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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 열네 번째 증언본풀이, 남은 자 기억 되살리며 눈물

1> 지천을 울리는 엄청난 굉음, ‘꽝’하는 소리에 12살 김순혜 양은 정신을 잃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했고, 바지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벌대에 끌려가 소식을 알 수 없던 큰오빠, 군인을 피하다 소에 밟혀 숨진 동생이 떠올랐다. 토벌대가 무서워 숨어있던 오빠는 깜깜한 밤이 돼서야 피투성이가 된 동생을 데리러 왔다. 운 좋게 살아남아 지금껏 숨이 붙어있지만 가슴 속 켜켜이 쌓인 ‘4.3의 한(恨)’은 차가운 포탄 파편으로 변모해 그녀의 폐부에 40년간 박혀있었다. 


2> 그날은 점심식사 중이었다. 말을 탄 경찰이 집안 마당으로 들어왔고 아버지의 두 팔이 포승줄에 묶였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끌려간 사실이 어리둥절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중학생 양용해 군은 알지 못했다. ‘언제나 오실까’ 문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중학생은 어느새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 나이를 뛰어넘었다. ‘연좌제’라는 벽에 굴복하기 싫어 누구보다 성실하게 때로는 독하게 살아왔다. 그렇지만 거친 포승줄이 부친의 두 팔에 묶이는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면 누군가 가슴을 쥐어짜는 것만 같다. 80세 노인이 됐어도 ‘아버지’ 세 글자에 눈물이 맺힌다.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가 31일 오후 3시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개최한 4.3 증언본풀이 마당 <기억 in 4.3>은 늘 그랬듯이 혼돈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제주4.3연구소는 2002년부터 4.3체험자들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당을 펼치고 있다. 평생 마음 속에 쌓아온 기억을 풀어내면서 자기 치유를 할 수 있는 과정인 동시에, 4.3의 진실을 후세대들에게 알리는 과정이다.

올해 본풀이는 열네 번째로 양치부(76)·김순혜(78)씨 부부, 양용해(84) 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장을 초청해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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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오라동에 거주하는 김 할머니는 4.3 당시 12살 소녀였다. 토벌대가 큰오빠를 폭도로 착각해 무자비하게 잡아갔고, 3살 막내동생은 군인차를 피하다 소에 밟혀 숨졌다.

자신도 피해를 입었다. 1948년 11월 오라2동 ‘섯구린질’에서 군인들이 발사한 포탄 파편이 등과 오른쪽 허벅지에 박혔다. 다행히 수술을 받고 회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통증이 시작됐다. 

1995년 10월 병원 진단 결과 포탄 파편이 폐에 박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려 48년만이다. 

파편을 제거한 뒤로는 신기하게 통증은 사라졌다. 그러나 4.3 당시 후유증으로 오른쪽 어깨, 발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녀의 상처는 4.3사진전시회, 책을 통해서도 익히 알려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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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남편 양 할아버지는 4.3으로 인해 부모를 모두 잃었다. 자신이 6살 때 세상을 떠난 생모 대신 그를 돌봤던 의붓어머니는 청각장애인이었다. 4.3 당시 피난 가던 중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이유로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아버지 역시 경찰에 의해 연행당해 목포형무소까지 잡혀간 뒤로는 소식이 없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졸지에 고아가 돼 버린 그는 “4.3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 진다. 나를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어떻게든 살아났기에 살았다”며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인생이 무엇인지 답답하기만 하다”고 고개를 떨궜다.

양 할아버지는 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아버지는 연동리, 의붓어머니는 이호리 지역으로 등록돼 있는 점을 안타까워 하며 함께 모실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겼다.

양용해 회장은 4.3으로 인해 너무나 큰 상처와 한(恨)을 품게 됐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는 “영화 지슬을 보면서 그 당시 상황을 제법 잘 재현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4.3은 단순히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참혹한 역사”고 밝혔다.

4.3 당시 중학생이던 양 회장은 1948년 애월읍 신엄리에서 특공대원으로 활동했다. 오촌 당숙이 토벌대에 붙잡혀 잔인하게 희생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지금까지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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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직후인 1950년에는 예비검속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양 회장은 “당시 신엄지사장 이근식이 아버지의 두 팔을 포승줄로 묶어 말의 안장에 매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끌고 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이라며 “그때만 기억하면 이런 불효자가 있을지 가슴이 미어진다”고 오열했다.

억울한 희생은 도리어 '연좌제'라는 가시로 그를 옥죄였다. 공군 중사로 근무할 시절, 뛰어난 정비 실력으로 미국에서 연수를 받게 될 기회가 주어졌으나 ‘아버지는 4.3당시 형살 당했고, 숙부는 입산활동 후 행방불명 됐으니 미국 유학을 가면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군 상부의 신원조회로 좌절을 맛봤다. 

애월면장(현재 애월읍장)으로 임명될 때도 똑같은 문제로 발목이 잡히자, 로비 끝에 ‘유신체제에 적극 협조하는 자’라는 평가를 개인 신원에 넣어 해결했다는 사연은 실소를 자아낸다.

그는 2002년 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를 결성해 지금까지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2014년에는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양 회장은 “소송에서 이겼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 친지, 부모는 아직도 제주공항 어딘가에 묻혀 잠들어 있다. 어서 발굴해 양지 바른 곳에 모셔야 한다”며 “대통령의 추념식 불참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유족회와 경우회가 손을 잡았듯이 갈등과 반목을 넘어 4.3을 평화·인권의 상징으로 키우는데 도민 모두가 노력하자”고 밝혔다.

이날 본풀이마당에는 최상돈 제주민예총 예술감독이 4.3을 소재로 직접 만든 곡 '애기동백꽃의 노래'를 불렀고, 강덕환·김영미 시인이 '각건 들어봅서', '그 사내의 이름'을 낭송하며 이름 모를 수 많은 4.3 희생자들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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