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41) 조선공산당 재건에 노력하다 검거된 김정노               

김정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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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노.
‘제주공립보통학교(濟州公立普通學校) 맹휴사건으로 동교생 9명이 검속되어 이틀 동안이나 취조를 받고 8명만 석방되었다함은 별항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지난 22일 오후 2시에 제주경찰서(濟州警察署)에서는 죽삼(竹森) 경부가 경관 두 명과 함께 제주합동회관(濟州合同會館)에서 장시간 동안 문서를 조사하고 다수문서를 가져가는 동시에 제주청년회간부(濟州靑年會幹部) 김정노(金正魯) 윤석원(尹錫元) 양씨와 샛별소년회 지도자 송택원(宋澤元)씨를 인치하여 밤이 깊도록 취조하다가 송택원씨만은 그날 밤으,로 석방하고 김정노 윤석원씨는 22일밤이 되어서 석방하였으며 형사가 출동하여 다수 청년을 인치하여 필적(筆跡)을 검사하고 가택을 수색하는 등 그 활동이 명렬한데 아마 보통학교에 산포한 격문에 관련된 혐의자를 수색하는 듯하다는 바 일반의 공기는 긴장하더라.’-東亞日報 1928년 2월 29일

김정노(金正魯, 1907~? 분단시대)는 제주시 이도동 1460번지에서 태어났다. 방성칠(房星七)란 때 창의(傖義)에 나선 김남윤(金南胤)의 손자이며, 한말에 제주군수를 역임한 김창호(金昌鎬)의 차남이다. 항일운동에 기여한 김정순(金正舜)은 그의 맏형이다. 서울 경성중학을 졸업하였다. 

1920년대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주로 사회주의적 형태를 띠었다. 1921년 반역자구락부(反逆者俱樂部)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할 때 김정노는 창립멤버로 참여하였다. 1925년 반역자구락부의 좌파회원들이 신인회(新人會)로 조직을 개편하고, 그해 11월 23일 창립한 경성학생연맹(京城學生聯盟)에 가입하였다. 창립회원 20명 중 제주출신으로 김정노 외에 박찬식(朴燦式, 중앙고보), 윤석원 두 사람만이 참여하였다. 

1927년 봄 제주청년동맹이 조직되자 청소년단체의 통합을 도모하였다. 제주읍내 샛별소년단의 조직과정을 청년동맹간부 김정노, 강창보(姜昌輔) 등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3월 학기말 휴가를 이용하여 야간에 몰래 소년단에 가입하게 한 결과, 제주공립보통학교 생도가 240명에 달하였다. 1927년 후반부터 제주청년연합회(濟州靑年聯合會)의 중심인물들은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제주도 야체이카를 구성해 나갔다. 

제주청년연합회의 송종현(宋鍾鉉)은 1927년 7월 광주에 가서 공산당 전남도당 책임자인 강석보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고 정식 입당하였다. 송종현은 제주청년연합회의 핵심 구성원을 대상으로 입당을 권유하여, 우선 한상호· 김택수· 강창보 등을 가입시켰다. 그후 윤석원· 김정노 ·신재홍· 이익우· 오대진 등이 입당하였다. 제주청년연합회는 제주청년동맹으로 변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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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공립보통학교.

1928년 2월 제주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 사건으로 9명이 검속되니 그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제주청년회 간부 김정노· 윤석원 양인과 샛별소년회 지도자 송택원은 일경에 의해 취조를 받았다. 그해 7월을 전후한 공산당사건으로 2년형을 선고받아 김택수(金澤銖)· 송종현· 강창보와 공산당청년당원(共靑員)인 김정노· 윤석원 등이 구금되었으니, 신인회 속의 급진분자가 공산당 조직과 직결하여 비합법적인 지하운동으로 넘어갔다. 

