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의 섬’ 제주도는 예부터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경제·사회활동에 참여해왔다. 비정규직 증가, 경제불황, 양극화 심화 등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국내 경기악화 속에 열악한 육아환경은 비단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1차산업과 서비스업 편중 등 불리한 산업구조와 양성평등 인식이 부족한 지역사회 분위기 속에 제주여성들은 일과 육아 모두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주의소리]는 '3.8 세계여성의 날'을 앞둬 출산부터 육아, 재취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 워킹맘(workingmom)들이 부딪치는 현실 문제와 대안을 세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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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제주여성들은 열악한 일자리와 편향된 양육역할이라는 이중부담을 안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여성, 워킹맘의 눈물] ① 임산부 보호 근로기준법은 '허명'...직장풍토 개선부터

사례 1. 금융업에 종사하는 30대 A씨는 “회사 여직원들끼리 순서를 정해서 임신하는 것이 어떠냐”는 몇 달 전 상사의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는 “물론 강제성 없이 흘리는 말이었지만 젊은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다들 알아서 (임신 주기를) 조절하자’는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현재 임신 중인 A씨는 아이를 가지기 전과 같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사측은 임신 중인 여성근로자에게 시간외 근로를 하게 해선 안되고, 근로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 쉬운 종류의 근로로 전환해야 한다는 근로기준법 내용을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없다. 여전히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근무시간에 잠깐 휴식을 취할 여유도 분위기도 되질 못한다. 근로기준법 조문은 현실 앞에선 그저 허명의 문서일 뿐이다. 

회사가 나서서 임산부 직원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혼자만의 생각일 뿐 강압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바뀌는 것은 없다. 배려에 대한 희망은 자연스럽게 인내와 눈치로 바뀌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다.

‘우리 땐 육아휴직도 제대로 못쓰고 일하러 나왔다’는 일부 선배 여직원들의 사연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 되레 이런 말을 들을때면 괜히 죄라도 짓는 기분이 든단다. 그녀는 맘 편하게 출산을 준비하고 싶지만 “빨리 휴가를 받게되면 그만큼 출산 후 아이를 키울 시간적 여유가 줄어든다”며 출산을 코앞에 둘 때까지 일해야 할 것 같다고 긴 숨을 내뱉었다. 

사례 2. 사무직에 종사하는 40대 B씨는 자녀를 두 명 키우는 ‘워킹맘’이다. 현재 직장에서 근무한 지는 1년 밖에 되지 않지만 출산과 육아기간 3년을 포함해 다른 직장 근무경력까지 포함하면 워킹맘 10년차다.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복귀한 직장은 주 5일제도 아니었고 정시 퇴근도 힘들어 마음고생이 심했다. 둘째 아이를 낳은 지금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서류는 통과했지만 면접마다 가장 먼저 물어보는 질문이 ‘애가 어린데 육아는 어떻게 하냐?’였다. '직장생활에 전혀 문제없다'고 자신 있게 답변했지만 마음은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재취업을 했지만 하루하루가 고된 일상이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오전 5시 30분경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들 밥 먹이고 큰 아이는 학교에, 작은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낸다. 오전 8시 30분 정도에 출근하고 오후 6시경에 퇴근해 작은 아이를 데리고 귀가하면 오후 7시가 넘는다. 집에 오자마자 저녁준비하고 애들 씻기고 재우면 남아있는 집안일을 한 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야 잠자리에 든다.

그녀는 “내 시간 같은 것은 아예 없다. 간단한 운동조차 할 수 없다. 하루 종일 반복되는 일상”이라며 “나는 아파서도 안 되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 할 수 없는 슈퍼맘이다. 슈퍼맘의 눈물을 누가 닦아줄까”라고 되뇌었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차라리 '내가 아픈게 낫다'는 생각이 한두번이 아니란다. 아이 병치레를 하느라 몸도 힘들지만 그것보다 일하면서 잘 돌보지 못해 아이가 아픈 것 같아 마음의 고통이 더 심하다. 방학이라도 되면 초등돌봄이나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고 싶지만 부족한 정원에 밀리기 일쑤다.

그녀는 “너무 힘들 때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워킹맘으로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떠오른다. 그래도 맞벌이 하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려우니 다시 용기를 낸다. 고되고 힘들지만 잘 커주는 아이들과 조금씩 발전하는 나 자신을 보며 느끼는 보람은 큰 원동력”이라고 밝혔다.

2013년 기준 도내 사업체 종사자는 22만6734명으로 이중 남성이 11만7983명으로 52%, 여성이 10만8751명으로 48%를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여성종사자 비율은 전국 평균인 42%를 넘어 전국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전국적으로 제주가 일하는 여성이 가장 많다는 의미다.

과거 바다일, 밭일을 모두 책임지며 자녀를 키웠던 제주여성들의 고된 삶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시대만 바뀌었을 뿐, 열악한 일자리 환경과 편중된 육아부담은 여성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부담이다.

지난해 6월 기준 취업자 수 가운데 제주의 임시직·일용직 비중은 30.7%로, 30.9%인 부산에 이어 전국 최고 수준이다. 2012년 기준 도내 10인 미만 사업체는 1842곳으로 전체의 90%를 차지한다.

열악한 일자리 만큼 임금수준도 떨어진다. 제주 청년층 상용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159.5만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낮다. 

제주도가 2013년 6월 실시한 ‘제주지역 청년고용 활성화를 위한 설문조사’에서도 도민들은 ‘제주지역에 괜찮은 일자리가 있냐’는 질문에 72.3%가 ‘없다’고 답했다.

꾸준히 증가하는 취업자수, 전국 최저 실업률도 실상은 ‘살려는 몸부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육아부담도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 (재)제주여성가족연구원은 지난해 10월 도내 여성 322명을 대상으로 24시간 어린이집 관련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영유아 자녀를 양육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37.3%(120명)이 ‘과중한 양육 및 가사준비’를 꼽았다. ‘맡길 곳이 없다’는 대답이 14.9%, ‘보육비 부담’이 12.1%로 뒤를 이었다.

질 낮은 노동환경에서 여성들은 제 권리를 찾기 어렵다. 제주사회에 만연한 남성 중심의 경직된 직장분위기까지 더해지며 여성들은 일 자체가 불편한 ‘눈칫밥’이 된다.

전문가들은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장, 가정에서의 의식 개선과 정부의 정책방향이 중요하다고 꼽는다.

김희정 제주여성인력개발센터 관장은 “젊은 어머니들을 상담해보면 어린이집에 맡긴 아이를 데리러 정시에 가깝게 퇴근할 때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느껴지는 압박을 가장 힘들어한다. ‘역시 어린 애 키우는 유부녀는 책임감이 없다’는 시선이 느껴져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고들 하소연한다"고 전했다.

김 관장은 “사소하게 보이겠지만 출퇴근 시 아이들 바래다주고 데려오는 일부터, 가사노동 하나하나가 일하는 여성들에겐 큰 부담이 된다. 남자들도 가사분담에 솔선해서 노력해야 한다”며 “그러므로 직장 내에서나 남성들 사이에서도 '가정적인 남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손태주 (재)제주여성가족연구원 박사는 “직장 내에서의 여성 동료에 대한 시각 변화는 경영자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며 “기본적으로 회사 경영자가 양성평등 인식을 갖춰야 하며, 나아가 양성평등하게 회사를 개선해야겠다고 느낄 만한 중앙·지방정부의 강력한 정책지원도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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