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40) 친일행위 이어 제주도감찰청장에 취임한 강인수  

강인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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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우균과 강인수.
‘【서울 21일 발 합동】경무부에서는 제주도감찰청장 신우균씨를 경무부로 소환함에 따라 20일 경찰학교 감찰관 강인수(姜仁秀)씨를 동 청장 대리로 임명하였는데 제주도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충남, 충북 경찰청 관내에서 각 50명의 경찰을 21일 파견하였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2월 20일

강인수(姜仁秀 ~1948)는 전라남도 태생이다. 경찰권을 장악한 통감부는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마지막 의병 항쟁 중 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대토벌 작전을 벌였다. 1909년 9월부터 10월 사이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었다. 

강인수는 순사자격으로 작전에 참가하여, 의병토벌을 위한 정보수집에 앞장섰다. 1909년 10월 12일 의병장 임창모가 흑석산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강인수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임창모 일행을 알아보고 그 정보를 토벌대에 제공했다. 그 결과 의병들은 순사 최진태가 포함된 토벌단의 기습공격을 받고 전멸하였다. 광주경찰서장은 임창모 의병 부대를 와해시키는데 현저한 공이 있다며 강인수에 대한 포상을 통감부에 상신하였다. 

강인수는 여수경찰서 경부보(警部補)를 거치는 동안 조국이 해방되었다. 경찰은 1945년 12월 27일 도지사의 권한 하에 있던 경찰행정권을  중앙 경무국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만들었다.한국 군(軍)은 초기에 경찰의 예비부대라는 명분으로 출발했다. 군과 경찰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권력유지를 위한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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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경찰감찰청.
제주도 경찰기구는 1946년 9월에 제주감찰청으로 시작하여, 1947년 3월에는 제주경찰감찰청으로, 그리고 1948년 8월에 제주도경찰국으로 승격되었다. 강인수는 초대 제주감찰청장으로 1946년 5월부터 4개월여 근무하였으며, 그 후 1947년 2월 17일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위원장 安世勳)가 결성되자, 2월 19일 국립경찰학교 총무과장에서 제주감찰청이 제주경찰감찰청으로 개편되면서 초대 청장으로 다시 부임하였다. 강인수의 부임은 신우균(申宇均) 전임청장의 부하직원 폭행과 독직(瀆職)혐으로 물러난 후였다. 

강인수가 제주감찰청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제주도(島)가 제주도(道)로 승격되고, 제주도지사에 제주도사(島司) 박경훈(朴景勳)이 취임하고, 북제주군수에 박명효(朴明效), 남제주군수에 김영진(金榮珍)이 임명되었으며, 호열자가 창궐하여 매일 50명씩 환자가 생겨났다. 경무부는 이 무렵부터 제주섬을 ‘붉은 섬’으로 규정하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7년 2월 23일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대회에 이어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리고, 기마경관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강인수는 바로 사건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강인수는 제주경찰감찰청에서 물러나고, 1948년 10월 19일 여수의 육군14연대 반란사건으로 순천에서 반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경찰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제주도 재향경우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4·3사건으로 인해 전사한 경찰은 153명이다. 제주경찰이 4·3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는 전사자는 122명이고 전상자는 92명이었고, 제주시 총혼묘지 경찰관 묘역의 비석에 의하면 경찰관 희생자는 140명이다. 그런데 제주도 재향경우회에서 조사하여 재향경우회 홈 페이지에 올린 제주도 경찰관의 전사일자와 장소를 확인하면 4·3관련 전사자는 153명이다. 이런 착오가 발생한 것은 행정체계가 부실하여 관계자가 통계유지를 철저히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나종삼 편저 『제주4·3사건의 진상』 385쪽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현 제주경찰감찰청장 강인수(姜仁秀)씨 후임에 서울대학 사무국장 김영배(金英培)씨가 3월 31일부로 발령되었다 하는데 강 청장은 본 사건이 수습될 때까지 고문으로 유임케 되리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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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덕정 전경.