1928년 12월 국제공산당 정치서기국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정책이 결정되자 1929년 5월에 안상훈(安相勳)·송무영(宋武英) 등은 만주길림에서 이 결정서의 사본을 가지고 입국하고, 김철수(金綴洙)는 1930년 1월에 입국하여 공산당 재건에 노력하다가 모두 검거되었다. 이때 검거되어 판결을 받은 자는  유죄 253명, 무죄 21명, 사건계류중인 자는 약 30여명이었다. 검거된 자 중 제주출신은 홍순기(洪淳起)· 김정노· 좌공림· 강창보· 윤석원· 송종현· 김택수· 한상호 등이다. 1931년 8월 9일 만기 출옥하고 돌아오자 제주청맹원 읍내지부에서는 환영회를 준비하려던 중 관계된 청맹원이 검속되고 말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 거주하면서 김창수(金昌洙: 전북 순창 출신)와 함께 비밀출판물을 국내로 우송했는데 이 사건으로 1932년 일경에 의해 다시 수배되었다. 1934년 가덕진(加德鎭)소년회와 눌차리(訥次里)소년회를 조직하여 회원들에게 죄익서적을 읽혔으며, 메이데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1935년 9월 ‘조선총독 암살’을 운운한 통신물을 발송한 관계로, 1938년 2월 경상남도 경찰부에 검거되었고 출옥 후 목포에서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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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9월 13일자 . 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1927.9.13.) 검거사건은 1925년 말에 일어났는데, 일제의 보도 통제로 1927년에 처음 보도.

해방 직후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은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였다.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 결성했다. 1946년 말까지 섬 전체적으로 당원 수가 100명 선을 넘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좌파정당인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는 1946년 11월 23일 중앙에서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 3개 좌파 정당의 통합으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 임원들이 1946년 12월 조천 김유환(金瑬煥) 집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은 일제시대 사회주의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조천의 안세훈(安世勳)이 맡았다. 초기 활동가로는 김유환, 김은환(金誾煥), 문도배(文道培), 현호경(玄好景), 조몽구(趙夢九), 오대진(吳大進), 김한정(金漢貞), 이신호(李辛祜), 이운방(李運芳), 김용해(金容海), 김정노, 김택수(金澤銖), 문재진(文在珍), 부병훈(夫秉勳), 송태삼(宋泰三), 이도백(李道伯)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로당은 원래 대중정당을 표방하고 나섰기 때문에 초기부터 활발하게 당원 배가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주읍내 중심가인 칠성통에 남로당 간판도 걸려 있었다. 

‘당일 공판이 개정되는 법전문밖에는 멀리 제주도(濟州島)에서 피고 송종현(宋鍾炫)의 어머니 고오삼(高五三)씨와 멀리 대판에서 온 사건피고 김정노(金正魯)의 형 김정순(金正純) 등을 비롯하여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 각군에서 피고들의 가족들이 살을 어이는 듯한 이른 아침부터 사방에서 몰려와서 장차 무겁게 닫힌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관계 피고들은 동일 오전 11시경 전에 없이 늦게야 형무소수차로 운반하여 동 11시 30분에 겨우 출정하게 되었는데 워낙 법정이 협착할 뿐만 아니라 시건관계 피고가 44명이 다수에 달하고 방청인으로는 불과 2,30명 밖에 이벙할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약간의 자리를 남겨놓고는 가족이외 일반의 방청을 제한하여 헛되이 떨기만 하다가 돌아간 사람도 다수다.’-東亞日報 1930년 12월 2일 

‘(제주) 지난 14일 제주경찰서원은 홍순일(洪淳日)· 장종식(張鍾植)· 이태윤(李泰潤) ·문종순(文鍾舜)· 문무현(文武炫) 등 청맹원 5명을 검거하여 취조 중 또다시 17일에 부태환(夫泰煥) 외 8인을 검거하였는데 사건 내용은 일찍 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오랫동안 옥중에 있던 한상호(韓相鎬)· 윤석원(尹錫沅)·김정노(金正魯) 등 삼씨가 10여일 전에 출옥하여 16일에 귀향하였는데 경찰당국에서는 환영회 등 집회를 일체 금지하고 돌연 그 같이 검거하였으므로 금번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어 궁금히 생각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31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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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공산당 21주년 기념식장에 나온 박헌영(가운데) 서기장.(조선해방1년-1946년)

