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43) 좌우대립으로 혼란에 빠진 도내 중등학교 

▲ 제주공립농업학교의 1938년의 수업장면. 1946년 제주공립농업중학교로 개편되었다.

해방공간, 좌우 학생운동의 대립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들은 지금까지 온갖 모순된 환경 속에서 부자연한 경제혼란을 물리치고 오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사랑하고 암흑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한 우리민족의 계몽투사가 되기 위한 학도이었었다. 연(然)이나 해방이란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이란 것은 일제시대와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해방이요? 특권권력은 날이 갈수록 학원의 연구와 발표의 자유란 것은 꿈꾸지도 못할 견지에 도달함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금반 3․1기념행사를 돌아보면 온순하고 순박한 다수 민중들에게 잔학무도한 발포 난사로 수다한 희생자를 냄과 동시에 평화적이고 진리를 탐구하는 학도들에게 노상에서 혹은 기숙사에서 불법 검속을 하고 고금동서에 예를 볼 수 없는 야만적인 고문을 가하여 이번 살인죄를 학도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악질경관의 만행에 대해서는 피 있는 청년학도로서 수수방관할 수 없으며 자유학원에 대한 부정한 외부 간섭이 날로 심하여 감은 실로 유감천만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민주학원 건설과 미래의 완전을 기하기 위하여 다음의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맹휴(盟休)를 단행함.’-제주신보 1947년 3월 12일(중등교생 성명서)

당시 중등교생 <생도합동대책위원회>의 요구조건은 △발포한 책임자 강동효(姜東孝) 및 발포한 경관을 살인죄로써 즉시 처형하라 △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인책 사임하라 △피살당한 유가족에 대한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며 피상자(被傷者)에게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경찰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경찰내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3․1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경찰의 학원간섭 절대 하지 말라 △교원과 생도의 최저의 생활을 보장하라 △국립대학안(國立大學案)을 즉시 취소하라 △고문한 경관에 대하여 철저히 처형하라 △교정과 관사를 반환하라, 등이다. 

1947년 ‘제28주년 3·1기념 제주대회’도 불상사로 끝났다. 3월 10일부터 도청직원을 비롯하여 신한공사 종업원, 운수노조, 제농(濟農) 제중(濟中) 오중(五中) 교양(敎養) 생도 및 교원, 동남북국민학교 교원, 항무서원, 측후소 직원이 총파업을 단행하였고, 11일에는 식량사무소 직원, 군청, 읍사무소 직원, 우편국 직원, 남진운수사 종업원, 무선국 종업원, 상호은행지점, 고녀(高女), 전매서, 금융조합 역시 파업을 단행하였다.   

진압당국은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을 적극 활용했다. 전국통일학생총연맹(全國統一學生總聯盟‧이하 ‘학련’으로 약칭)도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다. 학련(學聯)은 중앙에서 계몽대를 파견하였고, 제농교생을 중심으로 전국학생총연맹 제주도지부 결성대회를 개최하고, 위원장 나운수(奈運洙), 부위원장 김호산(金浩山)을 선임하였다.  

김달삼(金達三)과 이덕구(李德九)는 1947년 초 중등교원이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 총책 김달삼은 대정공립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과목을 가르쳤으며, 인민자위대 사령관 이덕구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담당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또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김용관(金龍寬)은 하귀국교 교장으로, 조직부장 고칠종(高七踵)은 농업학교 교원으로, 일본으로 피신해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저술한 김봉현(金奉鉉)은 오현중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947년 초에 안세훈·이일선 스님과 더불어 제주민전의 공동의장을 맡은 현경호(玄景昊)는 제주중 교장으로 재직했다. 1948년 10월부터 제주농업학교 임시수용소 천막과 제주경찰서 유치장에는 연일 주민들이 끌려 들어왔다. 특히 토벌대는 현경호 등 교육계 인사를 비롯하여 유력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이 무렵 희생된 사람으로는 현경호(초대 제주중 교장, 민전공동의장), 이관석(제주중 교장), 김원중(전 제주남교·, 성산고성교 교장), 채세병(제주도학무과 장학사), 현두황(제주중 교사) 등 교육계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前) 전국학련 돌격대는 각 중등학교 학도호국대원 중 우수한 간부로서 구성되어 본도에 있어서도 2연대 주둔당시 군사훈련, 폭도토벌 등 눈부신 활약을 한 바 컸었는데 금반 또다시 북한 괴뢰집단의 불법 남침과 만행에 대하여 조국 사수와 승리를 맹서하고 본도 학도돌격대원 일동 ○○○명은 죽음으로써 국가 민족을 구해내겠다 하여 자진 심신연마를 도모하고 8월 2일부터 합숙훈련을 실시하고 있는데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일선에 출전할 수 있도록 만단(萬端)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한다. 그런데 중요 간부는 다음과 같다. 돌격대장(前 학련 위원장)  김호산(金浩山)/ 교관(前 농중 학도대장) 송봉규(宋奉奎)/ 교관(농중 학도대장) 고남화(高南化)’-제주신보 1950년 8월 4일