좌파 중심 민전결성식 

1946년 11월 23일 공산당 조직들이 남로당으로 하나가 되면서, 남로당 중앙당은 1947년 초부터 투쟁을 전개해 나갔고, 중앙당은 전국에 ‘3·1기념투쟁에 관한 지령’을 하달했다. 제주도당은 이 지령문을 2월 16일 수령하였다. 지령문에는 3·1투쟁은 바로 반동분자를 척결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 날 활용할 표어도 하달되었다.

1)학원을 민주화하라 2) 진보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3) 정권을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4) 박헌영 선생의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5) 민주애국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6) 남녀평등법령 즉시 실시하라 7) 근로인민은 남로당 깃발 아래!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결성대회는 1947년 2월 23일 상오 11시부터 읍면 대의원,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 방청객 200여명의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열렸다. 민전의장단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 승려인 이일선(李一鮮), 제주중 교장 현경호(玄景昊) 등이 추대되고,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金日成)‧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이 추대되고, 박경훈 지사도 참석, 축사를 하였다. 경찰고문관 패트릿지(John S. Partridge)와 강인수 제주감찰청장도 참석, 질서문란을 방지하기 위한 강연을 하였다.  

강인수 감찰청장은 안세훈 등 투쟁위원 5명을 경찰청으로 초치하여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의 “행사는 각 직장, 읍면, 리 단위로 하되 반드시 허가를 맡아서 하고 시위는 못하게 되어 있으니 질서 있고 평온하게 해주기 바란다.”는 당부를 했다. 

안세훈 등은 2월 25일 경찰고문관 패트릿지대위를 방문, 집회허가를 신청했다. 다시 2월 28일 군정장관 스타우트(Thurman A.Stout) 소령이 안세훈 등 여러 명을 미군정장관실로 초치, 3‧1절 기념행사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스타우트 소령은 강인수 감찰청장, 패트릿지 대위, 강동효(姜東孝) 제1구경찰서장이 배석한 가운데 시위행렬은 절대 금지하고 기념행사를 가지려면 읍내를 벗어난 서비행장에서 거행하라는 통첩을 하였다. 

스타우드는 “당신들은 내일 3.1절 기념행사에 조천, 애월, 한림등지의 군중들을 제주읍내로 집결시켜 과격한 시위를 감행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회 질서가 혼란케 될 우려가 있으니 읍내 시위는 절대 안 되며 대중을 동원하여 행사를 치르는 것이 불가피하면 제주읍내를 벗어나 다호부락 북쪽인 서비행장에서 치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안세훈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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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덕정 발포현장.
3·1절 발포사건

‘강인수 감찰청장은 도내를 순시하면서 좌담회를 개최, 평온 무사리에 질서있게 역사적인 기념일이 되도록 지도 계몽하여 기초방침대로 추진하려 하였으나 기히 조직되어 있는 3·1기념투쟁위원회는 암암리에 각읍면 리동 부락 좌익계통에 지령하여 당국의 지시에 순응함이 없이 자기들의 계획대로 미군정을 비방하고 강력한 지하공작을 전개함과 동시 한편으로는 경찰관과 그  가족을 위협, 협박하면서 자연히 직장을 이탈케 공작하여 오던 중......(하략).....’-제주도경찰국 편저 『濟州警察史』 282쪽

‘3·1기념일의 불의와 참사에 대하여 6인의 희생 동포와 그 유가족의 정중한 조의를 표하오며 6인의 중상자 및 5인의 경상자에 대하여 위문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여 천하에 발표코저 각계를 망라하여 진상조사단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감찰청의 불허로 실현치 못함은 유감천만이다. 그러나 지난 3일 관계자의 주최로 조사단이 구성되어 지금 임무를 수행중인 바 불원 그 결과가 발표될 줄 믿는 바이며, 우리도 조사단의 임무완수에 적극 협력하여 하루바삐 진상이 명백하여지도록 모든 자료를 공급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희유한 참사이므로 우리는 금후 그 책임의 소재를 확실히 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제주민전의 3·1사건 성명서」, 제주신보 1947.3.8.  