김정노와 조선공산당사건 

‘공산당 사건 판결문/....(중략).....본적 : 제주도 제주면 2도리/ 주소 : 대판시 동성구 저사야정 783번지/ 철공 김정노(金正魯) 25세/....(중략)...피고 김정노는 동년 11월경 제주도 제주면 2도리에서 피고 한상호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이 조직된 비밀 결사임을 알면서 당에 가입하였고.....(중략)...1927년 9월 말경 동면 2도리 제주도청년회관에서 피고 송종현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는 비밀결사임을 알면서 동회에 가입하여 피고 송종현 한상호 윤석원 등과 함께 피고 송종현을 책임자로 하는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하였고....(중략).....징역형을 선택하였고.....(중략)....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김천광길 소야승태랑 소람장장’-공산당 사건 판결문(1930.12.22.)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서 분리된 전남 중심의 공산당원 46명은 1929년 8월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되어 작년 12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각기 체형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이던 체형에 500일 미결구류의 통산을 받은 한상호(韓相鎬) 등 21명은 10일 오전 9시에 만기로 출감하여 시내 남산여관에 유숙 중이라 한다. 한상호 김정노(金正魯) 윤석원(尹錫沅) 외 19명 성명은 생략함.’-조선일보 1931년 8월 11일

공산화 바람은 제주도에도 여지없이 불어 닥쳤다. 조천출신 김명식(金明植)은 1921년 1월 27일 서울에서 마르크스-레닌(M.L)사상 단체인 ‘서울청년회’를 탄생시킨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2개월여 후인 4월, 그는 서울에서 공부하던 김택수·김민화·홍양명· 한상호· 송종현 등을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 이들은 제주도로 귀향하자마자 ‘서울청년회’ 제주도 버전으로 ‘반역자구락부’를 결성했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Communist Party of Korea)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되었으며, ‘반역자구락부’는 1925년 5월 11일 ‘제주신인회’로 탈바꿈하였다.   

서울의 보성전문·경성고보·휘문고보 등에 재학하거나 졸업한 고경흠·김시용·강창보·김정노 등이 제주도로 귀향하여 오대진· 윤석원· 송종현 등을 포섭하여 ‘제주신인회’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렇지만 곧바로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핵심간부들은 금고 5월에 처해지고 와해됐다. 

서울에서 제3차공산당이 와해 된지 1년만인 1927년 8월, ‘제3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가 결성됐다. 야체이카란 세포를 뜻하는 러시아말이다. 제주야체이카 대표 송종현이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김재명의 지시를 받고 제주도로 와서 강창보·한상호·김택수·윤석원· 김정노· 오대진· 신재흥· 이익우· 김한정 등을 이끌고 결성한 것이다. 하지만 주동자들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징역 1-3년의 형에 처해지면서 와해됐다.   

1928년 2월 27일, 서울에서 재건되었던 ‘제4차 조선공산당’이 그해 8월에 일었던 검거선풍으로 또 와해됐다. 김정노 이하 46명은 1930년 12월 22일 제4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당청년회 관계자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의 관계자로 판결언도를 받았다. 김정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의하면 “위 피고 등은 모두 사유재산제도는 현 사회에 도독(筡毒)으로써 여러 폐습은 한결같이 해제도(該制度)에서 싹튼 것이라 믿고, 이를 철폐하여 공산제도의 사회실현을 이상(理想)으로 하여 조선에서 그 혁명에 앞서 이를 용납하지 않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함으로써 공산제도의 사회실현하는 것을 열망하고 있었던 자들인 바”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931년 5월 16일, 제주도에서는 ‘제4차 조선공산당 야체이카’가 재건됐다. ‘제3차 조선공산당 야체이카’ 멤버들이 형기를 마치고 귀환한 후 강창보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불과 8개월 만인 1931년 1월 구좌면 하도리의 해녀시위사건으로 인해 그 배후 조직이 탄로 났다. 그해 3월, 전도에 걸쳐 100여 명이 체포되어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길게는 5년 짧게는 6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이들에게는 “요주의인물‘로 분류되어 계속된 감시를 받았고, 그 결과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제주)조선공산당 관계자가 만3년이나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윤석원(尹錫沅)· 한상호(韓相鎬)· 김정노(金正魯) 3씨가 만기 출옥되어 지난 16일에 해주환(海州丸)으로 고향인 당지에 도착하게 되자 부두에는 수백의 군중이 눈물과 기쁨에 넘치는 악수로 그들을 맞이는 동시에 만세를 고창하고 즉시 3씨는 여러 동지들에게 옹위되어 청년동맹회관에 이르렀는데 제주경찰서에서는 고등계 주임 이하 경관 수명이 동 회관에 와서 일체의 집회를 엄금한다고 함으로 오래 그리던 동지들과 일장의 담화도 교환치 못하고 섭섭히 헤어졌는 바 16일에는 김석묵(金錫默) ·이익우(李益雨)· 송성철(宋性撤) ·부태환(夫泰煥)· 장공우(張貢禹) ·김태륜(金台崙)· 박찬규(朴燦圭) ·문재진(文在珍) 8명을 공익을 방해할 목적이 있다는 막연한 구실로 검속하고 오늘날까지 김석묵· 이익우· 부태환· 송성철 4씨만 석방하였으므로 일반은 하등 정치적 의의가 없는 환영회를 미리 금지하고 이와 같이 무리한 검속을 함은 인권유린이라 하여 크게 분개한다고 한다.’-朝鮮日報 1931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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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유 체포기사(경성일보, 1938.5.1.)-"집요흉악의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하다"

