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36) 국방경비대 사령관에 이어 민정장관에 취임한 베로스 

제주4·3과 미국

▲ 일본군 요새로 전락한 제주도.

‘본인은 대통령의 사과 소식을 듣게 돼 기쁩니다. 본인은 그와 관련된 어떠한 기사도 보지 못했습니다. 본인은 적어도 미국 대통령이 그 곳에 가기를 희망합니다. 미국이 이 끔찍한 비극에 대해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부시의 측근 가운데 누가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매우 쉽게 잊습니다. 그렇지만 본인의 견해로 사과는 다른 범죄행위에서처럼 단지 첫 조처일 뿐입니다. 한국에서 향후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지는 본인이 말할 일이 아닙니다. 향후 조처들은 미국에서 취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문제는 너무 이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조처가 양식을 가진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도전적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비평가 노엄 촘스키

​‘미국의 양심’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미 M.I.T.)가 제주4·3과 관련한 메시지 내용이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의 4·3사건에 대한 사과 이후 제주4·3연구소가 그 해 11월 26일 관련 입장을 요청한 데 따른 답변이다. 진보학자 노암 촘스키의 4·3 관련 공식 입장 표명은 미국에서는 한국전쟁 전문가로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미 시카고대)에 이어 두 번째이다.

제주4·3은 치유되었는가? 제주4·3 비극의 사회적 치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4·3이라는 비극을 잉태한 주체 가운데 하나인 미국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제주4·3으로 알려진  대량 살육과 파괴는 미국 당국의 지시와 감독 하에 자행되었다. 

미국이 제주4·3의 사회치유에 참여하는 것은 인권과 배상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민주주의로서 미국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한·미 군부 지도자들과 경찰이 제주 주민의 저항에 과잉 대응했으며,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한 양국 군 장교와 경찰은 제주도를 '빨갱이의 섬'이라고 잘못 규정해 계속적인 폭력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미국정부는 제주4·3 비극에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책임이 명백함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해결책으로 비극에 대한 인식과 책임은 물론, 비극으로 인한 개인적 배상과 미국 정부의 진정한 사과가 필요하다.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은 사건에 책임이 있는 미국정부가 사회적 치유에 참여해 희생자 가족들에게 정당한 배상과 사과 없이는 불가능하다.  

제주4·3사건은 미군정 시절(1945.8.15-1948.8.15)에 일어났다. 당시 정부는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미군은 연합군 세력으로 한반도 이남을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주사람들의 항거를 무력으로 진압한 장본인이 누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제주항쟁의 탄압을 수행한 이승만 세력은 미국의 용병 역할을 다하였을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미제국주의자가 남조선을 강점하는 첫날부터 조선인민 앞에는 아주 간고하고 어려운 과업이 제기되고, 또한 평탄하게 실현할 수 없는 복잡한 형세가 전개되었다. 당시 제주도에 처한 사정은 더욱 곤란하였다. 협착한 섬이 미일군의 싸움터로써 오랫동안 일군병에 발굽에 짓밟혀, 삶의 터전이 일체 상실되었던 도민들에게 자포자기에 빠진 8만 여 일제 패잔군의 무도한 행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김봉현 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 제주, 미군정이 실시되다.

국방경비대 사령관에서 군정장관으로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동포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하여 순국하려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군사기관이다. 우리들은 모국의 주구도 아니다. 일개 정당의 이용기관도 아니다. 다만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추진시키고 밖으로는 국방의 중책을 완수하려는 국가의 간성이다.’-제주신보 1947년 4월 22일 모병광고문 중에서

‘본도 민정장관(전 지사)으로서 금반 럿셀 D. 베로스 중좌가 임명되어 지난 2일 공로(空路) 착임하였는데, 이에 따라 전 미인 도지사 스타우드 소좌는 계속 차석으로서 본도에 유임케 되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4월 6일