‘【제주 발 조통】폭풍 가라앉은 뒤 가리어져 있던 지난날의 몸서리치던 상처가 이곳저곳에 나타나고 있다. 기자단 일행은 가장 큰 희생을 내었고 또한 쌍방의 교전이 치열하였던 애월면 하귀리를 찾아 이곳 중학교의 교원과 생도에게서 당시의 정경을 들었다. “눈앞에 선한 당시의 실상을 지금 얘기만 하려도 몸서리납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약 1개월 후에 경찰응원대가 폭도들을 소탕한다고 하여 70노인과 소학생까지 포함한 18명의 도민을 마을에서 사살하였습니다. 피살자 가운데에는 경찰에 협력하는 사상을 가진 자도 있었으나 가리지 않는 무차별 사격이었습니다. 우리 학교의 어린 두 학생이 그 당시 무참히도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입술들은 떨렸다. 다시 기자단 일행은 부락민을 찾았다. “그때 이 앞 신작로에는 시체가 즐비하였수다. 피가 흘러서 길이 아롱이 졌고…” 말하는 부락민 가운데에는 희생당한 젊은 청년의 노모가 우두커니 서 있다. 5․10선거 전후 경찰에 인치되어간 다수의 사람이 행방불명이 되자 국방경비대나 경찰에 그들의 행방조사를 의뢰했으나 소란 가운데 찾지를 못하였다. 그런데 한사람이 불덩이가 꺼지자 무참히도 여기저기에 유기된 시체로 나타나고 있다 한다. 관민이 유리된 탓이라 할까. 도민의 억울한 사정은 호소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한림면 저지와 조수국민학교에서는 7월 초순 경찰응원대가 개최한 계몽강연에 모인 군중 앞에서 1명의 경관과 동 후원회원이 교장과 교원 1명을 “경찰에 협력한 일이 있느냐”고 빈사상태에 이르도록 구타하였다 한다. 피해자는 전치 2개월의 중상을 입었고 부락민은 다만 실색하였을 뿐이었다. 경찰청장도 이를 긍정하였고 가해자는 구속 문초중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제발 이 곳 뿐이기를 제주도민 어느 누가 원하지 않으리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23일

▲ 제주공립농업학교.

제주공립농업중학교

‘삐라 관계로 교양생 남녀 생도 십수명과 농교생 1명이 제1구서에 구금되어 있다 함은 기보한 바 있거니와 그 후 진전에 대하여 1구서장이 언명한 바에 의하면 그 중 농교생 1명은 경찰에서 일반 취조가 끝나 5일 검찰청으로 사건 송치되었다 하며 교양(敎養) 남생도 10명, 여생도 2명도 역시 방금 취조 중에 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6월 8일

‘제농(濟農) 김계용(金繼庸)교장은 동교 내분에 관하여 여좌히 말하였다. “본교는 전부터 사제간에 미묘한 대립 경로가 있었으나 적극 그 수습에 노력해 왔다. 이번 내분에 있어도 교내에서 원만 해결을 보려 애썼으나 결국 결렬되고 말아 학교당국으로서는 이를 상부에 보고하여 상부의 적절한 조치밖에 바랄 수 없다. 팟쇼 교원 규정에 있어서도 그 선생이 부임 후 10여일 밖에 안되었고 그 선생의 교육이념 있는 만큼 시일이 경과된 후가 아니면 간단히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파면된 교원을 복직시킬 수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제주신보 1947년 7월 14일

제주공립농업중학교는 1910년 개교되었고, 1920년 제주공립농업학교로, 1946년 6년제로 개편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이곳에 미군과 4·3토벌대가 주둔하였다. 1945년 9월 28일 제184보병연대 그린(Roy A. Green) 대령과 38명의 장교와 사병이 내도해 일본인 도사(島司)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은 곳이 바로 제주공립농업중학교이다.