건준과 인민위원회 그리고 민전

‘(전략) ㉠ 남로당/1947년 7월 4일 제주도 하도리에서 몇몇 사람이 (미소)공동위원회 선전 삐라를 배포하려다 체포됐다. 삐라에는 △공동위원회 지지, △3상회의 결정 실천, △3상회의 정신에 따라 북한에 인민경제 확립, △신탁통치 지지, △인민의 친구이자 진정한 애국자인 박헌영 체포 명령 즉각 철회 등 일반적인 좌익 선전내용이 담겨 있었다. ㉡ (미소)공동위원회와 관련한 좌익 선전 활동/1947년 8월 5일 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제주읍 전역에 뿌려졌다. 이 삐라들은 제주도 전역에 뿌려지고 있는 많은 삐라들과 그 내용이 비슷하다. ① “조선에 독립국가가 수립되길! 조선에 과도민주정부가 수립되길! 조선에 인민정부가 수립되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영광이 있으라!” ② “농민들이여 보라! 살인 경찰들에게 하루 5홉씩의 쌀이 분배되고, 악질적 테러리스트인 광복청년단원들의 배만 살찌울 강제 곡물수집 계획을 거부하자! 농민들이여 보라! 도 당국에는 미곡 1만 9,000석이 보관되어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곡물수집 계획을 거부하자!” ③ “인민들은 요구한다! 조선의 모든 재산을 우리 손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한 뒤 처분할 것을! 우리 인민들은 요구한다! 우리 손으로 정부를 세운 뒤 적산가옥을 팔 것을! 왜냐하면 적산가옥은 가장 중요한 우리 재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위원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미국과 소련 대표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낸다! 조선공화국이 수립되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영광이 있으라!”-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격주간정보보고(CIC Semi-Monthly Report) 1947. 3. 1~1948. 5. 15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미군측 보고에 의하면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수적으로 대단히 강했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온건한 정책들이 대단히 호응을 얻었으므로 우파에서는 인민위 세력이 더욱 강력해질까봐 두려워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초기부터 강한 독자의지를 밝혀 나갔다. 전남위원회에 종속되는 것을 싫어했다. 미군정 중대는 이 섬을 관할하는 데 인민위원회를 이용했으며, 상당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8·15 직후에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자치행정기구였으며 출발 초부터 전라남도에 속박됨이 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였다." "제주도인민위원회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가 중심이었다는 점과 함께 상대적으로 온건했다는 특성은, 그들이 제주도 민중들로부터 강력한 정통성을 획득하고 또 매우 긴 기간을 미군정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조직을 보존하고 기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였다." 제주도인민위원회의 성격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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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식(1949년 6월 25일 평양)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10일 결성되었다. 각 읍‧면 대표 100명 가까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건준조직을 출범시켰다. 이날 임원진 구성도 있었는데, 위원장에 오대진(吳大進‧대정면), 부위원장에 최남식(崔南植‧제주읍), 총무부장에 김정노, 치안부장에 김한정(金漢貞‧중문면), 산업부장에 김용해(金容海‧애월면)가 선출되었다. 일제말기 목포(木浦)로 피신해 있던 오대진, 김정노 등이 그곳에서의 건준조직 활동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 서둘렀다. 김정노는  목포에서 건준 결성에 참여한 후 제주로 귀향하였다.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기 위하여 오대진과 함께 할동하였다.  