‘5일 기자는 금반 본도 민정장관으로 취임한 베로스 중좌와의 초(初)회견석상에서 여좌한 문답을 하였다. (문) 본도에 대한 첫 인상는 어떠한가. (답)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는 감을 느꼈다. (문) 귀관의 신임에 제(際)한 포부 여하. (답) 착임한 지 단시일이므로 본도 사정에 정통치 못함에 어떠한 계획은 없으나 본도의 발전을 위하여 나의 힘있는 대로 본도의 모든 문제에 전 노력을 다할 각오이다. (문) 본도 3․1사건을 주지하고 있는가. (답)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방금 조사 중이다. (문) 중앙에서는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착착 이양하고 있는데 본도에서의 행정권 이양에 대해서는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는가. (답) 나의 희망은 행정권을 차차 한 두개씩 부분적으로 이양하여 조선인이 행정에 대한 경험을 쌓게 하고 최후에 완전히 이양하여 필리핀과 같은 민주독립국가가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다. 【약력】미국 동해안에 출생. 연세 37. 신문기자 생활을 수 년 하다가 태평양전쟁에 필리핀에서 활약. 종전 후 조선에 진주하여 신임 전까지 국방경비대 고문관으로 있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4월 8일

‘4월 8일 오전 10시 도지사실에서는 관공서 책임자 40여 명 집합하에 민정장관 베로스 중좌의 신임인사와 스타우드 전 군정지사의 감사인사가 있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4월 10일

J.R.하지 중장의 지휘 하에 미육군 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 서울로 들어와 9일 삼팔선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A.V.아널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미군정체제가 수립되고 이어 러치 소장과 딘 소장으로 이어졌다.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는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다.

1946년 1월 15일 미군정이 1개 연대 병력으로 창설하였다. 일본군·관동군·국민혁명군·팔로군·광복군 출신자들을 주축으로 한 조선 국군준비대 등 사설군사단체 혹은 유사군사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 그해 11월에는 그 수가 무려 60여 개를 헤아렸다. 창설 당시 병력은 1연대 A중대의 187명으로 시작했다. 이후 1연대가 대대편성을 완료했다. 1946년 6월 15일 〈군정법령〉에 의거하여 '국방경비대'가 '조선경비대'로 개칭되고, 국방경비사관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국방경비대의 첫 사령관은 미군 중령 존 마샬((John T. Marshall, 1946.1.15.~1946.2.5)이고 두 번째 사령관은 바로 러셀 베로스(Russell D. Barros, 1946년.2.5~1946.8.15.) 중령이다. 그 뒤 46년 9월 하지 중장이 조선인 이형근(李亨根, 1946. 9.28~1946.12) 참령을 사령관대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2선에 물러나야 했던 베로스는 계속 경비대에 실권을 행사하려 했고 하지와 베로스의 갈등 끝에 베로스는 1946년 12월 주한미군 제주도연대 연대장으로, 이형근은 통위부 참모총장으로 물러나고 송호성이 사령관이 되었다. 베로스 제주연대장은 민정장관으로 한국인과 함께 공동 도사(島司) 직무를 시작하였다.

▲ 1947년 4월 검거선풍으로 3.3평 유치장에 35명 수감(당시를 재현한 모형).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북초등학교 주변의 군중 수는 2만 5천~3만 명. 경찰은 원래의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보강하였다. 관덕정 앞에 응원경찰이 무장을 한 채 경계를 서고 있다가, 군중이 밀어닥치자 일제히 발포를 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정은 ‘3·1기념대회’를 기회로 도민들을 군정법령위반이란 죄명으로 소위 ‘The Third Degree, 1. 체포 2.투옥 3. 심문’을 적용하여 무궤도한 군정재판을 벌여나갔다. 3·1기념대회 이후 도민들은 ‘동포를 살해한 경찰을 총살하라!’고 요구하면서 대중적 파업투쟁이 전도적으로 전개되었다. 

미군정은 3·1사건이 마무리 될 즈음 고위관리들을 극우성향의 인물로 바꾸기 시작했다. 군정장관과 도지사를 새로 임명했다. 1947년 4월 2일 스타우트 소령에 이어 국방경비대 사령관에서 제2대 군정장관으로 부임한 러셀 D. 베로스 중령은 37세의  미국 동해안 출신으로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군에 투신, 태평양전쟁 때 필리핀 전투에서 활약했다. 종전 후 한국에 진주, 제2대 국방경비대 사령관으로 취임, 한국군 창군작업에 관여했다. 

