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재선충병에 떨고 있는 한 그루 늙은 소나무의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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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낱 볼품없는 한그루 늙은 소나무일 뿐입니다.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그 놈의 재선충병 때문에 제 친구, 후손들까지 멸종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저는 ‘볼품없는’ 한 그루 늙은 소나무입니다. 제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제 나이가 몇인지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20년이면 하늘도 변하다’고 했으니, 어림잡아 하늘이 서너 번 변한 듯합니다. 역시 세상은 험준하여 ‘언덕이 골짜기가 된지’ 오래됐습니다. 그래도 저는 오늘도 변함없이 뒷동산에서 아랫마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이 저만치 다가왔는데, 요즘 왜 이렇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슬프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독야청청’ 굳건히 살아온 우린데, 이렇게 무력감을 느껴 보긴 처음입니다. 이 모두가 그 재선충병 때문입니다. 작년에 제 이웃 몇몇이 그 병으로 생을 다하더니만, 요즘은 제 옆에 있는 친구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그 빛나던 솔잎이 향기를 잃고 며칠 전부터 신음만 토해냅니다. 한번 앓기 시작하면 살아날 길 없다는데…. 너무 무서워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지금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저 같은 늙은 소나무야 이제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만, 정말 이러다가 우리 후손들이 멸종되는 것이 아닌지 매우 두렵습니다. 오늘도 멀리서 제 친구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전기톱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 어렵다고 하여 어찌 사람들만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을 위해 일하다가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은 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지역에 맞는 방제 매뉴얼’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결과적’으로 그건 10년 동안 8백억원 넘는 예산을 헛되게 낭비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방제’란 말도 그렇습니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인데, 그 생명을 놓고 ‘선택과 집중’운운은 참으로 듣기 거북합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자’는 말도 마찬가집니다. 나무가 건강하지 못하면 숲도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선택과 집중’이란 명분으로 ‘일정 고지 이하 소나무’는 모두 포기하자는 주장이 나올까 심히 두렵습니다.

사람들만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닙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과 나무와 노루와 꿩, 저 딱따구리와 까마귀 모두 이 아름다운 제주의 구성요소입니다. 아주 작아서 있을 듯 말 듯한 작은 들꽃도 사람들 발아래서 숨죽이고 있지만, 모두 이 땅의 거주자입니다. 그건 지역생태계로서의 총체성입니다. 이들 모두는 스스로 전존재를 통해 바로 진리임을 파지합니다. 만일 ‘제주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 이들 모두와의 관계에서 오는 직접적 감각일 터입니다. 그래서 병든 소나무쯤 베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합니다.

먼 나라 이야기지만, 개발로 인해 파괴될 나무와 산등성이도 사람들처럼 ‘법적지위’를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법적 권리의 본질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합니다. 권리는 어딘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침해에 이의를 달 수 있는, 공공적으로 권위 있는 조직에 의해 승인될 때 비로소 존재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 발전의 역사에서 사회적 애착의 대상은 계속 확대돼 왔다”는 진화론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보호대상을 자연물로 확대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후견인 또는 보호자 등을 지정하면 ‘법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로 확실하게 자연물의 이익관심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유명한 말이 등장합니다. “스모그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소나무의 후견인이자 소송대리인은 그의 고객이 스모그 없기를 희망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스모그’를 ‘재선충병’으로 바꾸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됩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인심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제넘은 소리 같지만, 저는 사람들이 오로지 나무와 돌과 숲과만 관계를 맺으면서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주위환경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제가 서 있는 동산 앞으로 도로공사가 한창입니다. 사람들은 그럴수록 자연과의 생태적 총체성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멸종된 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자연의 모든 존재는 서로 거울이자 상(像)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비추고, 여러분들이 저를 비춥니다. 이렇듯 이 아름다운 제주를 구성하는 존재들은 서로 관련돼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멸종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혹 그것이 재앙이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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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선충병으로 시름시름 앓고있는 제 친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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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선충병에 감염된 고사목 제거 현장. <제주의소리 DB> 

요즘은 ‘생태주의적 언어’가 유행이다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떠나간 자리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도 입으로는 서슴없이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른바 ‘높은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연이 주는 심오한 이치를 외면한 채 생태주의적 사고를 운위하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그것은 무익합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이 불러내는 감정과 염려로부터, 그리고 경이와 경외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또 다른 위선일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분통이 터집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운명이 사람들의 행정적 도식에 의해 항상 밀리는 것도 ‘감정 이입적’으로 모든 생명체를 염려하는 마음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늙은 소나무 주제에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원래 자연이란 ‘말 없음’입니다. 그래서 제 ‘말 많음’은 그 본의에 어긋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자연의 말 없음’은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연을 사유의 중심에 놓자는 것이지, 우리들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말’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들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의 언어’로 우리들 소나무와 꿩 노루 등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말’로 저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합니다. 다만 우리들은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스스로를 자연과 구별되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그 어떤 방제 매뉴얼도 모든 생명체를 염려하는 마음을 그 바탕에 둬야 합니다. 그리고 서둘러야 합니다. ‘미래의 가치와 자연 생태계를 고려한 숲의 조성’도 다르지 않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그 곳입니다. 재선충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도 저는 주책없이 오늘도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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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잎과 숲의 모든 잎사귀들이 나눈 선율’이 흐르는, 그리하여 모든 존재들이 빛과 생명으로 물결치고, 이 아름다운 제주 땅에서 생의 영원한 흐름이 이어질 수 있다면….

안타깝습니다. 글쓴이의 붓이 워낙 무뎌 제 생각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소연합니다. “우리들을 좀 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새 봄이 무척 두렵습니다. / 강정홍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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