 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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