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40년간 선거를 통하여 서로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결국 오늘의 부끄러운 그리스를 있게 만든 양대 정당 - 중도우파 신민주당(ND)과 중도좌파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 - 에 대한 그리스인의 분노가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희망으로 분출됐다.

지난 주말(1월 25일)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여 당수 알렉시스 치프라스를 그리스뿐 아니라 유럽연합의 사상 최연소 총리로 밀어 올린 것이다.

시리자 당은 13개의 취약한 진보정당들의 집합체였으나 그리스가 국제사회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이번 총선에서는 구제금융에 부수되었던 고강도의 긴축조건을 재협상할 것과 부채 원금도 추가 탕감을 요구하겠음을 공약으로 내걸어 표심을 얻었다. 치프라스는 또한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에서 "그리스와 그리스인의 잃어버린 존엄을 회복하겠다"고 일갈했다.

외채 탕감은 이미 2010년에 한차례 받은 적이 있다. IMF, EU 및 ECB 등 소위 트로이카가 2400억유로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그리스에 제공하면서 민간부문, 즉 은행이나 기관투자가들의 팔을 비틀어 약 1000억유로의 탕감을 단행한 바 있다.

그리스의 새 정권이 추가로 탕감받고자 하는 대상에는 트로이카의 구제금융도 포함된다. 앞서 민간부문의 탕감은 당사자들의 금고를 축내었지만 공적기구들의 헤어 컷은 유럽 모든 납세자들의 주머니를 축내는 것이다. 트로이카의 수장들도 넓은 의미의 정치인이다. 납세자의 심사를 거스르는 것은 민간 채권자들의 팔을 비트는 것과는 다르다.

차제에 그리스를 나락으로 몰고 간 배경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첫째는 경쟁적으로 돈을 펑펑 쓰며 표심을 끌어모았던 역대 정권들이다. 유권자들은 환호했다. 직접민주주의 내지 다수결 원칙이 항상 옳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험난한 '존엄 회복'의 길

둘째는 국가 차원의 회계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있었기에 방만한 재정지출이 다년간 은폐되었는데 이 점은 응분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2010년 2월 13일자 뉴욕타임스는 골드만 삭스 등 일부 국제투자은행들이 그리스 정부에게 어떤 금융상품들을 제안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그리스 정부에 돈을 빌려주면서 그것을 대출이 아니고 스왑(SWAP)이라는 금융파생상품으로 처리했다.

즉 현재의 현금은 은행에서 그리스 정부로 흐르게 하고 공항 사용료, 고속도로 통행료 또는 복권판매수익금 등 장래의 현금은 거꾸로 그리스에서 은행으로 흐르게 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십억유로에 달하는 국가부채를 정부의 대차대조표에서는 누락시키고 그 대신 기타 주요계약으로 각주(Foot Note)에 한 두줄 언급하고 지나갔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중대한 사실이 유럽 내에서는 언론에 자세히 보도되는데 대서양을 건너오면 이상하게 잠잠해진다"고 비꼬았다. 미국의 금융과 언론을 유태계 세력이 잡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다른 나라로의 전염을 염려하여 국제 금융사회가 그리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는 주제에 자칫하면 그리스와 그리스 국민들의 존엄 회복은커녕 비웃음을 자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를 비웃을 자 누구인가?

2012년 9월 미국 중앙은행이 본격적으로 돈을 찍어 채권매입을 하기 시작할 때 독일 중앙은행의 젊은 총재 옌스 바이트만이 말한 비유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스의 국가부채 은폐 도운 월 스트리트

인쇄기로 돈을 찍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원론적으로 반대하면서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장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종이돈을 발행하는 묘안을 가르쳐 주자 황제가 돈을 사방에 뿌려 모든 이들을 즐겁게 했다는 전설 속의 고사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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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이제는 독일의 여전한 반대에 불구하고 유럽중앙은행도 메피스토펠레스의 묘안을 실행에 옮길 채비를 하고 있다. 미국이 지난 몇 년간 찍어낸 돈의 크기는 3조8000억달러, 독일의 국민총생산 규모를 넘는 액수다. 이 크기의 돈으로 금융자산의 가격을 떠받쳐 주니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고작 제로 금리기조가 언제 깨질지에 관심을 집중할 뿐 증발된 돈의 회수 시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이 글은 <내일신문> 1월 28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게재됐습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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