‘관직에 있는 나로서 무어라고 비판을 가할 수는 없으나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피탄자는 관중 / 도지사 박경훈씨 담 ’-독립신보 1947년 4월 5일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 경찰은 원래의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보강하고 150명을 제주 읍내에 배치.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으며, 오전 9시께 오현중학교에 집결, 한 차례 행사를 치른 다음. 

대회장 안세훈은 “3‧1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각계 대표들도 연설을 했다. 오후 2시께 북국민학교를 나온 한 대열은 서문통으로, 다른 한 대열은 동문통으로 이어졌다. 오후 2시 45분께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난 무렵에는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시점. 관덕정 앞에는 미군장교가 지휘하는 무장경관대와 시위대가 정면 대치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 경찰고문관 패드릿치와 강인수가 대책을 숙의하고 있었다. 

사건은 갑자기 튀어나온 6세 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이면서 시작됐다. 기마경관은 군중들에 쫓기며 동료들이 있던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의 신원은 허두용(許斗鎔‧15세‧제주북교 5년), 박재옥(朴才玉‧21세‧여), 오문수(吳文壽‧34세), 김태진(金泰珍‧38세), 양무봉(梁戊鳳‧49세), 송덕수(宋德洙‧49세)로 밝혀졌다. 무장경찰은 경찰 고문관 패트릿지 대위가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도립병원 앞에서 두 번째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그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한 응원경찰관이 입원해 있었는데 동료 2명이 병원에 있었다.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이문규(李文奎‧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순경이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 장제우(張濟雨) 등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강인수 감찰청장은 도립병원 앞 발포사건에 대하여 “도립병원 앞 발포사건에 대하여는 대단히 미안의 뜻을 표하는 바이며 여사(如斯)한 한 경관의 실책으로 말미암아 전 경찰이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연(然)이나 이 경관은 발포한 사실을 전연 부인하고 있으나 사실의 증거가 확연하므로 중앙에 지시를 얻어 엄벌에 처할 것이며 장차 여사한 사건은 발생치 않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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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제주북초등학교.

그날 경찰은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통금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저녁에 목포 경찰 100명이 제주를 향해 출발했다. 제주경찰은 다음날부터 행사위원회 간부와 중등학생들을 검속했다. 하룻동안 학생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곧이어 무조건 구타와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강인수 감찰청장이 「발포한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경찰의 발포조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그 책임을 제주신보의 허위보도라는데 전가하려고 하였다. 강인수는 지방언론으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제주신보는 사설을 통해 “감찰청장의 성명에 의하면 발포 당시에 S자형으로 행진하던 시위대가 현장에 있던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 점은 본사 기자가 직접 목격하였기에 청장의 통찰이 정확하지 못한 게 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며 증인이 필요하다면 몇 십 명이라도 증언케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3·1대회 이후 전개된  검거사건에 관하여 3월 27일  강인수 감찰청장은 “방금 주모자는 몇 사람이 체포되고 있으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이 도피하고 있다. 일반 양민들을 선동하여 놓고 피난한 자들은 차후 검거되면 엄벌에 처할 것을 미군정장관과도 말하고있다. 그리고 압수된 증거서류에 의하면 모 정당이 2월 16일부터 계획적 비밀활동으로 투쟁하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근일 내에 발표하겠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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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사건 희생자들.

전도 파업사태와 군정재판

1947년 3월 10일부터 도청직원을 비롯하여 신한공사 종업원, 운수노조(제주, 남일, 조흥버스, 조화․朝貨 각 종업원), 제농(濟農) 제중(濟中) 오중(五中) 교양(敎養) 생도 및 교원, 동남북국민학교 교원, 항무서원, 측후소 직원이 총파업을 단행하였고, 11일에는 식량사무소 직원, 군청, 읍사무소 직원, 우편국 직원, 남진운수사 종업원, 무선국 종업원, 상호은행지점, 고녀(高女), 전매서, 금융조합 역시 파업을 단행하였다. 