강성파인 베로스 중령과 함께, 초대 지사 박경훈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 후임에 철저한 극우파인 한독당 농림부장 유해진(柳海辰)을 전격 임명했다. 그리고 '자다가도 공산주의자라면 벌떡 일어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제주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베로스는 1946년 11월 제주도 모슬포에 창설되는 제9연대 초대 연대장인 장창국 부위가 인사차 경비대사령관 방에 들렀을 때, 제주도에는 좌익세력이 강하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던 인물이다. 그는 그 해 12월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과 교체될 때까지 8개월 동안 제주의 군정업무를 총괄했다.

베로스 중령은 “좌‧우익의 정당을 물론하고 그 관계자가 관공리 직원으로 취직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라고 표명했으며, 제주 CIC는 “극우파 제주도지사는 좌익분자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그의 암살을 요구하는 삐라가 여러 장 뿌려졌다”고 보고하였다. 여기서 극우파는 유해진 도지사를 말한다. 당시 제주도에서 한국인 도지사로는 박경훈→유해진→ 임관호가, 미군정장관으로 스타우드 소령 →베로스 중령→ 멘스필드 대령 순으로 통치를 이어갔다.

▲ 1946년 조선경비대.

‘종달리사건’과 ‘북촌리사건’

베로스 중령이 부임하면서 사태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경무부 최경진 차장이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퍼센트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3·1사건 연루자 군정재판이 첫 개정되고, 제주농업학교 영어교사 한병택에게 체형 6월이 선고되었다. 경찰 당국은 파업검속자는 500명에 이르며 이 중 260명을 군정재판에 회부했다고 발표하였고, 1947년 4월 28일 응원경찰대의 교체병력으로 철도경찰 245명을 제주경찰에 배속하고, 제주경찰 정원을 500명으로 증원되었으며 5월 23일 3·․1사건과 관련 재판에 회부된 328명에 대해 공판이 있었는데, 체형 52명, 집행유예 52명, 벌금형 56명,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및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특히 6월 1일 경찰이 삐라 살포 혐의로 제주읍내 중학생 20명을 검속하였고, 다음날 제주여중학생들이 파쇼교육 중단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후 6월 20일 여러 마을 청년들이, 삐라살포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7월 3일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삐라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자 이에 항의해 집단퇴학원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8월 12일 미군정이 '8․15폭도음모사건'과 관련해 좌파세력에 대한 대규모 검거작전 전개에 전국적으로 검속자가 13,769명에 이르렀다.

‘경찰당국이 발표하는 바에 의하면 종달리 불상사건으로 인하여 거(거) 17일 16명(남 13인, 여3인)이 포고령 위반으로 공무집행방해죄 상해죄 소요죄 불법체포죄 불법강틸죄로 송치되었다 하는데, 관계자 71명 중 미체포자가 43명이라 하며, 16일 성산포 해안 부근에서 발동선으로 출륙하려는 괸계자 7명도 1구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6월 18일 

‘한동안 말썽이 되고 있던 종달리사건은 그 후 검거와 취조가 끝나 지난 10일 상오 10시 동 사건 관계자 18명에 대한 공판이 심리원 법정에서 있었는데 좌석의 태반을 점령한 경찰관 이외 방청인 등 만장한 가운데서 이일빈 심판관이 주심으로 주로 경관에 대한 폭행, 상해, 공무방해 등의 범죄사실의 심리가 있은 후, 입회 검찰관인 양을씨로부터 “우리 민족이 생사관두(生死關頭)의 기로에 처한 오늘에 있어서 더구나 치안을 담당하는 경관에 가한 피고 등의 폭행은 단호 불가용허(不可容許)할 만행이다. 본관은 인간적으로는 피고 등에 동정하나 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니 만큼 피고 등의 만행에 대해서는 단연 철퇴를 가하여 피고 등의 악심(惡心)을 고치려 한다”하며 포고령 2호, 법령 19호, 형법 95, 106조 적용으로 최고 체형 4년 최하 10개월 체형에 긍(亘)하는 구형을 각 피고에 논고한 바 있어, 피고진술에 들어가자 각 피고는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범죄사실을 부인하였는데 주심은 다음과 같이 판결언도하고 11시 폐정하였다. △부옥만(夫玉萬) 체형 4개년 △채희조(蔡熙祚) 김경찬(金敬燦) 권태봉(權泰奉) 이상 각각 체형 1개년 △김여표(金汝杓) 고태화(高泰和) 김기천(金基天) 채기남(蔡基南) 임병익(任炳益) 현봉추(玄奉秋) 임병업(任炳業) 홍성대(洪性大) 임병은(任炳殷) 이상 각각 10개월(단 집유 3년) △김봉추(金鳳秋) 김중립(金仲立) 이상 각각 체형 10개월 △윤종문(尹鍾文) 단기 1년반 장기 3년 △채치만(蔡致萬) 윤학석(尹鶴錫) 이상 각각 벌금 1,000원’-제주신보 1947년 7월 12일
 