건준은 1945년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는 하층조직까지 파급될 정도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현경호(玄景昊)는 제주읍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읍‧면 위원장 가운데 대정의 우영하, 안덕의 김봉규, 남원의 현중홍, 표선의 조범구, 조천의 김시범 등은 미군정 하에서 초대 면장을 지냈으며, 김봉규, 현중홍은 ‘4‧3’발발 이후인 1948년 5월까지 면장 직에 있었다.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1945년 10월쯤이며 20명 정도에서 시작했다. 김정노가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하여 횔동하였고, 조선공산당이 나중에 남로당이 된 이후에도 김정노가 계속 주도했으며 특별히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다. 결국 1946년 말에는 중앙의 정치변화에 따라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무렵의 주도인물로는 안세훈(安世勳)· 김유환(金瑬煥)·  김은환(金誾煥) · 문도배(文道培) · 현호경(玄好景) · 조몽구(趙夢九)·  오대진(吳大進) · 김한정(金漢貞) · 이신호(李辛祜)·  이운방(李運芳) · 김용해(金容海))·  김정노 · 김택수(金澤銖)·  문재진(文在珍)·  부병훈(夫秉勳)·  송태삼(宋泰三)·  이도백(李道佰) 등을 꼽을 수 있다. 

1945년 11월 20일 천도교 강당에서 600여명의 대표가 모여 제1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위원장 오대진, 부위원장 최남식, 총무부장 김정노, 대정면 인민위위원장 이운방 등 4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다. 그들의 성향을 분석해 보면 오대진· 김정노는 좌익, 이운방· 최남식은 우익인물로 분류할 수 있다.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아놀드(Archibald V.Arnold)가 참석하는 ‘성의’까지 보였지만 인민공화국의 명칭 중 ‘국’자를 없애자는 미군정의 제안은 끝내 거절되고 말았다.

제주도 군정당국은 1945년 말 인민위원회 치안대 간부들을 소집해 치안유지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는 제주도 군정업무를 맡은 59군정중대의 묵인 또는 협력이 있었다. 인민위원회 산하에는 청년동맹‧부녀회‧소비조합 등이 있었는데, 치안대의 활동은 주로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 간부들이 맡아보았다.  

1946년 2월 17일 오후 5시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간담회를 개최, 안세훈(安世勳)을 비롯해 김정노, 고창무(高昌武) 김용해 등 30여 명으로 발기인을 구성 민전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1947년 2월 23일 각 읍면 대표와 사회단체 등 315명이 참석리에 민전결성대회를 개최, 의장단에 안세훈 이일선(李一鮮) 현경호 등이 선출되었다. 민전 집행위원으로 김정노외 33명을 뽑아 2월 24일에는 사무국장 김정노, 사무국차장 좌창림(左昌林), 조직주방 김정노, 선전부장 좌창림, 문화부장 김봉현(金奉鉉), 조사부장 정상조(鄭相朝), 재정부장 김두훈(金斗壎) 등으로 집행부를 결정했다. 김정노는 1947년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 준비위원회의 핵심인물로 동년 2월 17일 안세훈이 주도하는 3․1기념투쟁 제주도투쟁위원회의 동원선전부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본도 민전에서는 거(去) 24일 상임위원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하였다. 사무국장 김정노(金正魯), 차장 좌창림(左昌林), 조직부장 김정노(金正魯), 선전부장 좌창림(左昌林), 문화부장 김봉현(金奉鉉), 조사부장 정상조(鄭相朝), 재정부장 김두훈(金斗壎).’-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민전 간부측에서 김두훈(金斗壎)씨, 고창무(高菖武)씨 외 수명이 피검되어 목하 취조중이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3월 18일

‘도민전(島民戰)에서는 활동을 개시한 후 그 내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의장에 전 지사 박경훈(朴景勳)씨, 부의장에 김시범(金時範)씨를 추대하고 상무위원회도 결원 중인 사무국장에 고창무(高菖武)씨, 차장에 김창순(金昌淳)씨, 선전부장에 김행백(金行伯)씨, 조직부장에 문경원(文景源)씨를 선정하여 전 부서 결정도 완료되어 민주역량을 집결하고 임정수립의 전제인 미소공위에 적극적인 협력으로써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케 되었다는데 전지사 박경훈씨의 정계 등장은 의외의 일이었고 앞으로의 동씨의 활약은 자못 주목되는 바다.’-제주신보 1947년 7월 18일