1945년 겨울부터 교사는 물론 학생들 사이에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어 적색기(赤色旗)가 걸리고, 죄익성향의 노래를 가르친 교사도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 책임을 맡은 고칠종(高七鍾)도 교사였다. 전국학련 제주도연맹 사무소가 제11연대가 주둔하고 있던 제주농업학교 기숙사에 설치되었다.

3·1사건 이후 학생과 학교당국 간에 내분도 있었다. 1947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학생들은 일제잔재 교육과 파쇼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였다. 3·1사건으로 집행유예의 판결을 받은 3년생 김봉휘(金峰輝)와 김모(金某)에 대하여 퇴학처분을 단행하자 학생들은 퇴학처분을 취소하라는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1) 퇴학처분을 취소하라 (2) 파면당한 선생을 복직시켜라 (3) 팟쇼 교원을 숙청하라 등 요구조건에 대하여 아무런 타협점을 보지못했다. 7월 8일 2~3학년 학생들이 합동 퇴학원을 제출하였고, 10일에는 1, 4, 5년생들이 2~3학년의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하여, 사태는 학교 대(對) 학생들의 대립으로 바뀌었다. 

1947년 9월 15일 학생들이 친일파 학생들이 다녔던 제주중학교 건물을 파괴하였다. 1948년 5월 26일 동맹휴학을 옹호하는 삐라가 살포되었다. 삐라는 ‘인민희생회’라 칭한 사람들의 명의로 동맹휴학에 따르지 않는 모든 학생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삐라가 살포된 곳은 기숙사 안으로, 그 곳에는 경비대의 무기와 탄약이 보관되어 있었다.  

‘제주도감찰청 발표에 의하면 제주농업중학교 6년 농과 생도 전창규(全昌圭․당20년)군은 남로당에 가입하여 하급 생도들에게도 가입권유 하는 등 공작을 계획하다가 금반 경찰당국의 지도에 의하여 심사(深思)하는 바 있어 기금(旣今)까지의 행동을 회개하고 ‘학생의 본분을 지킴과 동시에 조국광복에 이바지함’ 이라는 혈서와 별항과 같은 성명문을 감찰청에 제출하였다는 바 동 성명문의 내용은 대략 여좌하다 한다. 민족생사의 엄숙한 현실에 처하여 학생으로서 조국의 자주독립에 이바지하는 길은 오로지 학업에 정려(精勵)함으로써 장차 신생조국의 초석될 각오를 게을리 않을 것이며 아울러 조국을 망치는 분자에 대해서는 철저한 소탕을 해야할 것이다. 이에 자기의 과거를 회고할 때에 학생의 신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해온 나는 말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이겨낼 수가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마취된 나는 1947년 1월 10일 김근수(金根洙) 선동에 빠져 남로당에 입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입당해 보니 나의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학생은 학생답게 공부해야 할 것이며 주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마취될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자기신념을 가진 연후에 참다운 조국을 살릴 수 있는 단체에 들어서 이바지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 학생들이 무슨 까닭에 일개 정권 혹은 단체의 이용물이 될 필요가 있는가. 나는 지금 감히 남로당을 탈당하며 이상과 여(如)한 점을 조선 백만 학생에게 부르짖고 싶고 또한 과거의 나의 과오를 사과함과 동시에 앞으로는 학생의 본분을 지킴으로써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에 공헌할 것을 굳게 맹서하며 자에 성명함. 제농 6년 전창규’-제주신보 1947년 12월 22일

▲ 오현중학교 제1회 졸업생들 기념사진(1947년 7월)

오현중학교

‘방금 노변에 혹은 저포 앞에 일석(一昔)을 회고케 하는 때 아닌 양과자가 가경(可驚)할 고가로 번매(繁賣)되어 항간에 널어져 가는 현상에 감(鑑)하여 도내 중등학교 연맹에서는 10일 “조선의 식민지화는 양과자로부터 막자”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동원된 제농(濟農), 오중(五中), 제중(濟中), 교양(敎養) 등 무려 천 수백 명이 관덕정 광장에 지회 하에 “양과자 수입을 절대 반대하자”라는 아우성 천지를 울리게 외치며 일대 시위행렬을 전개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2월 10일 

