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협의=편성권침해” 논리비약…‘재량사업비’아닌 ‘사업제안→검토’시스템 전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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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예산을 편성을 앞두고 제주도와 의회가 ‘전면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예산편성 이전에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구성지 의장의 제안을 제주도정이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촉발된 이번 사태가 막장으로 치닫지 않을까 도민사회의 우려가 많다.

두 기관 수장의 ‘대타협’ 필요성까지 제기된다.

초반 도민사회의 여론은 도의회에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예산 협치’로 포장된 사전협의 요구가 사실상 재량사업비 부활을 위한 꼼수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는데다, 공직 내부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된 도의회는 17일 긴급 의장단 및 상임위원장단 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는 등 다급해졌다.

구성지 의장의 반응부터가 심상치 않다. 자신의 기자회견 직후 곧바로 이어진 제주도의 반박 기자회견이 소위 ‘꼭지’를 돌게 했다.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검토하는 ‘시늉’ 조차 없이 일언지하에 거절한 데 대한 섭섭함이 깔려 있다.

이날 회의에서도 구 의장은 ‘확전’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관의 수장으로서 기(氣)싸움에서 밀릴 수 없다고 판단했을 터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선봉장이 돼야 할 상임위원장들이 이를 말렸다는 후문이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는 “의장이 너무 앞서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예산 협치’ 제안의 취지는 사라지고 마치 재량사업비를 구걸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모 의원은 “설사 재량사업비 10억원이 반영됐다고 치자. 여기저기서 요구가 빗발칠 것이고, 결국 의원들은 재량사업비 집행문제로 더 골머리만 썩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제주도,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박영부 기획조정실장의 대응도 꽤나 서툴렀다.

기자회견 형식부터가 그렇다. 의회의 수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제안한 것을 30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 자체가 부적절한 처신이란 지적이다. 게다가 반박 회견에서는 구 의장이 회견에서 하지도 않은 말까지 마치 한 것처럼 오도했다.

도의회가 “견강부회(牽强附會) 하지 말라”는 경고에, “의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거나 “참으로 경솔하고, 의회를 경시하는 행태”라고 비판한 게 결코 과하지 않다.

도민사회가 도의회에 싸늘한 시선을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주도정도 웃을 처지는 아니다. 

21일부터 322회 임시회가 열릴 예정이어서 ‘예산 전쟁’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당장 도의회가 제안한 ‘예산 협치’를 거부한 게 ‘협치위원회 조례’처리와 관련해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두 기관은 다시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의회는 억울해할 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표현하지도 않은 ‘재량사업비’라는 프레임에 갇혀 명분과 실리 다 내줄 판이다. 문제는 예산편성 과정에서 지역구 주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얼마큼 폭넓게 반영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그게 표(票)로 먹고사는 정치인으로서 사는 길이기도 하다.

시행 3년째인 주민참여예산제가 읍면동별 ‘떡반 나누기’로 전락한 실정이고 보면 각 지역의 민의를 대변하는 도의원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따라서 제주도가 ‘사전협의=편성권 침해’라고 치부한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도정이 지역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역의 민심을 가장 잘 읽는 게 도의원이고 보면 그들이 수렴한 의견을 예산에 반영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도의회가 “도지사가 수렴한 의견은 되고, 의원들이 수렴한 의견은 안 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고 토로하는 것은 이 같은 ‘소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표를 의식한 선심성 예산은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 이는 도의원뿐만 아니라 도지사도 마찬가지다.

예산 심사 때만 되면 도의회는 “선심성, 선거용 예산”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들 역시 대규모 계수조정을 통해 ‘지역 예산’을 만들어내곤 했다. 결국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행태가 매년 반복됐던 것이다.

의회도 무조건 예산을 편성하라는 식의 압박이 아니라, 사업 타당성 및 효과 분석을 통해 우선순위에 들 수 있는 사업을 골라내고, 예산에 반영되도록 ‘정치력’을 펴면 된다.

집행부도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의원 몫의 재량사업비 편성을 중단하는 대신 의원들로부터 사전에 사업계획서를 제출받아 부서별로 투명한 사전 검토절차를 밟으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의원이 요구한 예산은 곧 ‘선심성’으로 치부했던 선입견부터 걷어내야 한다.

그래야 의원들도 ‘될 만한’ 예산을 반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회성 ‘선심성 예산’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렇게 예산편성 과정에서 제주도와 의회가 소통을 하게 되면, 계수조정의 병폐도 자연스럽게 개선될 수 있다. 심사를 거치며 ‘누더기’예산안이 되는 것을 막아, 당초 계획했던 예산분배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막장으로 가기 전, 두 기관의 수장의 대타협이 절실하다. 그도 아니면 고향 선배이자, 공직 대선배인 구성지 의장이, 박영부 실장을 불러 꼬인 매듭을 직접 푸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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