▲ 조선경비대.

‘종달리사건’은 1947년 6월 6일 민청의 불법집회를 단속하던 경찰관이 집회 참석 청년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베로스 중령이 취임하고 두 달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종달리 바닷가에서는 마을 청년 2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 민청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세화지서 김순영(金順影) 황종욱(黃鍾郁) 최한수(崔漢洙) 경찰관이 집회 현장에 나타났다. 종달리 민청 부위원장인 부옥만(夫玉萬)이 나서서 “우리가 잘못한 일이 없으니 도망칠 이유가 없다”면서 대중을 선동했다.

곧이어 청년들과 경찰관 사이에 몸싸움이 시작됐고, 수세에 몰린 경찰관들이 급한 김에 바다에 뛰어 들었다. 부옥만은 갈고리가 달린 장대로 경찰관들의 제복 옆구리를 걸고 잡아당겼다. 결국 실신상태의 경찰관들은 자신들이 소지했던 포승줄에 묶이는 신세가 됐다. 청년들은 피신하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마차에 실려 세화지서로 옮겨졌다. 경찰과 집회참석자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됐다. 경찰당국은 종달리사건 관련 수배자가 71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결국 수배자 71명 중 42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8월 13일 오전 11시경 북제주군 북촌리에서 경찰과 민중의 충돌사건이 발생하여 양측의 각각 3명의 중상자, 다수의 경상자를 내었다고 한다. 동 사건의 원인은 동 부근에 다수의 삐라가 산포되어 있었으므로 경찰이 출동하여 부근 민중에게 발포를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제주조통】 (같은 기사 우리신문․자유신문․한성일보 47. 8.17)’-중앙신문 1947년 8월 17일

‘조천면 북촌리에서 경민(警民)간에 불상사건이 발생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경찰당국에서는 그 후 경찰력을 출동시켜 북촌, 함덕에서 40명을 검거 유치 중이던 바, 거(去) 26일에는 18명을 석방하였다는데 나머지 22명은 불일간 송청할 예정이라고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30일

북촌리에는 계속 불상사가 일어났다. ‘북촌리사건’은 1947년 8월 13일 불법 삐라를 단속하던 경찰관과 지역주민들이 충돌, 쌍방의 부상자를 낸 사건이다. ‘북촌리 대량학살사건’의 전초전이었다. 경찰은 오전 11시께 북촌리에서 삐라를 붙이던 사람들이 달아나자 뒤쫓으면서 총격을 가했다. 10대 소녀 장윤수(張允洙)를 비롯해 여자 2명과 남자 1명 등 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한 소녀가 사이렌을 울려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 김병택(金秉澤) 순경 등 경찰관 2명이 붙잡혀 집단폭행을 당했다. 북촌 주민들은 이에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마을에서 3㎞ 가량 떨어진 함덕지서에 찾아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함덕지서에서는 지서 지붕에 기관총을 장착, 공포를 쏘면서 시위군중들을 해산시켰다. 