‘【제주】요즈음 경향 각지에 인민공화국기를 게양하여 일반의 화제가 되고 있는데 제주 읍내에서도 여기저기서 게양되었다. 또 지난 30일 밤 제주읍사무소를 비롯하여 오현중학교 국기대에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하며 제주북국민학교 교정에도 난데없는 기가 떨어져 있었다 하는데 경찰당국에서는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피의자 1명을 체포하고 문초 중에 있다 한다.’-서울신문 1948년 10월 13일

해방 직후 학병동맹(學兵同盟)은 일본군에 징병됐다가 해방 이후 귀환한 1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처음에 치안활동에 관심을 두다가 점차 문화사업에 비중을 두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업으로 제일중학원 설립을 주도하였다. 오현단의 적산건물을 학교로, 1946년 3월 3일 문을 열었다. 10월 22일 오현초급중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설립인가 되었다. 당시 교사로는 양명율· 김종현·  김호전·  김봉현·  백우원·  문태원·  양세민 등이었다. 김봉현은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1946년 12월 19일 오현중 맹휴사건은 학생들의 진보적인 연극활동을 일부 교사가 제지하면서 일어났다. 학생들은 연극문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제교육의 잔재임을 들먹거리며 항의운동을 벌였다. 1947년 1월 20일 각계 대표들이 모여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학교 당국을 비롯해 부형회, 도 학무과와 교육단체인 문화협회, 교혁동맹, 교사회, 그리고 제주농중·제주중·제주여중 학생대표들이 참여하였다. 오현중 맹휴사건은 문모·양모 두 교사가 사의를 표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오현중 맹휴사건 다음 시도가 양과자 반대시위였으며, 두 번째의 시도가 바로 3·1절 시위였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학생들은 오현중 교정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교장 서리 강순현(姜淳鉉)은 학생선동 혐의로 투옥되어 집행유예를 받은 후 교직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1947년 9월 15일 오전 11시께 제주농업학교 학생 500여명이 오현중학교로 몰려가서 건물 1동을 완전히 박살냈다. 오현중학교가 위치했던 토지의 사용에 대하여 제주농업학교 학생들과 오현중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1947년 하반기 일제잔재 교육과 파쇼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4·3 무렵 교무실 책상 서랍 속에서 ‘미제(美帝)만행 분쇄하자’는 삐라가 나왔고, 교사 현채운과 김치문이 희생되었다. 1948년 1월 우익교사가 가르치는 공민시험을 본 학생들에게 좌익계 학생들이 폭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강봉순·백옥민 등이 학련에 가입하여 학교를 순찰하던 중 수류탄을 발견하여 신고했다. 강봉순은 삼양을 중심으로 신촌· 봉개· 화북 일대의 학생 50여명(여학생 10명 포함)으로 동부지구학도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49년 1월 3일 삼양리에 무장대의 침입으로 학도대의 본부가 기습을 받아 김두추· 이화생· 장영애· 김용배· 장무종 ·이계담 등이 희생당하고 2명이 총상을 입었다. 상급생 장동석은 조선민족학생단 단원으로 활동하여 대동학생단과 자주 마찰을 일으켜 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았다.

1949년 1월 22일부터 2월 21일까지 제주농중· 오현중· 제주중 간부학생 138명이 오현중 교정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5월 20일 오현중 교정에서 제주도학도호국단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지원해 해병대4기생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전에 참전했다. 

‘교정에 집합한 수백 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출정을 지원한 통쾌한 사실이 있다. 방학중에 있는 시내 오현중학교에서는 동교 지정 등교일인 지난 5일 등교한 동교생 400여 명은 교장 이경수(李慶守)씨의 시국에 관한 훈화(訓話)가 끝나자마자 생도대장 전제문(全濟文)군을 비롯하여 생도 간부를 포함한 전 423명이 “우리는 이 비상시국에 그냥 있을 수 없다. 일선으로 나가 싸우겠다”는 결의도 아름답게 출정을 지원하였는데 현장에서 혈서를 쓰는 장쾌(壯快)한 광경도 허다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들 지원자 중에는 18세 미만의 생도가 적지 않아 교직원들을 더욱 감격케 하였는데 그 후에도 지원자는 매일같이 답지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동 교장서리 이경수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장 무명지를 깨물고서 혈서까지 하는데는 아니 놀랄 수 없다. 이러한 용사들이 나의 가르친 학생이었던가 생각하니 스스로 눈머리가 뜨거워짐을 못 참았다. 또 우리 교직원들이 감명한 것은 나이 어린 하급 학생까지도 우리라도 왜 총을 못 멜 수 있겠느냐 수속을 해달라고 대드는 것이었다. 그 지성을 지워버릴 수도 없고 해서 도학무과에 연락해 보았더니 특별지원 수속을 밟을 수 있다길래 모두 수속을 완료하였다.”’-제주신보 1950년 8월 9일