군정재판의 막도 올렸다. 제1회 공판은 1947년 4월 3일 오후 1시 반부터 법무관 스티븐슨 대위 주심, 경찰고문관 패드릿치 대위 입회하에 지방심리원 법정에서 피고 홍윤경(洪崙慶)과  한병택(韓秉澤)에 대한 심리로 개시되었다. 홍윤경은 주심으로부터 “피고는 1945년 9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자택에 일본제 94식 권총 1정과 탄환 240발분을 은닉 소지하고 있음에 포고령 제5호 위반으로 기소된 것이다”라는 기소이유 설명이 있는 후 주심으로부터 결국 2년의 징역에 처한다는 판결언도가 있었다. 

계속하여 제주농업학교 영어교사 한병택에 대한 심리에 들어가 주심으로부터 “2월 27일 농교에서 무허가회의를 개최하여 3․1에 시위행진할 것을 획책한 것, 3월 1일 오중(五中)에서의 학생의 무허가 집회에 피고가 지도한 것, 3․1시위에 참가한 것, 3월 10일 오중에서 무허가 회의를 개최하여 무허가 삐라를 살포한 것 등 포고령 제2호 위반에 의하여 기소된 것이다”는 이유 설명이 있는 후 사실 심문에 들어가 주심으로부터 증인심문이 있었다. 이어 검찰관 대위로부터 “3월 1일 오중 교정에서 피고가 지휘하여 학생들이 합창하는 것을 나는 목격하였다. 또 감찰청 앞에서도 시위 중인 학생대를 리드하는 피고를 보았다”라고 증언한 바 있어 피고 로부터 검찰관에 대하여 반문이 있었다.

(피고) 오중에서의 기념식은 귀관이 허가하지 않았는가. (파 검찰관) 허가한 바 없다. 본관이 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기히 회합이 되고 있기에 속히 기념식을 거행하고 즉시 해산하라고 충고한 바는 있다.  (피고) 감찰청 앞에서는 나로서는 불상사를 미연 방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을 따름이다. 그때의 나의 교섭으로도 이는 증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파 검찰관) 그러나 학생대는 해산하지 않았다. 결국 제주신보사 기자가 해산시킨 것이다.

이어 피고로부터 “나를 선동자로 규정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나는 시종 통역으로서 교섭에 당하였을 뿐인데 처벌은 부당하다”는 진술이 있었으며, 다음날 재판관으로부터 “본 법정에서 피고는 유죄로 인정한다. 시위행렬을 계획해 놓고 중도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시위행렬로 인하여 수 명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있다. 나는 피고를 주모자로 취급해서 판결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까지는 주모자라 볼 수 있다. 본관은 범죄사실 제1항에 6개월 체형, 제3항에 6개월 체형을 언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6개월씩 복역하게 됨에 결국 6개월 체형이다.”라는 판결이 있었다.

4월 10일 경찰 당국은 파업검속자는 500명에 이르며 이 중 260명을 군정재판에 회부했다고 발표하고, 4월 28일 응원경찰대의 교체병력으로 철도경찰 245명을 제주경찰에 배속. 제주경찰 정원 500명으로 증원하였다. 4월 30일 제주도 민청위원장 김택수, 서울서 검거됐으나 미 CIC의 조사받고 석방되고 5월 7일 응원경찰대가 제주에서 철수하였다.

