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강정마을에서 만난 두 노인 (2)

삼보일배하는 오철근 선생

문 신부와 헤어진 후 강정포구로 내려왔다. 포구로 가는 길에도 끝없는 철제울타리가 마을과 기지를 동서로 가르고 있었다. 돌담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소로가 대부분인 우리고장의 여느 포구 길과는 사뭇 달랐다. 도로를 확장하고 있는 듯 길 양옆으로 파란 그물망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안에서 굴삭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뒤집은 흙더미를 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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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마을에서 만난 오철근 선생. <사진 제공=김헌범> ⓒ 제주의소리

그때였다. 앞 차창 저 멀리 누군가 삼보일배하는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의 뒤로는 그를 보호하는 것인지, 감시하는지 알 수 없는 경찰 두 명이 졸졸 따라다녔다. 서둘러 카메라를 집어 들고 차에서 내렸다. 삼보일배가 내게는 처음 보는 일이라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을 발견한 것 같았다. 멀리서 뒷모습을 몇 장 찍은 다음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수고 많으십니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혹시 함석헌 선생님을 아십니까?”
“네. 씨알의 소리...”
“네. 저는 종교친우회 소속 퀘이커 교인입니다만.”

그의 삼보일배가 너무나 진지한 터여서 혹시라도 방해될까 봐 내 질문은 이것으로 끝냈다.

그가 오철근 선생인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잠깐 들렸던 강정마을 평화센터에 걸린 사진의 자막을 보고 알았다. 수년 동안 오전과 오후 매일 두 번씩 강정마을을 삼보일배를 해온 그는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그에게도 숱한 행인들이 똑같은 질문들을 숱하게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처음처럼’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친절하게 답하는 수줍은 그의 얼굴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선량함이 묻어나왔다.

셀 수 없이 반복됐을 큰 절임에도 그의 절은 기계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절 하나, 동작 하나에 온 몸과 마음을 담았다. 강정마을의 거리 곳곳마다 끝없이 엎드리며 드리는 그의 큰 절은 ‘처음처럼’이 아니라 언제나 ‘처음’이었다. 일상적인 삼보일배가 매일 그의 업을 지우며 그를 계속해서 자연의 ‘처음’으로 갖다놓는 것일까.

몇 년 전 한 도내언론에서 그는 상복을 입고 삼보일배를 하는 이유를 주권과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구럼비 바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 문 신부가 준엄한 꾸짖음을 통해서였다면 그는 지극정성의 절로서 우리의 죽어가는 인성을 깨우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강정사태 해결에 있어서도 희망이 있을까. 오철근 선생에 대해서도 회의가 드는 것은 문 신부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주장은 평화의 섬 제주에 군사기지 설치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간디의 비폭력저항이 인도인들의 대대적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도의 독립은 열강들 간 이해관계와 영국의 이익을 고려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기지설치에 미국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다면 그의 평화의 삼보일배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물론 인성을 깨움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세를 규합함으로써 미국을 향해 한국민들의 전체적인 의사를 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다. 그의 삼보일배의 느릿한 걸음걸이만큼이나 더디게 이루어질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이익에 민감한 주류언론들은 사안의 진위를 희석하며 해군기지건설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고 있는 현실이다.

순간 그의 삼보일배가 강정 앞바다 멀리 광활한 태평양에 돌맹이 한 개를 던지는 것만도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이 밀려왔다.

피노키오의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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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포구. <사진 제공=김헌범> ⓒ 제주의소리

오철근 선생을 뒤로 하고 도착한 강정의 바다. 열 척 남짓한 작은 고깃배들이 사이좋게 포구에 줄을 매고 야간 출어를 기다리는 모습은 여느 포구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쪽으로 눈길을 조금만 돌리자 여기에도 높다란 철제팬스가 기지와 포구를 구분 짓고 있었다.

팬스에는 50미터 가량의 하얀 보드가 둘러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피노키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피노키오의 코는 “해군의 새빨간 거짓말, 토지 강제수용 않겠다? 주민과의 상생? 친환경상생? 민군복합형 미항?”이라는 문구들을 담느라 엄청난 길이로 늘어져 있었다. 이 모두가 해군들이 이제까지 지키지 않은 약속들인 것 같았다. 경찰 한 명이 피노키오의 코를 늘리는 그림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림 앞에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할망물 길어다가 제사 지내고 애기 아플 때 할망 넋 기리던 구럼비 바위는 어디 쯤 될 것인가. 그것이 있었을 자리에는 울퉁불퉁한 갯바위들은 온데 간데 없고 모레 더미와 자갈들만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위로는 공사 차량들이 오가며 뿌연 먼지를 날리며 흐릿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해군이 자랑하는 자칭 ‘아름다운 항구’의 방파제가 범섬의 심장을 찌를 듯 먼 바다까지 깊숙이 뻗어 있다. 범섬이 있어 미항일까. 아니면 저 칙칙한 잿빛의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어 미항일까. 거짓말쟁이 피노키오의 코는 영원히 늘어나야만 할 것 같았다.

몇 년 전이었으면 아름다운 강정의 바닷가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던 유채꽃들은 공사장 한 켠으로 쫓겨난 채 불안한 모습으로 공사장 크레인들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뒤로 저 멀리 한라산이 구름 속에 절반의 모습을 가린 채 두동강이 난 강정 바다를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저 한라산마저도 영겁의 세월을 지켜온 순결한 속살들이 개발의 광기 속에서 샅샅이 파헤쳐질 위험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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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범 제주한라대 교수.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 주민은 이날 오후 다섯 시에 영등할망 축제가 열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마을사람들의 몸부림이 허탈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남도의 이른 봄은 반기는 사람 없이 떠나고 있었다. (끝) / 김헌범 제주한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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