▲ 제1회 제주여중 수료식(1947년 7월 16일)

제주여자중학교

‘1947년 6월 13일~1947년 6월 14일 (NO. 604, 1947. 6. 14. 보고) 제주여중 동맹휴교 /민간인 소요 (발췌: 1947년 6월 12일자 방첩대 보고서) 파업: 6월 2일 제주도에서 제주여중 3학년 학생 약 180명이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요구는 무엇보다도 교장에 대한 반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요구사항은 (1) 교육과정 심화, (2) 파쇼교육 중단, (3) 학교 내 파쇼분자 추방, (4) 교장의 행동 시정 등이다. 아직까지 정치적 색채는 눈에 띄지 않지만 파쇼적 요소나 지배에 반대한다는 외침은 모호하지만 ‘붉은 색조’를 띄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주한미육군 제6보병사단((6th Infantry Division,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1945. 10. 1~1948. 12. 21

1946년 2월 10일 제주고등여학교로 개교하고 초대교장 홍순녕(洪淳寧)이 취임하였다. 1947년 5월 12일 제주여자중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4·3사건 혼란기에는 동맹휴학, 좌우학생 및 교사 갈등으로 학사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좌익사상을 가진 학생들이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학련’이라는 우익단체 학생들은 좌익 학생들을 데려다 매질을 하기도 하였다. 군이 요청하자 20여명으로 무용단을 조직하여 선무공작활동을 지원하였다. 무장대 지원활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학교에서 수시로 성금을 거두어 산에 올리기도 하였다. 1949년 여중독서회 회원 중 5명이 입산한 사건이 발생하여 귀순공작을 벌여 하산시킨 사례도 있었다.

무장대 지원활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주로 식량과 의복 등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동문로에 위치해 있던 제주여중은 수시로 성금을 거둬 산에 올렸다. 당시 한 학년에 두 반이 있었는데 한 반의 학생수가 60명이니까 전교생은 360명이었다. 대부분 성금을 냈다. 그런데 대동학생단(곧 學聯으로 개편) 소속 학생 11명만은 성금을 내지 않았다. 

당시 제주농업중학교, 오현중, 제주중과 함께 학생들 사이에는 연계가 있었다. ‘독서회’를 통해 사상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독서회를 열다가 경찰이 오면 돌담을 뛰어 넘어 도망갔다. 하루는 학교에서 동맹파업을 해 모두가 학교 밖으로 나오자 어딘가로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호리 지경으로 생각되는데 학교 마당 같았다. 처음엔 단합대회인가 했는데 그게 바로 입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산에서는 삐라 문구를 적어 등사하는 일도 있었다.

‘【제주】현하 각 중등학교에서는 배속장교가 있어 학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나 제주도에는 아직 배속장교가 배치되지 않고 있는데  군사훈련교육의 긴급성에 비추어 독립대대장 김용주(金龍周) 중령의 특별조치로 현역장교를 제주읍 각 남녀중등학교에 배치하였는데 제주여중과 제주중학에는 강성희(姜成熙)중위가 취임하였다.’-서울신문 1949년 9월 17일

▲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어린이와 초등학생들.

