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진실을 찾아서> 진실이 만들어간 치유와 화해의 역사

"4·3진실규명사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적인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의 사례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4·3위원회의 활동성과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김헌준 박사는 4·3진실규명의 역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김 박사는 198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과거사화해의 흐름과 제주4·3위원회 활동을 비교 연구한 논문으로 '미국정치학회 인권 분야'에서 최고 논문상(2009년)을 받으며 미국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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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부터 4.3 취재반장을 맡아 10년 넘게 4.3사건에 대한 진실을 연재했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다. ⓒ 양조훈

세계가 주목하는 4·3 규명의 역사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4·3진실규명사의 중심에는 바로 양조훈(4·3평화교육위원장) 위원장이 있다. 1988년부터 <제주신문> 4·3 취재반장을 맡으며 운명적으로 4·3사건과 조우한 그는 10년 넘게 4·3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하며 진실의 씨앗을 심었고, 제주4·3특별법 제정,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4·3진상보고서, 대통령의 사과, 유가족(피해자)와 경우회(가해자) 간의 화해라는 열매로 이어졌다.

얼마 전 출간된 <4·3 그 진실을 찾아서>(양조훈, 도서출판 선인)는 그 치열하고 지난한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양 위원장은 책을 통해 진실을 향한 치열한 여정과 4·3유족들의 처절한 아픔과 상처를 담담하고 촘촘하게 재현했다. 양 위원장은 "제주인에게 4·3의 상처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깊다"며 제주 출신 화가인 강요배 화백의 이름에 담긴 사연을 소개했다.

강요배 화백의 이름에 담긴 비밀

4·3 양민학살 당시 토벌대가 수백 명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빨갱이를 색출하며 호명할 때 '김철수'라고 불러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 명이 나오면 누군지 가려내지도 않고 모두 처형했다는 것이다. 이를 경험했던 강요배 화백의 아버지는 자녀의 이름을 절대로 같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름으로 지을 것이라고 마음먹고 형은 강거배로, 동생은 강요배로 지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4·3과 관련된 증언과 자료는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양 위원장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피해의식 때문에 증언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겨우 맘을 잡고 입을 떼려고 하면 "이 하루방, 또 잡혀가려고!" 하면서 할머니가 가로막는 식이다. 그토록 제주인들에겐 4·3이란 화석처럼 굳어버린 말할 수 없는 상처였다.

"이 하루방, 또 잡혀가려고?"

그런데 뜻밖에도 1988년에 시작된 광주 청문회가 4·3 피해자들의 태도를 많이 바꿔 놓는 계기가 된다. 광주 청문회를 본 4·3 유족들은 "청문회에서 총에 대검을 꽂았느냐 안 꽂았느냐가 쟁점이 되던데, 4·3 땐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며 울분을 터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 청문회를 기점으로 4·3 유족들은 4·3의 참혹상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4·3 사건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가족이 몰살당한 대목에서는 숨이 턱 막힌다.

경찰은 1948년 12월 어느날, 이덕구의 가족과 친인척 20여 명을 처형하기 위해 산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때 이덕구의 누나에겐 11살인 아들과, 9살 된 둘째 딸, 2살짜리 막내딸이 있었다. 이덕구의 누나는 "자식들만은 살려달라"고 경찰에 애원했고, 경찰은 허락했다. 하지만 이덕구의 누나는 2살짜리 막내딸은 그냥 업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저것들은 밥을 빌어먹을 수도 있지만 막내까지 살리려고 하면 결국 모두 죽을 거"라며 살릴 수도 있었던 2살 된 딸과 같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 어미의 심정은 어땠으며, 이를 지켜보던 자식들은 그 상처를 가지고 평생 어떻게 살아갔을까. 당시 살아남은 11살 아들의 증언을 듣던 양 위원장은 유족들과 함께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7단계에 이르는 검증 과정을 거치며 진실에 접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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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위원장은 4.3의 진실을 캐내기 위해 증언을 채록하고 현장을 누볐다. 사진은 굴 속으로 피신한 11명의 민간인을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질식사시킨 다랑쉬굴 학살 현장을 취재하는 모습이다. 오른쪽 두 번째가 양 위원장. 사진=김기삼. ⓒ양조훈