‘거(去) 1일 야(夜) 연돌 비상경계를 베푼 경찰당국에서는 교원양성소 남생도 30명, 여생도 6명, 동 교유(敎諭) 1명을 검거하고, 2일 야(夜)에는 농교생 2명을 검거하였는데 이는 비라살포 혐의로 방금 취조 중에 있으며 그 후 3일에는 농교생 1명, 교양(敎養) 남생도 6명, 여생도 4명이 석방되었는데 귀추는 매우 주목되고있다.’-제주신보 1947년 6월 6일

‘본지에 기보한 바 있는 삐라 첩포(貼布)로 말미암아 검거되어 기소되어 있던 강평옥(姜平玉) 임석현(林錫鉉) 김병수(金柄洙) 김항윤(金恒潤) 변승규(邊承珪) 김준혁(金準赫) 신동문(申東文) 8명에 대한 사실심리 공판이 16일 상오 10시부터 심리원 법정에서 최(崔)원장 주심으로 개정되었는데, 결국 채(蔡)검찰관의 포고령 및 군정법령 19호 위반으로 각 피고에 대하여 체형 6개월의 구형 논고가 있어 18일 판결언도를 선언하여 폐정되었다 하는데 기소된 11명 중 3명 즉 남 1명, 여 2명은 기소유예 처분되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6월 16일

베로스가 재임하던 시기, 제주도가 삐라부착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심했다. 마을마다 삐라부착과 무허가 집회가 성행했다. 삐라살포와 무허가 집회로 초등교원양성소와 제주농업중학교, 조천중학원 학생을 비롯해 30여 명이 검거되거나 재판에 회부됐다. 삐라내용을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강탈하려는 미군을 몰아내자‘ 등 미군을 공격하라는 선동적인 삐라가 제주도 곳곳에 뿌려졌다. 당시 군정장관이던 베로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 조선 경비대 간부용 인식표.

▲ 국군의 전신 조선국방경비대 휘장.

베로스와 유해진

‘【서울 12일 발 합동】제주도지사 후임은 유해진(柳海辰)씨로 결정되어 4월 10일 발령되었는데 씨(氏)의 경력은 여좌하다. 1933년 일본 중대(中大) 법학부 졸. 계속하여 3년간 법리학을 연구. 1945년 국민당 간부에 피선. 1946년 한국독립당 농림부장에 피선되어 금일에 이르렀다.’-제주신보 1947년 4월 14일

베로스가 부임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유해진 지사가 부임하였다. 그는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이며 좌익분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6척 장신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그를 암살하자는 삐라까지 나돌았다. 권총을 늘 옆에 끼고 잤다. 

베로스와 유해진은 민심 동향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좌익 척결에만 비중을 둔 정책을 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제주도는 섬으로서의 소국(小國)이나 다름없었다. 경찰 최고위직은 모두 본토에서 모집된 경찰관들로 채워졌다.

1947년 10월 21일 미 CIC 제주사무소의 개입으로 대동청년단 제주도단부(단장 김충희) 결성이 있었으며, 11월 2일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위원장 장동춘) 결성대회도 있었다. 11월 25일 미 CIC 제주사무소는 서청 제주도단장이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해왔다고 상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유해진은 관공리의 숙청작업부터 손을 대었다. 총파업을 주도한 관리들을 찾아내 파직했다. 숙청작업은 도청만이 아니라, 전 행정기관으로 파급되었으며 교육계에도 무섭게 불었다. 공직사회나 교단에 날로 빈자리가 생겼으며, 많은 자리에 본토 사람들을 임명했다. 좌파를 지하로 몰고 갔으며 좌익활동은 더욱 위험스럽게 변모했다. 유치장은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10×12피트(3.04×3.65m)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됐다. 작은 유치장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되었다. 수감자 대부분이 좌익이라고 밝혔다.  

유해진은 곡물수집에도 앞장섰다. 미군정은 제주도에 1만 7천 석을 할당했다. 제주도 보리농사는 흉년이었다. 주민과의 첫 충돌은 1947년 7월 말 한림면 명월리에서 발생했다. 우익청년단체원들을 동원, 강하게 하곡 수집에 나섰다가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었다. 베로스 중령은 명월리 충돌사건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유 지사가 한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회피했다. 두번째 사건은 1947년 8월 8일 안덕면 동광리에서 발생했다. 주민 50여 명이 하곡 수집 독려 차 이장 집에 머물고 있던 공무원들을 상대로 할당량을 조정해 줄 것을 요구하다가 언쟁 끝에 공무원 3명을 집단 구타했다. 

