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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⑳> 속절없이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엊그제 다큐 독립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봤다.

이 영화는 생로병사의 4단계 통과의례 중 3가지(老·病·死)를 날것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수채화처럼 담백한 노년의 사랑을 기교나 작위 없이 진솔하게 펼쳐내지만, 사랑도 부귀영화도 다 덧없다는 ‘인생무상’이 이 영화의 진짜 주제다.

죽기 전에 테레사 수녀는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란 말을 남겼다. “천지는 여인숙이고 인간은 거기 머물다 가는 나그네이다”라고 한 장자의 생각과 비슷하다. “세상은 무대, 인간은 그 무대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광대”라고 한 맥베드도 나를 맥 빠지게 한다.

부처도 인생살이 무상함을 토로했다. “아침 풀끝의 이슬과 같고 저녁 연기와 같고 물에 뜬 거품과 같고 먼 산의 아지랑이와 같다”. ‘금강반야바라밀경’에 몽환포영(夢幻泡影)이 나온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재물·명예·권세가 다 꿈·환영·거품·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통령의 동생이나 숨은 실세가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권력 다툼에 앙앙불락하지 않았을테고, 재벌 3세 조 아무개도 그처럼 방자하게 으스대지는 않았을거다.(한 줌의 권력과 재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어쨌거나 인생이 한바탕 꿈이요, 토란잎 위에 구르는 아침 이슬이라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아등바등 산 게 너무 부끄럽고 너무 원통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던 솔로몬의 탄식에서 깊은 관조와 통찰을 배우고 싶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러니까 무상 속에 진리의 핵이 있다는 걸 발견할 때 놀랍게도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리라.

고승에게 묻는다. “스님, 깨닫는다는 건 뭔가요?” “내 마음의 본바탕이 삼라만상의 근본이고 우주의 근본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녀석아” 나는 이걸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없다면 삼라만상도 우주도 없다.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나는 우주를 위해 존재하고 우주 또한 나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의 근본인 것이다. 이걸 달리 말하면 직지인심(直指人心 : 사람 마음에 달렸다)이나 일체유심조(一體有心造)라고 할 수 있으니 한 마디로 인생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인생이 무상하다고 해서 허무주의에 빠져선 안된다. 오히려 허무를 극복하고 ‘자기 앞의 生’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해야 한다. 스티븐 잡스처럼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자”고 치열하게 외치거나 당나라 시인 백거이처럼 “달팽이뿔위처럼 작은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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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싯돌 불꽃 같은 인생에 이 몸 맡겼을 뿐인데, 부(富)하면 부한대로, 빈(貧)하면 빈한대로 인생을 즐기자”고 낙천적으로 살거나 모두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잡을 수 없는 세월, 속절없이 한 해가 저물어가니 인생무상이 뼛속 깊이 저미어 오는구나. 묵은 해가 가니 또 새해가 오겠지. 새해에는 뭔가 기쁜 일이 있겠지(없으면 말고).

나를 칭칭 감았던 욕심 내려놓고 벗어버리니 천하가 다 내 것! 즐겁구나야. 아암-!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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