‘금반 사건에 관련하여 지난 1일 경감청장 강인수씨와 본사 기자와의 회견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최근에 검거된 인원수는? (답) 작일에 23명이 검거되었고 15명이 출감되었다. (문) 지금까지 석방한 총 인원수는? (답) 157명이다. (문) 현재 수감 중인 인원수는? (답) 약 140명 가량이다. (문) 현재가지 송환된 응원경관수는 얼마나 되는가? (답) 간부를 합하여 10명이다. (문) 현재 배치된 타 관구 경관대는 언제나 송환케 될 것인가? (답) 이에 대해서는 조부장 각하가 고려하여 어떠한 지시가 있을 것으로 믿으나 나로서의 생각은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서 제1차로 내도하였던 응원대 약 100명 가량은 불일간에 소속지로 귀환시킬까 한다. 그리고 본도 출신 경관의 대량 사임한 데 대해서는 육지부 경관에게 특별수당을 지불하여 이를 보충하려고 생각 중에 있다. (문) 현재 본도 경찰관이 그리 부족한가? (답) 150명 가량이 부족한 상태이다. (문) 각 지방에 배치되어 있는 경관이 너무 지나친 행동을 취한다는 데 대하여 여론이 분분하며 일반민중의 경찰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하는 데서 이는 치안상 도리어 큰 지장이 되리라고 보는데 이에 대한 대책 여하? (답) 경관은 그 자신이 책임추궁의 입장에 있는 만큼 자숙하고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일부 그런 경관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 각 지서에 명하여 조사중에 있는데 만일 있다면 처분하겠다. (문) 민주경찰이란 취조방법이 과학적이며 검거에 있어서도 증거가 당연한 데서만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답) 물론 증거가 있어서 검거한다. 금반 검거된 자도 무허가 시위, 무허가 집회 등을 한 자로 전부가 위법행위를 감행한 자들이다.’-제주신보 1947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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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대의 행위로 보이는 도로차단 현장을 한 경찰관이 가리키고 있다(1948. 5) 

주민과 경찰의 충돌사건

‘본지에 기보한 바 있는 구좌면 우도사건에 대하여 제주경찰감찰청에서는 30일 사건 전모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난 3월 4일 하오 1시경 우도 도민 약 1,000여 명이 3․1사건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하오 6시경에는 민청간부 모(某) 외 수명이 파견소에 나타나 게시판을 파괴(투석)하고 시위에 참가 않았다는 이유로 국민학교 간판까지 파괴하는 일이 있었다. 이날 동 파견소 김경관이 이날 살포 중인 삐라를 압수하여 보관 중 수 명이 동 순경 사택을 습격하여 ‘삐라를 반환하라. 불연(不然)이면 죽인다’고 협박함에 동 순경은 부득이 반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 사건이 발생한 후 10일이 지나서 파견소 직원의 보고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급행한 경관대는 즉시 수사망을 베풀어 주모자 대부분을 체포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4월 2일

'지난 17일 중문면 경찰관지서에서 발포한 사건에 대하여 그 후 사태를 수습하고자 20일 경찰고문관 패드릿치 대위와 감찰청장 강인수씨는 중문면에 급거 출장하여 당시 발포책임자인 김경술(金京述)경위로부터 발포동기의 유래와 침착세밀한 처치진상(處置眞相) 보고를 청취한 다음, 청장 강인수씨로부터 20여명의 직원에게 “그 당시 모든 정세에 비추어 발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차후로는 일반민중에게 친절 정녕히 하여 경민일치(警民一致)로써 사태수습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는 훈시를 한 바 있어 그 익일 귀청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3월 24일

‘우도사건’은 1947년 3월 14일 우도의 민청 맹원들이 대중 시위를 감행한 후, 우도경찰관파견소의 간판을 파괴 소각한 사건이다. 우도주민 1,000여 명은 국민학교에 집결,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우도 섬 한바퀴를 돌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가 끝난 후 민청 간부 몇 명이 경찰관파견소에 찾아가 삐라를 압수한 데 항의하고 파견소 간판을 불태워 버렸다.  