유해진은 1947년 11월부터 미군정청의 특별감사를 받았다. 특별감찰관 넬슨(Lawrence A. Nelson) 중령의 지휘 아래 1947년 11월 12일부터 1948년 2월 28일까지 실시됐다. 일명 ‘넬슨 특별감찰보고서’는 베로스를 포함한 제주주둔 미군장교들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베로스는 넬슨 중령에게 “그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위는 본인은 물론 제주도민들을 당혹하게 했다. 제주도 우익의 테러행위는 증가했고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가 부임한 이래 공직에서 해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미군 보고서에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로 표현된 유해진 도지사.

‘거(去) 28일 민정장관 베로스씨와 본사 기자와의 회견석상에서 도내 제반 사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이 있었다. (문) 하곡수집에 일반 사회단체를 동원시켜 한림면 명월리에서 불상사를 일으켰다 하는데 하곡수집에 일반 사회단체를 동원할 수 있는가? (답) 유지사가 한 일이기로 잘 모르겠다. 연(然)이나 좌우익을 막론하고 사회단체로서 보수를 받지 않고 애국정신에 호소하여 수집에 노력하는 것은 가하다. 그러므로 일반민중은 하곡이 도외로 반출되지 않고 도내에서 배급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하여 협력하여야 된다. (문) 정당 및 사회단체에 가입한 자로서 관공리 직원 혹은 교원에 취직할 수 없는가? (답) 좌우익의 정당을 물론하고 그 관계자가 관공리 직원으로 취직할 수가 있다. 이것이 즉 민주주의 원칙이다. (문) 유지사는 도청 행정운영에 있어서 즉 집회관계에 있어서도 편당적(偏黨的)이라는 세평이 자자한데. (답) 유지사는 일절 나에게 말하여 준 바 없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인사로부터도 편당적 행동을 취한다는 보고가 있어 조사중이다. 또 집회는 중앙의 지시에 의하여 정식 수속만 하면 허가는 하게 되었다. 차후 집회허가원을 신청하고 유지사가 무조건 불응시는 나에게 말하여 주기 바란다. 이에 대하여는 유지사하고도 협의하겠다. (문) 유지사는 모 중학교 교장에게 민전에 가입했다고 하여 권고사직을 시켰다는데 이것도 민주주의 원칙인가? (답) 사실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절대 없으리라고 믿는다. (문) 대정중학교 교장 이원정(李元貞)씨는 부임 10일 후에 유지사로부터의 권고사직에 대하여 세론이 자자한데. (답) 나는 초문이다. 그러므로 학무 고문관 케리 대위에게 말하여 주기 바란다. (문) 전재민(戰災民)을 수용하기 위하여 현 남일자동차부 명도(明渡)문제로 사회에 파문을 던지고 있는데. (답) 도지사와 읍장과의 적절한 타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장소에는 청결치 못하므로 이재민(罹災民)을 수용시킨 다는 것은 좋지 못하다. (문) 적산(敵産)인 소(小)사업체와 주택 등을 불하할 세칙이 규정되었다는 바 불하는 확정적인가? (답) 적산관재처장(敵産管財處長) 케리 대위가 이에 대한 사무는 진행중이나 불하에 대하여는 수개월이 걸릴 것이다.’-제주신보 1947년 7월 30일

‘제주도청에서는 도제(道制) 실시 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지난 1일 오전 9시 도청 회의실에서 도청 직원 100여명과 민정장관 베로스씨를 비롯한 미군 장교 다수 임석 하에 도제 실시 1주년 기념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고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4일

‘스타우드 소좌의 뒤를 이어 약 8개월간 본도 제2대 군정장관으로서 본도의 문화, 경제면 등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긴 베로스 중좌는 금반 경질에 의하여 환국케 되어 거(去) 3일 공로 워싱턴(華盛頓)으로 향발하였는데 동 중좌는 이도에 앞서 재임중 도민 제위의 끊임없는 협력과 후원을 감사하며 아울러 도민에 주는 여좌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단일민족인 조선민족이 국토 양분이라는 비극으로 통일이 안되고 또한 독립에 지장을 받고있다는 현상은 불행 중에 불행이라 아니할 수 없어 이제 떠나는 나로서 제주도민에 요청하고 싶은 것은 하루바삐 이 난관을 극복하여 통일조선자주정부 수립에 힘찬 진군을 해달라는 것이다.”’-제주신보 1947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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