‘거(去) 14일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경찰당국에서는 민전 간부를 비롯하여, 남로당원, 도 직원(학무과장 이관석씨 외 7명), 도립의원 직원(의사 1명, 간호부 1명), 우편국 교환수 등을 검거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후 ‘씨, 아이, 씨’와 경찰당국, 검찰당국이 협력하여 즉시 취조에 착수하였던 바, 17일에는 민전 의장 박경훈씨 외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는데, 18일 현재 판명된 바에 의하면 홍종언(洪宗彦) 한사택(韓四澤) 김인규(金仁奎) 백남섭(白南燮) 김이환(金二煥․婦女) 고봉효(高奉孝) 강대석(康大錫)씨 등 기타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며, 한편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를 비롯한 도 직원 7명과 민전 간부 등은 계속하여 검찰당국의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20일

3·1기념대회의 주역  

‘28주년을 맞이하는 3월 1일이 혁명운동기념일을 전도적으로 의의깊게 성대히 거행하기 위하여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7일 오후 2시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인사 다수가 읍내 김두훈(金斗壎)씨 댁에 회집하여 안세훈(安世勳)씨의 사회로 제반 토의가 있은 다음, 3․1기념행사의 모든 문제를 준비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하고 위원장에 안세훈씨, 부위원장에 현경호(玄景昊)씨, 오창흔(吳昶昕)씨 양씨를 추대함과 동시에 총무부, 재정부, 선전동원부 등 부서를 설치하고 위원 28명을 선정하여 5시 반경에 폐회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2월 18일

‘3·1기념일을 앞두고 각 학교 대표자회의가 있었는데 동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보았다 한다. 즉 3․1기념대회는 거족적으로 행하여야 할 것임에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와 보조를 같이할 것과 다음의 3단계로써 행동방침을 결정하였다. (1) 준비기간 중 각 학교별로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 (2) 3․1기념의 역사적 의의를 아동에게 인식시키고 아동을 통하여 학부형에도 인식시킬 것 (3) 투쟁기간에 있어서는 3․1운동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때문에 완전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것이며 기념행사에 대하여는 반성의 기한을 둘 것. 또 기타에 있어서 교원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원조합을 조직하기로 되었다는 바 하부조직이 완료하는 동시에 도적(道的)으로 조직할 것 등이라 한다.’-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민전 의장단에서는 25일 미인(美人) 경찰고문관을 방문하여 요담한 바 있었다는데 주로 3․1기념행사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1947년 2월 17일 읍내 관공서 단체 대표 및 지방유지로 3‧1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물론 김정노도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위원장 안세훈(53세) △부위원장 현경호(54세) 오창흔(35세)이 선임되었다. 3·1투쟁위원회에는 우익인사와 관공리뿐만 아니라 경찰 간부와 검찰 관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조직 총동원령을 내렸다. 당시 ‘3‧1운동 기념투쟁의 방침’에 나온 표어를 보면, 당면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적 애국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만세!’,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일제적 통치기구를 분쇄하라!’, ‘단일 누진제 즉시 실천!’, ‘입법의원을 타도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 파쇼분자의 근멸!’, ‘삼상회의 결정의 즉시 실천!’, ‘인민 경제를 파괴하는 모리배의 철저한 소탕!’,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신앙의 절대 자유!’, ‘식량문제 해결은 인민의 손으로!’

3‧1절 발포사건은 ‘4‧3으로 가는 도화선’이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일인 이날  읍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길목마다 배치된 무장경관들은 출입자들을 일일이 검문검색하고 있었다. 관덕정 광장에서 발포사건이 일어난 그 시각에 북신작로에서는 미군 장교가 지휘하는 무장경관대와 시위대가 정면 대치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족히 1000명이 넘었다. 시위대 선두는 감찰청장 관사(지금의 일도1동사무소 자리) 앞까지 진출해 있었으며, 그 꼬리가 '산짓물'에 닿을 정도로 북신작로의 동쪽 도로를 가득 메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군정 당국은 당황한 나머지 이에 대항할 우익단체인 독립촉성청연동맹과 광복회 등을 조직하여 좌익세력과 맞서게 하였으나 치안은 혼미를 거듭하였으며 급기야 군정당국은 중앙에 제주도의 불안한 상태를 보고하여 특별대책을 세워주도록 한 결과 100여명의 경찰 응원대가 도착하였고 연이어 서북청년단이 입도하였다.’-‘제주경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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