‘중문리사건’은 1947년 3월 17일 시위군중에게 응원경찰이 발포, 주민 8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3월 13일 중문지서 주임 양경한(梁慶漢) 등 제주출신 경찰관 6명 전원은 제주읍에서 일어난 3‧1 경찰 발포가 부당하다면서 사직했다. 경찰은 김경술(金京述) 경위를 반장으로 한 응원경찰대 20여 명을 중문지서에 배치했다. 응원경찰대는 곧이어 총파업에 가담했던 지역 인사들을 연행했다. 구금자 중에는 중문중학원 원장 이승조(李承祚)와 중문민청 위원장 김성추(金性秋)도 포함됐다. 이승조는 일본 간사이(關西)대학 법문학부 출신으로 해방 후 중문면장까지 지냈으며, 김성추는 일제 때 노동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인물로 해방 후에는 청년운동과 야학운동을 주도해 왔다.  3월 17일 오전 11시 중문리 향사에서 지역주민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면민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3‧1사건으로 인한 수감자들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청하자고 결의하고, 오후 1시께 중문지서로 몰려갔다. 면장 등 지역유지들이 먼저 지서에 들어가 석방교섭을 벌였지만, 응원경찰대는 완강했다. 시위행렬이 지서 앞에 이르자 경찰 지휘관은 해산명령을 내렸다. 여러 차례 해산 요구에도 응하지 않자 경찰은 발포했다. 이 발포로 강상준(姜祥俊) 등 지역주민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번 사건의 여파로 17일 성산면 우도에 또 다시 불상사건이 발생하였다. 동도에는 파견소에 경관 3명이 주재하고 있는데, 17일에는 동 도민들이 파견소 간판, 게시판을 파괴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하는데 동도와 본도 사이에 연락이 두절된 관계로 26일에 비로소 소식이 전해져 경찰에서는 즉시 응원경관대 15명을 파견하였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3월 28일

‘【본사특파원 김영택 신창송 조사】3․1참사의 자취도 사라지지 않은 거(去) 17일 중문면서 또 다시 중경상자 7명을 낸 발포사건이 돌발하여 일반에 충동을 주고 있는데 본사 양 특파원의 조사에 의하면 사건의 전모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제주읍 3․1사건 파업 등으로 인하여 중문중학원 원장을 비롯한 민청 간부 수명이 경찰지서에 수감되고 있었는데 17일 하오 1시경 중문리 향사에 다수의 면민이 집회하여 3․1사건으로 인한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자는 등의 결의를 한 다음 슬로건을 들은 중학생을 선두로 일반군중 700여명이 해방의 노래를 부르면서 경찰지서를 향하여 행진하여 지서 앞에 대열(待列)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 군중과는 별개로 면장 외, 지방유지 등 11명이 지서에 들어가 석방을 교섭하고 있는 중 동 지서에 배치되었던 응원경관대는 운집한 군중에 대하여 지휘자의 명을 받고 해산을 재삼 권고하였으나 불응하였음으로 군중에게 최후의 권고를 하고 발포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완고히 해산치 않으므로 경관이 위협적 발포를 함에 군중은 일제히 지면에 엎드렸는데 이때 경관대측에서 일제히 발포하자 군중은 사산도주(四散逃走)하였던 것이다. 이 수라장화한 가운데서 중경상자 수명이 났는데 그 중에는 경관의 발포로 인하여 중상을 당한 자도 있었고 해산권고 시에 경관이 총으로 해산시키려 흔들 때 상한 자도 있다. 이 중경상자는 도합 7명이고 목하 현지병원에서 가료중이라 하는데 씨명은 여좌하다. 강상준(姜祥俊․상예리), 진철주(秦哲周․상예리), 고재호(高才浩․상예리), 고승평(高升平․상예리), 오승준(吳承俊․상예리), 변일봉(邊日奉․상예리), 강영범(姜永範․상예리). (2명은 위독상태)’-제주신보 1947년 3월 24일

강인수도 조위금 기탁

제주신보는 1947년 3월 10일자 신문에 ‘3‧1사건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弔慰金) 모집’이란 사고(社告)를 게재했다. 이 사고는 “그들 희생자는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졌다.”는 글귀에서 풍겨주듯,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모금운동은 전도적으로 확산됐다. 각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조위금이 모아졌다. 이 모금운동에는 우파계열 유지들도 참여했으며, 특히 강인수 감찰청장과 일부 응원경찰도 성금을 기탁했다는 사실이다.   또 제주도민단체인 ‘서울제우회’에서 50,000원을, ‘광주제우회’에서 23,025원을 보내왔다. 그 해 6월 모금운동이 마감할 때에는 기탁된 조위금이 317,118원에 이르렀다. 당시 중학생 월사금이 50원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 모금액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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