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새해 첫날

희망찬 새해 벽두, 만나는 사람마다 쓸쓸하고 괴롭다고 아우성이다.
언제부턴가 갑을로 관계를 규정하게 된 사람들이 서로 ‘을’이라며 ‘갑’에 대한 원망, 분노를 털어놓기 바쁘다. 지금 이 갑을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주 사람은 건설업자와 부동사중개업자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이들도 나름 ‘을’로서의 서러움을 토해내긴 하겠지만 전반적으로 활황이니 묻혀 넘어가는 일이 많다. 이러다가 ‘슈퍼 을 콘테스트’라도 열어 누가 가장 ‘을’인가를 헤아려보자는 말도 나옴직한 분위기다. 희망찬 새해 벽두부터 말이다.

나 역시 그렇다.
열심히, 열심히 일했지만 손에 잡은 성과물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두어 달 너무 힘들어 머리카락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온통 쓸쓸한 감정들이 나를 덮었다.
쓸쓸함.
쓸쓸하다면 나는 단박에 떠오르는 한 컷의 정지된 화면이 있다.
태어난 지 100일 조금 넘은 딸은 등에 업고, 태어난 지 만 2년 조금 넘은 아들은 손을 잡았다. 한쪽 어깨에는 큼지막한 기저귀 가방을 맸고 나머지 어깨에는 남은 한 손으로 잡은 우산을 지탱했다. 아이가 아파 병원으로 가는 그 때, 마음은 울적한데 비는 분위기 있게 내렸다. 너무 낭만적으로 내리는 비 때문에 나는 더욱 쓸쓸해졌고, 쓸쓸한 마음에 잠시 멍하니  발길을 멈춰 사방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남은 것은 그 사이 두 배가 된 쓸쓸한 감정이었다.

당시 내 등에 업혀  있던  딸은 이제 열다섯 살이 되었고, 그 사이 내 생각의 공간은 조금 넓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쓸쓸하긴 하지만 그때처럼 막연히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상황을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때는 쓸쓸함은 무조건 피해나가야 할 감정으로 규정되었지만 지금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내가 품어 감당해나가야 할 감정임을 알게 되었다.
흔히 좋고 나쁜 성격은 없다고 한다. 다만 서로 다른 성격이 있을 뿐이라고.
쓸쓸함과 행복도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 다른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우 박신양 씨도 같은 말을 했다. 지난 2013년 tvN의 스타 특강쇼에서 배우 박신양씨는 “러시아에서 유학 1년차,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스스로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요?”라는 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때 박신양 씨의 러시아 은사는 시집 한권을 건네주었는데  그 시의 내용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였다. 박신양 씨는 시집을 읽으며 즐거울 때보다 힘들 때가 더 많은 것이 바로 인생, 나의 힘든 시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답을 얻었다고 했다. 그의 결론은 당신이 가장 힘든 시간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힘든 것, 쓸쓸함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밝고 희망찬 나날들만이 아니라 괴롭고 쓸쓸한 나날들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쉽게 생각하면 온갖 고난을 다 이겨내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살았습니로 얘기를 맺는 동화를 생각해보라. 이미 동화나 소설 영화를 통해 이 결말에 의문을 품으며 새로운 버전의 얘기를 만들어낸 것이 흔해진 세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삶의 밝은 면만을 주목해왔다. 성공담이 차고 넘쳤고 그 대열에 끼지 못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도 그랬다. 쓸쓸함이 삶의 부분임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틈날 때 마다 생각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쓸쓸함도 삶의 부분이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
반드시 이 상황을 이겨내고야 말리라며 굳게 결심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러다가 한권의 책을 만났다.
이건범씨가 쓴 ‘파산’. 도서출판 피어나에서 냈고 부제는 ‘그러나 신용은 은행이 평가 하는 게 아니다’. 제목을 보라... 파산!
성공의 기록이 아니라 실패의 기록이다. 오래전 일도 아니고 더욱이 그가 이끌었던 기업의 제주지역 거래처였던 나에게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 책이었다.
책은 1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걸었는지, 그 후 어떻게 사회활동과 집필활동(시각장애 1급임에도 불구하고)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힘을 축적하는 과정이 힘의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바뀔 수도 있음을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한 파산에서 벗어난 방법은 이것이다.
“새로 시작하자. 과거의 틀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자. 자유로운 개인과 공동체의 연대가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향해. 그것이 최대의 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먼 길 떠나자. 우리 길을 가자.”

난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나의 쓸쓸함을 바라보았고 그 쓸쓸함을 받아들이고 다시 다음 길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의 노력은 완결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쓸쓸함도 힘이고 쓸쓸해도 삶임을 알게 되었다.
이 힘을 바탕으로 나의 노력은 계속 될 것이다.

희망찬 새해 벽두, 무조건 참고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우리가 어떤 길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길을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냉정하게 실패의 경험을 되살리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막연한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느라 과거의 실패를 가볍게 보고 현재의 문제를 눈감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누가 우리를 그 길로 몰아가고 있는 가를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파산의 두 번째 장 제목이 ‘때로 악마는 열정으로 유혹한다’이다.)

민족의 대명절 설이다. 흩어졌던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덕담과 정담을 나눌 것이다.
또 제주의 미래에 대한 많은 의견들이 오갈 것이다. 예를 들면 제주의 땅값이 계속 오를 것인가, 몇 년 뒤에 거품이 빠질 것인가.
난 정답은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얘기들도 오갔으면 좋겠다.
제주인의 삶을 돌아볼 때 언제가 가장 좋았는지, 후회스러웠던 일은 없는지, 모양은 좋아졌지만 내용은 부실했던 것은 무엇인지.
또 집에 돌아와서는 차분하게 각자의 삶을 돌아보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미래의 삶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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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섬(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늘 하는 얘기지만 나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감히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모두 너무들 괴롭다고 하니 같이 한 번 힘내보자고 용기를 내보았다.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기 좋은, 새로운 틀을 짜기 좋은 새해 첫날 설날 아닌가.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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