제주북국민학교

‘제주경찰 특별수사대에서는 지난 7월 22일부터 활동을 개시하고 제주관재처를 비롯하여 북국민학교 제주측후소 언론기관등 광범위에 걸쳐 16명을 검거하였다. 체포의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탐문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5월 상순경부터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지하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며 전기 16명은 지난 8월 1일 전원 송청되었다.【제주 7일 발 조통】’-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8일

‘1948년 10월 15일/ 구국투쟁위원회 조직/ (정보요약 제33호) 제2부: 방첩대 정보보고/24군단 971방첩대/(4) 구국투쟁위원회(Country Relief Struggling Committee): 남로당(SKLP) 전위조직인 구국투쟁위원회가 48년 5~6월 동안에 제주도 남로당에 의하여 조직되었는데 남로당의 목적을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구국투쟁위원회는 회원의 확보, 선동의 확산, 정보 수집, 방화‧암살단의 조직, 단독정부 반대라는 수단을 통하여 남로당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남로당 간부들이 구국투쟁회의 주요 간부직을 차지하였다. 세포조직은 남로당과 민주애국청년동맹(Democratic Patriotic Young Men's Association) 회원들에게 자신들이 구국투쟁회의 회원임을 알림으로써 창립되었다. 구국투쟁회의 회장은 강대석(Kang Dai-suk)이다. 세포들이 대부분의 학교, 기업체와 정부기관에 조직되었으나, 경찰에 세포조직이 있다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48년 6월 16일 제주도 학교들의 남로당 세포들의 연락담당 김학림(Kim Hak-lim)은 제주읍 북초등학교의 남로당 당원인 5명의 교사들에게 그들은 구국투쟁회의 회원이며 그들의 임무는 가능한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 다른 교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학림은 교사들 중 한 명에게 비좌익 교사들에 보낼 위협 편지의 초고를 넘겨주었다. 김학림과 관련 교사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소량의 벌금형과 더불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3급비밀) (후략)’-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민정정보국 정보요약(Civil Intelligence Section, Periodical Summary)

▲ 4·3 당시 여학생들.

조천중학원

‘조천중학원 생도 이성규(李性圭), 김진태(金鎭台)(18)에 대한 포고령 2호, 군정법령 19호 위반으로 기소되어 16일 하오 3시 심리원 법정에서 최(崔)원장 주심으로 경찰의 조사에 의거하여 주로 무허가 집회, 삐라 첩포(貼布)에 대한 사실심리가 있는 다음 박(朴)검찰청장의 ‘단기 1년, 장기 2년’의 징역 구형 논고가 있는 후 18일 언도한다는 선언으로 폐정.’-제주신보 1947년 6월 16일

조천중학원은 1946년 3월 설립하여 5개 학급에 20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15세에서 20대 후반이며. 야간에는 초등학교 교사, 면사무소 직원들까지도 강의를 받았다. 교사로는 현복유(학원장, 국어)·김민학(수학, 과학)·김동환(영어)·이덕구(사회, 체육)·김석환(역사)·김응환(영어)· 한평섭 등이 근무했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도 심했다.  

1948년 11월 4일 무장대가 습격하여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조천중학원은 건물만 방화된 것이 아니라 학적부도 모두 불에 탔다. 5·10선거 후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대부분 피신했으며 이후 ‘빨갱이 학교’라 하여 폐원 조치했다. 특히 이덕구· 현복유· 김민학· 김석환 등 교사들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와 무장대 활동에서 중책을 맡았다. 김민학 선생은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25가 나자 이북으로 넘어갔다. 

조천중학원 교사는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었다. 학생들 또한 선생님을 돕거나 직접 활동하여 항쟁 와중에 대부분 죽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심부름을 시키면 중산간의 산길을 혼자 다니다가 잡혀서 고문당하고  고문 과정에서 죽기도 하였다. 모든 제반사항은 논의를 거친 후에 결정되었고 학생회장도 ‘자치위원장’으로 불렀다.  

사실 1947년 3·1절 시위 및 3·10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을 받아 수업이 어려웠다.  1948년 3월 6일 조천중학원 2학년 김용철 학생이 경찰에게 고문치사 당했으며, 동맹휴학 선언서를 작성한 양성규는 당시 18세로 1948년 11월 23일에, 한진섭은 당시 18세로 1949년 2월 27일에 사망하였다. 김용현은 4·3사건 이전 체포되어 희생되었고, 김정생은 1947년 초 좌악활동 혐의로 고문받다가, 김진태는 입산 후 군사부에서 활동하다 1949년 5월 체포후 민보단에 의해 희생당했다. 

1948년 7월 조천중학원 학생 신분으로 입산한 김민주는 "당시 우리끼리는 '입산은 영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입산 5개월만인 1948년 12월 은사였던 이덕구를 산에서 만났는데, "이덕구 선생은 내게 '넌 집에서 가만히 공부하지 왜 이런 데 왔느냐'고 꾸중을 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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