양 위원장을 중심으로 꾸려진 4·3특별취재반은 11년 동안 취재하고 이를 연재할 만큼 끈질기고 집요하게 4·3사건을 물고 늘어졌다. 컴퓨터가 귀하던 시절, 수만 가지의 데이터를 축적해가며 자료를 정리하고 정리해낸, 7단계의 검증 과정(사전 준비→취재반 토론→1차 취재→취재내용 분석→2차 취재→종합분석→연재 시 재확인)을 거치며 최대한 진실에 근접했다.

 

이들은 1948년 4월 3일 새벽의 분위기를 전하는 날씨도 추측이나 증언에 의존하지 않고 기상대에 확인해 기술할 만큼 철저했다. 때문에 탐사보도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4·3 연재 기획물은 한국언론연구원의 탐사보도 우수사례로 선정(1996년)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언론인으로 존경받았던 리영희 선생은 양 위원장의 4·3연재 기획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제주4·3사건은 나의 청년기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기에 나는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를 눈물로 읽는다." 제주4·3 학살에 관여했던 제9연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던 자신의 과거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복잡하기만 했던 4.3의 길이 보이더군요"

이렇게 힘겹게 길어 올린 4·3의 진실은 또 다른 형태의 마중물이 되어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1990년대 초반 선풍적인 화제를 모았던 <여명의 눈동자>도 4·3취재반의 영향을 받았다. 여명의 눈동자를 쓴 송지나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기존 자료들이 너무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참 애를 먹었어요. 그러다가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연재물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복잡하기만 했던 4·3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드라마 소재로는 처음으로 제주4·3사건을 다뤘던 <여명의 눈동자>는 4·3사건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고, 그 법적 절차에 의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진행됐다. 산고 끝에 나온 4·3진상보고서는 제주4·3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사건'으로 규정했고, 이는 대통령의 사과로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유족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졌다.

대한민국 역사상 잘못된 역사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진상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국가원수가 사과한 것은 제주4·3이 처음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유족과 제주도민을 짓눌렀던 이념적 누명과 불명예는 그렇게 조금씩 회복되어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는 공통의 인식"

양 위원장이 파헤친 진실의 칼날은 가해자를 색출하고, 책임을 추궁하고, 처벌을 강요하는 것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 인식의 전환이 있었기에 화해와 용서라는 긴 여정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은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치부해버린 4·3사건의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러면서 치열하게 갈등했던 가해자(경우회)와 피해자(유족회)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 같은 피해자라는 공통의 인식을 공유하게 됐다.

양측은 몇 차례 만남을 통해 대화를 나누면서 벽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고, 유족회 임원이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군경 전사자가 안장된 충혼묘지를 참배하고, 경우회 회장은 "4·3은 시대가 낳은 비극의 수난이자 제주도민 모두가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서로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화답하면서 머나먼 화해로의 여정을 한걸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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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체전 개회식에서 성화봉송 주자로 제주종합경기장에 입장하고 있는 정문헌 유족회장과 현창아 경우회장. ⓒ 양조훈

이념 갈등까지 치유해가는 4·3의 상처

 

유족회와 경우회가 뿌린 화해의 씨앗은 정치권으로도 이어졌다. 2013년에는 새누리당, 민주당(당시), 유족회장, 경우회장까지 함께 충혼묘지와 4·3평화공원을 차례로 참배했다. 2014년 10월에는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성화봉송 주자로 나란히 그라운드에 입장하며, 4·3의 아픔을 딛고 화해라는 머나먼 여정을 향해 나아가려는 제주도 시민의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양 위원장은 "4·3의 진실규명운동사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뿐 아니라 이념갈등으로 얼룩진 한국사회에 대안적인 모델로 알려지길 원한다"며 "제주에서는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4·3에 한해서는 화해와 상생의 배에 함께 올랐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협약에 의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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